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시민혁명과 신대륙/만주족의 중국 지배 (명의 멸망과 청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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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중국 지배〔槪說〕[편집]

중국사상 17세기는 명·청 교체기에 해당하는데, 명과 교체된 청이 중국 지배를 확립하여 전성기로 향하는 시대이다.

청은, 명이 한민족(韓民族) 왕조임에 대해 만주족 왕조이며 건주(建州)의 여직부 출신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여 1616년에 세운 후금국(後金國)으로 시작하였다.

태종 때, 내몽골과 주변을 굴복시키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침으로써 명 정복의 체제가 착착 갖추어져 갔다.

이에 대하여 명의 정계(政界)는 당쟁(黨爭)으로 세월을 보내고 잇따른 증세(增稅) 등으로 민중의 궁핍이 점점 심해 마침내 이자성(李自成)의 난이 일어나 명은 멸망했다. 이 기회를 타고, 만주족은 태종의 아들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를 옹호하여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가, 청(淸)의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1644). 이어서 화중(華中)·화남(華南) 각지에 모인 명의 잔존 세력을 배제하여 1661년 명의 유족을 완전히 넘어뜨리고 청의 통일이 일단 완성됨과 동시에 강희제 시대에 들어갔다.

이러한 청의 중국 정복에 투항한 한인(漢人)이 많이 이용되었는데 그 공로로 오삼계(吳三桂) 등은 화남 각지에 봉(封)함을 받아 점차 강력하게 되어 강희 연대에 들어와 결국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청은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고유의 팔기병(八旗兵)과 함께 새로 편성한 녹기병(綠旗兵)을 기용하여 반란을 평정, 이어서 대만 정성공(鄭成功)의 저항도 평정하여 청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었다. 그 후 내정(內政) 충실에 주력하여 대외적 발전도 현저해져 청조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다.

여진족[편집]

女眞族

만주 동부로부터 연해주(沿海州) 방면에 살고 있던 반농 반수렵(半農半狩獵)의 퉁구스계(系) 민족. 이른바 만주족인데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여진이라 불리게 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인데, 야인 여진(野人女眞)·해서 여진(海西女眞)·건주 여진(建州女眞)의 세 부(部)로 나뉘어 명에 복속되어 있었다. 명의 쇠망에 편승하여 건주 여진에서 누르하치가 나와 여진의 여러 부를 통일하고 후금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마침내 중국사상 최후의 왕조인 대청제국이 되어, 20세기 초까지 중국을 지배했다.

누르하치(청의 태조)[편집]

-(淸-太祖) (1559

1626)

청조 제1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女眞) 출신으로 호트아라(撫順 동쪽의 興京 부근)에서 일어나, 여러 부를 정복 통합하고 1616년 제위에 올라 후금국을 세웠다. 그 후 명의 대군을 사르호산에서 무찌르고 다시 광닝(廣寧) 등을 함락시켰으나, 1626년 닝위엔성(寧遠城)의 공략에 실패하여 죽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 팔기병제를 제정하고 만주문자를 만들어 부족의 지식 개발에 노력하는 등 후의 대청제국으로 발전할 토대를 쌓았다.

팔기와 녹기[편집]

八旗-綠旗

둘 다 청조의 정규병이다. 팔기병제는 청조의 독특한 것으로서 고유한 사회·군사 조직을 바탕으로 8개의 군단을 편성하고, 황(黃)색·백(白)색·홍(紅)색·남(藍)색과 여기에다 홍색으로(홍색만은 백색으로) 가두리를 한 여덟 기를 표지(標識)로 하여 구분했다. 처음에는 만주 팔기(滿洲八旗)뿐이었으나, 후에 몽골 팔기 및 투항 한인에 의한 한군 팔기도 만들어져 이들 팔기병은 청조의 중국 정복과 지배의 군사적 근간(根幹)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당초의 강력한 용맹성을 잃어 중기 이후는 쓸모없게 되었다. 녹기병제는 중국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팔기병의 부족한 수를 보충하기 위하여 한민족(漢民族)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녹기(綠旗)를 표지로 하고 녹기 영병(綠旗營兵) 또는 녹영(綠營)이라고 불렀다. 당초에는 그다지 떨치지 못했으나 삼번의 난 평정 때 선두에 선 이후부터 강희(康熙)·건륭(乾隆)의 전성기에 여러 군사 행동에도 사용되고 평시에는 전국에 미치지 않은 곳 없이 배치되어 각종 치안 유지를 맡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중기에는 질적으로 저하되어 쓸모없게 되었다.

