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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르네상스〔槪說〕
[편집]영국,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고 남부에 나폴리 왕국, 중부에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제후령 외에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전개된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원래 재생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것은 고대 고전의 단순한 부흥은 아니고 고대 고전을 실마리로 하는 시민계급의 새로운 문화 창조이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고지(故地)로서 유적·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했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彼岸的)이 아니고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신곡(神曲)』을 쓰고 르네상스의 선구가 된 단테에 이어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문학의 새로운 길을 터놓았고, 미술 세계에서는 지오토(1266?
1337)에서 시작해 보티첼리(1445
1510)를 거쳐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의 3대 천재가 출현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이즈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했다.
피렌체 공화국
[편집]-共和國 Firenze
근세 초기 이탈리아에 번영한 도시 국가. 12세기경 일찍이 모직물로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15세기에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12세기 말 이미 겔프당적(黨的) 색채가 짙어져, 13세기 후반 신흥 상공업자들은 기벨린당의 귀족세력을 타도하여 공화정치를 실현하였으나 대시민과 소시민의 대립으로 시정은 혼란하였다. 마침내는 소시민이 순조로이 자라서 정의의 법령 등이 제정되었고 민주정치가 확립되었다. 피사, 시에나 등 인근 도시를 정복하여 토스카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378년에는 하층 노동자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정권은 결국 대시민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5세기에는 금융가 메디치가(家)의 독재시대였으며, 특히 대로렌초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의 사후 공화정치가 부활되어 한때 사보나롤라, 마키아벨리 등이 활약하였는데, 16세기 초엽 메디치가(家)가 복귀하여 코시모 1세가 토스카나 공국(公國)을 이룩하여, 공화정부는 멸망하였다.
피렌체파
[편집]-派 Firenze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14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룬 건축·조각·회화의 유파. 특히 회화에서는 주지적합리주의(主知的合理主義)·조형적형태주의(造形的形態主義)가 그 특징이다. 주제(主題)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간구성(空間構成)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이 전통은 장식적인 시에나파(派)와 대립하여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2대 조류를 이루었다. 한때 시에나파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인 것이 되었으나,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등의 투시도적수법(透視圖的手法)과 도나텔로의 조형적성과(造形的成果)를 도입한 다음부터는 회화적 현실의 표현에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피렌체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家)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이 자연주의(自然主義)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으며,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人體描寫)·운동묘사(運動描寫)·풍경묘사(風景描寫)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1500년대에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해지는데, 보티첼리는 만년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사실주의(寫實主義)를 완성하면서부터 주관적 정신내용을 그 속에 표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인체 표현 속에 인간의 정신적 고뇌(精神的苦惱)를 표현하였는데, 그 초월적 방향(超越的方向)으로써 피렌체파의 최종적 단계를 장식하였고,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가 되었다.
단테의 「신곡」
[편집]-神曲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문학자 단테(Alighieri Dante 1265
1321)의 작품.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구어(口語)로 쓰여 있으며 이탈리아 국민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인생의 중도에서 어두운 숲 속을 방황하고 있던’ 단테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지옥을 빠져나와 연옥을 통과한 다음 연인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되어 천국을 순회하고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받아 신의 환영(幻影)을 보게 된다는 구성으로, 가톨릭 정신에 일관하면서도 개인의 체험이나 생생한 감정을 묘사하여 「신생(新生)」에서의 이상적인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지순한 사랑의 표현과 함께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가 되었다.
