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송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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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개혁〔槪說〕[편집]

중국 북쪽의 여러 민족은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후부터 민족적으로 자각하여 당나라 쇠퇴와 함께 자립해 나갔다. 즉 그들은 종래의 북방민족과 달라서 독자적인 문화 형성에 노력, 국호(國號)를 세워 중국을 침입해 갔던 것이다. 5대10국시대(五代十國時代), 동북 중국에 대두한 거란(契丹)은 요(遼)를 세우고 중국 북변의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했으며, 서북변의 탕구트는 서하를 건국했다.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한 송은 용병(傭兵)을 고용하면서 양국의 침입에 대하여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없어 화해를 맺고 세폐(歲幣)·세공(歲功)을 보내어 침입을 방지했다. 그러나 양국과의 긴장된 관계는 병원(兵員)의 증대를 초래, 인종조(仁宗朝) 말에는 국가 재정의 8할 가까운 군사비를 소비하게 되었다.병약한 영종(英宗)을 계승하여 6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청년 기예의 신종(神宗)은 산적해 있는 난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할 필요를 통감하고 있었다. 대서하전(對西夏戰)에 의해서 군대는 국초(國初)의 18만에서 4배 이상이나 늘어나고 신구(新舊) 이중 구조라고 할 만한 과제에 의한 쓸데없는 인원 등, 세출(歲出)은 팽창일로를 걷고 있었다. 한편, 관료층과 특권계급은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중소 농민이나 상공업자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세수입은 도리어 감소하여 갔다. 이렇듯 대지주의 토지겸병이 진척되고 군사비의 증대로 각종 세의 증징(增徵)을 초래하여 중소농민의 몰락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곳곳에 반란이 끊이지 않아 타개책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젊어서 즉위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개혁에 착수했다. 즉 균수법(均輸法)·시역법(市易法)을 써서 대상인(大商人)을 누르고, 재정(財政) 재건·물가 조절에 도움을 주고, 청묘법(靑苗法)에 의하여 중소 농민을 구제하고, 보갑법(保甲法)에 의하여 농민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군사비를 줄이고, 모역법(募役法)에 의하여 촌락 내의 세금 징수·운반(運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몰락을 방지하려 했다. 이것들은 첫째로 국가재정의 재건을 목적으로 한 것인데, 특히 대지주·대상인의 이익을 억제하고 중소 농민·상인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따라서 대지주·대상인을 대변하는 관료는 크게 반대하여, 구법당(舊法黨)으로서 왕안석의 신법당(新法黨)과 대립했다. 그러나 양자의 싸움은 차츰 단순한 권력 투쟁이 되고 개혁은 결실을 맺지 못한 가운데 금(金)의 침입을 받아 송실(宋室)은 일시 중단된다.

세폐[편집]

歲幣

일반적으로 윗사람에게 바치는 물건을 말하지만, 특히 송이 요(遼)에 바친 것을 말한다. 거란족인 요는 중국이 혼란에 빠져 있던 5대10국시대(五代十國時代)에 침입,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했는데 송이 통일한 후에도 우위(優位)의 입장에서 송과 화해를 맺고, 송으로부터 매년 세폐로 은 10만 냥, 비단 20만 필을 획득하게끔 되었다.

세사[편집]

歲賜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선물을 말하지만, 특히 송이 서하에 준 것을 말한다. 탕구트의 이원호(李元昊)는 전부터 지켜오던 송과의 평화주의를 어기고 침입해 왔는데 송도 이에 응전, 교전이 오래 계속되었다. 여기서 화평이 맺어져 서하는 송에 대해 신하의 입장을 취한 대신 송으로부터 매년 세사로서 비단 1만 3천 필, 은 7만 2천 냥, 차(茶) 3만 근을 획득하게 되었다.

왕안석의 신법[편집]