군기처[편집]

軍機處

청조(淸朝) 정부의 정무 최고기관. 청조는 처음에 명(明)의 제도에 따라 내각을 설치했는데, 1729년 준가르 정벌 때에 용병의 신속과 기밀보장을 목적으로 군기방(軍機房)을 설치, 군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1732년에는 군기처로 개칭, 1737년에는 그 책임자를 군기 대신이라 불렀다. 군기처는 당초에 내각의 분국의 형식으로 임시로 설치된 것인데, 그 뒤에 상설기관이 되고 소관사항도 군사관계뿐만 아니라 점차 일반 정무의 중요한 사항을 취급하게 되어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다. 군기 대신은 내각 대학사(大學士) 및 6부의 상서시랑(尙書侍郞) 중에서 선출된 3명 또는 6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밑에 한인(漢人)·만인(滿人) 각 16명의 군기 장경(章京)이 있어서 문서를 처리하고 서리(胥吏)는 두지 않았다. 군기처의 설립은 일면에서는 황제 독재의 기구가 한층 발전된 것을 의미하며, 군기처의 소속기관으로서는 방략관(方略?)과 내번서방(內?書房)이 설치되었다.

후금국[편집]

後金國

청금조의 처음 국명인데 누르하치가 여진 여러 부를 통일하여 1616년에 건설했다. 여진의 선조는 5대(五代)·송(宋)의 무렵 여진(女眞)이라 불리었고, 그 중 한 부족에서 금나라가 나와 요(遼)를 멸하고 다시 송을 남방으로 쫓아버린 후 몽골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중국 북부를 점거하고 있었다. 이를 계승하고 부흥시킨 의미에서 후금국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으나 태종 때 점차 중국 정복을 노리게 되면서 한인(漢人)들의 과거의 반감을 피하여 1636년 대청(大淸)이라 고쳤다.

이자성의 난[편집]

李自成-亂

만주족의 중국 정복에 앞서 명의 멸망을 초래한 반란(1628

1645). 명은 동정(東征) 이래 재정 곤란이나 신흥하는 만주족에 대한 방위 등으로 계속 증세(增稅)함으로써 민중의 궁핍이 극심해, 마침내 각지에서 유적(流賊)이 횡행하게 되었다.

때마침 산시 지방에서는 가뭄이 계속되어 대기근(大飢饉)이 일어나, 주린 백성들이 봉기하니 여기에 합류하는 무리가 많아 큰 세력이 되었다. 이들을 거느린 것이 이자성(?

1645)으로서 그는 드디어 시안을 거점으로 왕이라 칭하고 베이징으로 대거 육박했다. 명의 조정에서는 내부의 추잡한 당파싸움과 요동 방면의 방위를 위하여 많은 병력이 충당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항할 수가 없게 되자 베이징이 함락되었다. 1644년, 의종 숭정제(毅宗崇禎帝)가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한 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명은 멸망했다. 이때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입장이 궁해지자 청에 항복, 청군을 안내하여 베이징으로 돌아가고 다시 산시로 도망간 이자성을 스스로 추격하여 죽음에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명·청의 교체가 이루어짐에 대하여 청은 “한인(漢人)의 요청에 의해 중국으로 들어와, 명에 이어 통치하게 된 것이다”라고 중국 지배의 정당성을 변명하게 되었다.

강희제[편집]

康熙帝(1654

1722, 재위 1662

1722)

청(淸)의 성조(聖祖), 청나라의 제4대 황제. 치세의 연호(年號)를 좇아 강희제(康熙帝)라 불렀다. 중국 통치의 기초를 굳혔으며 내치외교(內治外交)에 위대한 업적을 거양(擧揚)하고, 청조 황금시대의 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굴지의 황제로 추앙되었다.

