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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아시아 제패〔槪說〕
[편집]13세기의 몽골 고원에서는 오논, 케룰론 두 강의 상류 지방에 사는 몽골의 일족에 태무친이 나와서 제부족을 통합하여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전몽골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천호(千戶)·백호(百戶)의 제도를 기반으로 말의 기동력을 이용한 친위군을 편성하여 동서 무역로에 군대를 진격시켜서 서요(西遼)의 옛 땅을 합병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정복하여 서북 인도에 침입, 서하(西夏)를 멸망시켜서 동서에 걸친 대지역을 영유(領有)했다. 그의 사후 몽골인의 농경 지대로의 진출은 적극화하여 2대째인 오고타이칸(汗)은 금(金)을 멸망시켜 북중국을 합쳤고, 또 주치의 아들 바투(拔都)는 유럽 원정을 감행하여 남러시아에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구유크칸에 이은 툴루이계 몽케칸(憲宗) 때에 아우인 쿠빌라이는 티베트·쓰촨(四川)·다리(大理)·미얀마·안남(安南)을 치고 훌라구는 서아시아로 진격하여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를 넘어뜨리고 일 한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몽골제국은 아시아에서 유럽에 걸친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제국은 안으로는 유목 지대와 농경 지대가 존재하고 또한 제민족을 다수 지배하고 있던 관계로 단일 조직에 의해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여 쿠빌라이가 5대째 대한(大汗, 世祖)이 되었을 때 4한국은 사실상 독립 분열되어 그의 종주권(宗主權)은 명목만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 정복 왕조인 원(元)을 세우고 남송(南宋)을 멸망시켜서 중국을 통일하고 일본·안남·자바 등의 원정에는 실패했으나 미얀마·티베트를 복속시켜서 칭기즈칸 이래 80년 동안 동으로는 몽골·만주·한반도로부터 서로는 서남아시아·러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한 것이다.
칭기즈칸
[편집]-汗
Chingiz Khan (1154?
1227, 재위 1206
1227, 成吉思汗)
원(元)나라의 태조(太祖). 몽골 제국의 건설자. 몽골 부족의 걸안씨(乞顔氏) 출신으로서 네 형제 중의 장남이다. 태무친(鐵木眞)이란 이름은 부친인 에스가이가 타타르부(部)를 쳤을 때 적의 용장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가 9세 때(『元朝秘史』) 부친은 타타르부와의 싸움에서 독살되고 많은 부하들이 배반하여 지족(支族)인 타이츄트부에 예속되었다. 현모 호에룬은 구신(舊臣)을 슬하에 모으고 태무친을 내세워 걸안의 가명(家名)을 잇게 했으나 고난의 세월은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태무친은 34세경 드디어 강적 타이츄트부를 격파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1204년에는 나이만부의 다얀 한과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 내외 몽골을 세력하에 두었다. 이리하여 1206년 52세 때 오논 강변에서 개최된 대(大)쿠릴타이에서 추대되어 대한(大汗)의 자리에 올라 칭기즈칸이라 칭했다.칭기즈칸은 기동력이 뛰어난 유목기마군단(遊牧騎馬軍團)을 교묘하게 통솔하여, 단기간에 아시아의 태반과 유럽 일부를 정복하였다. 그 흉폭하고도 신속한 원정은 유라시아 각지에 일대(一大) 공황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반면에 광대한 지역이 강력한 단일 정권하에 놓여졌기 때문에 이종(異種)의 문화권과 교류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칭기즈칸은 개명적(開明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유목민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정주민(定住民) 사회의 문화에 빠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유목민 고유의 유연하고 상무적(尙武的)인 요소를 농경민(農耕民) 사회의 통치에 끌어들여 전례에 없을 만큼 안정된 정복왕조의 바탕을 확립하였다.
대몽골제국
[편집]大蒙古帝國
1206년 칭기즈칸에 의해 건설된 제국으로서 국가 기구의 근간(根幹)에는 천호·백호제라는 행정적·군사적 집단 단위로 조직된 사회조직이 있다. 영역의 확대에 따라서 이 천호·백호의 편제를 기초로 한 일족·공신을 영주로 하는 거대한 유목영주제 국가를 성립시켰다. 후에는 중국의 원(元) 왕조를 종주국으로 하는 여러 한국(汗國)으로 갈라져 그 연합으로 이루어진 대제국으로서 약 1세기 반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 통치했다.
