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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의 식민〔槪說〕
[편집]신대륙의 식민 활동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를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했다. 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경영한 목적은 금·은의 채굴이었으며, 국왕의 직할 지배 아래 영위(營爲)되었다. 네덜란드는 서인도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시 맨해턴섬과 허드슨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1년에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布敎)를 주로 한 것으로, 인구도 적은데다, 국왕의 직접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카보트의 북아메리카 동안(東岸), 체사피크만(灣) 부근의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험프리 길버트나 월터 롤리에 의하여 행해졌는데 볼 만한 것은 없었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707년에 제임스 하구(河口)에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하여,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건설이나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나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영국 식민지는 견실한 농업 식민이 주이며, 인구도 많고 건전한 발달을 했다.
서인도회사
[편집]西印度會社
네덜란드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의 무역을 목적으로 1621년 설립한 회사. 무역의 독점권과 아울러 독점 지역에 있어서의 입법·행정 양권을 가졌으나, 실제로는 에스파냐·포르투갈의 식민지를 공격했다.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점령하고 뉴네덜란드를 세웠으나, 자금 부족과 독점적 무역품의 결여로 1790년 해산했다. 프랑스도 1664년 이런 종류의 회사를 설립하여 아카디아 지방을 개척했으나 1674년 해산했다.
뉴네덜란드 식민지
[편집]-植民地
1609년 영국인 헨리 허드슨의 탐험으로 세워진 허드슨강 유역 지방의 네덜란드 식민지. 1624년 이후는 맨해턴섬을 중심으로 하는 항구적 식민지가 되었고, 1626년에 포트 암스테르담 요새가 세워지고, 섬은 약 24만 달러로 구입되었다. 모피 거래로 번영했으나 1650년대부터 영국의 공격을 받아 1664년 영국에 점령되었고 뉴욕이라 개칭되었다.
메이플라워호
[편집]-號 May Flower
1620년 영국 프로테스탄트가 승선하여 북아메리카의 플리머스를 향하여 출항한 배. 종교적 탄압을 받아 일시 네덜란드에 이주한 필그림 파더스들은 1620년 9월, 존 카버·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하여 102명이 플리머스를 출항해 12월 현재의 플리머스에 상륙했는데 반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인디언에게서 옥수수 재배를 배워 최초의 혹독한 겨울을 타개해 나갔다. 이것을 기념하여 감사절 행사가 시작되었다. 상륙 직전에 배 안에서 맺은 ‘메이플라워 계약’은 다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정부의 설립을 결정한 것으로서,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타운십
[편집]Township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행한 지방자치 제도. 지방자치 단체 ‘타운’의 성년 남자는 모두 타운 미팅(集會)에 참가하여 발언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타운의 주민은 경작지(耕作地)·농기구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생산품도 평등하게 분배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는데, 이 공유지의 분할 과정에서 독특한 집회에 의한 다수결 원리가 확립되었다.
이 집회는 민주적이었음과 동시에 종교적 집회였고, 타운의 모든 문제가 이 집회에서 결정되었다. ‘민주정치의 훈련장’으로서 민주주의 정신의 발달을 촉진시킴과 아울러 영국 본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정신도 이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 영국 의회는 1774년 여기에 엄중한 통제를 가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
[편집]-植民地
뉴잉글랜드(New England) 식민지란 북아메리카의 메인·뉴햄프셔·버몬트·매사추세츠·로드아일랜드·코네티컷의 여섯 식민지를 말한다. 이 지방은 충실한 청교도의 이주자가 많았고, 일찍부터 자주적 연합을 형성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는 일종의 종교정치가 행해지고,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에는 국왕의 총독이 존재하지 않았다. 본국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다른 지방과의 접촉도 그다지 없어 교육 제도·조합 교회제(組合敎會制)·타운 미팅제(制) 등 독특한 뉴잉글랜드의 전통을 낳았다. 이 지역의 거주민은 독립한 자작농민이나 어민·조선업자·무역업자 등의 중산계급으로 그 수가 많았고, 그들의 독립심과 재능은 훌륭한 문화와 각종 산업을 발달시켰다.
영·네 전쟁
[편집]英-戰爭 Anglo-Dutch Wars
17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영국과 네덜란드 양국간의 3차에 걸친 전쟁으로 일명 네덜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제1차(1652
1654)」 청교도 혁명 전쟁 중에 잃은 영국의 해운(海運)과 무역을 회복하고자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航海條例)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영국의 무역·어업으로부터 네덜란드인과 그 선박을 배제하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으로 이에 양국 해군은 충돌하였다. 영국의 승리로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곧이어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前兆)가 되었다.
