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르네상스와 종교개혁/프랑스의 종교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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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종교분쟁〔槪說〕[편집]

왕권을 중심으로 국내 통일이 진행된 프랑스에서는 벌써 15세기 전반에 샤를 7세(찰스 7세)하에서 국내의 가톨릭 교회를 그의 지배하에 넣고, 또한 프랑수아 1세(재위 1515

1547) 시대에 교황권을 배제하여 왕권에 의한 교회 지배는 완성됐다. 그러나 프랑스에도 16세기가 되자 프랑스 르네상스가 전개됨에 따라 종교개혁의 영향이 미치고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가 형성되어 갔다. 특히 국내의 탄압으로 스위스에 망명한 칼뱅의 영향을 받고 위그노파가 세력을 획득했다. 이것이 여러 귀족의 정치적 싸움과 결부되어 프랑스는 격심한 종교적 분쟁 속으로 휩싸여 들어갔다.

성(聖) 바르톨로뮤의 학살(虐殺)로 상징되는 위그노전쟁(1562

1598)이다. 싸움은 부르봉가(家) 앙리 4세(헨리 4세)의 낭트 칙령(1598)으로 종결되지만, 30년에 걸친 이 전쟁 중에 국내의 봉건귀족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며 앙리 4세하에서 절대주의적인 국가 통일이 완성됐다.

위그노 전쟁[편집]

-戰爭

프랑스의 종교전쟁(1562

1598). 샤를 9세(재위 1560

1574)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궁정 내의 신구 양파의 대립을 이용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것에서 비롯되어 일어났으며, 1572년의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이라는 피비린내나는 사건을 거쳐 칼뱅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국내의 민중(위그노, Huguenots)을 끌어들여 격렬한 종교 분쟁이 30년 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를 위그노 전쟁이라 한다. 1589년 발루아 왕조 단절의 뒤를 이어 신교파인 나바라왕 앙리가 앙리 4세(재위 1589

1610)로 즉위하였으며 스스로는 구교로 개종하여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고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와 시민권을 인정하여 내란을 진정시켰다. 이 과정에서 귀족의 세력은 약화되고 왕권에 의한 절대주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편집]

聖-大虐殺

1572년 8월 24일 프랑스의 성 바르톨로뮤(St. Bartholomew) 사원의 제일(祭日) 저녁에 위그노 지도자가 대량으로 학살된 사건. 위그노 전쟁이 한창 때였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파리를 비롯하여 전국에 위그노 학살이 번져 갔는데, 전국에서 수만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냈다고 한다. 코리니 등 많은 지도자를 잃고 귀족층 중에서는 개종(改宗)하는 자들도 속출했으나 신교도 민중은 격렬한 저항을 전개하여 위그노 전쟁은 더욱 격화했다.

앙리 4세(헨리 4세)[편집]

-世 Henri Ⅳ (1553

1610, 재위 1589

1610)

프랑스 왕. 부르봉 왕조의 창시자. 나바라왕 부르봉가(家)의 헨리로서 위그노 전쟁 때 신교측에 서서 활약했다. 1589년 앙리 3세의 죽음에 의해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구교에 개종함과 동시에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신교도의 신교의 자유와 시민권을 인정하고 위그노 전쟁을 종결시켰다. 국내 통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슈리를 기용해 재정을 정리하고 산업을 보호하여 프랑스 절대 왕정의 기초를 이루었다.

낭트 칙령[편집]

-勅令 Edit de Nantes

위그노 전쟁을 종결하려고 1598년에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발한 칙령. 신구 양파에게 평등한 지위를 준 것은 아니며 구교의 우위(優位)하에 신교까지도 보호한다는 원리에 입각하고 있지만, 신교도는 개인으로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으며 프랑스의 종교 분쟁에 종지부가 찍혔다. 루이 14세 때인 1685년에 이 칙령은 폐지되었으며, 그 결과 상공업에 종사한 많은 위그노는 국외로 망명하여 프랑스 산업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부르봉 왕가[편집]

-王家 Bourbons

프랑스 및 에스파냐의 왕가(1589∼1883). 본래는 부르봉 공가(公家)였으나, 1589년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의 왕가가 되었다. 그 후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등의 왕이 연속적으로 배출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한때 중단되었다가, 루이 16세의 아우가 루이 18세, 샤를 10세로서 다시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르봉 왕가의 왕정이 복고되었다. 7월혁명 이후는 왕당파(정통주의자)가 이 가계의 자손을 왕위에 앉히려고 기도했으나, 실패하여 이 가계(家系)는 끝났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는 1700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하여, 그로부터 시작되는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로는, 페르난도6세,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 이사벨 2세, 알폰소 12세, 알폰소 13세가 연달아 즉위하고, 1931년의 혁명에 의하여 알폰소 13세는 퇴위했으나, 1975년 11월 20일 프랑크 총통이 사망,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카를로스가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또한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의 일족은 나폴리 왕과 양시칠리아 왕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