칭기즈칸의 서정
[편집]-西征
서정의 목적은 서아시아 방면의 대상(隊商) 무역을 지배하여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몽골의 통상 사절이 호라즘의 국경 오트랄에서 암살됐다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1219년 이후 7년에 걸쳐서 호라즘을 치고 그 왕자를 인더스 강가에서 격파하고 동으로 귀환했는데, 별동대는 남러시아를 정복하여 아시아의 동서에 걸친 영토를 획득하고 여러 아들에게 분봉(分封)하여 후에 여러 한국(汗國)의 기초가 되었다.
칭기즈칸의 영토분배
[편집]-領土分配
영토(領土)의 분배는 칭기즈칸의 만년(晩年)에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1) 칭기즈칸이 스스로 근거를 두었던 본거지(本據地) 몽골 본토에는 막내 아들 툴루이가 계승하는 일이 묵인되어 있었다. 큰아들부터 차례로 양친의 슬하를 벗어나 독립해 가는 유목민 전래의 상속(相續)에 관한 습관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들의 상식에 속했다.(2)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에게는 킵차크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러시아와 시베리아의 남서부분이 약속되어 훗날 킵차크 한국(汗國)의 기초가 되었다.(3) 차남 차가타이에게는 추 강 유역 일대의 카라키타이(西遼)의 옛 영역이, (4) 3남(三男)으로 칭기즈칸 다음 대의 대한(大汗)이 되었던 오고타이에게는 전에 나이만 왕국이 있었던 땅이 주어졌다. (5) 그리고 실자(實子)에의 분여(分與) 외에 카사르(칭기즈칸의 동생)를 비롯한 동생들에게는 오늘날 중국의 동쪽지역 부분에서부터 내몽골 지역에 걸친, 싱안링(興安嶺)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각각 주어졌다.
오고타이 한국
[편집]-汗國 Ogotai (1224
1310)
몽골제국의 4한국 중 하나. 1224년 칭기즈칸이 나이만부의 옛땅 이르티슈강의 상류 지방, 대알타이 산맥 남쪽 기슭의 초원 지대를 제3자인 오고타이에게 분봉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수도는 이리 부근의 에밀이었다. 제한국 중의 강국으로 오고타이(太宗)와 아들 구유크(定宗)는 대한(大汗,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칭기즈칸의 4자 툴루이의 장자 몽케(憲宗)가 대한이 되고 나서부터는 대한위 계승권을 잃고 툴루이 일족과의 대립 항쟁을 초래하여 혼란 중에 쇠망한다.
오고타이칸
[편집]-汗 Ogotai Khan (1186
1241, 재위 1229
1241)
몽골제국의 제2대 황제. 태종(太宗). 칭기즈칸의 3남. 부친의 유명(遺命)에 따라 현명한 신하 야율초재(耶律楚材)를 기용하여 대규모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중국식 징세 방식을 채용하여 국력의 발전에 노력했다. 또한 페르시아·남러시아를 정복(바투의 원정)했으며, 수도를 오르콘강 유역의 카라코람에 정하고(1235) 제국의 기초를 굳혔는데 오고타이 사후는 원(元) 및 다른 4한국으로 분열했다.
야율초재
[편집]耶律楚材 (1190∼1244)
원조(元朝) 창업의 공신. 자(字)는 진경(晋卿). 요(遼)의 동단왕(東丹王) 8대손으로 부조(父祖) 때부터 금(金)을 섬겼다. 학문을 좋아하고 박학(博學)하며, 천문·지리·율력(律曆) 및 석로(釋老)·의복(醫卜)의 설에도 통달하였다.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선종(宣宗)이 남도(南渡)한 후 연경(燕京)에 머물렀다. 1215년 몽골이 연경을 함락한 후 태조 칭기즈칸을 섬기게 되어 이후 중용되었다. 1219년 태조의 서역 원정에 종군(從軍)하고 태조 사후에는 태종(太宗)의 즉위에 힘을 써 중용되었다. 1234년 금(金)이 망하자 초재는 한토(漢土)의 경영에 진력하여 몽골의 정치적, 경제적 기초를 굳혔다. 태종의 사후 황후(皇后)는 이슬람 상인(商人)만을 신임하고 초재를 멀리하여 그는 울분 속에 병사하였다. 저서에 『잠연거사집(湛然居士集)』 14권, 『서유록(西遊錄)』 1권이 있다.
