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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르네상스와 종교개혁/영국·프랑스의 중앙집권 국가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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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의 중앙집권 국가 확립〔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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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에는 중세를 통해 시종일관 왕권이 강력한 영국에서는 왕권의 흥망성쇠가 있었으며, 봉건적 권력분산의 전형인 프랑스에 있어서도 왕권의 현저한 신장이 나타난다. 영국·프랑스가 서로 싸운 백년전쟁(1337

1453)과 그 후 영국 국내에서 일어난 장미전쟁(1455

1485)을 거쳐 15세기에 이르러 양국의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백년전쟁은 그것이 단순히 왕위 계승이나 플랑드르 쟁탈을 에워싼 100년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출신 영국 왕실이 프랑스 국내에 갖고 있는 봉토에 대한 지배권(知行權)을 둘러싸고 되풀이된 영국·프랑스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국이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국가의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때에 해당하며 영국·프랑스의 봉건적 제세력을 많이 동원함으로써,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내 봉건 제후 내부의 투쟁이기도 하였으며, 제후의 몰락과 왕권의 신장, 국민 의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찰스 7세)·루이 11세·샤를 8세(찰스 8세)에 의한 전후 재건을 통해서 왕권이 정비되었다. 영국에서 전후 또다시 제후·기사들을 휘말아버린 30년에 걸친 내전(장미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등장하는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로의 힘찬 전진이 시작되었다.

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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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年戰爭 (1337

1453)

영국·프랑스 간의 싸움. 기엔 및 플랑드르에 대하여 왕권의 신장을 기도하느 카페 왕조와 프랑스의 영토를 확보하여 경제적으로 플랑드르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대립이 주요 원인이다. 때마침 1328년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에 대항하여 자신의 카페 왕조 상속권을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하여 전단(戰端)을 열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우세하여 에드워드 흑태자(Edward, the Black Prince, 1330∼1376)가 인솔했던 궁병대(弓兵隊)는 프랑스 기사군을 크레시(1346)·푸아티에(1356)에서 격파하였다. 플랑드르의 도시 칼레가 함락된 것도 이 때이다.

그동안 프랑스는 거듭되는 전란과 흑사병(黑死病)의 맹위로 극히 피폐되었으며, 태자 샤를은 파리의 에티엔 마르셀의 난(亂)과 자크리의 농민반란(1358)을 진압한 후, 겨우 영국과 브레티니의 화약(和約)을 맺었다(1360). 즉위 후 샤를 5세는 군제개혁과 왕실재정의 강화에 노력하고, 아키텐 귀족의 반항으로 동요하는 영국에 대하여 공세로 나가, 그의 치세(治世)동안에, 거의 실지(失地) 회복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380년 그가 죽은 후 왕제제후(王弟諸侯)의 섭정 정치하에서 국정은 재차 문란해지고, 더욱이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악화된 데다, 왕족제후의 대립이 아르마냑파(派)와 부르고뉴파(派)의 항쟁으로 발전하여 국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영국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15년 노르망디 상륙, 아쟁쿠르의 싸움에서 아르마냑 군(軍)을 격파하고, 1420년 트로와 조약에 의해 광왕(狂王) 샤를로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획득하였다. 그후 1422년 헨리 5세,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헨리 6세는 소위 영·프 복합 왕국의 왕호(王號)를 칭하고, 한편 샤를 7세는 르와르 이남에 위축되어 전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429년 잔다르크가 출현하여, 포위된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이래, 프랑스 군은 마침내 공세로 나아가, 1435년 부르고뉴 공(公)과의 화약(和約)이 성립되고, 다음해 파리를 탈환하여 칼레시를 제외한 전프랑스 영토에서 영국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상비군(常備軍)의 창설, 왕실 재정의 확립, 제후 세력의 억압 등으로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영국에서도 이 전쟁 직후에 일어난 장미전쟁 때 겨우 절대주의 왕권이 성장하여 두 나라는 모두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단서가 열리게 되었다.

