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삼국의 분립과 진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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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분립과 진의 통일〔槪說〕[편집]

한제국 말기에는 호족(豪族)이 차차 세력을 넓혀 황건(黃巾)의 난을 계기로 하여 드디어 3국으로 분립되고, 위(魏)·오(吳)·촉(蜀, 蜀漢)의 3왕조가 성립되었다. 위는 화북의 황하 유역에서 조조(曹操)가 둔전(屯田)이나 수리(水利) 정책을 행하여 화북을 통일했고, 그 아들 조비(曹丕)가 스스로 문제(文帝)라 칭하고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고 중앙집권적 정치를 했다. 촉은 양쯔강 상류의 청두(成都)를 중심으로 유비(劉備)가 제위(帝位)에 오르고, 오는 양쯔강 하류의 강남(江南)에 근거를 두고 손권(孫權)이 건업(建業:남경의 옛이름)에서 제위에 올랐다. 위가 가장 강했으므로 오·촉이 협력, 위에 대항하고, 촉상(蜀相) 제갈량(諸葛亮)은 수차 위를 괴롭혔으나 그의 사후 얼마 안되어 촉은 위에게 망했다.위(魏)의 제실(帝室)이 고립되어 있음을 틈타서 사마의(司馬懿)는 자기의 세력을 증대시켜 정치의 실권을 잡고 진(晉)왕조의 기초를 세우고, 손자(孫子) 사마염(司馬炎)이 제위에 앉고 무제(武帝)라 칭했다. 진은 일족을 각지에 봉(封)하여 제실을 지키게 했으나 오히려 이들은 8왕의 난을 일으켰고, 그 동안에 이민족이 흉노·갈(葛)·선비(鮮卑)·저(?)·강(羌)의 5호(胡)가 남침을 기도한데다 천재가 계속되어 큰 혼란을 가져와 결국 흉노는 진의 수도 뤄양을 빼앗았다.거기에서 사마예(司馬睿)는 남하하는 한인(漢人) 귀족과 강남 호족의 협력을 얻어서 동진(東晋)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강남(江南)의 개발은 진척되고, 황하 유역의 중원문화(中原文化)는 앙쯔강 유역으로 옮겨지고,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 등 각종 다채로운 6조 문화(六朝文化)가 전개되었다.

3국시대[편집]

三國時代

후한 멸망 후에 위·촉·오의 3국이 정립한 시대. 조조는 허(許:河南省)에서 한의 헌제를 옹호하여 원소(袁紹) 등을 쳐서 거의 화북을 통일했다.유비는 명신 제갈량의 천하 삼분(三分) 정책을 좇아 형주(荊州)에서부터 이저우(益州:四川省)를 빼앗아 청두(成都)를 근거로 삼았다. 조조의 아들 조비는 220년에 헌제에게 강압적으로 양위받아 제위에 올라 뤄양을 수도로 하고 국호를 위라고 불렀다.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이라 자칭해 왔으나, 221년 청두에서 제위에 올라 촉(국호는 漢, 그러므로 蜀漢이라 한다)이란 나라를 세웠고, 손권은 건업(建業)에서 위(魏)의 조비(文帝)로부터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222년 황무(黃武)라고 개원(改元)하였으며, 229년 오나라의 황제 자리에 올라 3국 분립의 시대가 되었다. 촉은 약 40년 만에 위에 의하여 263년에 멸망되고, 위는 265년에 진으로 바뀌고, 오는 진에 의하여 280년에 멸망했다.

동탁[편집]

董卓 (?∼192)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간쑤성(甘肅省) 린타오(臨?) 출생이다. 의협심이 강하고 완력이 뛰어나 강족(羌族)의 추장을 회유하여 세력을 길렀고,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병주목(幷州牧)이 되었다. 189년 외척 하진(何進)이 환관의 토멸을 꾀하자,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뤄양(洛陽)으로 향하였지만 하진은 환관에게 살해되었다. 비록 계획은 실패했으나, 동탁은 그대로 뤄양에 입성하여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에 원소(袁紹)를 주축으로 하는 동탁토벌군이 조직되자, 뤄양성을 소각하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 천도 후 횡포가 심해지자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모략에 의해 부장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다. 동탁이 살해된 후 장안은 부장들의 다툼으로 혼란이 거듭되자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여 조조에게 보호되었다. 이는 후에 조조가 중국 천하를 제패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손탁[편집]

公孫度

후한(後漢) 말의 무장. 자는 외제(外濟). 요동 양평(遼東襄平) 출생. 현도(玄?)의 하급관리를 거쳐 요동 태수(太守) 역임. 고구려·오환(烏丸)을 쳐서 세력을 넓힌 다음, 190년 요동군을 요서(遼西)·중료(中遼)의 2군(郡)으로 만들고 자립하여 요동후 평주목(遼東候 平州牧)이라 불렀다.

