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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의 문화〔槪說〕
[편집]명나라 중기부터 봉건제의 완만한 해체는 계급 분화와 모순을 심화키고 있었다. 농민 투쟁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민요(民擾)가 이에 호응하듯 발생했다. 이러한 서민의 대두는 문화의 담당권을 종래의 기생화(寄生化)한 지배자의 손에서 앗아버렸다.
서민이 직접 문화 창조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으나 하층의 사대부층으로 하여금 종래의 문화에 대신하는 독특한 문화를 낳게 한 힘은 실로 여기에 있다. 속어(俗語) 소설은 종래의 사(詞)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구성이 크고, 사실적(寫實的)인 것으로서 대성(大成)되었다. 또 도자기는 만력적회(萬曆赤繪)를 대표로 하여 공전(空前)의 수준에 달했다.
한편 양명학(陽明學)의 말류(末流)는 타락하고, 도피 속에서 무력했다. 동림파(東林派)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깊은 정치적 관심을 보여, 전제 군주제에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부패, 즉 환관과 무능화한 관료제와 이데올로기에 비판을 개시했다.
동림파는 여러 차례의 탄압으로 인하여 거세되어 가고 있었으나, 얼마 후에 생원층(生員層:科擧受驗者)을 기반으로 하는 운동으로 계승됐다. 그들은 실천적 학문을 주창하고 주(朱)·양(陽)의 양학문을 공격했다. 이러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은 기술서의 잦은 간행에서도 볼 수 있고 서양 문명과의 접촉도 이런 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청조의 정복과 정치적 탄압은 당초의 정치적 관심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하찮은 자구(字句)를 좇는 고증학(考證學) 속으로 학문을 퇴조시켜 서민 문학을 음습(陰濕)한 구석에 밀폐시켜 그 창조성을 오랫동안 박탈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
[편집]李時珍-本草綱目
이시진(1523?
1596)은 후베이(湖北) 지방의 의가(醫家)에서 태어났다. 향시(鄕試)에 세 번 실패하고, 본초(本草, 草藥)학에 뜻을 세워 30세 무렵부터 『본초강목』 52권의 작성에 착수하고, 1596년 간각(刊刻)하여 조정에 바치려다 죽었다. 고래의 의약서를 집대성하고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설을 첨부한 것으로서, 본문 52권, 부도(附圖) 2권으로 되어 있다. 약수(藥數) 1,898을 수(水)·화(火)·토(土)·금(金)·석(石)·초(草)·각(殼)·채(菜)·과(果)·목(木)·복(服)·충(?)·인(鱗)·개(介)·금(禽)·인(人)의 16부 60류(類)로 나누고 각 약품을 그 약효에 따라 상·중·하로 격(格)을 붙였다. 그리고 이들 약품 하나하나에 대하여 8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여 약 8,000의 처방을 수록하였다.
남방산(南方産)의 약품을 주로 다루었으므로 북방산의 약품을 알기에는 불편한 점도 있으나, 본초(本草)라고 하면 본초강목을 뜻할 만큼 유명하다.
서광계
[편집]徐光啓 (1562
1633)
명(明)말의 학자, 정치가. 자(字)는 자선(字先). 시(諡)는 문정(文定). 상하이(上海) 태생. 1604년 진사(進士)가 되었다. 난징(南京)에서 마테오 리치에게서 천주교의(天主敎義)를 받아 천주, 역학(曆學), 수학, 수리(水利), 병기 등 서양의 실용과학을 배우고, 1608년 상하이 서가회(徐家?)에 천주당을 세웠다. 1628년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郞)을 지냈고, 이후 상서(尙書)에 올랐으며, 회회역법(回回曆法)을 개정하였다. 1632년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서 국정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문연각(文淵閣) 대학사가 되었으나 병사하였다. 돈독한 천주교도로서 선교사의 전도를 도왔으며, 서양 학술을 중국학문에 도입하였다. 그는 마테오 리치가 죽은 후 탄핵되어 퇴관(退官) 숭정제(崇禎帝)에게 소환되기까지 약 10년 간 톈진(天津)에서 농학 연구에 힘써 『농정전서(農政全書)』 60권을 집필했는데, 이 책은 종래 농학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저작으로 목면(木棉), 사탕수수 등 상품 생산과 밀착된 신작물 연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마테오 리치와 공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과 『숭정역서(崇禎曆書)』의 편찬에 공이 있다.
송응성의 『천공개물』
[편집]宋應星-天工開物
송응성(1590
1650)은 장시(江西) 펑신현(奉新縣) 사람.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지방관으로서 왕조말(王朝末)의 농촌대책을 담당하였다. 『천공개물』 3권은 1637년에 완성했다. 천공 즉 자연의 힘을 기초로 인간의 기술이 새로운 것을 개발한다는 착상에서 농업을 비롯하여 당시의 산업을 거의 망라하고 도판(圖版)을 많이 넣어서 해설을 붙인 것이다. 이 책은 관찰·경험에 의한 실증(實證)으로 일관되어 있어 주목된다.
