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일본의 침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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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 〔槪說〕[편집]

일본의 침략전쟁 중 첫번째가 러·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일단 승리를 하기는 했으나 전쟁에 의한 국민생활의 핍박이 심해져서 전쟁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가 일어났고, 또한 사회주의 사상이나 노동운동의 전개를 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정부는 군국주의 정책을 한층 강화시켜, 국내의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탄압 정책을 강화했고, 한편 한국의 합병을 강행하여 침략정책을 더욱 노골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영·일(英日) 동맹을 구실로 연합군측에서 참전하였고, 열강(列强)이 중국에서 일시 후퇴하는 기회를 노려서 중국에서의 이권 확대를 꾀했다.

1929년에 뉴욕의 주식 폭락을 시발로 하여 야기된 세계적 공황은 세계를 다시 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중국(對中國) 침략을 기도했고, 이러한 침략정책으로 마침내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여러 나라와 대립하기에 이르러 전면적인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최초로 전격적 승리를 했던 파시즘 제국도 1942년 후반부터 연합국측의 반격에 패배하여 먼저 이탈리아가, 이어 독일이, 끝으로 일본이 항복하여 드디어 대전은 종막을 고했다.

러·일 전쟁[편집]

露日戰爭

1904

1905년의 러시아와 일본간의 전쟁. 영·일동맹(英日同盟)의 체결은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을 가져왔는데 북청사변(北淸事變)의 만주 주류군(駐留軍)을 러시아가 일부밖에 철병하지 않고, 만주의 독점적 지배와 한국 진출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 의도와 충돌, 1904년 2월 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 1월의 여순(旅順) 함락, 3월의 펑톈회전(奉天會戰) 등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의 계속은 불가능했다. 여기서 데오도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 강화 조정을 의뢰했다. 한편 러시아도 1905년 1월의 혁명 진압으로 형세가 급박하고 국제 정세도 변화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가쓰라 다로[편집]

桂太郞 (1848

1913)

일본의 군인·정치가. 초슈(長州) 출신. 1870년 독일에 유학하여 귀국 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밑에서 독일식 육군 건설에 노력했다. 청일전쟁에 사단장으로 참전, 전후 대만 총독이 되었다. 1898년 이후 4대의 내각에서 육군상을 역임. 1901년 내각 조직, 영·일 동맹을 맺고 러·일 전쟁을 수행했다. 1908년 제2차 내각에서 한·일 합병을 강행했고 대역(大逆) 사건에서 사회운동을 탄압했다.

치안유지법[편집]

治安維持法

천황제(天皇制)와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치안입법. 1925년 보통선거법 실시와 러·일 국교회복에 따른 영향을 경계하여 제정되었다. 국체(國體)의 변혁 및 사유재산제도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結社) 및 활동을 금지하고 위반자는 10년 이하의 형에 처했다. 1928년 긴급칙령(緊急勅令)으로 처벌 범위를 확대하여 최고형을 사형으로 고치고 1941년의 개정에서 예방구금제(豫防拘禁制)를 채용했다. 불명확한 개념 규정과 확장 해석에 의해서 사상·결사·활동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억압, 처단된 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 태평양전쟁 전의 최대 악법으로, 1945년 10월 점령군의 명령으로 폐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편집]

第一次世界大戰-日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英日同盟)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는데 그 진의는 극동지역에 있어서의 권익 확대와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은 즉각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독일 이권을 차지하고 독일령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점령했다. 또 중국에 ‘대중 21개조 요구(對中二十一個條要求)’를 제출하여 인정시키고, 나아가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간섭하기 위해서 그 다음해부터 시베리아 출병(出兵)을 실시했다. 또한 대전중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영국에 이은 강국으로 상승,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대전중 획득한 일본의 이권이 인정되었다.

