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제2기 문명/유럽의 철기문화와 로마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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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철기문화와 로마의 기원〔槪說〕[편집]

기원전 1000년대에 유럽은 철기시대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무기, 나중에는 농기구 종류가 철로 만들어졌다. 제철 기술은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사회의 문화를 크게 진보시켰다.유럽에서 가장 오랜 철기문화는, 다음에 기술하는 할시타트 문화인데 로마의 옛유적에서 그 영향이 확인된다고 한다.

할시타트 문화[편집]

-文化

초기의 철기문화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남유럽에 퍼져 있었다. 고온(高溫)으로 대량의 광석을 용해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단철(鍛鐵)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칼·도끼 등은 철제였으나 투구 같은 주조물은 청동제였다. 쟁기가 이용되고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어, 사회 분화가 이루어져 갔다. 발칸 반도의 일리리아계(系) 취락(聚落) 유적은 출토품이 드문 촌락과, 유적이 풍부한 고지(高地)의 성채(城砦)로 되었고, 특권적 귀족의 형성을 생각하게 한다. 광물 자원이 풍부한 이베리아에서는 반(半)은 전설적인 타르테스국(國)이 번영했다.

로마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편집]

-以前-半島

남북으로 가느다랗고 길게 뻗어 있는 이탈리아 반도는, 등뼈처럼 생긴 아펜니노 산맥에 의해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된다. 한편 알프스 쪽에 기울어진 북부와, 장화(長靴) 발목에서 앞쪽인 남부는 독립하여 전체적으로 합치기 어려운 지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이 길기 때문에 외래 문화가 들어오기 쉽고 험준한 알프스도, 문화 보급이라는 점에서는 결정적 중대한 장벽은 아니었다. 이런 뜻에서 이탈리아에는 옛날부터 갖가지 지방 문화가 발생하였다. 이탈리아 반도에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인류(그리말디인·크로마뇽인)가 살고 있어 신석기시대의 유적도 있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에 직접 관계되는 것은 청동기시대(전 3000년경), 특히 철기시대(전 1000년 이후)이다. 각기 테라마레 문화·빌라노바 문화가 대표적이지만, 그것을 걸머진 사람들은 북쪽에서 이주해 온 인도·유럽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기원전 8세기에는 서해안의 라티움, 캄파니아에 라틴인·팔리스키인, 아펜니노 산지(山地)에 삼니움인·움부리아인, 동해안에 일리리아계의 사람들이 정착해 있었다. 또 남이탈리아에는 그리스인의 식민지가 세워지고, 로마의 북쪽에는 수수께끼 민족 에트루리아인(人)이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에트루리아인[편집]

-人 Etrurians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많은 문화 가운데, 볼로냐 근교 빌라노바에 있는 작은 공동 묘지의 이름을 딴 빌라노바 문화가 중부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 이 문화의 특징은, 부장품(副葬品)이 풍부한 무덤과 복원추형(複圓錐形)으로 된 전형적인 골호(骨壺)가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트루리아 문화의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일반적으로 에트루리아 지역에 있는 빌라노바 문화에 속한 모든 대규모 공동 묘지는, 에트루리아 고전기(古典期)의 주거 중심지와 일치하고 있다.소아시아에서의 이주자 또는 이탈리아의 주민이라고도 하는 에트루리아인은 엘바섬(島)의 철을 개발하여 번영했다. 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그리스 문화를 배우고, 문자·미술을 이탈리아에 전했다. 에트루리아인은 타르퀴니아, 쿠르슘 등 12개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완만한 연합체를 만들었는데, 이윽고 북쪽 포강(江) 유역과 남쪽의 캄파티아에 진출했다. 그러나 기원전 6, 5세기에 왕정에서 귀족정으로서의 전환이 생겨났고, 또 포강 방면에 켈트인이 이주하고, 캄파니아에서 그리스 세력의 반격으로 쇠퇴해 버렸다.

로마의 왕정[편집]

-王政

빌라노바 에트루리아인 남쪽에는 농업과 양치기를 주로 하는 라틴인이 정착했는데, 아마도 그들의 기원은 리나르도네의 금석 병용기 문화를 전파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라틴인의 풍속 가운데 화장과 토장(土葬)이란 이질적인 매장 의식에서 알 수 있듯이, 라틴인들은 몇 세기 동안 다른 인종의 침입을 받아가면서도 이탈리아인과 같은 조상에서 연유된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라틴인(Latins)의 한 도시국가인 로마는, 처음에는 로물루스 이후 7대의 왕에게 통치되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는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에트루리아 왕(전하여 오는 이야기로는 5, 7대의 타르키니우스 父子)의 지배로, 로마는 티레니아해(海)와 내륙을 잇는 상업 기지, 또 캄파니아와의 연락 기지로서 주목되어 왔다.에트루리아 왕의 지배, 그 상업 정책에 의해 로마 사회는 크게 변화된 모양이었다. 원래 로마의 정치·군사는 씨족의 집단 쿠리아에 따랐는데 6대의 세르비우스 왕이 이를 개혁하고, ‘재산에 의하여’ 전시민을 계급별로 나누어 각 계급 내의 켄투리아(Centuria:百人隊)를 군사·정치의 기초 단위로 했다. 이는 재산 취득의 자유, 빈부의 차를 전제로 한 시도였다. 대지주인 귀족(Patrici), 중소의 지주인 평민(Plebs)을 중심으로 한 사회에 상업으로 업을 삼는 평민이나, 무산자가 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왕 자신은 사회 분화에서 발생한 문제를 남겨 둔 채, 귀족의 독립운동을 계기로 상업 기지를 버리고 본국으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