공손강[편집]

公孫康 (?∼221)

후한(後漢) 말기에서 위(魏) 초기의 장군.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었다. 207년 요동에 도망해 온 장수 원상(袁尙)을 죽여 조조(曹操)에게 바치고 양평후(襄平侯) 좌장군(左將軍)의 벼슬을 받았다. 고구려 왕 이이모(伊夷模)를 그 서울에서 격파하여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또 낙랑(樂浪)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 한(韓)·예(濊)도 정벌하였다. 그가 죽은 후 동생 공(恭)이 요동태수가 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강의 아들 연(淵)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공손연[편집]

公孫淵 (?∼238)

삼국시대의 장군. 공손강(公孫康)의 아들. 228년 숙부 공손공(公孫恭)의 자리를 뺏고 요동 태수가 되었다. 237년 위나라가 관구검(?丘儉)을 파견하여 선비(鮮卑)·오환(烏丸)을 치고 항복을 종용했으나 연(淵)은 이를 격퇴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였다. 이듬해 다시 침범한 위나라의 장군 사마의(司馬懿)에게 패하고 살해되었다. 이후 요동의 대방(帶方)·낙랑(樂浪)·현도(玄?)의 4군이 위나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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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 최후의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뤄양을 도읍으로 하고 화북을 지배한 왕조(220

265). 후한 말기에 조조는 황건 난의 평정에 참가하여 항복한 황건족을 자기의 군대로 하고, 둔전 정책(屯田政策:魏의 屯田)을 실시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켜 화북을 통일했다. 사천(四川)에는 유비가 촉나라를, 강남에는 손권이 오나라를 일으켜 중국은 셋으로 나뉘었다. 조조는 위의 왕이 되었으나 제위에 앉지 않고, 아들 조비가 제위에 올라 중앙 집권 정치를 확립, 9품관인법(九品官人法, 九品中正法)을 제정했다. 위는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멸하고, 고구려에 원정했으며, 후에 촉나라를 멸했다. 야마태국(耶馬台國)의 여왕 비칭호(卑稱呼)가 사자(使者)를 보낸 것도 이 때이다.

조조[편집]

曹操 (155

220)

위나라의 사실상의 창설자. 패국(沛國)·초(?:安徽省 毫縣) 사람, 자는 맹덕(盟德). 20세에 효렴(孝廉)에게 발탁,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騎都尉)로서 경천의 황건군을 토벌함으로써 제남상(濟南相)을 거쳐 동군 태수(東郡太守)에 오르고, 원소(遠紹)를 맹주로 하는 동탁(董卓) 토벌군에 참가, 연주에 침입한 황건군을 쳐서 그 30만(萬)을 자기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196년(건안 1)에 헌제를 받들어 허(許:河南省)에서 부근에 둔전(屯田)을 일으켜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고, 200년(건안 5)에 거의 화북을 통일했다. 강남을 정복하고 남하하여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과 208년(건안 13)에 적벽(赤壁:湖北省)에서 싸워 대패했다. 후에 위공(魏公)·위왕(魏王)의 칭호를 썼지만 제위에는 오르지 않고 수리사업을 일으켜 호조제(戶調制)·병호제(兵戶制)를 창시하고, 조비·조식(曹植) 등과 더불어 건안 문학(建安文學)의 융성을 가져왔다.

조비(위의 문제)[편집]

曹丕(魏-文帝) (187

226, 재위 220

226)위의 제1대 황제. 아버지 조조가 화북의 지배를 완성함으로써, 쉽게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뤄양을 도읍으로 하고 황초(黃初)라고 연호를 고쳤다. 조비는 아우인 조식(曹植)이 태자 행세를 하자 아우들을 쫓아버렸다. 오(吳)의 손권을 오왕에 봉하고 인질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자, 토벌군을 인솔하고 남하했으나 실패했다. 아버지 조조, 동생 조식과 더불어 문학에 뛰어나, 조비는 『전론(典論)』 5권을 저술하고, 그 중에서 “생각건대 문장은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이요, 불후의 성사(盛事)이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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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군(吳郡) 출신의 손씨(孫氏)가 건업(建業:남경의 옛이름)에 세운 왕조(220