페트라르카
[편집]Francesco Petrarca (1304
1374)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휴머니스트. 라틴어 고전 연구에 생애를 바쳤으며, 고대 로마의 무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무공을 노래한 「아프리카」 외에 많은 라틴어 시문을 남겼다. 구어로 쓰인 『서정시집(敍情詩集)』은 이상적인 연인 라울라에의 연정을 아름답게 노래하여 널리 알려졌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편집]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학자이자 휴머니스트인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
1375)의 작품. 흑사병을 피한 3인의 신사와 7인의 숙녀가 교대로, 이들 10인이 매일 이야기를 한 가지씩 하는 형식으로서 성직자도, 신분 높은 사람도 욕망·우둔·호색 따위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예리하게 풍자하여 인간의 본성을 훈훈하게 긍정한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대해서 「인곡(人曲)」이라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편집]Leonardo da Vinci
(1452
1519)성기(盛期)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가(藝術家), 과학자(科學者). 피렌체 교외의 빈치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여 서자(庶子)로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수학·음악·회화 등에 특이한 재능을 나타내고, 자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470년경부터 피렌체에 거주하면서 조각가(彫刻家) 겸 화가로서 유명한 베로키오에게 사사(師事)하여 원근법(遠近法)·해부학(解剖學) 등을 배우고, 자연의 사실(寫實)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서는 「수태고지(受胎告知)」가 있다. 미완성의 「성(聖) 히에로니무스」는 이 시대의 그의 사실주의(寫實主義)의 절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1482년 밀라노에 가서 밀라노의 전제 군주 스포르차의 군사기술자(軍事技術者)로서 봉사, 대포(大砲)·요새(要塞) 등의 각종 병기(兵器)를 설계하였다. 또한 시체를 해부하여 생리학을 연구하고, 조류의 비상(飛翔)을 관찰하여 비행의 원리를 발견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하였다. 예술활동으로서는 「최후의 만찬(晩餐)」 등의 걸작을 남기고,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대」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 밀라노 시대는 그의 고전예술(古典藝術)의 완성기로서, 단순한 사실(寫實) 이상의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1499년 프랑스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 후 피렌체에 귀환, 「모나리자」를 그렸다. 그 후 다시 밀라노, 로마를 편력(遍歷)하여 예술·과학 분야에 다각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1516년에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초빙되어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체재하였다.
미켈란젤로
[편집]Buonarroti Michelangelo (1475
1564)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고, 회화·건축에도 활약했지만 자신은 조각가로서 자인했고 「다비드상(像)」 「모세상(像)」 등 다수의 훌륭한 상을 조각했다. 회화에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 벽화 「최후의 심판」이 유명하다. 성 베드로 사원의 원개(圓蓋)는 그의 설계였다. 강한 개성과 의지로 웅대하고 힘찬 작품을 만들어 르네상스 예술의 최고봉을 이룩했는데, 「최후의 심판」의 주관적 정신주의와 동적인 구도·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만년의 작품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라파엘로
[편집]Santi Raffaello (1483
1520)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피렌체 태생. 로마 교황을 섬겨 「율리우스 2세 상」 「레오 10세 상」을 그렸으며, 특히 아름답고 우아한 성모상을 많이 그렸다. 그의 작품은 아름다우나 개성이 없다고들 말하는데, 여러 유파의 특색을 흡수하여 인간미의 이상적 완성을 추구하면서 안정되고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의 예술이었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그는 보기 드문 총합(總合) 동화(同化)의 천재이다.
브루넬레스키
[편집]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피렌체파(派)의 건축가. 피렌체의 명문 출신으로 처음엔 조각가를 지망했다가 24세 때 청동부조(靑銅浮彫)의 제작 경기회에 참가하여 기베르티에게 패한 후 조각을 단념하고, 로마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전공하면서 고대건축을 연구하였다. 처녀작품이며 그의 걸작인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은 1420년에 기공하여 1434년에 완성한 것으로, 이것은 고딕양식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반영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 중 1430년에 기공(起工)한 「파치가(家)의 예배당」과 1425년에 기공한 바실리카식(式) 회당(會堂)인 「산로렌초 성당」은 중세의 바실리카 회당에서는 볼 수 없는 약동적이며 지성적인 미(美)가 나타나 있는 것으로, 고전형식(古典形式)과 그의 예술적 창조력과의 정밀한 결정(結晶)이다.
