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송의 통일과 정치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송의 통일과 정치〔槪說〕[편집]

당의 중기 이후 균전제(均田制)의 붕괴에 따라 균전 농민이 도망하기 시작하자, 한쪽에서는 이들 땅을 수집하여 토지를 집중시키는 신흥 지주층이 나타났다. 토지 소유 관계상 큰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당(唐) 말기부터 5대에까지 권세가나 무사·절도사 등의 지배자 밑에서 관공서의 하급 사무를 보면서 주인의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대토지 소유의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후주(後周) 세종의 천하 통일 사업을 계승한 태조는 즉위하자 바로 금군(禁軍)을 개혁하고 절도사를 해체하여 문관에 의한 집권적인 관료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은 태종에 의해 계승되어 절도사의 전면적인 지군(支郡)의 반납, 과거제도의 정비와 확대 등에 의해 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관료 기구의 모체가 된 것이 신흥 지주들이었다.지주는 전호(佃戶)를 직접 경작 농민으로 하는 장원 경영을 하고 있었다. 전호는 농구·경우(耕牛)에서 종자에 이르기까지 생산 수단을 거의 지주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고 흉작이나 관혼상제 때의 비용도 물론 차용하므로 경제적이나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력하게 예속되어 있었다. 지주는 전호로부터 징수한 고액의 소작료나 고리대금업을 토대로 경제적인 기반을 굳히고 과거(科擧)를 보아 지배 관료가 되었다. 이 관료 지주와 전호의 관계가 이 시대의 기본적인 생산 관계였으며, 이것을 봉건적이며 농노제적인 생산 관계의 성립 시기로 볼 수도 있다. 단 지주가 그 대토지 경영에 기초하여 그들 자신의 힘으로 독자적인 지방 분권적 봉건영주가 되는 것은 아니고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 기구 중에 흡수되어 간 것이 특징이다. 관호(官戶)에는 불수불입의 특권은 없었지만 부가세나 용역면에서 큰 대우를 받고 있으며 그 특권을 이용하여 지주로서의 이익 확대를 도모했던 것이다. 당 말기 이래 강남을 중심으로 농업 생산력의 현저한 발전이 보이는데 그것을 축(軸)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상품 유통이 전개되어 왔다. 관료 지주는 전호로부터 수탈한 수확물과 고리대금의 자본을 가지고 이 상품 유통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그것은 지방적인 협소한 테두리를 벗어나 전국적인 통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조광윤[편집]

趙匡胤 (926

976, 재위 960

976)송나라 초대 황제이며, 묘호(廟號)는 태조, 아버지 홍은(弘殷)은 서후당의 장종(莊宗)에 벼슬한 무인. 후주(後周)의 절도사를 지내다가 아우 조광의와 조보(趙普)의 도움을 받아 960년에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웠다. 세종의 사후 거란의 입구를 요격하기 위해 출정하였으며, 그 진중에서 부하 병사들의 추대에 의해 황제위에 올랐다. 형남(荊南)·후촉·남한·강남 등을 순차적으로 평정하고 전국 통일을 거의 성취했다. 또한 안으로 절도사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내세워 중앙집권을 꾀하였으며 소금·술·차 등을 나라에서 맡아 판매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건국 방침은 철저해서 문치주의를 취하고 이후 집권적 관료제도의 기초를 이루었다.

송(북송)[편집]

宋(北宋)

