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르네상스와 종교개혁/무굴 제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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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성립〔槪說〕[편집]

14세기 전반부터 인도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정치적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하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는 경향과 다른 하나는 지방 할거(割據)를 추진하는 경향이다. 특히 후자는 델리 술탄의 여러 왕조가 그 최성기(最盛期)에서도 누를 수 없었던 것으로 중앙정부의 통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즉시 지방의 정치세력이 독립을 찾아서 대두해 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티무르에 의해 투글루크 왕조가 붕괴되자 수많은 지방정권이 차례차례 성립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역시 델리를 중심으로 한 왕조였다. 협소한 영토밖에는 갖지 못한 작은 나라로 전락하였다고는 하나, 델리는 인도에 있어서의 이슬람교도의 지배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델리에는 무굴 제국이 성립하기까지 두 개의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다. 그 하나인 사이이드 왕조는 약체일 뿐만 아니라 그 권위도 낮아 단명(短命)하여 다음의 로디 왕조로 넘어갔다.

힌두 정권으로서는 데칸 남부에 위치하여 이슬람 제국(諸國)과 대항하여 인도 고대의 전통을 지킨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가장 강력했다. 이와 같은 지방 정권의 분립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인도에 통일제국을 건설한 것이 무굴 왕조이다.

무굴 왕조의 초기 정권은 불안정했으나 제3대 악바르에 의해서 제국의 기초가 다져지고, 이후 수대에 걸쳐서 번영 시대가 계속되었다. 무굴 역대 황제의 대부분은 종교적으로 너그러웠으며, 지조(地租)와 지즈야(人頭稅)를 바치는 한 힌두교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힌두, 이슬람 두 문화는 이질적인 것이었으나 인도에서의 오랜 접촉 결과, 예술·사상·문학 등 각 방면에서 융합을 보여 독특한 인도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웠다.

사이이드 왕조[편집]

-王朝 Sayyid

인도 이슬람 지배 초기에 있었던 델리 왕조 중의 4번째 왕조(1414∼1451). 14세기말 투글루크 왕조의 쇠퇴를 틈타 귀족인 히즈르칸이 1414년 델리를 점령하여 술탄의 지위에 올라 이 왕조를 일으켰다. 4대 37년간 계속되어 델리의 여러 왕조 중에서 가장 단명(短命)하였고, 또 세력도 떨치지 못하여 로디 왕조에게 지배권을 빼앗겼다. 사이이드란 말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직계 자손의 가문을 말하는 칭호로서, 이 왕조의 명칭도 시조(始祖)가 마호메트의 후예(後裔)라고 일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로디 왕조[편집]

-王朝 Lodi

인도 델리 왕조(王朝)의 마지막 왕조(1451∼1526). 델리 왕조 가운데 이 왕조만이 아프간 사람(로디족)들에 의하여 창건(創建)되었다. 펀자브 지방에 거주하던 아프간 사람들의 지배자 바알롤은 사이이드 왕조가 쇠퇴해진 틈을 타서 이를 멸망시키고, 로디 왕조를 열었다. 그 때 시칸다르는 동쪽의 자운푸르 왕국을 병합하고, 제3대 이브라힘 시대에 가서는 바베르에 의하여 멸망되어, 이후 무굴 제국(帝國)의 인도지배가 계속되었다.

지금도 델리, 아그라 근교(近郊)에는 이 왕조 귀족의 분묘들이 다수 남아 있다.

비자야나가르 왕국[편집]

-王國 Vijayanag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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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걸쳐서 번영한 남부 인도의 힌두 왕국. 퉁가바도라강(江) 남안 비자야나가르에 수도를 두었다.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치세계에서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측면으로 힌두교 문명사에도 독특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왕국에서는 모든 경향의 힌두계 문화와 풍속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그것을 보호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도에 의해 황폐해진 북인도에 비해서 힌두문화를 보다 순수한 형태로 보존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비자야나가르의 성새를 건설하여 같은 이름의 왕국을 세운 인물은 14세기 전반 무하마드 빈 투글루크의 데칸 정복으로 인하여 그 남쪽으로 도망쳤던 하리하라와 부카 두 왕자였다.

