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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독일의 영방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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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영방국가〔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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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에서의 집권적 봉건 왕정이 확립되어 가고 있을 때, 독일에 있어서는 제후(諸侯)의 영방 주권이 확인되어 통일적 국가 형성에의 길이 막혀버린다.독일의 분권적 경향은 이미 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정책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프레드릭 2세)가 성속 제후(聖俗諸侯)를 위한 2칙령(勅令)에서 많은 특권을 승인한 것은 영방국가 형성에의 제1보가 되었다고 한다. 슈타우펜 왕조 단절 후 대공위 시대(大空位時代, 1256

1273)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황제의 지위도 선거후(選擧侯) 등의 이해에 좌우되어 권위를 잃었으며, 반대로 영방군주·제후에 의한 영방 내의 권력 집중이 진행되었다. 룩셈부르크가(家)의 카를 4세가 내린 금인칙서(金印勅書, 1356)는 선거왕제(選擧王制)를 법정화하여 제국의 안정과 통일을 기도한 것이었다고는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독일의 영방국가 체제를 확실하게 굳혔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 (프레데릭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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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Friedrich Ⅱ (1194

1250, 재위 1215

1250)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의 아들. 시칠리아에서 출생. 부제(父帝)의 사후 4세에 시칠리아 왕이 되었으며, 1212년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오토 4세의 대립국왕(對立國王)으로 추대되어 독일로 가서, 프랑스 왕의 원조를 얻어 오토를 물리치고 즉위하였다. 당시는 교황권의 전성기로서 황제는 종교상의 권리를 포기하고, 장자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앉히기 위해 성속제후(聖俗諸侯)에게 특권을 부여(1220, 1231∼1232), 영방체제(領邦體制)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1227년 십자군 원정을 중지한 까닭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게 파문(破門)당하였으나, 이듬해 원정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그 왕이 되었다. 귀국 후에는 자기 영토에 침입한 교황군과 싸웠고, 독일로 가서는 교황의 사주를 받아 배반한 하인리히를 체포, 차자(次子) 콘라트 4세를 왕위에 앉혔다. 후에 겔프 당(黨)의 롬바르디아 제도시(諸都市)를 정벌하여 교황 인노센트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켰으나, 리용의 종교회의는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고, 독일에 대립국왕을 세움으로써 제권(帝權)이 실추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절대주의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문예를 장려하여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호칭되었고 학예 특히 자연과학을 애호했다.

콘라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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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Konrad Ⅳ (1228∼1254)

독일 왕(1237∼1254), 시칠리아 왕(1250∼1254). 1237년 부왕(父王)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독일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국내 제후의 지원을 받고 있는 대립왕(對立王)과의 항쟁 때문에 애를 먹었다. 부왕의 사후(死後) 시칠리아 왕도 겸하여 교황과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항쟁을 받아, 1251년 이탈리아 원정을 하던 중 그 귀로에 병사하였다. 이로써 호엔슈타우펜가(家)는 단절되고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가 되었다.

카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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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Karl Ⅳ (1316∼1378, 재위 1346∼1378)신성 로마의 황제. 보헤미아 왕의 아들로서, 1356년 금칙인서(金印勅書)를 공포하여 독일 7선거후를 정하고 독일 국왕의 선거제를 확정하였다. 그는 영토를 넓히는 일보다 보헤미아의 통치에 더 힘을 기울였고 젊을 때 파리에서 공부하여 높은 교양을 몸에 지녀 독일 최초로 프라하에 대학을 세웠다.

금인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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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印勅書

Goldene Bulle

1356년 황제 카를 4세(룩셈부르크家)가 발포한 문서. 황제 선거와 선거후(選擧侯)의 상속 및 특권을 규정하고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으나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켰다. 주요 내용은, 선거는 7선거후(마인츠, 트리엘, 쾰른의 대사교, 보헤미아 왕, 파루트 백작, 잭슨 공, 브란덴부르크 邊境伯)의 공개투표, 다수결 원리에 의한다. 선거후령(選擧侯領)은 불분할 또한 장자 상속제를 취하고 관세 징수권 등의 특권, 자치적 재판권과 지고권(至高權)을 인정하는 따위이다.

