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국제대립의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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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대립의 격화〔槪說〕[편집]

19세기 말 삼국동맹(三國同盟), 프·러 동맹(佛露同盟), ‘영광 있는 고립’을 고수하는 영국, 이 3자(者)의 불안한 균형도 오래가지 못하고 독일의 경제적·군사적 발전은 영국으로서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20세기 초엽 유럽의 정세는 영국·독일의 제국주의적 대립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되고, 그것은 양국의 해군 확장 경쟁, 소위 건함 경쟁(建艦競爭)이 되어 격화한다.

한편 러·일전쟁(1904)은 이들 국제 관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유럽 확대와 프랑스와의 싸움을 피하고 독일의 진출을 막기 위해서, 영국은 독일과 대항 관계에 있는 프랑스와 오랜 세월의 대립을 버리고 러·일 개전(開戰) 직후에 영·프협상(英佛協商)을 성립시켰다(1904). 패전 후의 러시아는 국내 혁명 세력을 누르고 그의 국내 모순을 대외 침략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한편 독일의 급속한 진출과 러시아의 혁명화를 두려워한 영국도 러시아를 자기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어 여기에 영·러 협상(英露協商)이 맺어지고(1907), 3국 동맹에 대한 3국협상이 성립되었다. 3국동맹은 이탈리아 이반(離反)으로 약체화함으로써 사실상 독일 포위 체제가 착착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하고 대립해 있는 동안, 그 주변에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여러 나라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분쟁이 쉴새없이 일어나는데다 위기의 초점은 점차로 발칸 반도에 집중되고 있었다. 1908년의 터키 혁명 직후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두 주를 병합하고 이러한 사실이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립을 한층 심각하게 했다. 그래서 1911년 모로코 사건은 이탈리아와 터키와의 전쟁(이·터 전쟁, 1911)을 초래하고 그것은 다시 발칸 동맹의 발칸 전쟁(1912

13)을 초래하는 등 연쇄반응을 일으켜, 이들 분쟁은 결국 전면적인 파국으로 치달아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점차 유도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프 협상[편집]

英佛協商

1904년 영국·프랑스 양국이 공동의 적 독일의 진출을 방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관해서 맺은 협상. 내용은 이집트와 모로코를 비롯하여 뉴펀들랜드, 서아프리카, 사이암, 마다가스카르, 뉴해브리디즈 등 양국의 분쟁 지역을 원만하게 해결한 것이다. 협상의 핵심은 이집트에 있어서의 영국의 우월권(優越權)을, 모로코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우월권을 서로 승인하는 데 합의한 것이었다.

영·러 협상[편집]

英露協商

1907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벌써부터 분쟁의 지역이었던 페르시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에 관해서 원만하게 타협한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세력 범위를 규정하였고,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의 범위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티베트의 영토 보전을 도모하는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 결과 영국은 러시아의 티베트 진출 위협을 벗고, 한편 러시아는 영국과의 타협하에 발칸 진출을 기도하게 된다.

삼국협상[편집]

三國協商

프·러 동맹(1891), 영·프 협상(1904), 영·러 협상(1907)에 의하여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세 나라 사이에 생긴 제휴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특정 조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협상의 성립은 외교적으로는 이들 세 나라의 독일 포위 체제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데, 동시에 이것은 식민지 지배를 토대로 맺어진 것이며, 추축국(樞軸國) 견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건함 경쟁[편집]

建艦競爭

영국과 독일 양국 사이의 전함 건조 경쟁. 세계 정책에 관여하게 된 독일은 영국에 필적하는 해군력을 가질 필요가 절대적이어서, 1898년과 1900년 갖가지 해군법(海軍法)을 제정하고, 해군의 군사력 확장에 노력했다. 영국도 이것을 묵과할 수 없어 이에 격심한 건함 경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동양이나 지중해로부터 함대를 영·프 해협으로 증강하는 등, 대립이 심각해져 경쟁의 중지 교섭도 결렬되고 경쟁은 한층 격심해졌다.