아르마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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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 Armagnacs

백년전쟁 후기의 프랑스에서 부르고뉴파와 항쟁한 귀족 당파. 1392년 샤를 6세의 발광 후, 오를레앙 공 루이와 부르고뉴 공 장이 실권을 잡고 상쟁(相爭)하였는데, 1407년 루이의 암살 후에도 그의 아들 샤를이 아르마냑 백작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부르고뉴 공에 대항하자 이를 아르마냑파라 불렀다. 이 싸움에는 전(全)프랑스의 귀족·시민계급까지도 그 와중에 휩쓸려 들어갔다. 아르마냑파는 아쟁쿠르의 싸움에서 영국군에 패한(1415) 후 조락(凋落)하기 시작, 부르고뉴 공의 암살(1419)을 계기로 완전히 북프랑스에서 세력을 잃고, 이후 비운의 왕 샤를 7세를 옹립하여 황태자파라 불리게 되었다.

부르고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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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 Bourguignons

프랑스 귀족의 한 당파. 백년전쟁 후기에 아르마냑파와 싸웠다. 14세기말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악화된 후, 오를레앙 공(公) 루이와 부르고뉴 공(公) 장이 실권을 장악하고, 장이 지도하는 부르고뉴파는 1407년 루이를 암살한 다음 그 아들 샤를이 이끄는 아르마냑파와의 항쟁(抗爭)을 격렬하게 벌여, 거의 전프랑스의 귀족과 평민계급이 이 와중(渦中)에 휩쓸려 들어갔다.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비롯한 북프랑스 여러 도시의 지지를 얻고, 영국과 내통하여 헨리 5세의 프랑스 침략을 도왔으나, 1419년 장이 암살된 후에는 공공연히 영국과 동맹하여 헨리 6세의 영·프 복합왕국(複合王國)을 승인하고, 공동으로 북(北)프랑스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결국 1435년 아르마냑파가 지지하는 샤를 7세와 화약(和約)을 맺음으로써 양파의 항쟁은 종식되었다.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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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 d’Arc (1412

1431)

프랑스의 애국 소녀. 로렌주(州) 남부 뫼즈강에 연하는 도므레미 마을에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13세 때에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백년전쟁으로 위기에 시달린 샤를 7세와 회견하여 군대 지휘권을 받았다. 1429년 5월, 영국군이 포위하고 있는 오를레앙을 해방시켰으며, 7월 랭스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프랑스인에게 인식시켰다. 그 후 국왕 측근의 배신 행위로 1430년 5월 콩피에뉴의 숲에서 체포되었으며, 1431년 루앙에서 영국측 재판에 회부되어 이단이라는 판결을 받고 1431년 5월 30일 화형당하였다.

샤를 7세(찰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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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Charles Ⅶ (1403

1461, 재위 1422

1461)

프랑스 발루아 왕조(王朝)의 제5대 왕이다. 잔 다르크의 지지를 얻어 영국군을 격파하고 1429년 랑스에서 대관했으며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상인과 결탁하여 재정을 안정시키고 용병 상비군을 창설하여 관료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또한 왕권에 의한 교회의 통제권을 확립했다. 그 결과 프랑스 왕권은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루이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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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Louis ⅩⅠ (1423

1483, 재위 1461

1483)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제6대 왕. 아버지 샤를 7세의 뒤를 이어 17세 때에 귀족의 반란에 참가하여 부왕(父王)과 싸웠으나, 패하고 유배(流配)되어 도피네의 친왕령(親王領)에서 15년 이상을 보내었다. 그 후에도 부왕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아, 1456년 부왕의 군대에게 쫓겨 부르고뉴 공(公)의 비호(庇護)를 구하였다. 즉위 후 제후(諸侯)세력의 감축에 전념하였으며, 복지동맹(福祉同盟)의 반격을 받아서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소귀족을 자기 편으로 삼아 제후 영내에서의 반란을 선동하였으며, 영국왕을 회유하는 등 교묘한 정책을 사용하여 세력 만회에 힘썼다. 1477년 제후의 맹주(盟主) 부르고뉴 공(公) 샤를 용담공(勇膽公)이 전몰(戰歿)하자, 1480년에는 완전히 봉건세력을 억압하고 중앙집권을 달성하였다. 또 우편제도의 창설, 민병제도의 확충 등의 내정에도 현저한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특히 모직물·견직물 등 상공업 육성을 꾀해 특권 대상인의 이익을 옹호했고, 절대주의(絶對主義) 왕권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샤를 8세(찰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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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Charles Ⅷ (1470

1498, 재위 1483

1498)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제7대 왕. 브르타뉴 공령을 혼인에 의해 흡수하여 아버지 루이 11세 이래의 왕권에 의한 국내 통일을 완성했다. 나폴리 왕국의 지배를 목표로 이탈리아에 출병하여, 이 시도는 실패했으나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프랑스에 유입되었다.

