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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의 문화〔槪說〕
[편집]한나라 문화의 특색은 중국 고래의 문화를 고정화(固定化)하고 후세의 기준을 만든 점에 있다. 사상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에 지나지 않던 유가(儒家)의 사상, 즉 유교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의견에 의하여 국교화(國敎化)된 것이며, 이후 유교는 지배계급과 관계를 맺고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서 발달했다. 그 동안 신비적인 예언을 하는 참위사상(讒緯思想)이 전한말경부터 후한에 걸쳐 유행하고, 불교 또한 기원을 전후하여 전래되어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학문의 중심을 이룬 것은 유학(儒學)인데, 경전(經典)에 주석을 다는 훈고학(訓誥學)이 성행, 후한의 마융(馬融)·정현(鄭玄)은 그것에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학이 점차적으로 독립된 학문으로서 성장하고, 전한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후한에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가 나타나, 후에 역사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 문학에서는 『초사(楚辭)』의 계통을 이은 부(賦)라고 하는 서사시가 유행하고 전한의 사마상여(司馬相如)·양웅(揚雄)은 그 대표적 시인이었다.미술과 공예로는 견직물·칠기·동경(銅鏡) 등에 현저한 진보가 보이고 조각·회화·서예도 크게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비단은 ‘실크로드(비단길)’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서방 여러 나라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또한 후한 중기의 환관(宦官) 채윤(蔡倫)에 의한 제지법의 발명은 세계 문화 발달상 큰 공적을 남겼다.
사마천의 『사기』
[편집]司馬遷-『史記』
중국 최초의 통사(通史). 태고부터 전한의 무제까지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전 130권. 그 내용은 본기(本紀:황제의 연대기) 12권, 표(表:年表) 10권, 서(書:文物制度史) 8권, 세가(世家:諸侯의 가문의 역사) 30권. 열전(列傳:중요 인물의 傳記) 70권으로 되어 있다. 서술 형식은 기전체(紀傳體)라고 불리며, 후세 정사(正史)의 규범이 되었다. 사서(史書)로서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높다.
반고의 『한서』
[편집]班固-『漢書』
전한 1대(전 206
후 24)의 역사서. 『전한서』라고도 한다. 전 100권.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으로 쓰여져, 제기(帝紀) 12권, 연표 8권, 지(志) 1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되어 있다. 재료가 풍부하고 사실(史實)의 정확함이 특색이다. 『사기』와 함께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기전체
[편집]紀傳體
중국 역사서술 형식의 하나로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되었으며, 편년체에 상대되는 형식이다. 본기(本紀)·열전(列傳)·표(表)·지(志) 등으로 구성하여 서술하는 형식으로 본기·열전의 이름을 따 기전체라고 하였다. 본기는 왕의 전기(傳記)와 국가의 대사(大事)를 왕의 재위 연월(年月)에 따라 기술한 것이며, 열전은 신하들의 전기 및 외국의 여러 가지 일들을 열거한 것이다. 표는 세계표·연표·인명표 등으로 나뉘고, 지는 본기·열전에 포함되지 않은 관직·문물·경제·지리·자연현상 등을 내용별로 나눈 것이다. 이 형식은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의 창의에 의한 것으로 그의 저술 『사기(史記)』에 있어서 본기(오제(五帝)로부터 무제(武帝)까지의 제왕의 흥망을 편년체로 기술)와 열전 외에 표(表:연표)·서(書:문화 기술사)·세가(世家:제후의 역사)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그가 열전이란 체제를 고안한 것은 이 때부터 개인의 능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형식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의하여 이어져 가장 유력한 역사 서술의 형식이 되었다. 이 기전체로 씌어진 권위 있는 역사서를 남북조 때쯤부터 정사(正史)라고 부르게 되었다.기전체는 한 왕조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신하들의 전기와 통치제도 문물·경제·상황·자연현상 등을 분류, 서술하여 왕조 전체의 체제를 이해하기 편한 역사서술로 정사체제를 파악하기에는 긴요한 자료가 되지만, 총체적 역사의 이해에는 불편한 점도 있다.
