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요(거란)의 화북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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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란)의 화북 진출〔槪說〕[편집]

제6대 황제 성종(聖宗, 재위 982

1031) 시대에 요는 한층 발전했다. 먼저 송과 내통하는 만주의 여진족을 정복하고 다시 고려에 침입했다. 또 서방에서는 탕구트족 서하(西夏)와 손잡고 서역(西域)의 위구르 제국(諸國)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았다. 이리하여 배후를 튼튼하게 한 성종은 1004년 대군을 몰고 남하, 전주(?州)에서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진했다. 전쟁은 서로 승패(勝敗)가 거듭되었으나 화해가 성립, 요는 유리한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요는 송으로부터 많은 액수의 세폐(歲幣)를 받음으로써 경제적으로 풍부하게 되고 내치(內治)도 정비되었다. 즉 정치 조직, 군사 조직이 정비되고 법전(法典)이 편찬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성종에 이어 흥종(興宗, 재위 1031

1055)·도종(道宗, 재위 1055

1101) 시대도 요는 눈부시게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룩했다. 대외적으로는 서하(西夏)를 정벌하고, 대내적으로는 태조(太祖)·태종(太宗) 시대의 명족 중신(名族重臣)의 소유 영토를 회수하여 군주권을 강화했다.한편 유목민(遊牧民)과 농경민(農耕民)을 나누어 지배하는 이원적(二元的) 통치체제도 완비되었고, 특히 거란인의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문화면에서는 불교가 최성기에 달하여 사원이나 불탑이 국내에 이르는 곳마다 세워지고 불전(佛典)도 간행되었다. 또 미술에도 뛰어난 작품을 보여 성종·흥종·도종(道宗)의 장지 경릉(慶陵)에 유산이 많다. 이와 같이 전성기를 자랑한 요도 얼마 가지 않아 내부에 국수적(國粹的)인 보수파와 혁신파의 대립이 일어나고 그 위에 불교 광신(狂信) 등에 의한 재정난(財政難)이 겹쳐 쇠퇴하여 갔다. 그 결과 1125년 제9대 천조제(天祚帝) 때 만주 여진족 금(金)에게 멸망되었다. 이 때 일족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도망가서 중앙아시아에 요를 재흥시켜 서요(西遼, 카라키타이)라 칭했다.

송과 요의 화약[편집]

宋-遼-和約

3대 황제 진종(眞宗)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004년 성종에게 인솔된 거란군은 허베이에 침입해왔다. 송의 방위군은 성곽도시로 달아나 수비 작전으로 나왔기 때문에 거란의 기마(騎馬)는 무인지경의 허베이 평야를 남하하여 당장에 황하의 북안(北岸), 국도 카이펑을 지호지간(指呼之間)에 바라보는 전주성(?州城)에 육박하였다. 국도를 옮기어 일단 적을 피하려 하는 나약한 진종에 대하여 재상 구준(寇準)은 황제 친정(親征)의 강경책을 주장하였다. 하는 수 없이 전주에 도착한 진종을 맞이하여 송군의 사기가 올라서 몇 차례의 싸움 끝에 양국간에 화의가 성립되었다.국경의 현상유지를 골자로 하는 전연(?淵)의 맹이 그것으로, 송은 매년 요에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보내기로 되었다. 그 결과, 북송(北宋) 일대에 걸쳐서 송은 북방의 근심을 없앨 수가 있었다. 한편, 비단이나 은이 유입되고 무역장의 설치에 의해서 중국의 물자와 문화를 받아들인 거란의 상류계급이 받은 영향은 지극히 컸다. 최근 많이 발견되고 있는 요의 분묘 속에서는 송의 도자기와 회화(繪畵) 등이 발견되어, 그 중국화(中國畵)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전연의 맹[편집]

?淵-盟

중국의 송(宋)에 침입한 요(遼)의 성종(聖宗)과 이를 막기 위해 북상(北上)하였던 송의 진종(眞宗)이 전주(?州)에 대진(對陣)하고 체결한 강화조약, 그 조건은, (1) 송(宋)은 군비(軍備)로서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보낸다. (2) 진종은 성종의 모친을 숙모(叔母)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상대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越境者)는 서로 송환한다. 이상의 3개조이다.이 조약 체결 후 요와 송 사이에는 오래 평화가 유지되었으며, 그 결과 요는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상으로도 발전을 이루어 동아시아 제1의 강국이 되었다. 전연(?淵)이란 전주(?州)의 아명(雅名)이다.