대중 21개조 요구[편집]

對中二十一個條要求

제1차 세계대전 중간에 중국에 제출한 일본의 권익 확대를 위한 침략적 요구. 대전으로 인하여 중국에서의 구미 열강 세력이 후퇴한 기회를 노려, 1915년 1월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외상(外相)이 위안스카이(遠世凱) 총통에게 21개조의 요구를 제출했다.

내용은 산둥성(山東省)·남만주(南滿州)·동부 몽골(蒙古)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 승인,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의 중·일 합변화(合辨化), 중국 옌안의 불할양(不割讓), 중국정부 각기관·군대에의 일인 고문 고용 등이 주요한 골자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반대가 일어났고, 또한 구미 열강을 자극하여 국제문제화했다. 중국 정부는 당초 이를 거부했으나 일본이 동년 5월 7일 최후 통첩을 발했기 때문에 9일 중국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5월 9일을 국치기념일(國恥記念日)로 정하고 항일(抗日)·배일(排日)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산둥성 권익 등 일부가 상실되었다.

독코[편집]

特高

일본의 특별 고등경찰의 약칭. 1911년 반정부 사회운동의 단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경시청(警視廳) 안에 특별고등과를 설치, 1928년까지 각지방 경찰에 설치했다. 강력한 권한과 방대한 기밀비를 사용하여 사회주의운동·민족운동·노농(勞農)운동·저널리즘·종교단체를 내사(內査), 치안유지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이를 탄압했고, 스파이의 양성, 고문(拷問)·학살 수단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1945년의 종전 후 해체되었다.

만주사변[편집]

滿洲事變

일본의 대(對)만주 침략전쟁.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여 다음해 1월까지 둥산성(東三省) 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傀儡)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國際聯盟)은 1933년 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루는 것이었다.

관동군[편집]

關東軍

만주 주둔의 일본 육군부대. 1919년 남만주 철도의 수비대가 관동군으로서 독립, 1개사단으로 편성된 후에 중국 혁명의 진전과 함께 독자적인 정치·군사공작에 착수, 장쭤린(張作霖) 사건을 일으켰다.

노몬한 사건[편집]

-事件

1939년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 노몬한에서의 소·일 양군의 대규모 충돌사건. 당시 만주는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노몬한 부근은 국경선이 확실치 않아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몽골군이 할하강(江)을 건너오자 일본군은 이를 불법월경(不法越境)으로 간주하여 충돌하였다. 이에 몽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있는 소련은 기계화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 일본의 대본영(大本營)에서는 사건이 소·일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염려하여 불확대방침을 정했지만,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소련군과 몽골군의 반격으로 2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 관동군은 패전으로 전의(戰意)를 상실하여 9월 정전(停戰)협정에 동의하였다. 이 전투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관동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상해 사변[편집]

上海事變

1932년 1월 상해에서 일어난 중·일 양군의 충돌사건. 만주사변 확대에 의한 국제 여론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중국 국민의 항일(抗日)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군부(軍部)가 중국인에 의한 일본인 승려(僧侶) 습격사건을 연출했다. 이를 이유로 삼아 상해 점령을 기도하여 대군을 파견했으나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좌절되었고, 중국의 국제연맹 제소(提訴)에 따라 국제 여론도 악화되어 드디어 동년 5월 정전협정을 맺자 상해 침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만주국[편집]

滿洲國

만주사변의 결과 일본이 만든 괴뢰정권.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다음해 3월 1일, 청조(淸朝) 최후의 황제인 푸이(溥儀, 宣統帝)를 집정(執政)으로 하는 만주국을 창립, 둥산성(東三省)과 후에 러허성(熱河省)을 영역으로 했다. 1932년 9월 일본 정부는 일만(日滿)협정서를 맺어 승인, 1933년 이를 부인하는 국제연맹에서 탈퇴, 다시 1934년 제정(帝政)을 실시하여 부의를 황제로 앉혔다. 최고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 행정기관으로서 국무원이 있었으나 실권은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고, 또한 관리의 약 80%는 일본인이 점유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대일(對日) 참전을 한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어 만주국은 소멸되었다.