王安石-新法

북송조의 왕안석이 행한 개혁 정치를 말한다. 인종 시대 서하와의 싸움으로 인하여 갖가지 사회 불안이 표면화되고 국가 재정은 궁핍하게 되었다.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종(神宗)은 왕안석을 등용하고 정치·경제 개혁을 담당케 했다. 개혁의 기조(基調)는 대토지 발달에 대응하여 생긴 여러 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가 권력의 침투로 대지주·호상(豪商)의 이익을 억제하고 중소 농민·상인을 보호하여 재정을 재건하려 했다.1069년부터 1073년에 걸쳐 왕안석은 신법을 공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개(灌漑)의 정비, 전토(田土) 개발을 목표로 하는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 주로 화북(華北)에서 하천의 이토(泥土)를 이용하여 황무지를 미전(美田)으로 바꾸는 어전법(?田法), 정확한 토지측량에 의해서 과세의 공평을 기하는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농민을 재산고에 따라 윤번으로 징발하여 관청 사무의 일부를 떠맡기던 차역법(差役法)의 전납화(錢納化), 백성을 5가(家) 단위로 인보(隣保)로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베풀고 치안유지를 담당하게 하는 보갑법(保甲法), 그와 관련하여 군마(軍馬)를 사육시키는 보마법(保馬法), 농촌의 청묘법(靑苗法)에 대하여 중소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낮은 이자의 융자를 도모하는 시역법(市易法), 대상인의 매점(買占)을 막고 상품의 적정 유통을 행하는 균수법(均輸法), 길드 상인의 공용물자 무상조달을 전납화하는 면행전법(免行錢法), 서리(胥吏)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부정을 금하는 창법(倉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새로운 학교제도인 삼사법(三舍法), 과거제도의 개혁 등이다.

균수법[편집]

均輸法

상인이 중간에서 부당 이득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입안(立案)된 것. 삼사(三司:재무부)에서 예산을 세워, 파견관청(派遣官廳)인 양주(揚洲)의 발운사(發運司)에 소요의 물자와 수량을 통보한다. 발운사에서는 도읍에 가까운 원산지(原産地)에서 조달하여 도읍으로 보낸다. 불요품은 이를 필요로 하는 땅으로 판운(販運)하여 이익을 거두려고 한 것이다. 균수법은 상인의 중간 착취를 배제하고, 정부의 소비경제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며, 백성의 수송부담을 균등히 하여 되도록이면 물자의 수송에 의하여 얼마라도 이익을 거두려는 데 있었다. 이로 인하여 상인의 반대를 받았으나, 상당한 실적을 올릴 수가 있었다.

청묘법[편집]

靑苗法

농민은 춘궁기가 되면 절량이 되어 식량이나 볍씨를 지주에게서 빌었다. 그 이율은 춘궁기에서 수확기까지 6, 7할 내지 10할에 달하여 수확물은 채무를 반환하는 데 충당되고 농민은 몰락할 따름이었다. 청묘업은 농민에게 저리의 자금을 융통해주고, 고리의 채무에서 그들을 구제하려는 법률이었다. 현(縣)의 상평창(常平倉)에서 곡물이나 현금을 대여하고, 담보는 필요하지 않으나 10호 단위의 조합을 만들어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소작인은 지주가 보증인이 되며, 대개의 경우 현금을 대출하고 수확기에 곡물을 바치게 하였다. 또 반제기에 곡가가 오르면 현금지불도 허용되고 이율은 2할을 초과할 수 없게 했다. 청묘법이 시행되자 지주는 고리의 대부를 못하게 되었고, 또 종래의 고리대금이 두드러지게 부정(不正)한 행위로 간주되어 지주계급은 심한 반발로 대항했으나, 왕안석은 자기의 정치생명을 걸고 이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시역법[편집]

市易法

큰 도시에는 상공업의 조합(行)이 발달하여 정부 소요(所要)의 물자를 조달하는 대신, 정부로부터 영업의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조합은 소수의 호상(豪商)이 좌우하며, 소(小)상인은 대부분 호상으로부터 자금을 빌어 장사하고 있었으므로 그 이익의 대부분은 호상에게 착취당했다. 또 호상은 저점(邸店) 등의 창고업을 경영하여 지방상인이 물자를 운반해 오면 헐값으로 사들이므로, 상인은 손실을 두려워하여 물자를 운반하지 않아 상업이 쇠하여 산업이 침체하였다. 그래서 주요도시에 시역무(市易務)를 설정하여 상인의 물자가 팔리지 않을 때에는 사주고, 또 물자를 저당으로 자금을 대여하였다.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벌전(罰錢)을 징수하고 갚을 수가 없을 때에는 저당물을 매각하여 변상시켰다. 시역법 실시로 호상은 이익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가 없게 되어, 구법당(舊法黨)의 관료와 연합하여 후궁(後宮)에 작용함으로써 끝내 왕안석은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보갑법[편집]