5대(五代) 후주(後周)의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나라. 등극 초기에는 문치주의(文治主義)로 무인세력을 억제하고, 황제 독재에 의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에 힘썼다. 다음의 태종(太宗)도 형 태조의 유업(遺業)을 이어, 중국 통일의 여세로 북중국 연운 16주(燕雲十六州)의 회복을 꾀하여 요(遼)와 싸웠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진종(眞宗)·인종(仁宗) 시대에는 국력이 강대하고 번영했으나, 밖으로는 여전히 요(遼)·서하(西夏)의 침입을 받았다. 인종 말년부터는 군사비의 급격한 증대로 국민은 곤궁에 빠졌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즉위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기용하여 신법(新法)을 단행하였으나, 기대한 바 성과를 얻지 못한 반면, 철종(哲宗)·휘종(徽宗) 시대에 가서는 신법·구법 양당의 정쟁이 되풀이 되었다. 그 후 12세기 초엽 여진(女眞) 민족이 세운 금(金)은 요를 멸망시킨 여세로 북중국에 침입, 1127년에는 송도(宋都) 카이펑(開封)이 점령되고, 휘종·흠종(欽宗)이 포로(捕虜)가 됨으로써 송조(宋朝)의 왕통(王統)은 중단되었다. 그간의 9대 168년을 북송(北宋)이라 하고, 이후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은 남중국으로 난을 피하여 임안(臨安)에 도읍하여 남송을 창건하였다. 남송은 실지(失地)를 회복코자 악비(岳飛) 등 제장군(諸將軍)이 분전하여 한때는 우세했으나, 진회(秦檜)가 정권을 잡자, 오로지 화평정책을 써서 송·금 관계는 소강상태(小康狀態)를 유지하였다. 다음 효종(孝宗)은 명군(名君)으로 내정을 정비하여 남중국 개발은 크게 진척되었으나, 그 후 암군(暗君)이 많아 가사도(賈似道) 등 간신이 전권(專權)함에 남송은 쇠퇴해졌다. 더욱이 북방 신흥세력인 몽골이 나타나 서하·금 등을 멸망시키고 남중국에 침입해 오니 이에 굴복, 5대 152년 만에 멸망되었다. 태조 조광윤은 5대 난세에 태어나 군벌(軍閥)의 폐해를 절실히 느꼈으므로 건국의 국시에 무(武)를 버리고, 문(文)에 치중한 제도를 새로이 수립하였다. 병마(兵馬)·민정(民政)·재정의 대권을 군주 한 사람에게 돌리는 군주 독재의 정체 수립도 그에 의하여 일단의 완성을 보았다. 고문(古文)의 부흥을 주창한 구양수나 역사에서 편년체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한 사마광, 철학방면의 주희(朱熹)·육구연(陸九淵) 등이 저명하다. 또 송대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여 문화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사(詞)나 속문학(俗文學)이 번성했고 남종화(南宗畵)가 발달하였으며, 우수한 도자기가 출현한 것도 이 시대로서, 후세의 문학·공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반면에 무(武)를 버렸으므로 상무심(尙武心)이 극도로 쇠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한편 경제면으로는 각종의 산업, 특히 수공업의 발달이 현저하여 서민 수요를 충족시킬 실용품이 많이 생산되었다. 또한 중국 전토가 통일되어 물자의 유통(流通)이 자유로웠고, 상업무역도 성행되었다. 문학은 국수적(國粹的)인 성격이 짙었고, 유학(儒學)에 있어서도 신유교주의(新儒敎主義)의 체계가 이루어졌다. 불교는 완전히 중국화되어 널리 서민간에 퍼졌고, 도교도 재정비되었다.

관료제도[편집]

官僚制度

중국에서는 진(秦)·한(漢) 이래 중앙집권적인 전제국가가 성립되고 있었기 때문에 관료제도의 역사도 오래되지만, 중앙·지방을 통치하여 관료 기구로서 히에라르키를 형성한 것은 송 이후이다. 문치주의와 함께 권력의 분산은 송의 정치의 한 특색일 것이다. 송대의 기구를 보면 우선 중앙의 최고 행정 기관은 중서성(中書省)이며, 재상(宰相)―동중서문화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과 부재상―참지정사(參知政事)―이 있으며 양자 다 함께 두 사람 이상 두었고 합의제(合議制)였다. 군사의 최고 기관은 추밀원(樞密院)이며 추밀사(樞密使)와 부사가 있으며 여기도 복수(複數) 합의제였다. 재정은 삼사(三司)가 관리했으며 호부(戶部:호적·징세), 염철(焰鐵:전매), 탁지(度支:국가의 출납)의 3부로 갈려져 있으며 각각 장관이 있었다. 지방 행정은 노(路)에는 감사(監司)가 재정·군사·사법·전매를 분담했다. 부(府)·주(州) 이하는 현까지가 지사를 두고, 특히 주에는 부지사로서 통판(通判)이 신설되어 재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주지사의 권력 분산화가 시도되었다. 통판은 감시역이어서 주지사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이러한 정책은 동시에 한사람 한사람의 책임이 애매해질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황제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는 비밀경찰제도(秘密警察制度)와 함께 상당히 효과 있는 방법이었다. 중앙에서 지방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명령을 받은 문관이 직접 파견되었고, 관료끼리의 횡적 연결은 빈약했으며,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큰 피라미드를 형성했다. 이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관료는 거의 지주 출신이었으며, 이후에는 단순히 지주뿐만 아니라 고리대금업, 대(大)상인의 이익 대표로까지 되어 전근대적인 사회 특권 계급으로서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전매법[편집]

