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시민혁명과 신대륙/일본의 바쿠한 체제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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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바쿠한 체제 성립〔槪說〕[편집]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다이묘(大名)의 필두로서 실력을 보유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무(政務)를 관장하는 한편 자기 세력의 부식에 노력했다. 그리하여 세키카하라(關竹原)의 싸움에서 반대 세력을 격파하여 사실상 패권을 획득했다. 특히 그 전후 처리로서 실시한 대규모적인 다이묘의 개역(改易)·전봉책(轉封策)과 일문(一門)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의 창출(創出)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드디어 1603년 세이이 대장군(征夷大將軍)에 보임되어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를 개설하여, 이로써 에도시대의 막이 열렸다. 1615년 오사카의 진(大坂-陣)에서 도요토미를 말살시켰는데, 이때에는 전다이묘를 동원하여, 통수권이 바쿠후에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 후 바쿠후는 무가(武家) 제법도(諸法度)·공가(公家) 제법도를 제정하여, 제다이묘(諸大名)·천황(天皇)에 대한 도쿠가와 장군가(德川將軍家)의 절대적 우위를 법적으로 확정시켰는데, 바쿠후 통수권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1616년에는 군역(軍役) 제도의 정비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국가 공권력(公權力)으로서 바쿠후의 권한이 법적으로 확립되었다.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

1632)는 이에야스의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집]

德川家康 (1542 1616) 도요토미로부터 패권을 탈취하여 에도 바쿠후를 개설하고, 기본적으로는 도요토미 정권의 여러 정책을 계승하면서 바쿠한 체제의 기초를 굳혔다.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의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으로 태어나 전국시대의 희생으로 인질이 되어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1560년 오카자키성을 회복, 156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맹약, 1564년 마츠다이라 일족의 수령의 지위에서 전국다이묘(戰國大名)로 전화하였다. 그 후 세력을 확장하여 도요토미 정권하에서는 관위로는 내대신(內大臣), 소령(所領)은 240여만 석(石)에 달했다.

1603년 세이이 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자 에도(江戶)에 바쿠후를 개설, 오사카(大坂)에서의 두 차례 싸움에서 도요토미를 멸망시킨 다음, 바쿠후의 여러 세력 통제의 기본법을 확정시킨 후 1616년 4월 17일에 죽었다.

바쿠한 체제[편집]

幕藩體制

에도시대(1063

1867)의 무사계급에 의해서 조직된 지배체제. 전국기에 묘슈(名主)층의 지배에서 자립하고 있던 농민에 대응해서, 무사 영주층은 쇼쿠호(織豊)정권 아래서 계급적 결집을 완수하였으며, 농공상(農工商)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피지배계급으로 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바쿠한 체제로 완성시킨 것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였다. 이 지배체제는 무사계급이나 기타 영주계급(寺社·公家) 등 바쿠후와 한(藩)이라는 권력기구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중한 신분제를 조직하여(幕藩制), 농민을 토지에 묶어 놓고, 농민으로부터 가혹한 연공(年貢)을 수탈하는 것이었다. 에도 바쿠후는 이 지배체제의 중핵이었다.

농민으로부터의 과중한 수탈을 가능케 하고 또한 자기 존립의 기초인 군사력은 직신단(直臣團)과 여러 다이묘에 대한 군역(軍役)에 의해서 편성되었다. 다이묘와 그 가신(家臣)으로 편성된 한(藩)도, 바쿠후와 같은 조직으로 영내(領內)의 토지·인민을 지배하면서 바쿠후에 종속되었다. 1867년 바쿠후의 다이세이 호칸(大政奉還)에 이르러 바쿠한 체제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