하리하라왕과, 이어서 즉위한 부카왕은 당시의 상황에 적절한 양면정책을 취했다. 즉, 이슬람교도의 위협을 우려하는 지방 힌두교도의 토호(土豪)들의 불만을 적절히 이용하는 한편, 이슬람교도에 대한 완고한 적대자라는 태도를 드러내놓고 표명하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주변의 약소정권을 점차로 흡수하여 차차 영토를 확대해 갔다.

왕국의 후계자들도 이와 같은 유연한 양면정책을 답습해갔다. 그 결과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남인도에서 벵골만으로부터 아라비아해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 기반 위에서 건축활동이 크게 진전되는 한편 포르투갈인과 통상관계를 열어 많은 이익을 올림으로써 왕국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게 했다. 그런데 이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군사상 승리와 상업상의 승리는 북쪽에 인접한 이슬람 제국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나라는 연합을 맺어 1565년 연합군측은 비자야나가르 왕국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 주었다. 왕족 일행은 겨우 남쪽으로 도망했으며, 그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성은 무참히 약탈당하고 파괴되어 버렸다. 이로써 남인도 최강의 힌두 왕국도 붕괴하였으며, 이슬람교도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은 더욱더 전 인도로 퍼져 갔다.

비자푸르 왕국[편집]

-王國 bijapur

인도의 바흐마니 왕국이 분열을 틈타서 1489년 데칸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했던 이슬람 왕국. 초대(初代) 아딜 샤는 투르크계(系)로 이슬람의 시아파(派)에 속했으나 마라타 여자와 결혼한 뒤로는 마라타어(語)를 공용어로 정하고, 역대 왕들도 힌두교도에 대해 유화책을 썼다. 16세기 초엽 포르투갈 세력이 진출하자, 고아 만(灣)을 할양해 주고 이에 대항하다가 뒤에 이슬람 세력과 결탁하여 비자야나가르의 힌두 세력을 구축하였다. 17세기 초엽에는 동북부에 세력을 신장하고 비다르 지방도 병합하였으며 그 뒤 아우랑제브 왕이 데칸을 정복하게 되자 이들도 멸망하였다. 당시의 수도에는 오늘날에도 이슬람 지방 건축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많은 주요 유적이 잔존하고 있다.

무굴 제국[편집]

-帝國 Mughul

델리(한때 아그라 라호르)에 도읍을 둔 인도 사상 최대의 이슬람 제국. 티무르 직계의 자손 바베르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무굴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의 몽골족(蒙古族)을 가리켜서 전통적으로 무굴 혹은 모굴이라 쓰고 있었는데, 바베르 일족(一族)이 몽골족계(系)에 속했기 때문에 무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1527년 3월, 바베르는 라지푸트족 동맹군과 아그라 서쪽에 있는 마을에서 대결했다. 이 때 바베르의 기민한 전술지휘로 파니파트의 승리에 필적할 만큼 적의 군세를 격파했다.

북(北)인도의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을 연달아 격파하고 나자 바베르의 정복사업(征服事業)은 용이해져서 탄력 있게 각지로 전전(轉戰)하였다. 1530년 12월에 그가 병사(病死)할 때까지 북인도 중원(中原)의 주요부는 거의다 정복되었다. 무굴 제국이 성립된 지 4년 남짓하여 그 영역은 강력한 지배(支配)를 가능하게 할 정도로 광대한 것이 되었다.

제2대 후마윤 시대에 아프간족에게 패하여 인도 지배가 중단되는 등, 제국 초기에는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제(大帝)라 불리는 제3대 악바르 시대에 중앙 집권적인 통치조직이 완성되었고, 다음의 자한기르와 샤 쟈한 시대에는 궁정(宮廷)을 중심으로 인도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웠다. 제6대 아우랑제브 시대에 영토는 최대가 되어 남단부(南端部)를 제외한 전인도가 지배하에 들었는데 황제의 말년부터 반란과 제후의 이탈이 연이었고, 또한 영국의 진출 등도 있고 하여 무굴 제국은 쇠퇴했다.