요의 이원적 통치[편집]

遼-二元的統治

요는 영토의 확장에 따라 지배하에 있는 여러 민족을

생활 양식을 좇아 유목과 농경의 2군(群)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 결과 중앙의 통치 기구도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북면관제北面官制

거란인 등의 유목민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 기구인데, 최고 행정 기관을 부추밀원(北樞密院)이라 하여 군사·민정의 일체(一切)와 농경민의 군정(軍政)을 통괄했다. 이 외에 왕실·황족 및 부족 관계의 관청이 있었다.남면관제南面官制

한인(漢人) 등의 농경민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 기구인데, 최고 행정 기관을 남추밀원(南樞密院)이라 하여 민정을 관리하고, 그 밑에 당제(唐制)에서 배운 3성6부(三省六部) 이하의 관청을 두었다. 또한 지방에는 당말(唐末)의 제도를 받아들인 여러 관청이 있었다. 단 중앙·지방 어느 쪽에도 군정(軍政)의 권한은 없었다.

경릉[편집]

慶陵

요의 황제 성종(1031 죽음)·흥종(1055 죽음)·도종(1101 죽음) 및 그 후비(后妃)를 매장한 세 개의 능묘(陵墓)의 총칭. 내몽골 자치구의 와르 인 만하(기와가 있는 砂丘地)라 불리는 산에 있다. 지하 궁전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의 능묘로서 이 속에서 출토된 한문(漢文)·거란문(契丹文) 혹은 동릉(東陵, 聖宗陵)의 벽화는 문화적 가치가 높다. 특히 벽화는 4계 산수도(四季山水圖)·인물 초상화(人物肖像畵)·장식문양(裝飾紋樣) 등으로 극채색(極彩色)으로 그려졌으며, 동양 회화사(繪畵史) 및 건축사상 중요한 자료로 되어 있다.

요의 불교[편집]

遼-佛敎

요에서는 건국 당초부터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에서 중(僧)을 초청하여 각지에 사원이나 불탑을 건립했다. 특히 진언종(眞言宗)과 다라니(陀羅尼) 신앙이 성하여, 사원은 민중의 교환(交歡)의 땅, 유락(遊樂)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11세기의 성종(聖宗)·흥종(興宗)·도종(道宗) 시대가 최성기(最盛期)로서, 특히 불전(佛典)의 간행이 성행하였다. 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 그리고 방산운거사(房山雲居寺)의 석각 대장경(石刻大藏經) 등이 만들어졌다.

거란문자[편집]

契丹文字

『요사(遼史)』에 의하면 거란문자는 건국 당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遼의 太祖)가 대자(大字)를 만들고, 그의 아들 질랄(迭剌)이 위구르 문자를 습득하여 소자(小字)를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근년 경릉의 거란문 출토에 따라 연구가 진행되어 거란문자는 대부분 철음문자(綴音文字)로서 약 220

230개의 원자(原字)로 합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야율대석[편집]

耶律大石 (?

1143)

서요(카라키타이)의 건국자. 덕종(德宗)이라 한다. 요 태조(耶律阿保機)의 8대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의 관리가 되었다. 요에서는 한림을 린야(林牙)라고 하므로 따시 린야라고도 호칭되었다. 요 말기에 천조제(天祚帝)가 금(金)군의 공격으로 서주(西走)한 뒤, 연경(燕京)을 지키다가 패하여 역시 서주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고 외몽골로 들어가 18부의 정병(精兵) 만여 명을 얻었다.금국의 압력으로 다시 투르키스탄으로 서진하여, 1132년 추(Chu) 하반(河畔)에서 제위(帝位)에 올라 구르 한(Gurkhan)을 칭하고 천우(天祐) 황제로 불리었다. 역사에 서료로 나오는 것은 이것이며, 이후 사마르칸트에 나아가 서역 제국(諸國)이나 셀주크 투르크(호라산)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전동서(全東西) 투르키스탄을 영유(領有)하였다.

서요[편집]

西遼 Kara Kitai

요의 일족인 야율대석(西遼의 德宗)이 요가 멸망한 후 중앙아시아에 세운 나라. 중국의 기록으로는 서요라 하고, 이슬람 교도는 카라 키타이(검은 거란이란 뜻)라 부르고 있다. 1132년 건국되고 도읍은 벨라사군(지금의 토크마크 부근). 동서 투르키스탄을 영유(領有)하고 1211년 나이만국(國)의 왕자 쿠치루크에게 멸망되었다.소수의 거란인으로 지배한 정복 왕조로서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 교도였다. 재정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공납(貢納)과 위구르 상인이나 이슬람 상인 등의 동서 무역에 의한 수입에 의존했다. 또한 동서 교류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의 이슬람 세계와 동방의 중국 세계의 문화 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서요에 대신한 쿠치루크의 지배는 칭기즈칸 군대에 곧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