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르네상스와 종교개혁/오스만 제국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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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발전〔槪說〕[편집]

14세기에 보인 오스만 국가의 눈부신 발전은 15세기 초 1402년 앙고라의 패전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티무르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던 바야지트 1세는 오히려 포로의 몸이 되었고, 그가 죽은 후 왕자들의 술탄 직위 계승을 둘러싼 분규가 잠시 지속되었다. 이때 오스만 국가 붕괴의 위기를 방비하여 재건의 기초를 굳힌 것이 메메트 1세(재위 1403

1421)이다.

이어 그의 아들 무라트 2세(재위 1421

1451)는 발칸 경영을 재개하고 실지(失地) 회복을 기도했다. 당시 헝가리에는 국민적 영웅 후냐디가 나타나서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어 반(反) 터키 전선을 결성하여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또한 알바니아도 스칸델베우에 의해서 독립을 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라트 2세는 1444년 도나우 강구(江口) 부근의 바르나에서 후냐디가 이끄는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하고, 나아가 1448년에 제2차 코소보의 싸움에서 재차 후냐디를 대파하여 옛땅의 수복에 성공했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오스만 국가는 ‘정복자’라 불린 메메트 2세를 맞아 일대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최대의 정복 사업은 이슬람 교도의 오랜 염원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공략이었다. 1453년 5월, 1천 년 이상 계속되었던 동로마 제국은 터키군의 맹공을 받아 드디어 멸망하고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세계제국(帝國)의 수도로서 재생되었다. 이 사건에 의해서 오스만 투르크는 더 깊이 유럽의 국제 정국(政局)에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오스만 해군은 흑해와 동지중해에 진출하여 이들 지방의 유럽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동방 무역은 현저히 방해되어 서구 제국의 신항로(新航路) 개척의 기운을 한층 촉구하게 되었다.

이어 16세기에 들어서자 콘스탄티노플의 공략에도 비할 만한 중요한 정복이 셀림 1세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1517년의 마물루크 왕조의 이집트 정복이다.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보고(寶庫)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군사적으로도 제국 지배의 요지가 되었다. 셀림 1세는 또한 마물루크 왕조에 보호되고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손으로부터 칼리프의 자리를 양도받아 술탄 칼리프제(制)를 수립하였고, 이에 오스만 투르크 황제는 명실공히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셀림 1세에 이어 즉위한 술레이만 1세의 반세기 가까운 치세는 진실로 제국의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 제국의 영토는 3대륙에 걸쳐서 최대에 달했고, 유럽에서는 헝가리를 정복하여 빈에 육박했거니와 프랑스 왕과 결탁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괴롭혔다. 지중해는 전적으로 오스만 투르크 내해(內海)가 되어 가는 곳마다 초승달 깃발이 휘날렸다.

메메트 2세[편집]

-世 Mehmet Ⅱ (1430

1481, 재위 1451

1481)

마호메트(Mahomet) 2세라고도 한다. 오스만 제국 제7대의 술탄. 무라트 2세의 아들.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에 천도(遷都)했다. 제국 관제(官制)를 정비하고 술탄의 전제를 강화했다. 펠로폰네소스, 소아시아, 발칸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크림 한국(汗國)을 보호국으로 하여 동지중해와 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또한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후예(後裔)를 멸망시켜 소아시아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정복지역의 크리스트교도에는 교단을 조직하게 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며, 행정제도와 재정을 정비하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여 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그 부흥에 노력하였다. 그는 여러 언어에 통하고 학예(學藝)를 보호했기 때문에 그의 궁정에는 르네상스의 문화인도 많이 내왕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편집]

