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제2기 문명/주의 봉건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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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봉건제도〔槪說〕[편집]

은(殷) 왕조에 이어 중국에 성립된 국가가 주(周) 왕조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수이(渭水)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중원이란 황하(黃河) 중류의 남북 지역, 즉 허난(河南), 산둥(山東), 산시(山西)의 대부분과 허베이(河北), 산시(陝西)의 일부이다. 주나라의 청동기문화권이 최근의 조사에서는,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의 양쯔강 유역에까지 미친 것이 확실해졌다. 이 광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통치하는 조직이 봉건제도이다. 주 왕조는 일족 공신을 각지에 파견하고 제후의 벼슬을 주어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관계는, 이미 은에서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돼 있었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씨족적인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의 기구였다. 기원전 770년, 서방의 이민족 견융의 침공을 받아 수도 하오징(鎬京)은 함락되고 부도(副都) 낙읍(洛邑, 洛陽)으로 동천하였다. 동천 이전을 서주(西周, 전 2세기 반

전 770), 이후를 동주(東周, 전 770

전 256)라고 부른다.

주 왕조(서주)[편집]

周王朝(西周)

은나라 다음의 중국의 고대 왕조. 전설에 의하면 시조는 후직(后稷)으로서 13대 고공단보(太王) 때에 산시성(陝西省) 기산의 산기슭에 옮겨와서 정주했다고 한다. 이 씨족은 희성(姬姓)으로서 은나라에 입공(入貢)하여 주후(周侯)의 칭호를 받았다. 단부의 손자인 문왕은 도읍을 기산에서 시안(西安)의 서쪽 근교인 펑징(豊京)으로 천도하여 은과 맞섰다. 그 아들인 무왕 발(發)은 문왕의 뜻을 이어받아 은왕 주(紂)를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격파, 은나라는 멸망하였다. 무왕은 개선한 후에 수도를 하오징(鎬京:西安 西郊)에 정하였으나 얼마 뒤 병사하였다. 동생 주공은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을 도와 왕권 확립에 노력했다. 주나라는 무왕·성왕·강왕의 3대가 황금시대였으나 그 후 이민족 여러 나라가 배반하는 경향도 세어지고 또 내란도 일어나 기원전 841년부터 공위시대(空位時代)가 1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어서 선왕(宣王)은 주를 재건하여 중흥의 영주라고 칭송을 받았으나 유왕(幽王)에 이르러서는 애희(愛姬)인 포사에 빠져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황후인 신씨(申氏)의 교사로 견융(犬戎)의 침공을 당하여 기원전 770년 수도 하오징을 빼앗겨 붕괴되었으며 평왕(平王)은 낙읍(洛邑)으로 동천하여 거기에서 즉위했다.

무왕[편집]

武王 (재위 전 1122

1116?)

주나라 문왕의 아들. 이름은 발(發), 주 왕조의 개조(開祖). 그의 아버지 문왕(文王)은 은나라를 치기 위해 위수 분지를 나와 중원에 군병을 진격시켰으나 병사(病死)했다. 무왕은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군사(軍師)인 태공망여상(太公望呂尙)의 전략을 사용하여, 목야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주왕(紂王)의 대군을 격파했다. 주왕은 자살하고 은나라는 멸망했으나, 무왕은 은나라의 땅을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은나라의 왕자 무경(武庚) 등을 그대로 후(侯)에 봉하고, 아우에게 감시케 하고 다시 귀국했다. 무왕이 주나라의 개조이기는 하지만,정치 체제가 확립된 것은 그의 아들 성왕(成王) 때부터였다.

주공[편집]

周公 (전 1118

전 1051?)

주나라 문공(文公)의 아들이자 바로 무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단(旦).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무왕이 죽은 다음에는 아들 성왕(成王)의 후견자로서 주 왕조의 기초를 구축해 섭정 기간동안 주나라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닦고 제도와 예의를 정하여 어진 정치를 하였다.은의 무경(武庚) 등을 감시하기 위해서 동방에 남아 있게 된 관숙 등은 형인 주공 단이 왕위를 찬탈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경 등 은의 잔존세력이 후원하여 큰 반란이 되었다. 주공은 성왕을 받들고, 소공석(召公奭) 등과 함께 제후를 거느리고 3년간에 걸쳐 이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동방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또 동방 경략(經略)의 근거지로서 낙읍(낙양)을 부도(副都)로 했으며, 그후 동방을 지배하기 위한 동도(東都)로서 뤄양에 성주성(成周城)을 건설하고, 성왕이나 주공 등도 한때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후 성왕은 시안(西安) 근처의 도읍지인 종주(宗周)로 돌아가 이후의 성주는 동방지배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제후(諸侯)를 모아 놓고 조회(朝會)를 한다든지 중요한 정책을 공포한다든지 하는 일은 모두 이 성주에서 행했으며, 각지에서 올라오는 공납(貢納) 등도 일단은 이 곳에 모아 놓았다가 종주로 실어 보내게 되어 있었다. 주공은 장자상속·종법(宗法)·봉건(封建)·예(禮) 등 주나라 여러 제도의 창설자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후의 유가(儒家)가 주공을 완전무결한 성인(聖人)으로 칭하여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천명 사상과 방벌 선양[편집]