고증학
[편집]考證學
청대(淸代)를 대표하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 학문. 경서(經書)를 중심으로 성인의 참(眞) 가르침을 구명(究明)하기 위하여, 확실한 전거(典據)에 따라 연구하려(實事求是)한 학문이다. 그 원료는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타난 명말(明末)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學)에서 비롯되는데, 청조의 사상 탄압과 회유(懷柔) 속에서 점차로 실천성을 상실하고 쓸데없는 탐색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고전(古典)의 복원(復元)이라는 점 속에서 과학적 정신의 서광도 보였으며, 중국 문화의 과학적 연구에 초석(礎石)을 놓은 일면도 있다.
황종희
[편집]黃宗羲 (1610
1695)
자는 태충(太沖) 호는 이주(梨洲). 저장(浙江) 위야오(餘姚) 사람. 아버지 존소(尊素)는 동림파의 관료로서 환관(宦官) 위충현(魏忠賢)에 의해 옥사했다. 일찍부터 정치적 환경에 몸을 담아 오랫동안 복사(復社)의 활동에 참가했다. 노왕(魯王)을 섬기어 항청(抗淸) 활동에 참가, 청의 지배 아래서는 절개를 지켜서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 ‘경세치용’학에 마음이 기울어 특히 사학(史學)에 전념, 청조사학(淸朝史學)의 시조라 불린다. 그의 저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는 역대의 사실(史實)에 비추어 보아 “천하는 만민의 것이며 군주의 것이 아니다”라고 기술하여 훗날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민주사상의 원천이 된다.
『명이대방록』
[편집]明夷待訪錄
명말(明末)·청초(淸初)의 학자 황종희(黃宗羲)의 저서(1663).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맹자(孟子)의 민주주의적 사상과 동림당(東林黨)의 학설에 의하여, 민의(民意)에 반한 전제정치를 통렬히 비판하고 구체적인 정책론을 기술하였다. 청조(淸朝)에서는 금서(禁書)가 되었으나, 청말의 개혁파·혁명파에 의하여 취급되어 민주주의의 고양(高揚)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염무
[편집]顧炎武 (1613
1682)
자는 영인(寧人), 호는 정림(亭林), 장쑤(江蘇) 쿤산(崑山) 사람. 복사(復社)의 동인으로 문명(文名)으로 칭송받았으나 반청(反淸) 활동에 앞장서 전국을 주유(周遊)하여 명이 멸망한 후에도 야인(野人)으로 있었다. 이 격동 속에서 '경세치용’학을 주창하여 지리·역사의 실증적 연구에 앞장섰다. 또한 학문은 경학(經學), 훈고학(訓?學), 금석학(金石學) 등으로 넓고 확실한 사료(史料)에 기초한 고증(考證)을 방법으로 하여 청조 고증학의 조상이라 한다.
전대흔
[편집]錢大昕 (1728
1804)
자는 효징(曉徵). 호는 죽정(竹汀), 장쑤(江蘇) 자딩(嘉定) 사람. 27세로 진사(進士)에 합격,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등 칙선서(勅選書)의 찬수(纂修)를 맡았다. 48세로 퇴관(退官)한 후에는 향리에서 후진 지도를 했다.
그는 황종희·고염무로 시작된 청조사학(淸朝史學)의 대성자(大成者)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에 통달하여 근본 사료(史料)에 근거한 역사 연구를 확립, 그 실증적 엄밀성은 오늘날에도 정평이 있다. 특히 그의 저서 『십가제양신록(十駕齊養新綠)』은 그의 학문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이름이 높다. 종래의 포폄출척(褒貶黜陟)을 주로 한 사론(史論)에 대하여 일세(一世)를 그은 것이다.