-攻略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673년 사라센군에 의한 최초의 포위 아래, 그 후 몇 차례 이슬람교도의 공성(攻城)에 대해서 완강하게 저항해 왔었다. 14세기 후반부터 발칸 반도 진출을 개시한 오스만 투르크는 차차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체제를 정비하고 드디어 모하메트 2세 때에 최후의 결정적인 공격이 실시되었다. 공격은 14 53년 4월부터 5월에 걸쳐서 해륙(海陸)에서 격렬하게 실시되어 5월 29일에 함락되었다. 방위에 노력했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도 전사하고 1천 년 이상 계속된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셀림 1세[편집]

-世 Selim Ⅰ(1470

1520, 재위 1512

1520)오스만 제국 제9대의 술탄. 바야지트 2세의 아들. 이란에서 일어난 시아파의 사파비 왕조와 싸워서 적의 수도 타브리즈를 빼앗았다. 이어 이집트의 브르지 마물루크 왕조와 대립했는데, 1516년 시리아의 마루디 다비크의 싸움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1월 카이로를 함락시켰다. 이 승리에 의해서 시리아, 이집트, 홍해(紅海)를 지배하에 넣게 되었다. 또한 이집트에 망명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예로부터 칼리프의 존호(尊號)를 받았다.

술레이만 1세[편집]

-世 Suleiman Ⅰ(1494

1566, 재위 1520 1566) 오스만 제국 제10대의 술탄. 셀림 1세의 아들. 제국의 최성기를 가져왔고, ‘입법자(立法者)’, 유럽인들로부터는 ‘장려자(壯麗者)’라 불렸다. 일생동안 13회의 원정을 하였고, 동방에서는 사파비 왕조를 쳐서 메소포타미아를 얻었으나 그의 관심은 오히려 서방으로 향했다. 1526년 모하치 싸움에서 이겨 헝가리를 정복하고 이어 1529년에는 멀리 빈을 공격하여 포위했다. 합스부르크가(家)에 대항하기 위해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동유럽에 진출하여 트란실바니아를 복속시켰다. 또한 해상에 있어서는 로도스섬을 공략하고, 1538년의 프레베자 해전의 승리에 의해서 지중해 재해권을 획득했다. 국내에 있어서는 법전(法典), 기타 여러 제도가 정비되고 왕의 보호 아래 학예(學藝)는 융성에 달했다. 1566년 헝가리의 시게트발에 출전중 병사했다.

빈 포위[편집]

-包圍

1529년 술레이만 1세는 2만 4천의 병력을 이끌고서 9월부터 10월에 걸쳐서 빈(Wien)을 포위했다. 당시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부재중이었으나 성병(城兵)이 잘 방위했고 악천후 때문에 오스만군은 철퇴했다. 빈 공략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유럽의 국제 정국에 미친 영향은 컸고, 또한 독일 국내의 루터파 제후(諸侯)의 세력을 증대시켜서 종교개혁 운동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예니 체리[편집]

Yeniceri

‘신군(新軍)’이라는 뜻이다. 오스만 국가가 발칸 진출 후 창설한 술탄의 친위대(親衛隊). 그리스 교도의 소년들을 강제적으로 선발 징용하여 이슬람교에 개종(改宗)시켜 술탄의 측근에서 특별한 훈련을 실시하여 편성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정복에 자주 전공을 세워서 유명해졌다. 그들은 노예적 신분이었으나 고급 관리로의 진로도 열려서 재상(宰相)이 되는 자도 있었다. 이 제도는 후에 폐해가 생겨서 1824년 폐지되었다.

커피출레이션[편집]

Capitulation

이슬람교국에 있어서 통상 무역을 하는 그리스교도에게 주어진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포함한 특권이다. 1535년 술레이만 1세는 프랑수아 1세와의 조약에서 프랑스에 커피출레이션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오스만 제국에서의 통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 거주권, 영사(領事) 재판권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후 다른 여러 나라도 같은 특권을 취득했다. 커피출레이션은 이슬람교도간의 통상 무역을 촉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19세기가 되자 이 특권을 이용하는 유럽 제국의 진출이 심해져서 오스만 제국은 이 치외법권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다. 이 특권은 1923년의 로잔 조약에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