바베르[편집]

Baber (1482

1530, 재위 1526

1530)

무굴 왕조의 창시자. 티무르 제5대의 직계 자손으로 어머니는 칭기즈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우즈베크족에 의해 중앙아시아에서 쫓겨나 일시 카불에 있었는데, 인도 진출을 결심하여 1526년에 파니파트에 로디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델리로 들어가 왕조를 창건하였으며 그 후 인도 각지의 정복 사업에 주력했다.

악바르[편집]

Akbar (1542

1605, 재위 1556

1605)

무굴 제국 제3대의 황제. 악바르 대제(大帝)로 알려져 있다. 그가 14세로 즉위한 당시는 아직 제국의 기초가 불안정하고 지배 영역도 델리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북인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악바르는 궁정 내부의 항쟁의 근원을 없애고 아울러 강력한 군대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통치 말년까지 데칸 일부를 포함한 북인도 전역으로 영토를 넓혔다.

대내적으로는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겼으며, 재래의 종교인 힌두교도와 외래종교인 이슬람교도의 대립을 와해하고 인도내의 여러 종교를 융합·절충하여 신성종교(神聖宗敎:디네이라히)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首長)이 되었다. 또 전국을 주(州)로 분할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으며, 학문과 예술을 중요시하여 독특한 무굴제국문화를 이루었다.

행정제도로는 전국을 주(州)로 나누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꾀하여 황제가 각종 보고(報告)를 직접 청취하여 모든 일에 명령을 내려서 통할한다는 근세적 군주체제가 확립되었고, 또 전국에 발달된 관료제가 실시되어 주(州)의 총독(總督) 이하 현(縣), 군(郡)에 각각 관리가 배치되었다.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여 무굴 제국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고 스스로 힌두교도의 왕녀를 아내로 삼고, 힌두교도를 관리에 등용하는 등 힌두교와의 공존 정책을 추진했다. 악바르는 또한 힌두 문화에도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그 시대 이후 힌두, 이슬람 양 문화의 융합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악바르의 종교개혁[편집]

-宗敎改革

악바르는 제국 유지의 필요에 따라 힌두교도에 대한 융화정책을 추진하여 국내에서 다수파(多數派)를 구성하는 힌두교도에 대하여 종전의 인두세(人頭稅) 등 차별적 조치는 폐지하였다. 또 징수제도도 일원적으로 정비하였다. 그는 당초 순니파(派)의 정통(正統) 이슬람에서 출발하여 차츰 힌두교나 자이나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닌 개혁의 추진자가 되어 1579년에는 이 개혁파의 절대적 권위자가 되었다. 3년 후에는 각 종파의 특색을 절충해서 새로운 종교 디네이라히(神聖宗敎)를 창시(創始)하여 그 최고권위자의 자리를 맡았다. 그것은 힌두교의 범신론(汎神論)과 이슬람교의 일신론(一神論)의 조정을 의도하고 쌍방의 의식(儀式)을 보존, 섭취하려 한 것이었다.

악바르의 이 절충적(折衷的)인 새 종교운동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사상(思想)과 종교면에서 혁신의 필요성이 느껴지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었음은 확실하다. 이 점은 또 같은 시기에 나나크를 조사(祖師)로 하는 시크교(敎)의 운동이 인도의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 추진되고 있었던 사실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나나크의 교의(敎義)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으로 구성되었고 거기에 다른 종파의 요소도 약간 가미되어 있었다.

이 시크교는 악바르의 용인(容認)을 얻게 되어 펀자브 지방 엄리처시(市)의 통치권이 그들에게 양도되었으며, 그 곳에 신앙을 목적으로 하는 유명한 황금사원(黃金寺院)의 건립도 허용되었다.

지즈야(인두세)[편집]

-(人頭稅) Jizya

이슬람교 지배자가 이교도에 대해서 종래의 신앙을 계속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부과한 세. 지즈야를 납부하는 것으로 종래의 신앙이 허가된 것은 처음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 등 ‘성전(聖典)의 백성’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인도를 지배한 이슬람교 지배자들은 이 제도를 힌두교도에게도 적용했다. 악바르는 힌두교도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지즈야를 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