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문명의 형성/은의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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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사회와 문화〔槪說〕[편집]

선사시대의 농민 중에도 점차 생산력의 지방적·개인적인 불균형한 발전에 따라, 씨족을 결합하는 부족이 생기고 다시 부족을 연합하는 연합 국가가 성립한다. 은대(殷代)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村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租稅)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家內奴隸)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지(耕地)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삼황오제(三皇五帝)라고 하는 왕의 시대가 지난 후, 우(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하여 하(夏)왕조를 열고, 하(夏)나라 최후의 폭군 걸왕(桀王)을 멸한 탕(湯)왕은 은 왕조를 열었다.은나라 최후의 폭군 주(紂)왕을 멸한 무(武)왕은 주(周)왕조를 열었다. 이 하·은·주를 3대(代)라고 부르고 있다. 이 중에서 역사적으로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은왕조부터이다. 이 은왕조의 도시 유적이 은허(殷墟)이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하 왕조[편집]

夏王朝

중국 전설상의 왕조명.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요제(堯帝)의 말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가 치수 사업에 성공했다. 그 공으로 순제(舜帝)가 죽은 후, 제후(諸侯)들이 받들어 왕위에 오르고 하 왕조를 열어 이후 17대에 이어졌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도하려 했으나, 제후들이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여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왕조가 출현했다. 17대의 걸(桀)왕 때에는 정치가 포악해지고 민심을 잃어 은나라의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하(夏)의 소재지를 산시(山西)·산둥·허난 등으로 추측하는 학설이 있으나, 전설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확증은 하나도 없다.

은 왕조[편집]

殷王朝

중국 최초의 왕조명. 은이란 주 왕조가 이름 붙인 나라 이름인데, 은 왕조 스스로는 상(商)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 후반기의 수도인 은허도 상읍(商邑)이라 불러 도시명을 국명으로 쓰고 있었다.『사기(史記)』에 의하면 은나라는 오제의 한 사람인 곡(?)의 아들 계(契)를 시조로 하고 있다.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 : 天乙)은 백성들의 요망에 따라 폭군 걸왕을 무찔러 은왕조를 창설하였다. 19세기 말에는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 대(漢代)의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탕(湯)왕부터 세어서 19대가 되는 반경(盤庚)은 허난성 안양현(安陽縣)의 은허 땅에 도읍을 옮기고 30대 폭군인 신(辛, 주의 이름) 때에, 서방의 주(周)의 무왕에게 멸망되었다고 한다.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神權政治)로서 제사·정벌(征伐)·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精巧)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

삼황오제[편집]

三皇五帝

전설상의 성왕(聖王)의 총칭. 3황은 수인씨(燧人氏)·포희씨(?犧氏)·신농씨(神農氏), 또는 복희씨(伏羲氏)·여와씨(女禍氏). 복희는 역(易)을 만들고, 여와는 인류(人類)를 출생시켰고, 신농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제는 소호(少昊)·전욱(?頊)·곡(?)·요(堯)·순(舜), 사기(史記)에는 소호 대신에 황제(黃帝)로 되어 있다.

왕과 백[편집]

王-伯

고대의 도시국가나 그 연합 국가의 수장(首長)을 말한다. 동일 제사 군사 공동체가 되는 대촌락(도시국가·읍)의 수장을 백(伯)이라 부른다. 몇 개의 도시국가는 연합하여 유력한 백을 추대했는데, 이것은 방백(方伯)이라 불렀다. 은은 이들 방백을 종속시켜서 왕이 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이들 도시국가를 직접 통치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국가 연맹의 맹주, 방백의 두목으로서 화베이(華北)에 군림하였다.이와 같은 읍(邑)을 사회의 단위로 한 은 왕조의 국가 구조를 읍제국가(邑制國家)라고도 하며 주나라의 중국적 봉건제도의 원형이 되었다.

은허[편집]

殷墟

허난성 안양현 북서 일대의 은 왕조 후기 수도의 유적. 1899년 이 곳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중앙 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는,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5회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량의 갑골, 십수 좌(座)의 큰 묘, 1000좌에 달하는 작은 묘, 은나라의 궁전 주거가 발견되어 이 땅이 반경(盤庚) 이후의 은나라 수도였음이 확인되었다.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올린 궁전초석과 토단 주위에 수혈식(竪穴式)으로 된 거주유적이 있는데, 제왕(帝王)·왕족의 주거는 지상에 있고, 백성은 지하식인 수혈에 있다. 외곽에는 도기(陶器)·골기(骨器) 등을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지가 많이 발견되었다.큰 묘는 네모꼴이거나 아형(亞形)이며, 중앙의 관을 둘러싼 부장품으로는 청동의 용기, 무기, 악기, 옥으로 만든 장신구 등이 놓여 있다. 이들은 세계 청동기문화의 제1급 작품이다. 또한 집단 순장(殉葬)의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은나라 시대는 노예제 사회였다고 생각된다.

갑골문자[편집]

甲骨文字

은허에서 출토된 귀갑(龜甲)·우골(牛骨)에 새겨져 있는 상형문자(象形文字)로서 한자(漢字)의 원형이다. 이것은 점치는 데에 사용되었으므로 복사(卜辭)라고도 하는데, 반경(盤庚)부터 주왕(紂王)까지의 12왕, 273년 동안에 제작되었다. 귀갑이나 짐승의 뼈를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 시대부터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은나라뿐이다. 현재 알려진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순수한 그림문자보다는 진보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밝혀진 내용은 제사·풍우·전렵(田獵)·농경·군사·사명(使命)·질병·복점 등으로 이후 은나라의 제사·정치·사회·경제 등의 연구가 행해졌고, 전설로만 전해졌던 은나라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왕조임이 밝혀졌다.

점복[편집]

占卜

은나라 때에는 거북점(龜卜)이 행해졌다. 거북등의 껍데기나 짐승의 뼈를 불에 쬐어 그 균열되는 방향에 의하여 복사(卜辭)는 길흉을 판단, 갑골에 그 결과를 새겼다. 복사의 내용은 제사·정벌(征伐)·수렵 등 여러 가지인데 왕은 제사장으로서 신의 뜻을 물어, 신권정치(神權政治)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