天命思想-放伐禪讓

천명(天命)이란 하늘에서 부여받은 명령·운명이라는 뜻이며, 방벌(放伐)이란 폭군을 타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선양(禪讓)이란, 덕이 있는 천자(天子)에게 제위(帝位)를 넘겨준다는 뜻이다. 은(殷)이나 주(周)는 모두 신의 뜻에 의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신권정치가 행해졌으나, 은나라에서는 모든 현상은 불변하는 신(神)의 의지로 결정되고, 군주는 주술적(呪術的) 점으로써 그것을 예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주나라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에서 부여된 운명을 따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덕행을 쌓고 노력하는 것으로써 천명을 호전시킬 수 있고, 태만하면 천명을 다할 수 없다고 했다. 군주가 되는 자는 덕행을 쌓지 않아야 하고, 만약 폭군이 나타났을 때는 이를 넘어뜨릴 수가 있어야 했다. 방벌이란 걸(桀)·주(紂) 등의 폭군을 쳐부수는 것, 선양이란 요(堯)가 유덕한 순(舜)에게, 다시 순은 우(禹)에게 제위를 양보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성(姓)을 갈고 천명(天命)을 다시 하는 것을 역성(易姓)혁명이라 하고, 은나라를 타도하여 주 왕조가 성립한 것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후세의 왕조 교체 이론(理論)이 되었다.

중화사상[편집]

中華思想

한(漢)민족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인 우월감을 뜻하는데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中’이란 문화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말하고 ‘華’란 꽃처럼 피어남을 자랑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와 같은 자부심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중화사상은 기능적으로는, 하나는 예교(禮敎)를 분별 못 하는 이민족(異民族)을 차별하는 조건으로, 또 하나는 중국의 천자가 모든 이민족을 덕화(德化)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주의 봉건제도[편집]

은(殷) 왕조에 이어 중국에 성립된 국가가 주(周) 왕조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수이(渭水)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중원이란 황하(黃河) 중류의 남북 지역, 즉 허난(河南), 산둥(山東), 산시(山西)의 대부분과 허베이(河北), 산시(陝西)의 일부이다. 주나라의 청동기문화권이 최근의 조사에서는,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의 양쯔강 유역에까지 미친 것이 확실해졌다. 이 광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통치하는 조직이 봉건제도이다. 주 왕조는 일족 공신을 각지에 파견하고 제후의 벼슬을 주어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관계는, 이미 은에서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돼 있었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씨족적인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의 기구였다. 기원전 770년, 서방의 이민족 견융의 침공을 받아 수도 하오징(鎬京)은 함락되고 부도(副都) 낙읍(洛邑, 洛陽)으로 동천하였다. 동천 이전을 서주(西周, 전 2세기 반-전 770), 이후를 동주(東周, 전 770-전 256)라고 부른다.



동·서양의 봉건제도



서양의 봉건제도



중국의 봉건제도



·계약에 의한 주종관계

·계약 불이행시 해약

 



·혈연에 의한 군신관계

·봉토 세습

·제후는 주 왕실을 종실로 숭배

붕괴되어 가는 봉건제[편집]

崩壞-封建制

주(周)의 세력은 북으로는 현재의 랴오닝성(遼寧省) 남부, 동으로는 산둥 반도(山東半島), 남으로는 후난성(湖南省) 북부, 서로는 간쑤성(甘蕭省) 동부까지 확대돼 갔으나, 실제로는 소왕(昭王) 무렵부터 동남의 오랑캐라고 불리는 부족을 중심으로 한 반격이 시작되어, 도리어 오랑캐가 허난성 남동부에 침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영토 확대는 한계에 도달하여, 목왕(穆王) 이후가 되자 실제로 주족에 의하여 유지된 것은, 남은 화이허(淮河)의 선(線), 북은 허베이성(河北省) 싱타이시(邢臺市)로 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군사적, 정치적인 한계임과 동시에 농업 생산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허의 선은 예로부터 남의 수도(水稻)와 북의 조, 수수와의 경계선이며, 그런 사실은 주족의 생활에 한계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수수의 밭 곡식에 익숙해진 주족에게 수도경작(水稻耕作)의 지역은, 수도 그 자체보다도 기후나 지형 등의 자연환경상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주족(周族)에게 신흥국가로서의 세력이 있었던 기간은 그 한계를 넘어서 확대해 갔으나, 그 세력의 한계에 도달함과 동시에 한계역(限界域)의 바깥쪽은 중앙과의 연락이 끊어져 원주민(原住民)의 내부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한계역의 안쪽에 있어서도 제후와 중앙의 왕조와의 관계는 점차로 소원해져서 공납(貢納) 등도 충분히 보내지지 않게 되었다. 주족 전체의 세력의 쇠퇴는 왕조의 제후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시켜서 왕의 권력도 약체화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봉건제도의 유지가 곤란하게 되고 새로이 공신(功臣)을 봉건할 수가 없게 되어, 왕의 직할령(直轄領)의 일부 관할권을 부여하곤 했기 때문에 왕조의 수입이 감소되어 그 약체화를 재촉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더구나 왕의 통제력이 없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토지의 쟁탈이 빈발하여, 유력한 귀족이 약한 귀족의 토지를 겸병하게 되어 몰락하는 귀족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수공업 등에 의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해져서 소규모의 토지를 손에 넣는 자들도 나타났다.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귀족이 장원영주(莊園領主)로서 넓은 지역을 영유한 데 반하여, 그들은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는 지주였다. 이것은 종래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적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법 조직[편집]