중·일전쟁[편집]

中日戰爭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중국과 일본의 전쟁. 현지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병력을 강화하여 전면전쟁으로 돌입, 동년말에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학살사건을 일으켰는데, 국민정부는 공산당군과 협력하여 충징(中慶)에서 항전, 이후 일본측은 수습책에 골몰했다. 일본측은 이를 지나 사변(支那事變)이라 부르고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나 대본영(大本營)의 설치, 국가총동원법의 시행 등 전시체제를 폈다. 전쟁의 장기화와 그 타개책으로서의 불인(佛領 인도차이나) 점령 등은 오히려 미국·영국과의 대립을 격화하여 1941년 말 태평양전쟁에 돌입, 전역(戰域)을 확대했다. 이후에도 중국 본토에서 대병력을 유지했으나 팔로군(八露軍) 등의 게릴라 활동 때문에 점(點:都市)과 선(線:鐵道)을 확보한 데 불과했고 1945년 8월 일본은 항복했다.

난징대학살[편집]

南京大虐殺

중·일전쟁이 진행되던 1937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중국의 수도 난징(南京)과 그 주변에서 일본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의 지휘하에 자행한 중국인 포로·일반시민 대학살 사건으로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도 한다. 학살은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고, 부녀자에 대한 강간 및 약탈·방화도 거리낌없이 행해졌다. 이러한 만행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과 거류민에게까지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이 사건을 지휘한 일본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대동아공영권[편집]

大東亞共榮圈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의 일본측의 슬로건. 구미(歐美)의 식민지 지배에 대치하여 아시아 지역에 여러 민족 공영의 새 질서를 만든다고 하여 침략전쟁을 정당화 하려고 했다. 1938년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동아 새 질서 건설을 성명, 다시 1940년 제2차 노고에 내각이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했다. 이후 선전 구호로 사용되었는데 실제로는 1943년의 대동아회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태평양전쟁[편집]

太平洋戰爭

1941년에 접어들자 미국과 일본 사이에 국교(國交) 조정을 위한 교섭이 이루어졌으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다음해 10월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성립되고, 개전(開戰)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12월 8일 새벽의 하와이 진주만(眞珠灣)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은 개시되었다. 서전(緖戰)의 전과는 예상 이상의 것이었으나 그로 인해서 전선은 전태평양으로 확대되었다. 1942년의 미드웨이 해전(海戰)과 다음 해의 과달섬의 일본군 패배는 전국(戰局)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전국의 급격한 악화는 급속도로 국민생활을 압박하였고, 1944년부터는 학도(學徒)도 동원되었으며, 본토(本土) 공습의 격화와 함께 학동 소개(疏開)도 실시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지배자의 내부에서도 반(反)도조 움직임이 일어나고 국민들에게도 전쟁을 싫어하는 기운이 퍼졌다. 한편 연합군측은 1943년 11월에 카이로 회담을 열고 다시 7

8월의 포츠담 회담에 의해서 대일(對日) 항복 조항이 결정되어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9일에는 얄타 회담에 따라서 소련도 참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여 태평양전쟁은 종결되었다.

도조 히데키[편집]

東條英機 (1884

1948)

일본의 군인·정치가. 관동군 헌병사령관·관동군 참모장·육군차관을 거쳐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대신, 다음해 수상이 되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후 A급 전쟁범죄인으로서 극동군사재판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특공대[편집]

特攻隊

특별공격대의 약칭. 태평양전쟁 말에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조종사와 함께 적의 군함에 육탄(肉彈) 공격을 하기 위해서 편성된 것이다. 전국의 악화에 따라서 1944년 10월 해군에 의해 편성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가 최초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은 연합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비행기를 몰고 연합군 함대에 돌진하는 가미카제 공격을 했다. 이후 육해군 모두가 점차로 증강하여 파국(破局)에 처한 일본군의 절망적 전법으로서 많은 청소년에게 자살 공격이 강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