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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페르시아 제국의 오리엔트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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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의 오리엔트 통일〔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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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멸망(전 712) 후 4강대국이 분립 상태를 계속해 왔던 오리엔트 세계에 또다시 통일을 가져온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기원전 553년이란 고원의 파르사 지방에서 군병을 일으킨 키루스 2세는 메디아(전 550), 리디아(전547), 신바빌로니아(전539)의 3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속해서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전 525)를 병합하여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완성시켰다. 페르시아의 정복이 극히 짧은 기간에 더구나 매우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페르시아의 우수한 군사력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그 외에도 그들의 교묘한 외교나 피압박민에 대한 관대한 정책, 그리고 오리엔트 강대국 내부의 지배 계급간 대립 등도 그 요인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캄비세스의 죽음으로부터 다리우스 1세(다레이오스 1세)의 초두까지 제국(帝國)에 분열과 혼란이 일어났지만, 다리우스 1세는 이를 잘 진압하여 통일을 회복했다. 그는 제국의 재조직에 착수하여 그 후 약 2세기에 걸치는 제국 지배의 기초를 쌓았다. 그의 시대에 제국 영토는 최대에 달했으며, 동쪽은 중앙아시아, 인더스강 유역에서부터 서쪽은 마케도니아,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렀다.그러나 이와 같이 광대한 영역을 언제까지나 통일해서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페르시아 전쟁 중에 이집트와 바빌론은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이집트는 그 후도 때때로 페르시아에 반항하여 일시적으로 독립을 실현했다. 아르탁세륵세스 2세(Artaxerxes Ⅱ, 재위 전 404

전 359) 시대는 왕제(王弟) 키루스와의 다툼, 이어서 사트라프의 대반란이 일어나 서쪽 여러 주의 분리 경향이 현저해졌다. 그 후에도 사트라프의 반란은 그치지 않고, 또 궁정 음모 때문에 정치는 문란해지고, 다리우스 3세(재위 전 336

전 330) 때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 그리스군에 패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페르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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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Persians

아리아 민족 중 이란계이다. 기원전 1000년경 동족인 메디아인과 함께 이란 고원에 이주, 메디아인이 고원의 서북부에 분포된 것에 대하여 페르시아인은 서남부의 파르사 지방(현재의 파르스주)에 정착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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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한 왕조. 페르시아인의 족장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자손인 키루스 2세가 제국을 창건. 제2대 캄비세스의 사후(死後) 왕통은 방계의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 3세의 죽음으로 단절되기까지 11대 약 230년간 계속되었다. 아케메네스 미술은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의 재통일 과정에서 바빌로니아·이집트·그리스미술 등의 다양한 요소를 통합 발전시켜 세계성이 풍부하게 되었고, 장식이 호화롭고 웅장하여 품위 있는 독자적 미술을 탄생시켰다. 이런 특색은 페르세폴리스·수사 등지의 궁전건축과 벽면조각 등에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유물로는 날개달린 사자상의 각배(角杯),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금주발, 술잔, 동물머리모양 손잡이의 칼 등 많은 공예품이 출토되었고, 유리 공기와 상감(象嵌)을 한 유리구슬 등도 발견되었다.

키루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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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Kyrus Ⅱ (전 600?

전 529, 재위 전 559

전 530)

페르시아 제국의 창립자. 대왕이라고 불린다. 기원전 553년,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예속하에 있던 페르시아인을 규합해서, 해방 전쟁을 일으켜 3년 후 메디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계속해서 소아시아에 군대를 진군시켜, 기원전 547년 리디아 왕국을 정복했다. 기원전 539년에는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강국 신바빌로니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수도 바빌론을 함락시켰다. 그는 거기에서 바빌론의 신관(神官)으로부터 세계 지배자의 칭호 ‘사계(四界)의 왕’을 얻고, 또 포로인 유대인을 해방시켜 ‘신의 목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마사게타인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기원전 530년 동방 변경에서 전사했다. 그는 피압박민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써서 페르시아인으로부터 ‘아버지’, 또한 그리스인으로부터 이상적인 왕자(王者)로 간주되었다.

다리우스 1세(다레이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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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Darius Ⅰ(전 558?

