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송대의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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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의 사회와 문화〔槪說〕[편집]

송대에 이르자 당대(唐代)의 문벌 귀족은 몰락하고 장원(莊園) 지주나 부상(富商)이 대두했다. 그들은 과거를 거쳐 관료가 되고 특권을 잡아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균전제(均田制)하의 농민은 대부분 몰락하여 농노적(農奴的)인 소작인(小作人, 佃戶)이 되어 장원의 경작에 종사했다. 이외에 많은 자작농이 존재했으나 중세(重稅)에 시달리다가 토지를 버리고 유민(流民)·전호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이와 같이 송대의 사회는 북위(北魏) 이래의 균전제가 붕괴되어 장원제(莊園制)와 전호제(佃戶制)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기에 해당되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당말(唐末) 이래 생산력의 발전이었다. 송대 이래 강남의 개발은 한층 진척돼 크리크에 둘러싸인 위전(圍田)·우전(玗田)이라 불리는 수전(水田)이 만들어져 벼의 품종 개량도 발달했다. 화북(華北)의 맥작(麥作)도 보급되고, 농업 생산력은 증대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상업이나 수공업도 성했다. 각지에 도시가 발달하여 행(行)·작(作)이라 불리는 동업조합(同業組合)이 결성되어 국내 상업이 번성하고 지폐(紙幣)도 유통됐다.당대(唐代)의 문화가 귀족적·국제적 특징을 가진 것과는 달리, 송대에는 민족적인 문화가 발전했다. 새로운 지배자 계급은 전통적인 유교를 계승하고, 선종(禪宗)의 영향을 받아 만물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려 했다. 이것이 송학(宋學)이다. 송학은 화이(華夷)의 구별을 밝히고 대의명분·군신부자(君臣父子)의 구별을 강조하여 전정 군주지배(專政君主支配)의 사상적인 배경을 만들었다. 문학에서는 상공업의 발전을 반영하여 서민적인 문학이 발달, 가요의 일종인 사(詞)나 소설·희곡이 극구 찬양을 받았다. 미술·공예로는 수묵화(水墨畵)가 성하고, 직물(織物)이나 우아한 백자(白磁)·청자(靑磁)가 만들어졌다. 인쇄술도 한층 진척을 보였고, 나침반이나 화약도 발명되어 서양보다 일찍 실용화했다.

관호[편집]

官戶

송대의 지방 호족(豪族)을 형세호(形勢戶)라 하고, 그들 중에서 과거를 거쳐 관료가 된 자를 관호라 한다. 송조(宋朝)는 당의 귀족에 대신하는 지배 계급을 형성하기 위하여 과거제(科擧制)를 확충하고 지방에서 전지(田地)를 집적(集積)하여 유력자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고 있던 호족을 많이 채용하여 관료로 임명했다. 그들은 당의 귀족처럼 가문(家門)을 자랑할 수는 없었지만 관료가 되면 그 집은 관호라 하여 특권적인 계층을 형성했다. 특권 중 큰 것은 면역(免役) 특권이다. 즉 촌락의 유력자는 양세(兩稅)의 징수·운반·포도(捕盜) 등의 일을 맡은 데 대하여 관호는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그 외에 지이(支移:兩稅를 州縣으로 운반하여 바침)나 절변(折變:현물 대신 돈을 바침)을 면제했다. 이러한 면제는 토지 집적(集積)을 한층 유리하게 하고, 그러한 특권을 받기 위하여 일반 농민의 토지를 바치는 자들도 많아졌다. 그 때문에 남송에서는 일정액(一定額) 이상의 토지를 가진 자에게는 노역에 충당하려 했으나 토지 소유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호의 대토지 소유가 점점 더해 갔다.

형세호[편집]

形勢戶

송대의 지방 호족을 형세호라 한다. 관호를 포함함은 물론 관호가 아니더라도 지방에서 대지주로서의 재산을 모았고, 징세·치안유지 역을 짊어지고 국가의 향촌(鄕村)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는 자를 말한다. 양세 부담에 있어서도 일반 호(戶)와 구별하여 취급되었다. 그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자가 많으므로 일반적으로 호족·관료를 총칭하여 형세관호(形勢官戶) 혹은 관호·형세호(官戶形勢戶)라 한다.