280). 후한말에 손견(孫堅)이 나와 황건의 난을 비롯하여 강남의 소반란을 평정하여 공을 세우고, 아들 손책(孫策)은 강남을 평정하고 북상하여 허(許)를 치려다 암살되고(200), 동생 손권(孫權)이 명신 용장(名臣勇將)의 도움을 얻어 유비와 동맹하고, 208년 적벽 싸움에서 조조군을 무찔러 오나라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오는 촉의 형주(荊州)를 빼앗고 남방의 산월(山越)을 평정하여, 그 영토는 베트남 방면에 미쳤다. 유비가 제호(帝號)를 부르니 그도 오왕(吳王)이라 칭하고 황무(黃武)라고 연호를 바꾸었으며, 229년에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칭하고 강남의 개발을 도모했다. 대제가 죽은 후에 국세가 떨치지 않았다.

손권(오의 대제)[편집]

孫權(吳-大帝) (182

252, 재위 222

252)오나라의 초대 황제. 부(父)는 오군(吳郡)의 손견(孫堅), 형 손책(孫策)이 일찍 죽어 그 뒤를 이었다. 손권은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 싸움에서 남하하는 조조군을 쳐부수고 강남에 큰 세력을 폈다. 잇따라서 유비와 형주(荊州)를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나니, 손권은 위(魏)와 연합하여 형주를 점령, 3국의 영역이 거의 확립되었다. 220년, 위의 문제(文帝)로부터 오왕(吳王)에 봉함을 받고 인질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했다. 222년 우창(武昌)에서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앉고, 황무(黃武)라고 연호를 고쳤으며, 223년 유비가 죽으니 오는 촉과 더불어 위에 대항하였다. 229년에 손권은 제위에 올라 연호를 다시 황룡(黃龍)이라 고치고, 도읍을 건업(建業)에 정했다. 봉읍제(奉邑制)를 펴고, 산월(山越)을 토벌, 국력의 충실에 노력했다.

촉(촉한)[편집]

蜀(蜀漢)

전한의 경제(景帝)의 아들이며 중산정왕(中山靖王) 승(勝)의 자손인 유비(劉備)가 촉(蜀:四川省)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221

263). 유비는 형주(荊州:湖北省)를 기반으로 하여 명신 제갈량(諸葛亮)의 도움을 얻어 사천으로 쳐들어가,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을 항복시키고, 사천과 그 주변을 점령, 219년 스스로 언양에서 한중왕(漢中王)의 자리에 올랐다.그 다음해 위의 조비(曹丕)가 제위(帝位)에 오르니, 221년에 유비는 청두(成都)에서 제위에 올라 한(漢)의 국운(國運)을 계승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3국 중에 영역은 가장 좁아, 중원(中原) 회복을 국시로 하고 해마다 북벌을 감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유비가 죽은 후 유선(劉禪)은 정치적 능력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에게 정치를 위임하니, 제갈량이 죽은 다음 국위는 흔들려 위에 의하여 멸망했다.

유비[편집]

劉備(161

223, 재위 221

223)

3국의 촉(蜀:蜀漢)의 선주(先主). 탁(?:河北省) 사람. 자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제(昭烈帝). 전한의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상(中山靖王) 유승(劉勝)의 자손이라고 한다. 부(父) 유홍(劉弘)은 일찍 죽고, 신을 팔고 자리를 짜는 일을 생업으로 했는데, 같은 조상의 친족 유원기(劉元起) 등에게 도움을 받는다. 후한말 황건의 난 토벌에 참가하고, 그 후 공손찬(公孫瓚)·도겸(陶謙)·조조·원소·유표로 차례차례 주인을 바꾸다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禮)로서 제갈량을 신하로 맞아들여 수어지교(水漁之交)를 맺는다.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 싸움에서 조조를 무찔러 형주목(荊州牧)이 된다. 214년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을 청두(成都)로 침공하여 익주목이 된다. 조비가 위조(魏朝)를 세워 제위에 오르니, 221년에 청두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한(漢, 蜀漢)이라 하고,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정했다. 죽을 때 후왕의 보필을 제갈량에게 의뢰했다.

