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이베리아 반도 제국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이베리아 반도 제국〔槪說〕[편집]

이 시대에 ‘레콘키스타’의 진행과 함께 특히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이 국력을 굳히고 교권·귀족·도시도 세력을 뻗쳐서 중세 신분제의회(코르테스)의 성립을 보았다.카스티야 왕국은 코르도바(1236), 세비야(1248)를 점령하여 이슬람을 압박하고 아프리카 침입도 계획하게 되었으나, 오랜 전쟁 동안에 귀족의 힘이 강해지는 반면 농업은 쇠퇴하고 강대한 무력·경제력을 가진 대교단(大敎團)이 생겨서 훗날 에스파냐 국가의 불균형이 이미 싹트고 있었다. 13세기 후반의 국왕은 일류국을 자부하여 황제권에조차 도전하였고, 백년전쟁중에는 거의 프랑스를 지지하여 영국 함대를 격파하기도 했다(1372). 원래 왕의 봉신회의(封臣會議)였던 코르테스는 11세기 이후 발달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도시 대표도 참가하여 국왕·귀족이 대립하는 동안 주로 국왕측을 지지했다.아라곤 왕국은 카탈로니아를 합병한 다음에도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고(1229

1235), 지중해에 진출하여 북아프리카 정복을 계획하고 다시 십자군을 자칭하여 시칠리아를 점령했는데(1282

1285), 국내의 귀족·도시는 이에 반대하여 코르테스의 이름으로 왕권의 제한을 결의했다(1283, ‘아라곤의 마그나 카르타’). 그 후 국왕은 시칠리아와 사르지니바, 코르시카를 교환하고 오랫동안 제노바, 피사와 싸웠으나 14세기 중반에는 코르테스를 누르고 15세기 초에는 시칠리아까지도 합병하여 한때 지중해를 제압했다.포르투갈 왕국은 영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1294) 경제 발전에 노력하였고, 드디어 카스티야를 격파하여 독립을 완전히 확보했다(1385).

페르난도 3세[편집]

-世 Fernando Ⅲ (1199∼1252)

카스티야 왕 (1217∼1252), 레온 왕(1230∼1252). 양왕국을 최종적으로 통합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투장(鬪將)으로서 안달루시아에서 활약하였고, 코르도바, 세비야, 무르시아 등의 유력도시를 공략하는 한편, 내치에도 힘을 기울여 살라망카 대학의 창설, 절대주의 확립에의 기초 법전이 된 「칠편법(七篇法)」의 편찬에도 착수했다. 1671년 시성(諡聖)되었다.

페르난도 5세[편집]

-世 Fernando Ⅴ (1452∼1516)

카스티야 왕(1474∼1504), 시칠리아 왕(1468∼1516), 아라곤 왕(1479∼1516)으로서는 페르디난도 2세, 나폴리 왕(1504∼1516)으로서는 페르난도 3세, 통일 에스파냐 왕으로서는 페르난도 5세라고 부른다. 1469년 카스티야 공주 이사벨라와 결혼하고 다년간 국토통일의 현안(懸案)을 해결했다. 르네상스 군주의 전형으로서 절대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힘썼고, 종교재판을 조직하였으며, 무어인을 박해, 또 아라곤의 농노해방을 추진시켰다.

알함브라 궁전[편집]

-宮殿 Alhambra

왕권·교권(敎權)의 신장과 다양한 문화의 유입에 따라서 이 시기 문화의 특색은 우선 로마네스크, 고딕, 비잔틴, 모슬렘 등의 여러 양식이 중첩된 궁전·사원 등의 대(大)건축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그라나다 회교국의 이 궁전(대부분 1248

1354년 건축)은 이슬람 양식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기 최후 최대의 걸작이며, 그라나다 함락 후 수세기에 걸쳐서 파괴당하고 개수를 했으나 1862년 이후의 복구 계획에 의해서 거의 원형을 찾아볼 수가 있다.에스파냐의 그라나다 교외에 있는 이슬람 건조물로 ‘빨간성(城)’의 뜻. 13∼14세기에 건조 된 것으로 주위가 약 3.5km이다. 장려한 홀·열주(列柱)·정원·분수·온천·거실(居室)·모스크 등이 있으며, 내부는 아라베스크로 장식되고 원개(圓蓋)는 종유석상(鐘乳石狀)의 장식으로 덮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