전호[편집]

佃戶

송대 이래 관호 등의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예속적인 소작인을 말한다. 송대에서는 객호(客戶)·전객(佃客)·지객(地客)·장객(莊客)이라고도 하듯이 타향에서 흘러들어온 자들이 많고, 토지·가옥은 물론 농구·종자 등도 지주에게 대여받았기 때문에 지주에 대하여 보통 이상으로 예속적인 지위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조(佃租, 소작료)는 5할 이상이며 때로는 노역에도 사역되었다. 지주와 전호 사이에는 주종(主從) 관계가 있다고 하며, 전호의 지주에 대한 범죄의 경우에는 일반보다도 중하게 벌했다. 그러나 강남이 개발되고 특히 남송에 이르러 도작(稻作)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생산력이 증대하고 그 위에 맥작이 보급되어 수확이 전호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조전(租佃) 관계(地主佃戶制)는 더욱더 발전, 전호는 반드시 타향 출신뿐만 아니라 자기의 토지를 부득이 지주에게 맡기지만 그대로 전호가 되어 경작을 계속하는 자들도 많이 나왔다. 이리하여 지역에 따라 전호는 서서히 지주에 대한 예속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특히 강남 델타 지대의 호전(湖田)·우전(玗田)이 발달한 곳에선 전호 사이에 횡적인 연대(連帶)가 형성되어 지주의 명령을 거부하여 전조를 내지 않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완전항조(頑佃抗租)라 하여 남송 때 처음으로 나타났고 명(明)·청(淸) 시대에 들어오면 한층 격심해진다.

초시[편집]

草市

송대 주현치(州縣治)의 성곽 밖에 설치된 교역장(交易場)이다. 당(唐)까지는 상업 행위가 성내의 정해진 장소에서만 행해졌지만 송 시대에 이르면 장소·시간의 제약 없이 성곽 밖에서도 시장이 섰고, 그것은 조잡한 시장이란 의미로 초시(草市)라 불렸다. 다시 수륙(水陸)의 요충, 사원(寺院)의 문 앞, 소금·도기의 생산 요지에 있던 것은 발달하여 지방 도시를 형성하고 진(鎭)·시(市)라 불렸으며 일부는 현성(縣城)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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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부터 형성된 상인의 동업조합(同業組合). 행(行)이라 하는 것은 동업자가 도시의 한 구획에 나란히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송에 이르면 행수(行首)·행두(行頭)를 대표자로 하여 정부에 면행전(免行錢)을 바치고 그 상업을 독점, 조합원을 보호했으나 호상(豪商)의 마음대로 되었다. 일체의 상업에는 그에 따른 행이 조직되었는데 특히 쌀·소금·차(茶)·비단 등의 행이 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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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이후 만들어진 수공업자의 조합을 말한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사치품에 대한 욕구도 늘어나 각종 공예품 수요가 증대했다. 여기서 도시의 생산자는 동업자가 모여 작(作)을 만들어 스스로의 이익을 지켰다.예를 들면 석재(石材)·금은세공(金銀細工)·재봉(裁縫)·칠기(漆器)·종이 등의 작이 있다.

아승[편집]

牙僧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서 상담(相談)을 조정하는 중매인(仲買人). 아인(牙人)이라고도 한다. 송대에 이르면 상인의 역할도 분화(分化)되어 왔다. 도시에 점포를 설치하고 상매(商賣)를 하는 좌가(坐賈), 먼 곳에서 상품을 나르는 객상(客商)이 있으며, 그 사이에 있어서 아인은 상품의 가격을 평정(評定)하거나 객상과 생산자 사이에 서서 구매의 중개를 담당하거나 하여 수수료를 받곤 했다.

교자[편집]

交子

송대 쓰촨(四川)에서 사용된 세계 최고(最古)의 지폐(紙幣). 쓰촨은 원래 철전(鐵錢)을 화폐로 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거워서 거래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부상(富商)은 사권(私券)을 만들어 교자(交子)라 이름짓고 유통시킨 것에서 비롯된다. 후에 정부가 태환 준비금(兌換準備金)을 준비하여 발행해서 온전한 지폐가 되었다. 달리 임안(臨安)의 회자(會子)나 카이펑(開封)의 관자(關子) 등도 약속어음에서 점차 지폐로서의 역할을 하게끔 되었다. 남송에서는 각종 지폐가 발행되어 동전(銅錢)의 부족을 메우려 했다.

