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이집트·서아시아의 민족운동
이집트·서아시아의 민족운동〔槪說〕
[편집]19세기 후반 이래 유럽 세력의 침입이 심해지더니 결국 이 지역을 종속시켰다. 그런 반면 독립을 원하는 민족적 자각도 높아져,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 지역의 경제 발달, 러시아 혁명, 파리 강화회의에서 인정된 민족 자결주의 등의 영향으로 폭넓은 대중 운동으로 발전했다. 재빨리 일어선 것은 이집트, 터키, 이란이었다.
이집트의 독립
[편집]-獨立
이집트(Egypt)는 19세기 후반 이래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1922년에 독립했다. 1882년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방위를 명목으로 이집트에 군대를 투입, 다시금 1914년 터키로부터 이집트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영국의 보호국으로 할 것을 선언했다. 대전중에는 전국토가 영국의 군사 기지가 되었으나 동시에 반영독립운동(反英獨立運動)도 높아졌다. 1918년 자글룰 파샤(Zaghlul Pasha, 1857
1927)를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 와프트당(黨)은 영국의 무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데모나 파업에 힘입어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학생·변호사·관리·노동자·농민과 모든 계층이 운동에 참가하고, 1922년에 독립을 쟁취했으나 수에즈 운하, 수단 지방에 영국군 주둔을 인정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터키 공화국의 성립
[편집]-共和國-成立
터키(Turco, Turkey)는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1920년 연합국과의 사이에 세브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영토의 할양, 군비의 철폐, 연합국에 의한 위임통치 등 터키의 독립과 주권을 대폭적으로 제한한 것이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이 고조되었다. 이 사이에 케말 파샤는 아나돌 루메리아 권리 옹호단을 조직하고 앙카라에 혁명 정부를 수립, 국민군을 이끌고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1년 영국, 그리스 간섭군을 무찌르고 로잔 조약으로 세브르 조약을 파기했다. 1922년 술탄을 폐지하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세브르 조약
[편집]-條約 Treaty of Svres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戰勝國)이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파리 교외의 세브르에서 체결한 강화조약(講和條約). 전후 영국·프랑스·그리스는 터키령(領)의 분할을 기도하여, 소아시아에 무력진주(武力進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술탄 정부에 이 조약의 승인을 강요했다. 이것은 투르크 영토의 사실상의 분할, 다르다넬스 해협의 비무장화(非武裝化)와 국제화, 투르크의 군비제한(軍備制限) 등을 규정, 나아가 외국의 내정간섭권(內政干涉權)과 치외법권(治外法權)도 인정하고 있다. 이 불평등 조약은 투르크인의 그리스인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게 되어 케말 파샤가 인솔하는 국민군(國民軍)은 이 조약의 파기를 목표로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또 술탄정부를 폐지하여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후, 새로이 1923년 로잔 조약을 체결하여 세브르 조약을 유리하게 수정하였다.
케말 파샤
[편집]Kemal Pasha (1881
1938)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군인 출신. 육군 대학 재학중에 술탄 전제 반대 운동에 참가했다. 이·투 전쟁에 종군, 제1차 대전중엔 다르다넬스의 방위로 공(功)을 세웠다. 대전의 패배와 지나친 강화조약에 대하여 터키국민당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세나돌 루메리아 권리 옹호단을 조직하고 세브르 조약에 반대하는 국민회의를 소집했으며, 터키 국민군으로서의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또 그리스군의 소아시아 침입에 대하여 그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922년 술탄 폐지를 선언하고, 1923년 공화국의 성립과 동시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란의 독립운동
[편집]-獨立運動
이란(Iran)은 18세기 후반 이래 영국이나 러시아의 진출로 반(半)식민지화됐으나, 민족해방운동은 먼저 입헌운동(立憲運動)으로 나타났고, 1907년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성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영토는 교전국의 전쟁터가 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의 이권이 방기(放棄)되자 영국의 진출은 현저해졌고, 1919년에는 영국·이란 협정이 맺어져 영국의 보호 통치를 허용하고 대상으로 차관을 받았다. 이에 대한 국민의 반대 운동은, 리자한(1877
1944)을 중심으로, 1921년의 정변(政變)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내각 아래서 영국·이란 협정이 파기되고 경제의 자립화, 교육의 보급, 부인 해방 등 여러 정책이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