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서하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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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성립〔槪說〕[편집]

토번(吐蕃) 멸망 후, 다르마왕의 자손이 각지에 할거(割據)하여 분열하고, 티베트 불교도 여러 교파가 분생(分生)하여 병립했다. 곧 이어 11세기 중엽에 인도의 고승(高僧) 아티샤가 초청을 받아 티베트에 왔다. 그는 현밀일관(顯密一貫)의 수행(修行)을 역설하여 교리를 순화(純化)하고 라마교 확립에 공헌했는데 그 교파는 카탐파라 불리며, 후에 라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이후 사키아파와 카르규파가 일어나고 다시 카르마파, 파크모두파, 리콘파 등 여러 파(派)가 분립했다. 12세기 말에는 사키아파, 리곤파가 최대 종파(宗派)로 되고, 본산사원(本山寺院)을 중심으로 호족(豪族)의 경제력과 결합하여 승병(僧兵)을 길러 점차로 세속적 권력을 확대, 각지에 강력한 할거 세력을 형성해 갔다. 13세기에 들어서자 사키아파에 고승 파스파가 나타나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아 파스파 문자를 창안하고 티베트 최고의 종파로 발전했다.

탕구트족[편집]

-族

탕구트는 티베트계의 민족으로 원주지(原住地)는 쓰촨(四川)·칭하이성(淸海省) 경제의 산지이며, 6세기부터 토곡혼(土谷渾)과 수(隋)·당(唐) 사이에서 활동했는데 곧 이어 토번이 일어나 토곡혼을 합치게끔 되어 동쪽으로 이동하여 산둥(山東)·핑샤(平夏)·난산(南山) 등 3부로 분립했다. 당말에 평하부(平夏部)의 척로씨(拓路氏)가 대두하여 당조(唐朝)로부터 하국공(夏國公)으로 봉(封)함을 받아 이(李)라는 성(姓)을 하사받았는데, 동서 중계무역의 이득을 독점하여 차차 세력을 늘리고, 5대 무렵에는 이씨(李氏)의 독립체제가 한층 강화되었다.

서하[편집]

西夏

9세기 말, 탕구트 핑샤부(平夏部)에 이계천(李繼賤)이 나타나 북송(北宋) 지배에서 벗어나고 아들 이덕명(李德明) 시대에는 서쪽의 양(凉)·감(甘) 2주(二州)를 빼앗고, 티베트와 위르그의 세력을 물리쳤으나 다음 대(代) 이원호(李元昊)에 이르자 중국을 본떠서 여러 제도 문물을 정리하고 방비 체제를 굳혀 흥경부(興慶部)를 도읍으로 하여 드디어 1038년 서하(西夏, 大夏)를 건국했다. 그는 곧 송나라와 화약(和約)했으나 영속(永續)되지 못하고 서로 싸웠다. 남송대(南宋代)에는 금(金)과도 비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4대 이건순(李乾順), 5대 이인효(李仁孝)의 양대(兩代)에 걸쳐서 내정(內政)을 충실히 하고 경제적 번영과 문화의 흥륭(興隆)을 보였으며, 특히 불교 문화가 개화(開花)했다. 또한 서하 문자도 제정되고 불교 미술도 행해졌다. 얼마 안되어 몽골이 일어남에 따라 금과 형제국의 인연을 맺고 함께 몽골에 대항했으나, 1227년 몽골군에 멸망, 10대 190년으로 서하는 끊어졌다. 서하의 주요 민족은 탕구트족으로, 다시 토번인(吐蕃人), 위그루인, 한인(漢人)을 포함하고 중개무역의 이득을 독점, 일시적으로는 산시(陝西), 오르도스, 간쑤(甘肅)에 걸쳐서 국세를 떨치고 서역교통의 요충(要衝)을 차지하여 번영했다.

서하의 화목[편집]

西夏-和睦

서하가 발흥하자 북송(北宋)은 대군(大軍)을 서북 경계에 항상 배치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 경비가 막대하여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북쪽에서 거란(契丹)이 위협하였기 때문에 북송은 서하와 화친을 도모하여 1044년 인송(仁宋)은 이원호(李元昊)와 화약하고 이원호는 신하의 예(禮)를 갖춰 송조(宋朝)에 서표(誓表)를 바치고 하국 왕(夏國王)이라 칭하게 되었다. 송은 해마다 비단 15만 3천 필, 은 7만 2천 냥, 차(茶) 3만 근을 세사(歲賜)로서 주었다. 두 곳에 관영 무역장을 상설하여 호시(互市)를 행하기로 했으나 화친 관계는 영속(永續)되지 못했다. 이 호시에서는 서하에서 말·소·양 등 가축이나 모전(毛氈)·밀랍(蜜蠟) 등이 수출되고, 또한 송에서 견직물·향약(香藥)·자기(磁器)·칠기(漆器) 기타 물건이 수입됐다. 이것은 서하 경제의 중요한 수입원(收入源)이었는데 밀무역(密貿易)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