시박사[편집]

市舶司

송 이래 해외 무역항에서 관세 징수(關稅徵收) 등 외국 무역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리한 관청을 말한다. 송의 초기에는, 광저우(廣州)가 관세 수입의 대부분을 점(占)하고 당에 이어져 번영했는데, 북송 말기부터 남송에 걸쳐 취안저우(泉州)도 번창해져 양자는 함께 동남아시아의 무역항으로서 발전하고 거리에는 통상을 위하여 온 아랍인의 거주구(居住區)도 생겼다. 정부는 시박사를 설치하고 관세 수입을 얻는 한편 어떤 종류의 물자를 사서 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외국 무역을 장려했다.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에서 보석, 향료 등 사치품이 들어오고 중국에서 금·은·동전 등이 나갔다.

주자학[편집]

朱子學

북송에서 일어난 주돈이(周敦?)·장재(張載)·2정자(程子) 등의 새로운 학풍(學風)을 받아 남송의 주자(朱子)에 의하여 집대성된 학설을 말하는데, 후세 유학의 정통 지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한국·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송학(宋學)·도학(道學)·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학설의 중심은 이기설(理氣說)이다. 우주 만물의 근원을 이(理),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氣)라 이름짓고, 이가 만물에 성(性)을 주고 기는 만물에 형(形)을 준다고 설명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그 성은 본디부터 이(性卽理)지만 기에 의한 욕(欲)이 본연의 성의 발휘를 방해하고 있으므로 인욕(人欲)을 버리고 천리(天理)에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방법으로 성심성의(誠心誠意)일 것(居敬)과 객관적 사물에 대해서 그 이(理)를 추구해 지식을 완전하게 할 것(格物致知), 결국 내성(內省)과 독서를 중히 여겼다. 그 위에 종래의 훈고학(訓?學)을 물리치고 새로운 주석(註釋)을 만들어 이것을 신주(新注)라 했는데, 특히 유교의 근본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저작(著作)하여 오경(五經) 중심에서 사서 중심의 경학(經學)이 일어났다.

주돈이[편집]

周敦? (1017

1073)

경전의 해석을 고쳐 새로운 사상 체계를 만들어 주자학의 시조로 존경받는 사람. 주희(朱熹)의 현창(縣彰)에 의해 유명하게 됐다.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設)』과 『통서(通書)』가 있는데, 전자는 우주 만물의 생성 과정을 도식화(圖式化)한 태극도(太極圖)를 역(易)의 이론으로 설명한 우주론, 후자는 역과 중용(中庸)에 의하여 도덕의 존재 방식을 설명한 역의 통론이다.도주(道州, 河南省) 사람으로 고향의 지명을 따서 호를 염계(濂溪)라 하고 만년에 여산(廬山) 기슭에서 살았다.

정호[편집]

程顥 (1032

1085)

자연현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이(理)'라 이름붙이고 그 이(理)를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자학(朱子學)의 이설(理說)을 창시했다. 청년 시대에 아우 이(?)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으나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는 여러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그의 학설은 아우에게서 주희(朱熹)에게 계승, 대성(大成)되고, 한편으로는 육구연(陸九淵)이 이 이설(理說)에서 심학(心學)을 형성했다. 명도(明道) 선생이라 불려 아우와 합쳐서 2정자(二程子)라 한다. 낙양(洛陽) 사람. 관리가 되어 신종(神宗)의 지우(知遇)를 얻어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에도 참여했으나 나중에 반대파로 전향했다.

정이[편집]

程? (1033

1107)

정호의 이설(理說)을 발전시켜 이는 현상을 성립시키는 추상적인 개념이라 생각하고 또 이(理)와 사(事:現象)의 합일을 주장하여 거의 주자학의 대강(大綱)을 확정했다. 그 이사설(理事說)은 불교의 화엄철학(華嚴哲學)에 유래한다고 한다. 만년에 사관(仕官)했으나 당파 싸움에 말려들어 낙당(洛黨)의 수령(首領)으로 지목돼 유배(流配)를 갔다. 용서받은 다음엔 사설(邪說)을 부르짖는 자라 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고 문하생은 추방되었다. 저술로 『주역정시전(周易程氏傳)』, 2정자(二程子)의 언행과 저술을 모은 『이정전서(二程全書)』가 있다. 이천(伊川) 선생이라 부른다.