관우[편집]

關羽 (?∼219)

3국 촉나라의 무장(武將), 자는 운장(雲長)이며,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허둥(河東) 출신이다.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현(?縣)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때 조조(曹操)에게 포로가 된 뒤 예우를 받으며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함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양(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뒤,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지금의 쓰촨성) 공략 때 형주(지금의 후베이성)를 지켰으나, 조조와 손권의 협공으로 패해, 오나라의 포로가 된 후, 살해되었다. 송대 이후 군신(軍神),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으로 숭배되어 그를 모시는 관우묘(關羽廟)가 각처에 많이 건립되었다.

장비[편집]

張飛 (166∼221)

촉나라의 무장(武將). 후베이(湖北) 성에서 태어나 유비(劉備)·관우(關羽)와 더불어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유비를 평생동안 섬기면서 많은 전쟁터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힘과 용기로 용맹을 떨쳤다.뛰어난 호걸이긴 하였지만 너무 성격이 급하고 또한 술을 좋아하였다.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켜, 오(吳)나라로 쳐들어가는 길에 부하의 손에 암살되었다.

제갈량(공명)[편집]

諸葛亮(孔明) (181

234)

3국 촉나라의 명신. 낭사(琅邪)·양도(陽都:山東省 二水縣) 사람. 일찍 아버지를 잃어 형주(荊州) 양양(襄陽)에서 경작하며 타향에 유랑하는 선비들과 교제하고 와룡(臥龍)이라고 불렀다. 207년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받아 신하가 되고, 수어지교(水漁之交)를 맺는다. 조조가 형주를 점령하니 손권을 권하여 유비와 연합시켜, 조조와의 적벽(赤壁) 싸움에서 대승을 하게 하였다. 214년에 청두로 쳐들어가 유장(劉璋)을 멸하고 끝내 유비로 하여금 한중왕(漢中王)이 되도록 권했다.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니, 제갈량은 승상(丞相)·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고, 후에 사예교위(司隸校尉)를 겸한다. 유비가 죽은 후에는 그 유언을 받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정성을 다했다. 234년에 북벌군(北伐軍)을 이끌고 위의 사마의(司馬懿)와 싸우고, 웨이수이(渭水) 근처의 오장원(五丈原)에서는 둔전(屯田)을 행하는 지구전(持久戰)을 기도했으나 대진하고 있던 중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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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五胡)의 압박을 받아 강남으로 옮긴 이후를 동진(東晉, 317

420), 그 이전을 특히 서진(西晋, 265

316)이라 한다. 사마염(司馬炎)이 3국 중에 위의 양도를 받아 세운 왕조. 진조(晋朝)의 기초를 만든 것은 사마의(司馬懿)인데, 하내온(河內溫:河南省溫縣)의 명문 출신으로서 조조와 위조(魏朝)에 발탁되어 명제(明帝) 때 촉의 공격을 막고,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를 멸하여 대장군 조상(曹爽) 등의 배척을 거꾸로 물리쳐 위(魏)의 실권을 잡았다. 아들 사마사(司馬師)는 반대자를 죽이고 천자(天子)의 폐립(廢立)을 행했다.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司馬昭)는 위주(魏主) 고귀향공(高貴鄕公) 등을 죽이고 진류왕환(陳留王奐)을 옹립, 263년 촉을 멸하고 진왕(晋王)으로 봉함을 받았다. 사마소가 죽은 후 장자 사마염은 위원제(魏元帝)의 위를 물려받아 뤄양에 도읍하고 진조(晉朝)를 일으켜 무제(武帝)라 칭함을 받았다. 무제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전대(前代)에 이어 채용하여, 율령(律令)을 제정하고 여러 왕을 각지에 봉하고, 280년에는 오(吳)를 멸하여 진국을 통일하였으며, 점전(占田)·과전(課田)법을 제정했다. 제2대 혜제(惠帝) 즉위 후 가씨(賈氏)의 전횡(專橫)이 단서가 되어 8왕의 난이 일어났다.그 무렵에 흉노·갈·선비(鮮卑)·저(?)·강(羌)의 5호(胡)가 중원에 진출하여, 끝내 뤄양을 함락시켜 서진을 멸했다. 종실(宗室)의 사마예(司馬睿)는 서진의 유신(遺臣)들과 강남 호족들에게 추대받아 건강(建康)에서 즉위하고, 동진 왕조를 일으켜 원제(元帝)라 불리었다. 동진의 국가 권력은 약하여 권신(權臣)의 정권 쟁탈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사마염[편집]