바투의 서정
[편집]-西征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의 아들 바투(1207
1255)는 오고타이칸(太宗)의 명을 받고 유럽에 원정한다(1236). 이 원정은 치밀한 준비 끝에 실행되었다. 이전의 러시아 원정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몽골은 멀리 러시아 동유럽 땅의 정보수집에 힘썼다. 이와 같은 만전의 준비를 갖춘 몽골군은 중앙아시아에서 아랄해의 북방을 서진(西進)하여 러시아의 평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지배적인 권위를 차지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공(公)도 무찔러 러시아를 석권했다. 1240년에는 러시아 유수의 미도(美都) 키예프를 함락, 파괴를 자행하다가 기세를 몰아 동유럽에 난입하여 헝가리, 폴란드 땅을 짓밟았다.당시의 유럽에는 안정된 통일 정권이 없는 데다가 산재하는 각 세력 간에는 시기심이 짙게 깔려 있어 이를 이용한 몽골군은 각지에서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이에 동·중앙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몽골군은 다시 서유럽으로서의 침공을 검토하고 있었으나 마침 그때 몽골군 진영에 오고타이의 사망급보가 전해져 몽골은 즉각 군을 철수했다. 그리고는 볼가강 하류의 사라이에 도읍하고 킵차크 한국을 건국했다. 유럽에 있어서 이것은 결정적인 파멸을 피한 행운의 돌발사(突發事)였음에 틀림없다.
차가타이 한국
[편집]-汗國 Chaghatai (1227
1269)
몽골제국 4한국 중의 하나.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
1241)와 그 자손의 영토. 알말리크를 수도로 하는 그 영토는 이리 하곡(河谷)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전역을 포함하는 초원 지대로서 독립국이 된 것은 카이두 전쟁 후 원조(元朝)와의 우호 관계가 성립된(1305) 8대 두와칸(재위 1274
1306) 때이다. 그러나 그 후 원조나 일 한국과 불화가 생긴데다 한국 내부에서의 권력 투쟁 등에 의해서 동서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1321).
몽케칸
[편집]-汗Mngke Khan (1208
1259, 재위 1251
1259)몽골제국 4대 황제. 헌종(憲宗). 칭기즈칸의 손자. 툴루이의 장자. 즉위는 바투의 명령에 의한 것인데 그 때 태종·정종 등의 후왕파(後王派) 일파를 누른다.카라코람에서 내정을 정비하고 국내의 평정을 얻자 군대를 파견하여 고려(高麗)를 침공하였으며, 둘째 아우 쿠빌라이를 티베트·다리(大理)·안남(安南)으로, 셋째 아우 훌라구는 서아시아로 원정시켰다. 자신도 남송(南宋) 토벌을 했는데 합주(合州:重慶)에서 병사했다.
훌라구의 서정
[편집]-西征 Khulagu
칭기즈칸의 손자, 툴루이의 셋째 아들 훌라구는 형 몽케(헌종)의 명령으로 서정한다(1253). 톈산(天山) 북로에서 키르기스 고원을 남하하여 사마르칸트에 들어가서 페르시아 제후(諸侯)의 알현(謁見)을 받고 카스피해 남안의 무라히다족을 정벌한다.이어 바그다드에 도읍한 아바스 왕조 사라센 제국을 멸망시킨다(1258). 계속해서 시리아 원정을 하는데 아레보에서 헌종의 부보를 듣고 일단 타브리즈의 거성에 돌아갔으나 이 곳에 영주하여 일 한국을 세웠다.