宗法組織

주대(周代)의 봉건제 아래에 그 체제를 갖춘 종족(동족의 남계 자손이 조직하는 혈연 단체)을 통솔하기 위한 규정. 종법의 중심은 선조의 제사이며 공동식사(共同食事) 등의 행사를 통하여 친족 의식을 강화하고, 적장자의 가부장(家父長)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일족은 공통의 성(姓)을 가짐과 동시에 저마다의 씨(氏)를 갖는다. 이와 같은 자손의 분화를 계류시키기 위해 본가를 중심으로 하여 각 분가(分家)가 맺은 약속을 규정화하였다. 이 종법 이외에 생활을 지배하는 습관을 주(周)에서는 예(禮)라고 하여 사회의 질서를 지켰다.

하오징[편집]

鎬京

산시성 시안(西安) 서쪽에 있는 서주(西周)의 수도. 서주는 고공단보(古公亶父) 때 기산(岐山)으로 천도하고 문왕 때 위수(渭水) 분지에 진출하여 풍수(豊水) 서쪽의 풍수 동쪽에 호경을 정하고 서주의 수도로 삼았으며, 그 후 기원전 770년까지 계속되었다. 펑진과 함께 시안(西安) 서쪽에 있었다고 추정되는데 명확한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주의 동천[편집]

周-東遷

기원전 770년에 주(周)나라가 수도를 하오징(鎬京)에서 낙읍(지금의 뤄양)으로 옮긴 일. 견융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771년에 하오징이 무너져 유왕(幽王)이 죽음을 당하자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이 낙읍으로 수도를 옮겨 주나라의 부흥을 꾀하였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 한다.

낙읍[편집]

洛邑 허난성 낙양의 주대(周代)의 수도. 주 왕조 개조의 무왕이 사망한 후, 동생 주공은 은나라의 반란을 맞아 동부를 정복하여 동방 정벌의 근거지로서 낙읍을 동쪽 수도로 정했다. 그 후 서주에서는 부도(副都)라고 했지만, 기원전 770년 주(周)가 동천(東遷)한 후에 동주의 수도로 되었다. 1954년부터 뤄양의 고고학적 조사가 시작되어 주대의 성벽이 발견되었다.

읍제국가[편집]

邑制國家

은(殷)·주(周)의 읍을 기본적 단위로 한 구조를 갖는 국가. 읍(邑)이란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씨족 결합체의 취락(聚落)이란 뜻으로, 은 시대에서는 은왕은 읍의 장(長)을 백(伯)이나 방백(方伯)이라 하였고, 다시 그 수장(首長)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주대의 봉건제라고 불리는 제도도 읍을 단위로 했기 때문에 읍제국가(邑制國家)라고 간주할 수 있다. 제후가 거주하는 읍을 국(國), 제후의 분가가 거주하는 읍을 도(都), 이 밖의 읍을 국(國)라고 불렀다.읍제국가가 해체되는 것은 춘추 중기(中期) 이후이고, 철제 농구의 출현, 농업의 발전 등에 기인된다.

정전법[편집]

井田法 중국 최초의 토지제도로, 주나라 때에 실시되었다고 전한다. 정방형의 토지를 우물 정(井)자형(1정=900무)으로 9등분하여 8가구가 제각기 사전(私田)으로 경작하고, 중앙의 토지 100무는 공전(公田)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은 모두 세금으로 나라에 바치는 제도였다. 왕망 때 실시한 왕전제(王田制)나 북위 이후 당대까지의 균전제도 정전법의 이상을 지니고 있다. 맹자는 이 100무의 경지 외에 5무의 택지(宅地)를 백성에서 보장하여 항산(恒産)을 가지게 함으로써 항심(恒心)이 생기게 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