루이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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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Louis ? (1462∼1515, 재위 1498∼1515)

프랑스 왕. 오를레앙 공(公) 샤를의 아들. 블르와에서 출생하였으며, 14세에 루이 11세의 딸과 결혼, 샤를 8세에 반역하였다가 일시 투옥되었다.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밀라노를 제압하였으나, 세미나라에서 패전하고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철퇴하였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후원으로 다시 베네치아를 공격했으나 이탈리아 여러 도시(都市)와 영국, 에스파냐 등의 연합군에게 다시 패하였다. 그러나 농민을 보호하고 조세를 경감하는 등 내치에는 성공하여 ‘국민의 아버지’라 칭송되었다.

랭커스터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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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家 Lancaster

중세 영국의 왕조. 요크 왕가와 함께 플랜태저넷 왕가의 갈래로 창시자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국왕 헨리 3세의 둘째 아들인 에드먼드로, 랭커스터 백작에 서임(敍任)된 데서 유래한다. 14세기에 에드워드 3세의 4남 존 오브 곤트는 랭커스터 공작으로 제수되었으나, 그 아들 헨리는 국왕 리처드 2세에게 국외로 추방당하고 또한 국왕이 공령(公領)을 몰수한 데 불만을 품어 귀족들을 규합, 군사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백년전쟁에 승리를 거둔 헨리 5세의 뒤를 이어 헨리 6세가 즉위했으나, 그는 병약하여 윗대의 번영을 되찾지 못하고 이 때에 요크가와 랭커스터 왕가와의 정권쟁탈전이 일어나 마침내 장미전쟁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4세는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요크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 후 랭커스터 왕가의 방계(傍系) 출신인 헨리 7세가 요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장미전쟁을 종결시키면서 튜더 왕조를 열었다.

헨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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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Henry Ⅳ (1367∼1413, 재위 1399∼1413) 영국의 왕. 랭커스터 왕가의 창시자. 존 오브 곤트의 아들. 1398년 종형인 리처드 2세에 의하여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이듬해 부친 사후, 리처드가 위약(違約)하여 랭커스터의 영지를 몰수했기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거병, 리처드를 항복시켰다. 의회는 리처드를 폐위시키고 헨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1399년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치세 중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싸워 전쟁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1401년 이단분살령(異端焚殺令)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무리인 롤라드파를 박해하였다. 한편 이 시대에 의회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는데, 그는 이른바 조기(早期)의 입헌적 군주로서 영국 헌정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요크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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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家 Yorks

중세 영국의 공가(公家).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 에드먼드가 1385년 요크공(公)으로 봉작된 데서 시작된다. 그 아들 에드워드, 그 조카 리처드에게 계승되었는데,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발병(發病)을 틈타 1453년 호민관 겸 방위관(防衛官)이 되어 랭커스터가(家)의 중심세력인 서머세트 공(公)과 싸워, 장미(薔薇)전쟁을 일으켜 서머세트 공을 멸하였다. 1460년에는 왕위를 요구하고, 헨리 6세의 사후 왕위계승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랭커스터파의 반대로 리처드는 전사하고, 그 아들 에드워드는 1461년 랭커스터가를 격파, 왕위를 획득하여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이윽고 요크 내부에 불화가 일어나,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사후, 글로스터 공(公) 리처드는 어린 에드워드 5세와 그 아우 리처드를 살해하고 리처드 3세로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1485년 랭커스터가의 왕위계승자 리치먼드 백(伯) 헨리 튜더 때문에 왕위를 빼앗기고,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에 의하여 양가는 합체되었다. 요크가는 왕가로서는 없어졌으나, 요크 공칭(公稱)으로는 후세에까지 계승되었다.