保甲法

1070년 12월에 시행되었다. 그 실시목적은 처음에 제도방범(除盜防犯)의 경찰적 기능에서 점차 민병화(民兵化)함으로써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상을 실현하고 모병(募兵)의 폐(弊)를 고쳐서 군비(軍費)를 절약하여 거란·서하(西夏)의 침공에 대항하려고 한 것이다. 보갑편성의 방법은 민호(民戶)를 10가(家)(保)·50가(大保)·500가(都保)로 조직하고(1073년, 경기(京畿)에서는 5가(家)·25가·250가로 고쳐졌다), 각기 보장(保長)·대보장(大保長)·도보정(都保正)·부보정(副保正)을 두어 지도하였다. 또 주객호(主客戶)의 2정(丁) 있는 자 중 1정(丁)을 골라 보정(保丁)으로 하였다. 보갑의 임무는 처음에는 대보(大保)마다 5명이 윤번으로 제도(除盜)·방범(防犯)을 행하게 하고, 규정을 정하여 상벌을 주었으며, 경기(京畿)에 시행(試行)한 다음 점차 전국에 미치게 하였다. 1071년 기내(畿內)의 보정(保丁)에게 무사(武事)를 교습시키고 1075년 보갑의 관할을 사농시(司農寺)에서 병부(兵部)로 이관시켰다. 1079년 카이펑 부계(開封府界)의 대보장(大保長) 2,800여명을 모아 이듬해 보정(保丁)의 단교법(團敎法)을 정하고 카이펑 부계의 대보장을 교두(敎頭)로 하여 보정을 훈련시키고 점차 타로(他路)에도 확대시켰다. 1081년에는 오로(五路)의 의용(義勇)을 고쳐 보갑으로서 부분적으로 민병제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보갑의 민병화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구법당(舊法黨)의 반대로 중도에서 실패하고 1085년 보갑단교(保甲團敎)는 폐지되었다. 그 후 이 법은 남송(南宋)·명(明)으로 이어 내려갔는데 청(淸)에서는 10호를 1패(牌), 10패를 1갑(甲), 10갑을 1보로 하는 보갑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보마법[편집]

保馬法

1070년 보갑법(保甲法)을 실시한 2년 후에 보마법을 시행했는데, 처음에는 호마(戶馬)·양마(養馬)라고도 하였다. 송은 거란·서하(西夏)와 싸웠으므로 말의 수입이 끊겨 말의 확보가 곤란해졌다. 그래서 민간의 각 보갑(保甲) 중에서 말을 기를 자를 모집하여 조합을 만들어 관마를 주거나 말의 구입대금을 주어 평시에는 이를 사역(使役)함을 허가하였다. 말이 죽었을 때는 전액 또는 반액을 변상하게 하는 대신에 특수한 부가세를 면제하였다. 정부의 경비를 절감시키는 동시에 군마(軍馬)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효가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모역법[편집]

募役法

송나라 초의 조세의 징수, 도적의 추포(追捕) 등 지방 자치적인 직무는 향촌(鄕村)의 부유한 유지(有志)가 순번으로 맡아, 이를 차역(差役)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들의 부담이 무거워 그 개혁이 정치 문제화하였으므로 왕안석은 차역법을 모역법(募役法)으로 고쳤고, 역법(役法)중에서도 향호(鄕戶)를 괴롭히며 많은 재력을 필요로 하는 조세의 관리·운반 등의 역(役)은 백성에게 시키고 따로 급료를 주었다. 그 대신 이 역(役)에 해당하는 자로부터는 재력에 따라서 면역전(免役錢)을 징수했다. 또 이제까지 차역을 면제받고 있던 관호(官戶)·사관(寺觀)·상인 등으로부터도 약 반액의 조역전(助役錢)을 받았다. 이 때 불시의 출비(出費)에 대비하여 2할 가징(加徵)했다. 이를 관잉전(寬剩錢)이라 하고, 이들 수입을 모역법 실시의 재원(財源)으로 하였다. 이때까지 역(役)을 면제받았던 계급에도 부담시켰으므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나, 모역법은 백성에게 직업의 자유를 허용하고, 사회의 분업화(分業化)를 철저화시킨 진보적인 개혁이었다.

왕안석[편집]

王安石 (1021

1026)

북송(北宋) 중기 무렵의 정치가로서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강서성 임천(江西省臨川) 출생. 신종(神宗)의 시참지정사(時參知政事)가 되어 당시의 재정적 위기를 헤쳐보려고 신법(新法)을 만들어 부국강병(富國强兵)책을 썼다. 그후 상(相)이 되어 형국공(荊國公)으로 봉(封)하여졌다. 과거에 급제한 후 양저우(揚州)에서의 관계(官界) 진출을 출발로 여러 지방관직(地方官職)을 거듭하여 당시의 농촌 사회를 낱낱이 견문할 수 있었다. 그때의 농촌은 북송 초기의 안정기를 지나서 갖가지 모순이 표면화되고, 농민의 반란이 연달았다. 또 요(遼)·서하(西夏)의 관계는 재정 궁핍에 박차를 가해 그 어떤 개혁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왕안석은 중망(衆望)을 짊어지고 등장하여 신관청(新官廳)을 설치하는 등 순차적으로 신법을 시행했다. 그런데 운용을 맡은 사람들은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고 또한 신법은 대지주·호상 관료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큰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법의 시행은 어느 정도 농민·소상(小商)의 궁핍한 상태를 구제하고 국가 재정을 재건할 수가 있었다.그는 별도로 학제(學制)·과거제(科擧制)의 개혁을 단행했고, 시문에도 능하여 당송(唐宋) 팔대가(八代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신법당[편집]