『서유기』
[편집]西遊記
명대(明代)의 구어(口語) 장편소설. 당(唐)말부터 당의 현장(玄장(?))이 취경(取經)차 인도에 여행한 것이 구전(口傳)되었는데 송(宋)대에는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로서 민간에 퍼진 것을 명(明)의 오승은(吳承恩)이 현재의 모양으로 정리하였다. 그 내용은 72반(般)의 변화술(變化術)을 터득한 손오공(孫悟空)이 저팔계(猪八戒)·사오정(沙悟淨)과 함께 법사(法師)를 모시고 인도로 가는 도중에 갖은 법난(法難)을 극복하고 끝내 염원을 이루어 성불(成佛)한다는 이야기를 풍부한 유머를 섞어서 엮었다. 그 구상(構想)이 신기(神奇)하고, 규모가 웅대하고, 공상력이 비상한 것으로 보아 희유의 일대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금병매』
[편집]金甁梅
명나라의 소설. 작가 미상이다. 중국 최초의 창작소설이라 할 만한 것. 『수호전(水滸傳)』의 일부분을 확대한 점과 형식면에서 다소 이전의 이야기를 이어받고 있으나 주인공 서문경(西門慶)의 색욕(色慾)을 일상생활의 극명(克明)한 묘사로 부각시키고 권세와 그에 아첨하는 기생자(寄生者:豪族)들의 사회적·인간적 부패를 통렬하게 비판, 중국 문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왕휘
[편집]王? (1632
1717)
자는 석곡(石谷), 장쑤(江蘇) 창수(常熟) 사람. 청나라 초기 대표적 문인화가(文人畵家) 중 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왕감(王鑑)에게 발탁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까지 회화(繪畵)는 크게 나누어서 남파(南派)와 북파(北派)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왕휘는 왕시민(王時敏)에게도 지도를 받아서 널리 여러 대가(大家)들의 수장품(收藏品)을 연구하게 됨에 따라, 다른 화풍(畵風)을 융합하는 일에 성공하여 ‘화성(畵聖)’이라 칭찬을 받았는데, 문인이라기보다 직업적인 화가이다.
마테오 리치(이마두)
[편집]Matteo Ricci(利瑪竇) (1552
1610)이탈리아 사람. 예수회의 중국 포교의 개조(開祖). 사비에르가 이루지 못한 중국 포교를 약 30년 후인 1582년 마카오에 와서 광둥(廣東)을 기점으로 개시했다.
스스로 이마두라 이름지은 것처럼 중국어를 잘 했다. 1599년 난징(南京)에 와서 서광계(徐光啓)와 서로 알게 됐다. 1601년, 드디어 베이징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거기서 포교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포교는 중국의 사상·풍속에 타협적이어서 그리스도를 유교의 ‘상제(上帝)’에 비하기도 했다. 그를 비롯한 포교자들이 포교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존경받아서가 아니라 역법(曆法)을 중심으로 한 서양 학술이 당시의 중국 지식인의 관심을 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이지조(李之藻)의 조력을 얻어 1602년에 출판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는 지구설(地球說)·기후대설(氣候帶說) 등의 서양 지리학에 의한 것으로서 동양지리학을 계발했다. 그 밖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소개한 『기하원본(幾何原本)』도 큰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학술 교류상의 의의는 있으나, 중국에서는 이것을 기술로밖에는 취급하지 않은 점에 포교 수단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곤여만국전도
[편집]坤輿萬國全圖
명(明)대 1602년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베이징(北京)에서 간행한 세계 지도로 1603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이 우리나라에 전했다. 이는 한자로 기입된 최초의 과학적인 세계지도이다. 목판인쇄로 6매가 한 조(組)이며, 오르텔리우스 도법(圖法)을 써서 전세계를 타원형 지도로 나타냈다. 중국을 도면의 중앙에 놓고, 베이징(北京)을 경(經) 0°로 하였다. 난(欄) 밖에는 극중심(極中心) 세계도 외에 천문(天文) 따위의 설명이 있고, 지도 안에는 세계의 지지(地誌)가 간단히 기입되었다.
아담 샬(탕약망)
[편집]Adam Schall (湯若望) (1591
1666)독일 예수회의 전교신부(傳敎神父). 중국명은 탕약망(湯若望). 명(明)·청(淸) 양국에 벼슬하여 천문학·기계학 등의 학식으로써 전도 사업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622년 도래하여 시안(西安)에서 전교하던 중 1630년 베이징(北京)으로 소명(召命)되어 많은 천문 관측 기계를 만들고 서양 천문학서를 한역하는 한편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완성하였다. 그 후 서양 역법(曆法)이 중용되어 1643년에는 중국 전래의 대통력(大統曆)을 폐지하고 서양력(西洋曆)을 채용하자는 의논이 나오게 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또 그는 명나라를 위해 대포도 주조하였다. 전교신부(傳敎神父)로서의 그의 학식과 기술 그리고 포교의 영향은 명(明)말부터는 수천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고, 특히 황실과 고관(高官) 중에서도 많은 신자가 나왔다. 명(明)이 망한 후에도 청(淸)조에 벼슬하여 1644년에는 흠천감(欽天監:천문대장)에 취임하였다. 강희제(康熙帝) 때 수구파(守舊派) 천문학자 양광선(楊光先) 등의 무고로 1665년 다른 신부들과 같이 투옥되어, 교회(敎會)가 파괴되고 신자로 있는 관리들이 파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순치제(順治帝)의 모후(母后)가 비호하여 사형은 면하였으나, 사면(赦免)되지 못한 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