에드워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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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Edward Ⅳ (1442∼1483, 재위 1461∼1483)

잉글랜드 왕. 요크가(家) 출신. 요크공 리처드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루앙에서 태어났다. 랭카스터가와의 무력투쟁에서 활약하여 1461년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를 모티머의 십자로에서 격파하고 즉위, 그 해에 다시 타우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지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비 엘리자베스의 근친자를 중용함으로써 1469년 귀족의 반란이 일어나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헨리 6세의 복위(復位)를 허용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왕위를 빼앗았다. 그는 신흥 상인계급이나 하급귀족을 자기편으로 삼고 대제후를 눌러 왕권의 강화에 힘쓰는 한편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장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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薔薇戰爭

영국 왕의 계승을 에워싼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와의 전쟁(1455

1485). 랭커스터파가 붉은 장미, 요크파가 백장미의 휘장을 달고 싸운 연유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재위 1422

1461)와 요크가의 에드워드와의 왕위를 에워싼 분쟁에서 발단하여 국내의 제후·기사 모두가 휘말린 피비린내나는 대내란으로 발전했다. 이름과는 정반대로 처절하기 그지없었던 이 내란은 랭커스터가의 혈통인 리치몬드 백(伯) 헨리 튜더가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요크가의 리처드 3세(재위 1483

1485)를 격파하고 요크가의 처녀를 비(妃)로 맞이함으로써 끝났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많은 제후·기사가 몰락하고 튜더 왕조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로의 새로운 막이 오르게 되었다.

장미전쟁은 영국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음산한 사건으로 이 내란은 봉건 대귀족들의 집안싸움이었으며, 그 결과 구귀족 중에서도 왕권에 대하여 반항적인 부분이 거의 모두 괴멸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헨리 7세의 국가 재건사업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영국 절대왕정은 헨리 7세의 치세(治世)에 그 기초를 구축했다.

헨리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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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Henry Ⅶ (1457

1509, 재위 1485

1509)영국 왕. 튜더 왕조(Tudor)의 창시자. 모계에 의해 랭커스터가(家)의 왕위 청구권 소유자로 간주되어,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로부터 귀국하여 리처드 3세를 보스워스 싸움에서 패사시키고 즉위하였다. 이어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랭커스터 양가의 대립을 둘러싼 다년간의 내란(장미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요크파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여 왕령지를 확대하였고, 의복하사(衣服下賜), 소송방조(訴訟幇助)를 금지하여 봉건귀족의 세력을 억압하였으며, 성실(星室) 재판소를 정비하여 사회질서의 회복과 왕권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상공업을 보호 장려하였으며, 왕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등 영국의 절대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튜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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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 Tudor

절대주의 시대의 영국의 왕조. 본래는 웨일스 출신이며, 헨리 튜더(리치먼드 백(伯))가 랭커스터계의 왕위 청구권자로서 리처드 3세를 보스워스에서 격파하고, 즉위하여 스스로 헨리 7세라 칭한 데에서 시작된다. 이후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를 거쳐 엘리자베스 여왕 등이 나와서 거의 1세기 남짓 영국을 통치했다. 이 시대는 절대주의의 성립기 및 극성기이며, 강력한 왕권은 국내치안을 거의 확립하여, 경제적인 진보에 공헌하였다. 영국이 로마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의 확립에 성공한 것도 이 시대이다. 중세 이래의 봉건귀족은 일반적으로 몰락하고, 젠트리가 사회의 주된 세력이 되고, 요먼이 광범위하게 성립되었다. 해외 발전면에서는 서북·동북 양항로의 탐험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며, 또 선진국인 에스파냐의 해상지배에 도전하여, 1588년에는 아르마다를 격파하고 대해국군으로서의 제1보를 기록하였다. 또한 이 새대는 영국의 르네상스기(期)에 해당하며, 셰익스피어 등이 출현하였다.

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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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國 Bourgogne

프랑크 왕국의 동쪽 변두리에 있었던 공국. 광의(廣義)의 부르고뉴는 9세기 말에 이분되어, 서부가 부르고뉴 공국, 동부가 부르고뉴 백령(伯領)(뒤의 프랑슈콩테)이 되었는데, 본래의 브르타뉴는 전자를 말한다. 부르고뉴 공(公)은 카페 왕가(王家)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361년에 단절, 왕령(王領)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363년 장 2세의 아들 필리프에 의하여 제2차 카페가(家) 부르고뉴 공이 실현되고, 이윽고 플랑드르, 프랑슈콩테 등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장상 푀르, 필리프 르 봉 등의 유능한 군주가 등장하여 프랑스 최대의 봉건제후(封建諸侯)로서 부강을 자랑하였다. 그후 1477년 샤를 용담공(勇膽公)의 전사와 더불어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