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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 권력의 성쇠〔槪說〕
[편집]영국의 왕권은 ‘노르만 정복’ 이래 봉건 제후(諸侯)를 누르고 집권적 봉건 왕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존왕의 실정(失政)에 의해서 귀족·대상인의 저항을 받았다. 1215년에 대헌장(大憲章) 승인. 헨리 3세(1207
1272, 재위 1216
1272)는 남프랑스 출신의 총신(寵臣)에 의한 전제적 정치를 실시하여 이것도 1258년 귀족의 저항을 받았다. 귀족은 옥스퍼드 협정을 제출하고 15명의 국왕 고문관 회의인 왕정 감시위원회를 설치했다. 후에 왕이 이것을 무시하자, 개혁파 귀족은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 하여 또 반란을 일으켜 국왕을 격파했다(루이스의 싸움 1264). 다음해 시몽은 귀족 및 고승(高僧)에, 주 선출의 기사와 도시 대표를 합쳐서 소위 ‘시몽 드 몽포르 의회’를 개최했다. 에드워드 1세의 치세가 되자 내란 시대 봉건제의 혼란을 수습, 국왕 대권에 의한 입법 활동도 실시되어 봉건 왕정의 재편성을 기도했다. 의회 제도도 영국 국제(國制) 속에 채택되었다. 1295년 소집된 의회는 성직자·귀족 외에 주와 도시의 대표를 추가하여 ‘모범의회’라 불리고 있다. 의회는 또한 국왕 자문회의적 성격이 강했는데 국정의 중심 기관으로서 상당히 계속적으로 개최된다. 영국의 왕정이 국민적 기반에 선 의회 왕정으로 접어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존왕
[편집]-王 John the Lackland (1167
1216, 재위 1199
1216)
결지왕(缺地王). 헨리 2세의 막내아들, 리처드 사자심왕(師子心王)의 아우. 방종한 성격으로서 부왕과 형에게 반역했다. 그 폭정으로 말미암아 ‘대헌장’과 함께 후세에 이름이 남았다. 리처드 1세 사자(獅子心王)을 중간에 두고 왕위를 계승한 존 결지왕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싸워 노르망디를 비롯한 르와르 강 이북의 대륙 영토의 전부를 잃었다. 그 때문에 그는 독일 황제 오토 4세와 손잡고 대륙 반공(反攻)을 꾀했지만, 그것 역시 1214년의 부빈싸움에서 필리프에게 패했으며, 그 후로는 그것을 회복할 가망을 완전히 상실했다. 다시 캔터베리 대사교의 선임 문제로 교황 인노센트 3세(인노켄티우스 3세)와 대립, 그에 의해서 성무정지(聖務停止)와 파문되는 실태(失態)까지도 초래하여 결국 왕국을 교황의 한 봉토(封土)로서 새로이 수령(1213)했다. 프랑스 영내의 실지 회복을 기도했으나 국내의 귀족은 종군을 거부, 부빈의 싸움에서 패하고 귀국했다. 캔터베리 대사교 스티븐 란그톤이 지도하는 반란을 당하여 이에 굴복, ‘대헌장’에 서명했다.
대헌장(마그나카르타)
[편집]大憲章 Magna Carta
1215년 6월 15일 서명. 영국 헌정 발달의 근본을 이룬 것이라 한다. 내용은 전문(前文)과 63조항으로 되었고, 교회의 자유와 특권이나 런던 시의 모든 면허와 습관을 보장하고, 어떠한 자유인도 불법적으로 체포·감금·재산 몰수·추방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봉건 귀족과 런던시의 봉건적 특권·관습적 권리를 확인하고 국왕의 자의적(恣意的)인 권력의 제한을 의도한 것이다. 따라서 인민의 권리를 주장·창출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헨리 3세
[편집]-世 Henry Ⅲ (1207∼1272, 재위 1216∼1272)영국 왕. 존 왕의 장자. 1227년부터 친정했는데, 모친과 왕비의 관계 때문에 극단적으로 프랑스인 정신(廷臣)을 중용(重用)했으며, 교회의 중요한 지위도 외국인에게 맡기는 등 교황과의 관계도 깊었다. 1255년에는 둘째 왕자 에드워드를 위해 시칠리아의 왕위를 얻으려다 거액의 국비를 낭비했으며, 또한 프랑스에 있어서의 실지회복을 기도하여 해외 원정비를 조달하려고 마그나 카르타의 취지를 위반하면서까지 부당한 과세 및 헌납금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귀족의 불만을 샀다. 1258년 이들 귀족의 반항으로 국왕 권력을 제한하는 옥스퍼드 조례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로써 외국인 총신은 추방되고, 국정은 한때 소수 귀족에 의한 과두정치 체제가 되었다. 그 뒤에 국왕은 새로운 왕당파의 출현에 힘입어 이 조례를 부정하자, 시몽 드 몽포르의 귀족반란이 일어나 국왕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뒤에 몽포르를 패사(敗死)시켜 왕권을 회복했으나, 왕태자인 에드워드(후의 에드워드 1세)가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시몽 드 몽포르
[편집]Simon de Montfort (?
