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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경의 세계〔槪說〕[편집]

17세기의 유럽 여러 국가는 절대주의적 전제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중세 봉건국가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절대주의 체제란 서구의 중세 봉건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근대 시민 사회가 형성되기 전까지에 있었던 과도적 전제형의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절대주의 국가는 에스파냐를 비롯한 영국과 프랑스였다. 에스파냐는 펠리페 2세의 통치기에 발생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위신이 실추되었고, 영국은 16세기의 튜더 왕조를 거쳐 왕권을 강화,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에 이르러서는 유럽 여러 국가의 절대군주의 표본으로 군림하였다. 그가 제창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 절대왕정을 뒷받침하는 정치 사상이었다.

한편 프랑스는 루이 14세를 맞아서 국왕의 권력이 견고해졌다. 총신(寵臣)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왕립·국립의 특권인 매뉴팩처나 적극적 무역 정책이 전개되었다. 국왕은 또한 자신의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상비군이 필요하였고, 동시에 자신을 보좌하는 관료가 요청되었다. 이를 위해 국왕은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였는데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조세제도를 채택했었다. 이와 같은 조세제도가 대내적으로 국왕의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었다고 하면 중상주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이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중상주의 정책은 전세기에 발견된 미국의 신대륙을 위시해서 아시아·아프리카 등과의 교역으로 인해 수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영국은 1600년에, 네덜란드는 1602년에 각각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초기 자본주의를 육성하기 위한 소지를 닦아 나갔다.

영국은 이미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治世)하에 국내의 산업과 무역의 보호를 위해 외국상인들의 국내 활동을 제한하고 영국상인에 한해서만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당시 해외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대다수가 신흥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시대의 조류와 정치정세의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면서 의회에까지 그들의 세력을 뻗쳤던 것이다. 국왕은 봉건 영주 및 왕의 영지(領地)를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점차 그 수입이 고정화됨에 따라 수입이 감소되고, 지출과의 균형에 차질이 생겼다.

독일이 주무대가 되었던 30년전쟁을 위시하여 에스파냐·영국·프랑스 사이에 개재했던 장기간의 군사적 대립과 반목은 군주들로 하여금 막대한 전비의 지출을 요하게 했으며, 군주들은 자신의 명예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쟁을 되풀이하는 것이 당시의 상례인 것처럼 되었다. 여기에 군주들의 이성을 상실한 호화스런 사치생활이 가세하여 국정은 막다른 골목으로 나아갔다. 1560년부터 1660년까지 유럽은 대체로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찰스 1세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가 없어 국내적으로 두 차례의 혁명을 치르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인간정신의 커다란 변화가 도래하였다. 영국의 로크는 삼권분립설을 제창하였고,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학파가 출현하여 당시의 전제정치를 비난, 사회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으며, 또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민약론』 등은 이후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지도적 정신이 되었다.

중근동(中近東) 방면에는 쇠퇴일로에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유럽 열강의 진출로 인해 결국 동구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사파비조(朝)는 배후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위협, 아바스 1세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17세기 후반경에서부터 급격히 쇠망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악바르의 출현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 사이에 한때 융합의 기운이 있기도 하였으나 17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아우랑제브왕에 의하여 양 문명의 융합은 파괴되었다. 여기에 영국의 진출이 강력하게 진행되어 제국은 쇠운(衰運)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남아시아에 있어서는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청조의 번영기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8기제(八旗制)와 교묘한 중국 통치정책에 있었다. 더구나 강희제(康熙帝)의 대판도 정복과 강력한 통치체제는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외국무역의 발전도 눈에 띄게 진행되었으며, 대량의 은 유입은 풍부한 재정기반을 형성했다. 또한 그리스도 선교사의 내조(來朝)에 의해서 근대 유럽 문화와 조우(遭遇)하게 된 중국문화는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는 1699년 영국과 정식으로 광둥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제정 러시아도 이 무렵 흑룡강을 사이에 두고 교역을 기도하다가 실패,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는 등의 여건을 형성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