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문명의 형성/그리스인의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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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의 이주〔槪說〕[편집]

카스피해(海) 북동방(A. Nehring 설)의 옛땅에서, 기원전 3000년 후반에는, 이미 동·서 양 방향으로 나뉘었다고 생각되는 인도·유럽어족의 한파(一派)가 발칸 반도에 모습을 보인 것은 기원전 2000년경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발칸 반도를 남하하여, 이후 약 800년에 걸쳐, 계속 또는 간헐적(間歇的)으로 그리스 본토로 들어온다. 이것을 흔히, 후의 게르만인 이동에 비추어서 ‘그리스인의 민족 이동’이라고도 한다. 그 제1차가 그리스인의 한 그룹, 아카이아(Achaia)인이다.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고 얼마 안 가서 미노아 문명의 세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미궁’의 신화가 보여주듯, 미노아 왕국의 세력하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계속 그 수를 더하여 오는 아카이아인(人)에 의하여, 얼마 후에는 미노아 왕국과의 세력 관계가 역전된다. 급속도로 쇠퇴해 가는 미노아 왕국, 유명한 지중해 대지진――그 파괴의 흔적은 멀리 시리아 해안 페니키아의 도시 우가리트(현재의 이름은 라스 샴라)에서도 확인된다――이 그 괴멸(壞滅)에 박차를 가하였다. 기원전 1400년경, 끝내는 크노소스가 멸망되고, 여기에서 미노아 문명은 끝난 것이다. 이리하여 이번에는, 아카이아인이 에게해(海)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노아 문명의 잔영(殘影) 밑에, 이 아카이아인이 창조한 문명의 한 시기가 미케네 문명이다.‘민족 이동’의 제2차를 담당하는 것은 그리스인 가운데 이오니아인(Ionians)과 아이올리스인(Aeolis, 그리스어의 동방어군)이었다. 그리고, 최후로 제3차인 도리아인(Dorians)들이 이 소세계(小世界:Micro Cosmos)에 들어오면서(전 1200?)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어쨌든 미케네 문명은 그들에 의하여 멸망하고 붕괴되는 것이다(전 1200?).

미케네 문명[편집]

-文明 Mycenean civilization

그리스 본토의 중·남부――미케네, 아르고스, 티린스, 필로스 등――를 중심으로 하고 외곽으로는 멀리 크레타·트로이(소아시아)에까지 다다랐다. 이것도 청동기 문명이다. 유적은 견고한 방색구축(防塞構築), 중후한 메가론(Megaron)식 성관(盛觀), 트로스 분묘, 난로가 있는 북방적인 주거의 유적 등이 특색으로서 미노아 문명의 그것과는 아주 양식이 다르다. 예술적 기조는 딱딱하고 둔탁해서 결코 세련됐다고는 할 수 없다. 출토되는 문서는 모두 왕실 경제를 위한 주민들의 동원과 방비의 배당 등을 기록한 것뿐으로, 유치하면서도 관료제를 갖춘 작은 왕국의 역무국가(役務國家)적인 성격을 상상할 수 있다. 미케네, 아르고스, 필로스 등의 하나하나가 이러한 내용의 작은 성채(城砦) 왕국이었으며, 그래서 이들 작은 왕국군(群)은 미케네 왕국을 중심으로 완만하게 연합하여, 미케네 문명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문제는 최초의 그리스 사회가 실은 이와 같이 오리엔트적 형태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과 같이, 후의 그리스 사회가 어찌하여 이러한 전통에서 완전히 단절되어――한편, 예를 들어 항아리의 기하학적 무늬와 같은 예술면에 있어서는 단절이라고는 할 수 없다――주지하는 바 그리스의 독특한 사회를 낳는 경향으로 변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 문제로서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있다고 생각된다.

발견과 독해[편집]

發見-讀解

19세기 후반, 그 때까지 가공적 전설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던 호메로스의 고시(古詩)――에 심취된 상인 출신인 무명의 독일인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

1890)이 전설의 트로이, 미케네, 오르코메노스(Orcho­menos)를 3000년 전의 땅 속에서 발굴하여 세계의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겨우 7세 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림책 속에서 트로이가 낙성(落城)하는 삽화에 감격하여 언젠가는 트로이를 찾으러 가고자 하던 어릴 때의 결심과 꿈을 평생 잊지 않다가 결국 성취한 것이다. 동행을 약속한 어린 연인과의 실연, 주위 사람들의 조소, 생활과의 싸움, 그리스어 습득을 위한 비상한 노력――미케네 문명의 기록은 이 로맨티스트와 함께 시작한다. 발굴의 성공에 못지않게 독해의 성공도 극적이었다. 영국인 마이클 벤트리스(1956 죽음)는 원래는 건축 기사였는데, 그도 겨우 14세 소년의 몸으로 가끔 들어 온 신비한 문자의 강연(에번스 경, Evans Arthur, 1851

1941)에 매혹되어 이후 수수께끼 풀기에 열중, 병역 중에 깨우친 암호 해독의 기술을 응용하여, 드디어 약관 31세의 젊은 나이에 미케네 문자(線狀B문자) 독해의 위업을 이룩한 것이다. 슐리만에 대해서는, 고고학의 기본적 지식이 없던 그의 발굴이 실은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남굴(濫掘)이었다는 비판도 있는데, 아무튼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미케네 문명사의 학문상 불멸의 금자탑으로서 특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설의 트로이 전쟁[편집]

傳說-戰爭

슐리만을 매혹한 트로이 전쟁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그가 찾아낸 제2층 트로이시(市)는 사실은 오류였었던 것으로 전설의 트로이는 그보다 훨씬 깊은 제7층이었다. ‘전쟁’을 전혀 부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민족 이동기에 있어서 아카이아인끼리의 충돌·투쟁’, ‘미케네 왕권의 독점 무역의 폭력적 진출’ 등 갖가지 해석이 시도되어, 오늘날에는 계통을 잇는 배후에 사실(史實)의 반영을 보고자 하는 자세를 취하는 측이 유력하다. 최근에는 히타이트 문서――아카이아라 생각되는 ‘앗햐와국(國)’과의 교섭이 자주 나온다――를 원용(援用)하여 이들의 관계를 추구하려 하는 새로운 전망도 전개되었다. 어느 쪽이든 한 번만의 전쟁은 아니고 만성적인 투쟁의 반복이 있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전승(傳承)의 ‘10년간’이란 오랜 기한 속에 투영(投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