1265)
프랑스에서 출생. 알비조아 십자군의 지휘자였던 동명의 시몽의 아들이다. 1230년 영국에 건너가 헨리 3세를 섬기고 왕의 누이 에리나와 결혼했다. 레스터 백작이므로, 편협(偏狹)한 당파 정신을 싫어하여 국왕과 귀족과의 조정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족의 지도자로서 국왕과 싸웠으며, ‘하원(下院)의 창설자’라 불린다. 1265년 이브스함에서 전사했다.
모범의회
[편집]模範議會
1295년 에드워드 1세가 소집한 의회. 귀족·고승(高僧) 외에 하급 승려의 대표, 각주에서 기사 2명, 각도시에서 시민 2명씩이 선발되어 참가했는데 영국 의회 제도의 모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영국의 의회는 노르만 왕조 이래의 봉건적 국왕 자문회의와 헨리 2세 이후 발달한 지방 자치 제도(州代官制, 순회재판제)와 결부되어 형성된 것이라 하며 국왕의 자문 기관으로서의 사법적·행정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 시대에는 이미 정치적 성격도 강화되어 1376년의 ‘훌륭한 의회’대에 이르러서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1세
[편집]-世 Edward Ⅰ(1239
1307, 재위 1272
1307)
헨리 3세의 장자. 노르만 정복 이래 영국 최초의 ‘국민적’인 왕이라 불린다. 왕태자 시절에 가스코뉴와 아일랜드의 영주로서 활약했으며, 1258∼1265년의 내란에는 부왕을 도왔다. 1265년 시몽 드 몽포르를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1271년 십자군에 참가, 부왕의 사후 원정 중에 왕으로 선출되어, 1274년에 귀국하여 대관(戴冠)하였다. 재판 행정 제도를 확립하고 일련의 제정법(制定法)을 발포, 봉건사회의 질서 유지에 노력하였다. 또 산업에 주력하고 1285년 상인법을 발령, 양모(羊毛)와 가스코뉴의 술 생산을 장려하였다.그는 프랑스 왕에게 신종(臣從)하여 대륙에 있어서 나바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문제, 아라곤 왕 알폰소와 교황·프랑스 왕 필리프 단려왕(端麗王)과의 조정(1291)에 활약이 컸다. 말년에 단려왕의 가스코뉴, 플랑드르 공격을 받아 1303년 파리 협정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또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조달 때문에 국내의 반란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에드워드 3세
[편집]-世 Edward Ⅲ (1312∼1377, 재위 1327∼1377)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의 장자. 1330년 모후 이사벨라와 정신(廷臣) 모어티머의 정권을 탈취, 즉위 당초에는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전쟁에 시종했는데, 1339년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 또 프랑스의 플랑드르 무역의 침해에 간섭하여 백년전쟁을 촉발시켰다. 왕자 에드워드 흑태자의 활약으로 크레시 싸움(1346)에서 대승하였다. 1355년에 재차 개전, 이듬해의 푸와티에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왕관 획득엔 성공하지 못하고 그 대신으로 아키텐을 얻었다.그러나 1369년에 재차 개전, 이번에는 강력한 프랑스 국민주의에 압도되어 대륙에서 철병했다. 말년에는 의회의 반대와 앨리스 페러즈를 열애(熱愛)하는 가운데, 아들 존 오브 곤트에게 정권을 농단당하였다. 그의 치세는 기사도의 최후를 장식하는 시대임과 동시에 장기에 걸친 대륙전쟁의 결과로서 봉건 군제(軍制)가 퇴색하여, 봉건 말기의 양상이 조야를 뒤덮고 있었다. 흑사병(페스트)의 만연은 그의 치세기에 해당되며, 또 정치의식의 앙양으로서는 1376년의 선량의회가 있었고, 위클리프의 개혁도 이 시대에 발단하였다.
에드워드(흑태자)
[편집]-黑太子 Edward (1330 ∼1376)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색의 갑옷을 입은 데서 흑태자(黑太子)라 불리었다.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노르망디에 원정, 크레시 및 칼레시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 1356년 푸와티에 싸움에서 프랑스 왕 장2세를 포로로 하고, 1362년 아키텐 및 가스코뉴 공(公)이 되었다. 1367년에는 카스티야 폐왕(廢王)을 원조하여 에스타냐에 침입, 폐왕을 복위시켰는데 그 때문에 아키텐에 중세(重稅)를 과하였으므로 그 지방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 중에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