「제2차(1665∼1667)」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으나, 영국은 1660년의 왕정복고(王政復古)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쳤다. 다음 해 1665년 양국은 전쟁을 개시하였는데 네덜란드의 데 로이테르가 템스강에 침입하여 하구(河口)를 봉쇄하는 등 전과를 올려 1667년 브레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동인도제도에 대한 영국의 권리가 포기되고, 영국은 뉴욕을 획득하였다.
「제3차(1672∼1674)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행한 침략전쟁 중의 하나인 네덜란드 전쟁에 해당된다. 루이 14세가 영국과 도버 밀약을 맺음으로써 일어난다.
브레다 조약
[편집]-條約 Treaty of Breda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로 맺은 조약, 주요내용은 (1) 양국의 영토는 대략 현상태를 유지한다. (2) 영국은 뉴암스테르담(오늘의 뉴욕)을 얻고, 네덜란드는 수리남을 확보한다. (3) 항해조례(航海條例)를 수정하고 1662년 통상조약을 재확인한다.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간에도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은 아카디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서인도 제국의 영토를 얻었다.
네덜란드 전쟁
[편집]-戰爭
제3차 영·네전쟁으로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 타파를 위해 단행한 침략전쟁의 하나. 사실상의 원인은 네덜란드가 프랑스 망명자를 비호(庇護)한 데 있다. 전쟁준비로서 루이 14세는 앞서의 3국 동맹(네덜란드, 영국, 스웨덴)을 타파하고자 1670년에는 영국과 도버 밀약(密約)을 맺고, 1672년에는 에스파냐와 그리고 독일 제후(諸侯)들과 결탁하였다. 1672년 프랑스군은 라인강을 건너서 네덜란드에 침입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데비트가 암살되고 오렌지공(公) 윌리엄이 총독이 되어 수문을 열고 홍수전술(洪水戰術)로 항전하였다. 1673 ∼1674년 네덜란드는 브란덴부르크의 선거후(選擧侯)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제 레오폴트 1세, 그리고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또 영국과도 화해를 함으로써 프랑스에 대해 외교전술로 대항하였다. 전투는 네덜란드와 알사스, 그리고 지중해에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678년 네이메겐 화약(和約)으로서 종막을 내렸다. 이로써 프랑스는 프랑슈콩테와 기타의 동북 국경의 약간의 도시를 얻었다.
도버 밀약
[편집]-密約 Secret Treaty of Dover
영국왕 찰스 2세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맺은 비밀조약(秘密條約). 찰스 2세는 루이 14세로부터 보조금(補助金)을 얻어, 영국에 있어서의 가톨릭 부흥 및 프랑스와 함께 네덜란드와 개전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은 루이 14세의 유럽 제패(制覇)의 야망과 찰스 2세의 가톨릭 전제화(專制化)의 의도가 결합한 결과로서 영국은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략에 가담하고 가톨릭 관용책(寬容策)을 취했으나, 어느 것이나 의회의 반격으로 좌절되었다. 이 밀약은 윌리엄 3세의 즉위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네이메겐 화약
[편집]-和約 Treaty of Nijmegen
네덜란드 침략 전쟁의 평화 조약. (1) 프랑스, 네덜란드간(1678.8.10.), (2) 프랑스, 에스파냐간(1678.9.17), (3) 독일 황제, 프랑스, 스웨덴간(1679.2.6.), (4) 네덜란드, 스웨덴간(1679.10.12,), (5) 프랑스, 덴마크간(1679.9.2), (6) 덴마크, 스웨덴간(1679.9.26)에 체결된 제 조약의 총칭이다. 이 조약에 의해서 네덜란드는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중립(中立)을 약속하였으며, 에스파냐는 프랑스에 프랑슈콩테와 그 밖의 동북 국경의 몇 개의 도시를 양보하고, 독일 황제는 프랑스에 일부의 영토를 양보하였다.
루이지애나 식민지
[편집]-植民地
18세기 초 루이 14세 치하(治下) 미시시피강 전유역의 프랑스령 식민지. 프랑스는 17세기에 들어오자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서 북아메리카에 있어서의 식민지 활동도 활발해졌다. 1682년 라살이 일리노이 지방 및 미시시피 하구(河口)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18세기 초두에 이들 미시시피강 전체를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Louisiana)라 불렀다. 이 식민지는 직접 국왕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식민 활동은 주로 모피 거래와 가톨릭 포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