주희[편집]

朱熹 (1130

1200)

고대로 돌아갈 것을 표방하여 일어난 북송(北宋)의 새로운 철학·사학(史學) 등을 통합하고 깊은 사색에 의하여 거대한 학문 체계를 세운 중국 최대의 사상가이다. 존칭하여 주자(朱子)라 부른다. 휘주(徽州, 安徽省)에서 태어나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으나 실무에 임한 기간은 지방관으로 도합 9년, 중앙에서는 45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각지에 사창(私倉)을 창설하는 등, 사회 정책에 노력하여 공적을 쌓고 또 정무(政務)를 보는 한편으로는 학도를 모아 경서(經書)를 강의했다. 가끔 권신(權臣) 한택주에게 박해를 받아 끝내 그와 그의 학도는 모두 위당(僞黨)이라 하여 관계에서 추방되었고, 그 학문은 위학(僞學)이라 이름 붙여 금지되었다. 이것을 경원의 당금(慶元-黨禁)이라 한다. 추방된 몸인 채로 세상을 떠났으나 다음 이종(理宗)대에 명예를 회복하고 그 학설은 유학(儒學)의 전통이라 지목되었다.주희는 스스로 『시경(詩經))』과 『역경(易經)』의 주석서 『시전(詩傳)』과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지었고, 또한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른 경서(經書)의 신역(新譯)이 저술되었는데, 후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만든 일이었다.또 주희는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빌어, 여기에 공자가 깊은 의미를 담아 정리했다고 하는 노(魯)나라의 역사 『춘추(春秋)』의 정신을 주입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저술했다.

육구연[편집]

陸九淵 (1139

1192)

주희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며 마음은 그대로 이(理)라고 하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주창(主唱)하여, 마음(心)을 성(性)과 정(情)으로 분석하는 주자학의 성즉이설(性卽理說)과 대립했다. 이 사상은 정호(程顥)의 설을 계승한 것인데 마음을 지상(至上)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 불리었다. 주희와는 여러 번 논쟁을 했는데 두 사람이 회견하여 토론한 아호의 회(鵝湖-會)는 유명하다. 그가 죽은 후에는 주자학파에게 압도되어 떨치지 못했으나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에 의하여 새로운 전개를 보았다. 호를 상산(象山)이라 하고 강서(江西) 사람. 형 구소(九韶)·구령(九齡)도 함께 저명한 학자로서 세 사람을 합쳐 삼륙(三陸)이라 부른다.

구양수[편집]

歐陽脩 (1007

1072)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강서성(江西省) 길안(吉安)에서 출생.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중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을 받아, 1027년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승진했으나, 왕안석의 혁신정치에 반대하여 퇴관하였다. 시·문 양방면에 송대문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특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평이하고 달의(達意)한 문장인 고문(古文)의 부흥을 주장하여 일세(一世)를 풍미하고 그 후의 문체를 일신(一新)시켰다. 『춘추(春秋)』를 본받아 짧은 말 속에 깊은 포폄(褒貶)의 뜻을 담은 난세오대(亂世五代)의 역사인 『오대사기(五大史記)』(통칭 『新五代史』)는 고문의 본보기가 된다. 이 책은 사기(史記)의 기술(記述)과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에 따르고 사론(史論)을 중히 여긴 역사서로 유명하다. 그 외에 『신당서(新唐書)』 『집고록(集古錄)』 등의 저술이 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문하(門下)에서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이 나왔다. 송대에 많은 신흥 관료를 낳은 강서(江西) 출신. 참지정사(參知政事, 副宰相)까지 올랐으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하야(下野)하고 인퇴(引退)한 후 호를 육일거사(六一居士)라 했다.