專賣法

재정면에서 송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징수기구(徵收機構)인 전매제도를 채택하였다. 소금, 차(茶), 술, 향료, 약품 등을 전매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특히 소금이 그 중심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중국의 소금 생산지는 해안선과 일부는 내륙염호(內陸鹽湖), 쓰촨(四川)의 암염(岩鹽)에 한정된다. 광대한 중국에서는 정부가 생산지역을 장악한 뒤 그 가격이나 분배(分配)를 자의적으로 결정하여 거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세부적인 판매구역이나 가격은 정부의 형편에 따라 자주 변경되어서 백성은 대개의 경우 질이 나쁘고 값이 비싼 소금을 사야만 되었다. 그래서 값이 싸고 질 좋은 소금을 몰래 파는 밀매인이 정부가 끊임없이 단속을 강화하면 할수록 확대하여 대항하였다. 소금의 밀매단은 체제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수용함과 동시에, 일단 일이 일어나면 반체제 운동의 중핵으로 변하여, 송 이후의 역대 왕조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금군[편집]

禁軍

궁성을 수비한 근위병으로 한 대(漢代) 이래 계속 존재했지만 5대 이후는 천자의 근위병(近衛兵)임과 동시에 모병(募兵)제도에 의한 국가 군사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5대 각 왕조의 정권 불안정은 금군 병사의 책동에 그 원인이 많았으므로 송초(宋初)에 금군의 개혁이 행해졌다. 이것을 3아(衙)로 나누어 병력을 분산하고 또한 그 장관, 도지휘사(都指揮使)는 자기가 인솔하는 군대의 지휘권이 있을 뿐이었으며 발병의 권리는 추밀원에 위임되어 있었다. 태조 때 약 19만이었던 금군은 요(遼)·서하(西夏)와의 국경 분쟁에 대비하여 증대시켜 인종 때에는 82만으로 팽창하였다. 양의 증대는 질을 저하시켰고 군사비의 증가는 북송의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편집]

송시대의 지방 행정 구획의 최고 단위이다. 때때로 분할·병합이 행하여져 숫자는 일정하지 않지만, 북송에서는 거의 20노(路) 전후이며 남송에서는 15

16노였다. 노에는 전운사(轉運使)·안무사(安撫使)·제점형옥공사(提點刑獄公事)·제거다염공사(提擧茶?公事) 등 4인의 장관이 있어서 각각 재정·군사·사법·전매를 분담했다. 이들을 모두 합하여 감사(監司)라고 말한다. 독자적인 관할 구역은 없으며 소속 행정 구획 단위인 부(府)·주(州)·군(軍)·감(監)을 감독했다.

전운사[편집]

轉運使

재정을 관리하는 노의 장관. 처음 설치된 것은 당의 개원(開元) 연간이며 강남의 생산력 발전에 따라서 강남에 대한 당 황실의 재정적 의존이 높아지므로 세량(稅粮) 기타 물자를 수도로 수송하기 위해 총감독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그 후 번진(蕃鎭)의 세력이 증대함에 따라서 한때 세력이 약해졌으나 송대에 이르러 경제상의 요지에 놓여졌으며, 변방(邊防)·치안·재판까지도 담당한 일이 있었다. 또 절도사가 장악하고 있던 주(州)내의 재정권을 빼앗고 1노 내의 재정·행정을 담당하여 지방 행정의 요직이 되었다.

과거제도[편집]

科擧制度

수(隋)나라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던 고등관료 자격시험이었는데 제도로서 확립되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송대에 이르러서이다. 진사(進士)와 여러 과(科)로 나누어져 있었다. 시험은 먼저 지방 주현(州縣)에서 행해지는 해시(解試), 다음 수도 카이펑의 예부(禮部)에서의 성시(省試)가 있으며, 특히 태조 때인 975년에는 황제 자신이 출제, 시험관이 되어 행하는 전시(殿試)가 새로 첨가되었다. 이후 이 3단계 제도가 확립되고, 영종(英宗) 때에 시험 횟수도 3년에 한 번으로 제도화되어 청(淸)말까지 계승되어 내려왔다. 전시의 출현에 의해 문신 관료의 등용과 임면권(任免權)이 황제의 재가에 집중되었다. 수험자는 당말 이후 농촌에서 성장해 온 신흥 지주층 출신으로 채워졌다. 당대까지 가문의 품격과 관직의 대응 관계가 고정화되어 있던 문벌 귀족 관료에 대신하여, 이 과거를 통한 신흥 계층이 정권 담당자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