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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십자군과 라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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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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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回十字軍

십자군은 처음부터 반드시 종교적 목적으로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제4회 십자군은 종교적 목적이 전혀 도외시된 영토 획득과 약탈이 노골적으로 나타난 점이 특색이다.이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에 있었던 인노센트 3세의 주장에 의한 것으로서, 당초 이슬람측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예루살렘 공격을 용이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베네치아 통령(統領) 엔리코 단도로는 병원(兵員) 수송비의 부족을 이유로 십자군을 아드리아해 동안(東岸)의 자라시 공격에 파견하였고, 다시 비잔틴 제위(帝位)를 둘러싼 내분을 틈타 하필이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하여 이 곳을 점령, 약탈시켰던 것이다. 이 때 이후로 베네치아가 이 원정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여기서는 제후(諸侯)의 약탈·영토 획득의 욕망이 베네치아 상인의 상권 획득에 이용되고 있다. 또한 교황은 일단 십자군을 파문했는데 후에 파문을 해체하고 콘스탄티노플 총사교(總司敎)를 새로 두었다.

라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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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國

제4회 십자군에 의해 비잔틴 제국(帝國)에 일시적으로 건설되었던 국가. 제4회 십자군은 처음 이슬람교도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격목표로 하였으나, 베네치아의 통령(統領) 단돌로는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어 이를 점령하였다. 그 후 비잔틴 황제와 십자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십자군은 라틴 제국을 세운 후, 플랑드르의 보두앵을 황제로 삼아 봉건국가를 수립하였다. 이 때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의 8분의 3과 아드리아노플, 갈리폴리, 낙소스, 안드로스, 유비아, 크레타, 이오니아 제도(諸島)를 영유하고, 제국내의 상업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1261년 니케아를 수도로 한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라틴 제국을 멸한 후, 수도를 옛 도읍으로 옯겼다.

소년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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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十字軍

1212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어났다. 독일의 경우는 도중에 저지당했으나 프랑스의 소년들은 마르세유의 상인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버렸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십자군의 권설(勸說)을 위해 교황이 파견한 설교사들에 의해 자극된 이상하리만큼 열광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증명하고 있다.

제5회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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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回十字軍

헝가리 왕 엔드레 2세, 오스트리아 후(侯) 레오폴트가 참가하여 제5회 십자군(1217∼1221)이 파견되었다. 아크레 상륙 후에 그들은 곧 우세한 아유브군과 직면하게 되어, 팔레스티나 탈환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이에 1218년부터 1219년에 걸쳐서 예루살렘 왕(王) 휘하의 프랑크 시리아 군은 아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하고 나일강 어귀의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에 아유브 왕조의 술탄 말리크 알 카밀은 화의(和議)를 제창하고 아울러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의했다.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 시리아 군은 무모하게도 카이로 진격을 개시했다. 1221년 결과는 프랑크 시리아군의 완패(完敗)였다. 당연히 다미에타는 포기되었다.

제6회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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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回十字軍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과의 약속을 미루었기 때문에 파문되자 겨우 실시한 것인데, 그는 이슬람 세계와 접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전투를 하지 않고 상대방의 대립을 이용하여 1229년 조약으로 예루살렘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1917년 영국인이 점령할 때까지 이슬람 교도의 수중에 있었다.

십자군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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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字軍-影響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영향을 대략 간추려 보면 첫째, 교황의 주도로 행해진 십자군 원정이 실패함으로써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교도들의 신앙심도 약해졌다. 둘째, 원정에 참가한 제후·기사 들의 몰락으로 봉건세력이 약화되었으며, 그 대신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적인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셋째,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과의 교통이 열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무역이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각지에서 상업과 도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넷째, 십자군을 통하여 서유럽인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동방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으로 서유럽문화에 새로운 기운(르네상스)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