당서[편집]

唐書

당나라의 정사(正史)로 이십오사(二十五史)의 하나이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두 종류가 있는데, 『구당서』는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945년에 완성되었다. 당고조의 건국부터 망국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 역사의 기록으로 5대 후진(後晉)의 유후가 일을 총괄하고 장소원·가위·조희 등이 편찬하고 조영이 감수하였다. 당 멸망 직후의 사료부족으로 후반부는 부실하고 전반부도 선행의 여러 사료에서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하나 당대 원사료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있다. 처음에는 『당서』라 했으나, 송나라 때 『당서』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다. 『신당서』는 송나라 때 인종(仁宗)이 『구당서』의 내용이 충실치 못하다 하여 구양수 등에 명하여 1044∼1060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송대에 얻을 수 있는 자료로 구당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고, 체계를 정비하여 내용을 갖추었다. 병지(兵志)·선거지(選擧志)를 갖추고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 등 표가 많고 당시 중시되던 고문으로 문장을 간결하게 기술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정사편찬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했으나, 원사료의 문체를 고치고 간략이 지나쳐 문장의 이해가 불분명한 부분 등으로 사료적 가치는 『구당서』보다 못하다는 평이다.

『자치통감』[편집]

資治通鑑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영종(英宗)의 칙령을 받고, 19년의 시일을 소비하여 제작한 편년체(編年體)의 사서(史書). 294권. 그냥 통감(通鑑)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403년부터 959년에 이르는 1362년간의 통사(通史). 사마광뿐 아니라 이를 보좌한 유서(劉恕)·유반(劉?)·범조우(范組禹)도 모두 일류의 학자이다. 처음에는 통사라고 이름하였으나, 치세(治世)에 자(資)하고 역대 군주의 전감(前鑑)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영종으로부터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정사 이외의 풍부한 자료와 고증을 기록하였는데, 특히 수(隋)·당 (唐)·5대(五代)에 관한 부분은, 신당서(新唐書) 편찬 이후에 채택 취재한 자료를 구사하여 근본 사료(史料)로서 정사(正史)와 동등하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증에 필요한 자료는 별도로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작하였다. 본서가 중국 사학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한국·일본 등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참고로 원(元)의 호삼성(胡三省)의 주(註)는 통감의 기사를 보정(補正)하고, 또 다른 사료도 제공하여 본문에 못지 않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편년체[편집]

編年體

연월(年月)에 따라 사실의 발생·발전을 서술해 가는 역사기술의 한 형식, 기전체(紀傳體)·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등과 함께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 형식은 중국에서는 가장 먼저 사용되었는데, 『춘추(春秋)』나 그 주석서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대(漢代)에 들어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기전체를 창시한 이후부터는 기전체의 사서(史書)를 정사(正史)로 삼게 되었으나, 그래도 『자치통감(資治通鑑)』과 같은 명저가 이 편년체를 사용하고 있다.

기사본말체[편집]

紀事本末體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가 인물별·분야별이나 연대순으로 서술하여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중복되고 분산되는 단점에 비해 어떤 일의 원인과 발단, 전개과정, 후에 미친 영향까지 일관되게 서술하기 때문에 사건을 체계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송(宋)나라의 원추(袁樞)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사를 개편한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을 편찬한 데서 비롯되었다. 송(宋)이후 각 왕조의 역사에도 이 방식이 적용되어 금(金)나라에 이르기까지 9왕조의 기사본말이 있다.

소식[편집]

蘇軾 (1036

1101)

송대 제1의 시인이며, 기지(機知)가 풍부하고 인간미 넘치는 시문(詩文)은 널리 애창되어 왔다. 학문으로는 촉학(蜀學)이라 불리어서 하나의 학파(學派)를 이루고, 서화도 뛰어난 문인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정치 생활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을 격렬히 공격하여, 황저우(黃州)나 하이난섬(海南島)에 귀양가는 등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중년에 이르러 스스로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했다. 부(父) 순(洵), 아우 철(轍)도 문명(文名)이 높아 3인이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부자(父子)를 합하여 3소(三蘇)라고 부른다.