그의 재위는 61년 간이었다. 치세(治世)의 초기는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나 위기에 직면했으나, 고심 끝에 이 난을 진압하여 한인(漢人)의 반항을 누르고, 이어 대만(臺灣)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정씨(鄭氏)를 정벌하여 명(明)의 잔존 세력을 단절시키고 청조의 중국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어 시베리아 방면으로 동진(東進)하여 헤이룽강에 도달, 알바진성(城)을 축조해 진출을 기도하던 러시아인(人)을 격퇴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정하고 그 이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또한 이리(伊犁) 지방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준가르 부족을 토벌하고 외몽골·칭하이(靑海)·티베트를 평정해 전례에 없던 대판도(大版圖)를 형성하였다. 한편 내치(內治)에도 주력하여 이민족 왕조(異民族王朝)로서의 악조건을 극복하기에 진력하였다.

우선 중국 전통의 문화를 존중하여 학예를 장려하고, 학자를 우대하여 여러 종류의 문화 사업에 참가시켜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을 만드는 한편, 서양 과학의 채택에도 뜻을 두었다.

또한 종종 조세의 면제를 행하고 말년에는 강희 50년의 인정(人丁, 人頭稅)을 정액(定額)으로 하고, 그 후의 증가분(增加分)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것이 다음의 옹정조(雍正朝)의 지정은(地丁銀)으로의 개혁에 이어지는데 오직 세법(稅法)만에 한하지 않고, 모든 방면의 시정(施政)이 문자(文字)의 옥(獄)이라고 하는 엄격한 반만사상(反滿思想) 탄압의 한계는 있었으나 옹정제(雍正帝)에 계승되고 손자인 건륭제(乾隆帝) 때에 개화(開花)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삼번의 난[편집]

三藩-亂

청초(淸初)에 일어난 한인(漢人) 삼번(三藩)의 반란(1673

1681)으로서, 이 진압에 의해 청(淸)의 중국지배가 확립되었다.

청은 당초 다수의 투항 한인(投降漢人)의 협력을 얻어 중국을 정복할 수가 있었으므로 각각 보상해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삼계(吳三桂)·상지신(尙之信)·경정충(耿精忠)에게는 특별히 윈난(雲南)·광둥(廣東)·푸젠(福建) 등에 봉(封)하여 소위 삼번(三藩)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세력이 강대해지자 도리어 청조(淸朝)를 위협하려 하였으므로 강희제가 이를 삭감하려 하자 오삼계가 먼저 군대를 일으키고 이어 다른 2번(藩)도 참가하여 전후 9년에 걸친 대반란이 일어났다.

청조는 한때 남방(南方)의 6개 성(省)을 상실하는 등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강희제의 단호한 방침으로 8기병(八旗兵)은 물론 특히 녹기병(綠旗兵)에 대해서도 “한인의 반란은 한인의 손으로 진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독려하여 드디어 진압에 성공하였다. 청조의 중국 지배는 이를 통해 굳건해져 소위 강희·건륭(乾隆)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정성공의 저항[편집]

鄭成功-抵抗

정성공(1624

1662)은 청초에 대만을 근거로 하여 최후까지 청조에 저항한 명(明)의 유신(遺臣). 부친은 정지룡(鄭芝龍). 모친은 일본 하치노혜(平戶) 지방의 전천씨(田川氏). 명조 멸망 후, 유족·유신이 청조에 대항하였으나 그는 부친과 더불어 당왕(唐王)을 받들어 명의 부흥을 도모하고 그의 부친이 청에 항복한 후에도 푸젠·대만 지방을 근거로 하여 초지(初志)를 관철하였다.

한때는 10수만의 부하가 있었고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도 있었으며, 1661년엔 대만의 네덜란드인(人)을 추방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하였으나 이듬해 병사(病死)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족(一族)의 저항은 삼번(三藩)의 난(亂) 진압 후 공략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그는 당왕(唐王)으로부터 명(明)나라의 국성(國姓) 주씨(朱氏) 성이 사여(賜與)되었으므로 국성야(國姓爺)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