일 한국
[편집]-汗國 Ile (1258
1411)
몽골제국 4한국의 하나. 칭기즈칸의 손자. 툴루이의 셋째 아들 훌라구가 1258년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정권을 멸한 뒤에 타브리즈를 서울로 정하여 건국, 페르시아, 소아시아를 중추지역(中樞地域)으로 그 세력을 떨쳤다. 먼저 로마 교황, 크리스트교국(敎國)과 동맹을 맺고, 이슬람교를 받드는 이집트의 마물루크 왕조 및 킵차크 한국, 차가타이 한국과 싸워 이기고 내정을 정비했으나, 한위(汗位) 계승문제로 정치적·경제적 동요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잔칸(1295∼1304)이 왕위에 오르자 피지배 민족인 이란인과의 융합을 꾀하며,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성원(聖院)·학교·천문대(天文臺)를 세웠으며, 이슬람 문화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군제(軍制)·세제(稅制)를 대폭적으로 개혁하여 일한국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며, 라시드 웃딘 등의 뛰어난 문인·학자가 배출되었다. 그 후 한위 쟁탈과 재정(財政)의 문란 때문에 국세(國勢)가 기울어지고, 동방에 티무르국(國)이 일어나자 혼란 가운데 멸망하였다(1411).
쿠빌라이칸
[편집]-汗 Khubilai Khan (1215
1294, 재위 1260
1294)
몽골제국의 5대 황제. 원조(元朝) 초대 황제 세조(世祖). 칭기즈칸과 견주는 영웅으로서 어려서부터 총혜(聰慧)하였고 후에 한인(漢人) 유병충(劉秉忠)을 스승으로 하여 학덕(學德)을 수양하고 막료에는 영재(英才)를 모았다. 형 헌종 몽케의 영향을 받아 티베트·다리·안남에 원정했는데 악주(鄂州:武昌)의 전선에서 남송(南宋)과 싸울 때 형 몽케는 진중에서 죽었다. 쿠빌라이에 반대하는 오고타이 칸계의 사람들은 당시 카라코람에 있던 몽케칸의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를 옹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1260년 내몽골의 카이핑(開平)에서 급히 황족 제장(諸將)의 집회를 열고 대한에 취임한다.
원제국의 성립
[편집]元帝國-成立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중국에 세운 왕조. 1271년 국호를 원이라 정하고 남송(南宋)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한 세조는 상도(上都:舊都 開平)·대도(大都:수도로서 지금의 북경)의 양 서울을 포함한 장성(長城)·화북(華北) 지대를 제국 영토의 근간으로 새 정권을 수립하고, 정치 조직도 중국의 집권적 관료제를 채용했다. 따라서 제국 내의 유목 사회도 원조 정권 내에서 머물려고 하는 한 순응하지 않을 수 없고, 한편 신체제에 반대하는 것은 원조 정권 외로 분립했다. 이리하여 서방의 유목적 제후령(諸侯領)은 점차 분리되고 몽골제국은 원조(元朝)를 종주(宗主)로 하는 제한국(諸汗國)의 연합 정권이 되었다.
카이두 난
[편집]-亂 카이두(?
1301)는 태종 오고타이의 손자로서 오고타이 한국 제4대 칸이다. 난(亂)은 4대 헌종이 죽고(1259) 쿠빌라이칸과 아리크부카의 형제가 대한 자리를 놓고 다투었을 때에 시작된다(1267
1308). 카이두는 어린 동생 아리크부카를 옹호하여 투르키스탄 일대에 세력을 뻗치고 마침내 킵차크 차가타이와 동맹하여(1269) 세조 쿠빌라이의 원조에 대항하였다. 30여 년에 걸쳐서 승패·발전·권모가 있었고, 그의 죽음(1301)에 의해서 낙착되었거니와 그의 아들 차바르 때에 화평했는데 원조와 제 한국과의 관계는 상호 독립화하여 대한(大汗:황제)에 의한 통일성이 상실되었다.
쿠릴타이
[편집]Khuriltai
몽골 말로 집회를 의미하는데 부족이나 씨족의 공적인 집회를 가리킨다. 개최는 비교적 여가가 있는 봄·여름에, 장소는 하반(河畔)의 천막 안이 보통이다. 칸(汗)의 추대 즉위, 원정의 가부, 법령 규칙의 결정 등 공적 사항이 합의 결정되었다. 몽골제국의 성립 후에는 국가적 집회로서 왕후 제장이 참가하는 중요하고도 성대한 회의가 되었다. 대한위(大汗位)가 세습화되기에 이르러 형식화되어 분쟁의 원천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