司馬炎 (晋의 武帝) (236

290, 재위 265

290)서진의 제1대 황제. 조부(祖父)는 사마의(司馬懿), 부(父)는 사마소(司馬昭). 조부 이래 구축한 세력에 의하여 선양(禪讓) 방식으로 위원제(魏元帝)로부터 위(魏)를 빼앗았다. 위가 종실(宗室)을 눌러 고립된 것에 반하여 여러 왕을 각지에 봉하고, 대국왕 읍 2만호(大國王邑二萬戶), 차국왕 1만 호(次國王一萬戶), 소국왕 5천호(小國王五千戶)로서, 각각 군사 5천, 3천, 1천5백의 보유를 인정했다. 이성(異性)의 공신(功臣)으로는 공(公)·후(侯)·백(伯) ·자(子)·남(男)이 있었다.또한 즉위 초에 주군(州郡)의 장리(長吏)나, 출정하는 부곡장(副曲將)으로부터 인질을 받던 제도를 폐지, 279년에는 부곡독(副曲督)에게도 적용했다. 같은 해 3도(三道)에서 오나라를 토벌하기 위하여 사(師)를 보내고, 다음해 오제(吳帝) 손호(孫晧)를 항복시켜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다. 오나라를 평정한 후, 토지법으로서 점전(占田)·과전(課田)의 법을 정하고 세제(稅制)로서는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했다.

사마예[편집]

司馬睿 (276∼322, 재위 317∼322)

동진(東晋)의 제1대 황제. 8왕의 난이 계속된 서진의 서울 뤄양(洛陽)을 빠져나와 산둥(山東)으로 옮겼다. 서진이 흉노족에게 멸망당하자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을 일으켰다.

위의 둔전[편집]

魏-屯田

한대(漢代)에는 군둔(軍屯)이 행해졌는데, 위는 민둔(民屯)을 실시, 재정상 대단히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말(漢末) 196년 조조는 군량(軍糧) 조달을 목적으로, 백성을 모집하고 허(許:河南省許昌縣)에 둔전을 경영하여 곡물 100만 곡(斛)을 수확했다. 그 후 주군(州郡)에 전관(田官)을 두어 둔전(屯田)을 경영했는데, 전관은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전농교위(典農校尉)·전농도위(典農都尉) 등이며, 현관(縣官)이란 다른 계통으로서 사농경(司農卿)에 속했다. 둔전민(屯田民)은 전농부민(典農部民) 혹은 둔전객(屯田客)이라 하고, 그 외에 오(吳)·촉(蜀)과의 국경에는 군둔(軍屯)을 두어, 탁지(度支)나 도독(都督)의 관리를 받게 했다.위의 재정은 전적으로 둔전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일반 농민에 대한 토지세, 즉 전조(田租)는 한대(漢代)에 비해 대폭적으로 그 세율이 인하되었다. 그런데 국가의 재정을 오로지 둔전에만 의존한다는 정책은 통일 왕조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위로부터 진으로서의 선양 혁명을 끝내고 전국 통일을 완수한 서진(西晋)의 무제가 직면한 것은, 둔전법과 이에 관련된 세제(稅制)의 개정 문제였다. 이에 무제는 호조식(戶調式)이라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발포하고 점전법(占田法)과 과전법(課田法)을 결정했다. 이것은 위의 둔전법을 계승한 것으로서 북위(北魏)의 균전제(均田制)로 이어지게 된다.

점전·과전법[편집]

占田·課田法

진(晋)의 무제(武帝)가 오(吳)를 멸하고 중국 본토를 통일한 직후 280년에 세상에 공포한 토지 제도인데, 조문이 간략하기 때문에 그 해석에 여러 설이 있다. 『진서식화지(晋書食貨志)』에 의하면 한 쌍의 부부(夫婦)에게 100묘(畝)의 점전(占田), 즉 점유를 인정한 것이다. 정남(丁男)에게는 과전(課田)이라 하여 50묘, 정녀(丁女)에게는 20묘, 차정남(次丁男)에게는 25묘를 할당했다. 그리하여 과전은 이제까지 둔전 경작자로서 새로 일반 서민의 호(戶)에 편입된 자를 대상으로 했다는 설이 있다. 또 지위가 있는 자에게는 제1품(品) 50경(頃)(1頃은 100畝)을, 이하는 5경씩 적게 하여 제9품은 10경의 논을 점유함을 인정했다. 이에 대하여 호조(戶調)라고 하여 정남이 호주인 집에는 한 해에 비단 3필·솜 3근을 바치게 하고, 그 외에 전조(田租)는 묘마다 4되를 할당하고, 남자에게 역역(力役)이 부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