정현의 훈고학
[편집]鄭玄-訓?學
유교 경전의 자의(字義)를 해석하는 학문으로, 정현은 대표적 학자. 한대(漢代)에는 금문파(今文派:漢代의 문자로 쓰여진 경전을 텍스트로 한다)와 고문파(古文派:漢代 이전의 옛 자체(字體)로 쓰여진 경전을 텍스트로 한다)의 두 학파가 경전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 논쟁했는데, 그 논의(論議)를 통하여 훈고학은 발달했다. 정현은 고문파(古文派)에 속하면서도 금문파의 학설을 받아들여 논어(論語)를 비롯하여 많은 경전에 주석(註釋)을 달았다. 그의 주석은 후세까지 경전 연구상의 기초가 되었다.
종이의 발명
[편집]-發明
105년, 후반의 환관 채륜이 나무껍질·삼·누더기천을 원료로 하여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종래 쓰이던 목간(木簡)·대나무조각·견포(絹布) 등에 비하면 비용이 적고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하여, 차차 개량 보급되어 4세기경에는 종이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이 제지법은 당대(唐代)에 사라센에 전해져 아라비아, 이집트를 거쳐 유럽 여러 나라에 퍼졌다.
불교의 전래
[편집]佛敎-傳來
불교가 중국에 처음으로 전해지던 시기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기원 전후경이라 말한다. 일반적으로 후한의 명제(재위 57
75)가 꿈에 금으로 된 사람을 보고 서방에 성인(聖人)이 있음을 알고, 채암 등을 파견하여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전하여지지만, 이 전설은 오늘날에는 사실(史實)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명제 시대에 이미 황족 중의 일부에 신앙자가 있었다는 확증이 있음과, 전한의 애제(哀帝)의 원수(元壽) 1년(전 2) 대월지 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이 경로(景盧)에게 불교를 직접 말로 전해 주었다고 하는,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 있음으로 인해서, 기원 전후경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대(漢代)에는 정통 사상인 유교의 그늘에 가려서 발전되지 못하였으나 이윽고 후한말에 이르러 서역(西域) 출신 중(僧)에 의한 불전(佛典)의 번역이 행하여지게 되었다.
노인 울라의 유적
[편집]-遺跡
기원전후쯤의 흉노(匈奴) 왕족의 분묘 유적. 몽골의 북부, 하라강(江) 부근의 노인 울라산(山) 속에 있다. 1924년 러시아의 카즈로프 탐험대에 의하여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212기(基)의 고분(古墳)이 발견되었다. 지표 밑 10
14m에 구축된 장방형의 목조 묘실에는 나무관과 함께 화려한 견직물·양모포를 비롯하여, 복식(服飾)·가구·거마구(車馬具)·무기 등 다종다양의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이 출토품에는 스키타이풍(風)의 흉노 자신의 작품 외에 한(漢)이나 서역(西域) 제품이 풍부하게 섞여 있어 흉노 문화뿐 아니라 한대(漢代) 문화나 동서 문화의 교섭사 연구에도 중요한 유적이다.
실크로드(비단길)
[편집]아시아 대륙을 횡단하였던 고대의 교통로로, 중국의 주요한 교역품인 비단이 이 길을 통하여 서방 세계에 전해진 사실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서의 무역, 문화 교류의 통로로서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이룩했다. 중국의 서북단에 위치한 둔황(敦煌)에서부터 톈산 산맥의 남쪽 타림 분지(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또는 남쪽에 점재(點在)하는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통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남쪽·북쪽의 두 길을 합하여 톈산 남로라 하고, 후에 톈산 산맥의 북쪽 기슭의 통로가 열려 이것을 톈산 북로라 했다). 서(西)투르키스탄에서 인도, 또는 이란, 시리아 방면에 달했다. 이 통로가 기원전 2000년 이전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은 서아시아의 채도(彩陶)나, 타림 분지 남쪽의 우전(于?)에서 나는 옥그릇의 분포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중국과 서역(중국인이 서방 여러 나라를 총칭한 명칭) 등이 실크로드에 의하여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 후반, 전한의 무제가 사자(使者) 장건(張騫)을 대월지국(大月氏國)에 파견하여, 서역과의 교섭을 시작한 때이다. 실크로드를 지배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이후 통상권을 둘러싸고 중국의 각 왕조, 북방의 유목 제민족, 남방의 인도, 서방 여러 나라 사이에 여러 차례 쟁탈전이 되풀이되었다. 동쪽의 중국에서는 서방으로 비단이, 서방에서는 중국으로 아라비아 말(馬)·포도 등의 물자가 운반된 외에, 불교·이슬람교 등도 주로 이를 통하여 동방에 전해졌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해상 교통로의 발전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경략(經略)의 진척에 따라서 실크로드는 점차 쇠퇴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