모로코 사건[편집]

-事件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모로코의 탕헤르항(港)을 방문, 모로코의 영토 보전 및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프랑스와 대립했고, 영·프 협상에 의해 영국은 탕헤르의 국제관리를 조건으로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우월적 지위를 승인했다. 이에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을 방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중 프랑스의 동맹국 러시아가 러·일전쟁(露日戰爭)에 시달리고 있는 때를 이용, 1905년 3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탕헤르항(港)에 상륙, 프랑스에 반감을 갖는 술탄에 우호와 원조를 약속하여 프랑스를 위협했다. 이것이 제1차 모로코 사건으로 1906년 이러한 국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알헤시라스에서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독일의 의견은 관철되지 못하고, 오히려 영·프의 결합이 강화되었다. 1911년 독일은 모로코의 내란을 구실로 군함을 아가디르에 파견했으나 또다시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함으로써 독일이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독일과 프랑스는 한때 전쟁의 위험마저 조성되었으나,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하는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마침내 양보하여 그 해 11월 4일 독·프 협정을 맺어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획득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령 콩고의 북부를 독일에 양도하였다. 이것을 제2차 모로코 사건이라고 하며, 제1차 세계대전의 국제관계의 긴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탈리아·투르크(이·투) 전쟁[편집]

伊土戰爭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터키)의 전쟁.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북안(北岸)의 트리폴리의 영유를 바라고 있었는데, 제2차 모로코 사건으로 열강이 분망한 틈을 타서, 1911년 11월 투르크에 선전(宣戰)하고 트리폴리를 침략하였다. 전투는 투르크군의 저항으로 별 진전이 없었으나, 결국 열강의 조정으로 1912년 10월 휴전이 성립되고,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영유가 인정되었다. 이같이 열강이 투르크령에 대한 침략을 방관하게 되자, 발칸 제국은 자극하여 발칸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곧 이어 제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이·투 전쟁은 이탈리아가 3국동맹으로부터 이탈하는 전조(前兆)가 되었으며, 독일과 투르크의 접근을 촉진시켰다.

발칸의 위기[편집]

-危機

복잡한 민족 구성을 이룬 발칸(Balkan) 반도는 타오르는 민족주의와 열강의 이해가 얽히고 합쳐서 ‘유럽의 화약고(火藥庫)’라고 불렸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많이 사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주를 병합하여 버렸고, 슬라브계 세르비아의 반(反)오스트리아 기운에 기름을 부었다. 러시아도 범(汎)슬라브 주의의 기치 아래 이들을 이용하고 그 영향하에 발칸 동맹을 결성시켰다(1912). 이 동맹은 이·투 전쟁으로 약체가 된 오스만제국에 개전했으나(제1차 발칸 전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영토 할양을 둘러싸고 또다시 전쟁이 되어서(제2차 발칸 전쟁), 국제 긴장은 한층 더해 갔다.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편집]

汎-主義-汎-主義범게르만주의란 발칸 반도에 있어서 게르만(German) 민족을 주체로 하여 발칸을 통일하려는 사상·운동을 말한다. 실제로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침략 진출을 위해 이용된 것인데 독일의 소위 ‘3B 정책’은 그 구체적인 현상인 것이다. 한편 이 주의·운동에 대항하는 것이 슬라브(Slave)인의 범슬라브주의이다. 슬라브 여러 민족의 독립·통일을 노린 이 운동은 18세기 말경부터 일어나 투르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여러 제국(帝國)으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러시아는 독립을 원조한다는 명목으로 이것을 제국주의 정책에 이용했기 때문에 분쟁의 씨가 되었다.

발칸 동맹[편집]

-同盟

이·투 전쟁(1911

12)이 진행되고 있던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의 4개국 사이에 개별적으로 맺어진 방위동맹(防衛同盟). 불가리아, 세르비아 사이(3월), 이어 그리스, 불가리아 사이(5월),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사이(9월)의 순서로 맺어졌다. 이 동맹은 그리스를 제외하면 발칸에 있어서의 슬라브 세력의 결집일 뿐 아니라, 범슬라브주의의 구체적인 출현이었다.

발칸 전쟁[편집]

-戰爭

오스만 제국이 이·투 전쟁으로 고심하는 틈을 타 발칸 동맹 여러 나라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제1차 발칸 전쟁, 1912

13).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와 강화(講和)를 맺고 응전하였으나 고전(苦戰)을 했고, 결국 1913년 런던 조약으로 발칸에 있는 영토가 할양되었다. 제1차 발칸 전쟁 후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할양된 영토를 둘러싸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대립하여 전쟁이 된다(제2차 발칸 전쟁, 1913). 세르비아측에 몬테네그로, 그리스, 루마니아가 합세, 불가리아는 항복하고, 1913년 부쿠레슈티에서 강화조약을 맺는다. 세르비아, 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했으나 불가리아는 탈락되었기 때문에 독일측에 기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