전 486, 재위 전 521

전 486)

페르시아 제국 제3대 왕. 아케메네스가(家)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지만, 기원전 522년 마고스 중(僧) 가우마타가 왕위를 빼앗고 캄비세스가 죽자, 6명의 귀족과 함께 찬탈자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 직후 일어난 제국 각지의 반란을 1년 동안에 평정하고, 계속 주변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완성했다. 그는 페르세폴리스에 왕궁을 건설하고,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제국을 20여 주로 나누어 사트라프를 파견하여 각 주의 부담액을 정하여 재정을 정돈했다. 또 ‘왕(王)의 도(道)’와 나일·홍해간의 운하를 개설하는 등 교통 정비에 마음을 썼다. 이와 같이 제국 지배 조직의 확립에 노력하는 한편, 흑해 북안의 유목민 스키타이인(人)의 토벌과 그리스 본토에 원정을 했지만 어느 것이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스에 파견한 군대가 마라톤에서 패하자,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는 그 진압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베히스툰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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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文

다리우스 1세가 베히스툰(정확히는 Behistun:하마단 서쪽 약 105㎞ 거리의 자그로스 산 속에 있다)의 깎은 벼랑에 새긴 비문. 그가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도움에 의해 즉위하고, 또 즉위 후의 반란을 진압하여 제국의 질서를 회복한 사정이 고대 페르시아어 아람어(Aram語) 바빌로니아에 의해 씌어 있다. 고대 페르시아어 부문은 영국인 로린슨에 의해 해독(1846

1851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설형문자 해독사상 획기적이며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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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Xerxes Ⅰ(전 519?∼전 465, 재위 전 486∼전 465)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장남은 아니었으나 부왕의 명으로 왕이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 제10대왕. 이집트·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부왕의 뜻을 받들어 육로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 본토 원정을 준비했다(제3차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80년 봄 육해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살라미스해협에서 패배하여 페르시아전쟁은 그리스의 전면승리로 막을 내렸다. 귀국후 궁전 등의 축조에 힘을 기울여 다리우스 1세 때 미완성된 수사(Susa)와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완성하였다. 패배 후 몇 차례의 전투에 역시 패하였으나 국위는 여전히 융성기였다. 그러나, 만년에 궁정생활이 사치에 젖어 신하들의 잦은 음모가 끊이지 않다가 하렘의 음모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암살당했다.

다리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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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Darius Ⅲ(?∼전 330, 재위 전 336∼전 330)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가(家) 최후의 왕. 다리우스 2세의 증손자로 카스피해 남안의 카두시아인을 정벌한 공으로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계속된 궁정의 음모와 암투속에서 전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그의 아들을 죽인 환관 바고아스가 세력을 잡게 되자 왕조의 친족인 다리우스를 선택하여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다리우스와 바고아스는 서로 대립하여 결국 다리우스가 바고아스를 타도하고 궁정정치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 시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제국에 침입하여 다리우스 3세는 이에 대항했으나,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패주한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던 중 그를 수행하던 베수스 등 페르시아 귀족에 의해 암살당했다.

페르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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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epolis

페르시아의 수도. 행정상의 수도는 수사에 두었지만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자, 바로 고국 파르사의 페르세폴리스에 왕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건설 사업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에까지 계속되었다. 길이 455m, 폭 300m의 대기단(大基壇) 위에 알현전(謁見殿:아파다나) 외에 각 왕의 궁전·후궁·보고(寶庫)가 줄지어 서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조각·장식·공예는 고대예술의 요소를 내포하여 당시의 오리엔트 건축미술을 집대성했다.알현전은 72개의 대원주로 받쳐져 있고 주두(柱頭)는 황소와 뿔난 사자 머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제국 지배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신년제가 집행되었고, 그 계단 측벽에는 신년제에 참가한 중앙아시아·인더스 지방에서 이집트·에디오피아에 이르는 전세계의 주요 피정복민족의 조공행렬도가 부각(浮刻)되어 있다. 이 유적은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때(기원전 330년) 소실되었는데, 알렉산더 군대는 이곳에서 수많은 재화와 보물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군의 보복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 거대한 기둥이 남아 있는 이 유적을 이슬람시대의 사료(史料)에서는 천의 기둥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930년대 이후 발굴이 계속되었고, 1960년대부터 유적 수복과 보존 작업을 하였다.

사트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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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rap

페르시아 제국 주(州) 총독의 칭호. 나라를 주(州)로 분할하고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방법은 벌써 우라르투나 아시리아에서도 실시되었다. 페르시아 제도도 메디아를 통하여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사트라프의 파견은 키루스 2세 시대부터 행하여지고 있었지만 이 제도를 완성시킨 것은 다리우스 1세였다. 그는 제국에 20여 주(州)를 두고 사트라프를 임명하고 주의 행정·사법·군사·조세의 징수를 관장시켰다. 그리고 사트라프를 감독하기 위해 ‘왕의 눈’ 등의 순찰관을 두었다.

왕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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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道

소아시아의 살디스와 제국 행정의 수도 수사를 연결하는 주요 간선도로. 그 사이에 111개의 숙소가 있고 역전제(驛傳制)가 설치되어 있었다. 군사적·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상업상으로도 극히 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