독일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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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騎士團

제3회 십자군 때인 1190년 아크레에 설립. 원래 야전병원(野戰病院)으로서 예루살렘에 창설된 독일 기사단은 12세기 말까지 급속히 군사적 기능을 강화했고, 13세기에는 성지에 있어서의 행동의 자유가 좁아졌기 때문에 그 주요한 활동영역을 동부유럽으로 옮겨 슬라브 세계의 정복에 힘을 기울였다. 독일 기사단은 마침내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하여 뒷날의 프로이센 국가의 기초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1237년 독일 기사단은 리보니아 기사단과 합체함으로써 리가, 쾨니히스베르크, 토른, 메멜 등 장래의 가능성이 포함된 여러 도시를 영유했다. 동시에 독일 기사단령은 한자의 여러 도시와 접촉을 깊이하여, 유력한 산업국가로서의 변모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 기사단령은 1525년 세속령(世俗領)이 되어 프로이센 공국(公國)이라 칭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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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邊境伯

독일 기사단령과 함께 후의 프로이센 국가의 기반이 된다. 10세기에 설치된 노루드마르크에서 발전된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변경백은 12세기 아스카니엘가(家)의 변경백 시대에 동방 식민에서 활약하여 확대되었다. 1415년에 호헨촐레른가(家)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1618년 프로이센 공국(公國)을 합쳐서 영방국가 중 최강의 것으로 발전했다.

대공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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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空位時代 (1256

1373)

1254년 콘라트 4세의 죽음, 호엔슈타우펜 왕조 단절. 제후는 두 파로 갈라져서 영국 왕 헨리 3세의 아우, 콘포르의 리처드와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를 각각 선출했는데 사실상 독일 재위는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이로 말미암아 대공위 시대라 불린다. 1273년 합스부르크가(家) 루돌프의 선출로 혼란은 수습되었으나 제국의 분열을 심화시킨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합스부르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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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Hab- sburg

루돌프(재위 1273∼1291)가 황제로 선출되면서부터 제국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는 종언을 고했다.루돌프는 제국의 부흥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알사스, 스위스에 있는 가령(家領)의 확대에 노력하여 제국 제후를 능가하려 했다. 루돌프는 1287년 오스트리아를 빼앗아 합스부르크가(家)의 권력정책의 터전으로 삼았다.1438년 알브레히트 2세 이후 제위(帝位)는 세습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때 네덜란드, 헝가리, 보헤미아를 영지(領地)로 추가하였고, 카를 5세 때는 에스파냐 왕위도 겸하여 전성기를 맞이했다. 1556년에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의 양계(兩系)로 분리되어 전자는 펠리페 2세가 상속하였으나 1700년에 단절되었고, 오스트리아계는 마리아 테레지아 때 로트링겐가(家)로부터 프란츠 1세를 맞아, 이를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家)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1806년 동가(同家)는 나폴레옹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박탈당하여 단순히 오스트리아 황제라고만 불리면서 20세기에 이르렀으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카를 1세가 퇴위함으로써 유럽의 명문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스위스 3주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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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州同盟

1291년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 슈비츠, 운테르발덴의 삼림(森林) 3주가 농민의 자치권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결성한 ‘영구 동맹’이다. 스위스 독립의 효시가 된다. 모르가르텐의 싸움(1315), 8주(州)의 스위스 맹약단 결성(1353), 셈파하의 싸움(1386)을 거쳐 독립의 기초를 굳혔다.

영방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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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邦議會

영방국가에서는 영방 내의 유력한 기사·승려·시민의 대표가 등족(等族)을 형성하여 영방의회를 구성했다. 소위 신분제 의회에 해당하며 등족은 영방군주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했다. 영방의 통일은 등족의 저항을 배제하여 이루어졌고, 독일의 절대 왕정은 영방국가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