『수호전』[편집]

水滸傳

북송 말기에 산둥의 양산박(梁山泊)을 근거지로 한 송강(宋江) 등 36인의 호걸들이 관리의 가렴주구(茄斂誅求)에 반항하여 봉기(蜂起)한 사실을 제재로 한 장편 소설. 남송에서 이미 그들의 무용담(武勇談)이 흥행장의 이야깃거리로 설정되어 민중에 친근해졌으나 원(元)시대에 와서 그 중 일부분이 잡극(雜劇)으로서 희곡화(戱曲化)되었다. 그들 단편적(斷片的)인 이야기를 합치고 다른 이야기를 첨가시켜서 현재 보는 바와 같은 장편으로 집성(集成)된 것은 원말(元末)·명초(明初)라고 한다. 구어소설(口語小說) 중에서도 오랜 시기에 걸쳐 가장 광범위한 독자를 얻었다.

원체화[편집]

院體畵

궁정의 화원(畵院)에서 그려진 독특한 양식을 가진 회화(繪畵)를 말하는데 원화(院畵)라고도 한다. 송(宋)의 화원은 태조 때에 설치되어 전국의 유명한 화가들이 모였다. 쓰촨(四川)의 화가 황전(黃筌)이 등장하자 그의 사실적(寫實的)이고 장식적인 화풍은 궁정 취미와 합치해 화원의 지도적 양식이 되고, 다시 신종(神宗) 무렵 화조화(花鳥畵)에 섬세한 선묘(線描)와 윤택한 색채를 쓴 신양식이 채용되었다. 북송 말기에 자신도 화조화에 조예가 깊었던 휘종(徽宗)은 크게 예술을 장려하였으므로 화원이 아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송 말기에 와서 화풍(畵風)은 형식주의에 빠져 생채(生彩)를 잃어 갔다.

문인화[편집]

文人畵

직업 화가를 주체로 하는 원체화(院體畵)에 대하여 문인이 여기(餘技)로서 그린 아마추어 회화를 가리키는 것인데 사대부화(士大夫畵)라고도 한다. 당의 왕유(王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송 시대에는 미비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인화가가 나타났다. 그들은 소재나 기법에 구애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나 인생의 모습을 흥취가 일어나는 대로 그려 표현하고자 했다. 때때로 남화(南畵)와 혼동되지만, 남화는 산수화(山水畵)에서의 양식의 구별이며 엄밀히 말해서 동일하지 않다.

나침반의 발명[편집]

羅針盤-發明

나침반은 어디서 발명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3세기)에 이미 자석에 의한 지남침의 장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면 인공적 자침이 발명되어 12세기 초에 걸쳐서 이것을 항해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그 당시의 것은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그 뱃속에 자침을 넣어 물에 띄우는 지남어(指南魚) 종류의 것이라 추측된다. 이것이 아라비아인을 통해서 유럽에 전해져 신항로(新航路) 발견에 기여했다.

화약의 발명[편집]

火藥-發明

화약은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병기(兵器)로서 실전에 쓰인 것은 10세기 초이다. 11세기 중엽의 『무경총요(武經總要)』에 제조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수도 변경(?京)에는 전문적인 제조 공장이 있었다. 초기의 화약은 목적물을 연소시키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폭발성을 가진 것이 만들어지고 화약을 넣는 통(筒)도 종이 제품에서 철제(鐵製)로 개량되어 폭탄으로서의 위력을 더했다. 13세기경 이슬람 제국(諸國)을 경유하여 유럽에 전해졌다.

인쇄술의 발달[편집]

印刷術-發達

중국에서의 목판 인쇄가 시작된 것은 6,7세기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한 장에 인쇄한 달력, 통속(通俗)의 자서(字書), 일용(日用)의 불전(佛典) 등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대(五代)에는 유교 경전의 출판이 있었고, 송 시대에는 현저하게 발전하여 정부나 민간에서 수많은 책들이 인쇄되어 서적은 사본(寫本)에서 판본(版本) 시대로 들어갔다. 쓰촨(四川)·항저우(杭州)·푸젠(福建) 등이 출판의 중심지로서 알려져 있고, 특히 푸젠에서는 민간 출판업자가 수험(受驗) 참고서 등을 대량 생산하여 번성했다. 더욱이 11세기 중엽에는 필승(畢昇)이 활자 인쇄를 발명했다. 이것은 유럽에 비하여 4세기나 빠르다. 그러나 목판 인쇄에 압도되어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