사보나롤라
[편집]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宗敎改革者). 페라라 출생. 1475년 도미니쿠스 교단(敎團)에 들어갔으며, 1491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긴 후, 공화주의(共和主義)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基調)로 한 설교로 당시의 피렌체의 참주(僭主)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 교회와 속세(俗世)의 도덕적 부패를 통박(痛駁)하여 인심(人心)을 사로잡았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 때 잘 대처(對處)하였으며 이로써 피에로 데 메디치의 망명(亡命) 후에는 중산계급(中産階級)을 주체(主體)로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귀족정치를 배격하고 신정 정치적 민주제(神政政治的民主制)를 실시했으며, 종교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權威)에 반항하다가 1497년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파문(破門)당했으며, 이어 대(對) 피사 전쟁의 실패, 메디치파(派)의 모략으로 인심을 잃어 1498년 화형(火刑)으로 죽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評價)는 그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라고 하는 사람, 또 가톨릭정통복귀운동자(正統復歸運動者)라고 하는 사람 등 일치하지 않으나, 16세기 르네상스의 미술·문학·사상(思想)에 미친 영향은 크다.
보티첼리
[편집]Sandro Botticelli (1444?∼1510)
이탈리아 르네상스기(期)의 화가. 피렌체에서 출생하여, 프라 필리포 리피의 현세적·탐미적 종교화의 화풍을 습득하여 인간적(人間的)·정감적(情感的) 표현을 계승하는 한편, 피렌체의 사실화(寫實畵)와 풍경화를 배워, 여기에다 독자적인 애수(哀愁)를 가미시켜서 선적 특질(線的特質)과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는 특이한 화풍을 완성하였다.
또 시인인 폴리치아노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아 고전적·이교적(異敎的) 정신에다 중세적 종교심이 괴이(怪異)하게 뒤섞인 많은 걸작을 그렸다. 초기의 작품인 「성(聖) 세바스티아노의 순교(殉敎)」(1474)는 사실적이고 「봄」은 서정성이 풍부하며 「비너스의 탄생」은 장식적 효과에서 뛰어났다.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받아 열성적인 신자가 된 후에는 종교적 제재(題材)에 몰입하여 신비적 환상 속에 잠기게 되자, 「비방(誹謗)」 「비너스의 탄생」(1500)을 제작하였으나, 차차 신비주의 때문에 명료성(明瞭性)을 잃고, 드디어는 회화제작을 포기하였다.
마키아벨리
[편집]Niccollo Machiavelli (1469
1527)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 외교가, 역사가(歷史家). 아버지는 법률가였다. 만년(晩年)에 피렌체 근교(近郊)에서 저작에 전념, 실의와 빈곤 속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는 피렌체사(史)의 전개(展開)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메디치가(家) 몰락 후 1498년부터 1512년까지 외교·군사에 관한 십인청(十人廳)의 사무국장이 되어 외국에도 수차 사절로서 파견되었다. 메디치가(家)의 복귀로 실각하여 은거(隱居)하였다. 그동안 명저(名著) 『군주론(君主論)』 『로마사론(史論)』 『전술론(戰術論)』 『피렌체사(史)』와 희곡 「만드라골라」 등을 저술하였다.
여우의 교지(狡智)와 사자(獅子)의 용맹을 예로 들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즘은 결국은 중세적 정치방식이나 도덕률(道德律)이 권위를 잃는 과도기(過渡期)적 사상의 꽃이며, 또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혼란의 극에 있었던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적 소산(所産)이었다.
마사초
[편집]Masaccio (1401∼1428?)
르네상스 기(期)의 피렌체파(派)에 속한 화가(畵家). 14세기 후반 이래 쇠퇴하였던 회화(繪?)의 전통을 부활(復活)하고, 명암(明暗)의 색조(色調)로써 인체의 입체성을 힘차게 표현했다.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세례주는 성베드로」 등 일련의 벽화는 그의 걸작이다. 그 중에서도 「낙원추방」은 인간의 비애와 절망을 현실성과 박진성(迫眞性)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지웃토가 설화(說話)에 내재(內在)하는 인간적 감정의 표현에 역점을 둔 데 비해 그는 빛과 음영(陰影)으로써 인체의 양감성(量感性)을 강조하고 보다 객관적인 현실성(現實性)에 입각하여 대상의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또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조각가 도나텔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작품으로는 미켈란젤로의 격찬을 받은 「네 성자」 「낙원추방(樂園追放)」 「공납금(貢納金)」 「빈자에게 시혜(施惠)하는 성베드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