新法黨

송대 왕안석의 개혁 정치를 지지하는 당파(黨派)를 말한다. 신법당은 남방 출신의 관료가 많고 진취적 기개(氣槪)가 풍부하여, 대지주·호상(豪商)의 이익을 대표하는 북방 관료가 많은 구법당(舊法黨)과 대립했다. 그러나 신종(神宗)·철종(哲宗)의 양조(兩朝)에 걸쳐 양당이 당쟁(黨爭)을 거듭하는 동안 초기의 혁신적 정책은 잊혀져 없어지고 휘종조(徽宗朝) 때 재상이 된 신법당의 채경(蔡京) 등은 국가의 수탈(收奪)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구법당[편집]

舊法黨

송대 왕안석·채경 등의 신법에 반대한 보수파(保守派)를 말한다. 신종(神宗)에게 신임을 받은 왕안석이 시행한 신법은 대지주·호상·관료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마광(司馬光) 등은 구법당을 결성하여 크게 반대했다. 구법당은 신종 다음의 철종(哲宗) 때에 일시 정권을 잡았으나 그 후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신법당의 채경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 큰 탄압을 받아 세력이 쇠퇴하였다.

사마광[편집]

司馬光 (1019

1086)

북송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정치가로, 또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한 학자로서 유명하다. 왕안석처럼 오랜 기간 지방관에 임용된 후 중앙에 기용되었으나 왕안석의 신법에는 반대였다. 예를 들면 모역법에 의해서 사람을 고용하면 응모하는 것은 부랑아(浮浪兒)들로서 촌락을 혼란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의 정책을 받아들였으므로 사마광은 사임했다. 그래서 『자치통감』의 편찬에 손을 대어 19년이 걸린 끝에 완성했다. 이것은 중국 역사서(歷史書)의 대표적인 것으로 예로부터 애독되어 왔다. 신종이 죽은 후 10세에 즉위한 철종의 섭정(攝政) 황태후(皇太后)에게 초빙받아 권좌에 앉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법당의 중심 인물로서 신법을 차례로 폐지하고 구제도를 다시 회복시켰으나 취임 8개월 만에 병사했다.

휘종[편집]

徽宗 (1082

1135, 재위 1100

1125)

신종의 아들로 북송 제8대, 북송 멸망 직전의 황제. 즉위 당초 구법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친정(親政)하면서부터는 신법당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에 신법당의 출신인 채경(蔡京)이 휘종의 신임이 두터운 환관 동관(童貫)의 추천으로 발탁되어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채경은 『역경(易經)』의 「풍형예대(豊亨豫大)」라는 괘를 들어, 지금은 경기가 좋아 돈을 뿌려 사업을 일으킬 시대라고 휘종을 부추겼다. 기뻐한 휘종은 궁정 안에 대동식물원(大動植物園)을 만들고, 서화를 충실히 하며 미술 골동품을 수집하던 끝에 도교(道敎)에 빠졌다. 천자의 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전국에서 진귀한 화목(花木)과 암석(巖石)이 모아지고 화석강(化石綱)이라 불리는 선단(船團)이 조직되어 카이펑으로 운반되었다. 이러한 황제의 취미를 기화로 하여 채경을 둘러싼 집단은 백성들로부터 착취를 되풀이하고 자기들 일족의 향락에 빠져 있었다.대외적으로는 당시 발흥하던 여진(女眞, 金)과 함께 숙적이던 요를 정벌했으나 그 후 위약(違約)을 비난하는 여진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에 황태자(皇太子, 欽宗)에게 양위(讓位)했다. 이듬해에는 재차 수도인 카이펑(開封)이 금(金)에게 포위되어 마침내 함락되었다. 송은 금이 요구하는 세폐(歲幣)를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휘종·흠종(欽宗) 등 종실(宗室) 3천 명은 인질이 되어 북방으로 끌려가고(靖康의 變) 휘종은 북방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