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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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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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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주침략을 전사(前史)로 한 제2차 세계대전은 서전(緖戰)에 있어서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추축국(樞軸國)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즉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시작된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전격작전 아래 순식간에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고, 이탈리아도 독일을 편들어 참전하였다.

조기 승리를 목표로 한 독일군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하여 1941년 6월에는 소련으로 침입했다. 한편 아시아 지배를 노리는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을 기습(진주만 공격)하여 여기에서 전세계를 휩쓸어 넣는 대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추축국측의 단기결전 계획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실패, 소련의 완강한 저항, 물량(物量)이 풍족한 미국의 참전으로 좌절되어 유럽에서는 1943년초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소련군의 승리를 계기로 전국(戰國)이 점차로 연합국에 유리해졌다. 아시아에서도 강렬한 중국의 대일(對日)항전, 태평양에 있어서 미군의 반격 앞에 일본군의 후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더욱이 유럽의 서쪽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동쪽에서는 소련군의 맹추격을 만나 1945년 4월 베를린이 함락되자 독일도 항복해 버렸다. 고립된 일본 또한 동년 8월 15일에 항복하여 드디어 미증유(未曾有)의 대전도 연합국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 대전의 성격은 극히 복잡·다양한 계기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의, 각기 그 주변의 약소 국가나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며, 피침략국측에서 말하면 민족 방위 또는 광복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남아시아 침공에 대한 각국의 저항 투쟁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로 식민지 침략과 영토 확장을 지향하는 추축국(樞軸國)측과 해외 시장 개척과 아울러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연합국간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셋째로 독·소전을 계기로 미·영·불과 소련의 동맹, 나아가서 중국 및 기타 피침략 민족국가들이 동맹을 형성하였는데,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즘 국가들이 이들을 침략하자 전세계에서 반파시즘 세력이 구축되어 벌어진 전쟁이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면으로 볼 때 이 대전의 성격은 반파시즘 전쟁이며 반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세력이 가장 진지하게 싸운 점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 진영 대 전체주의적 파시즘 진영의 대결이라고 하더라도 식민지 팽창을 사이에 둔 이른바 ‘세계 재분할(世界再分割)’이란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1929년부터 1933년의 세계공황은 자본주의 국가를 뿌리째 흔들어 놓아 블록 경제 체제의 강화와 보호무역 체제의 격화는 자본주의 열강(列强)의 대립을 날카롭게 하였고, 한편 그 경제권이 협소하고 경계 기반이 취약한 일본·독일·이탈리아에 있어서는 공황의 타격이 의외로 심각하여 각기 국내 모순의 활로를 세계 재분할, 즉 대외침략에서 구하여 스스로 ‘갖지 못한 국가’라 칭하며 ‘가진 국가’인 미국·영국·프랑스에 대한 도전을 노골화하고 그 공격의 유효화와 국내 경제 악화의 해결이란 일석이조의 이점을 얻으려고 군비확장을 급속히 진전시켰던 것이다. 또한 미국·영국·프랑스에서도 경제공황의 타격은 컸고 실업률은 매우 높았으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예민해지고 사회 불안도 증대하여 현(現)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갈 길이 막힌 정세하에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의 열강들간에 재차의 세계 분할을 위한 패권 다툼이 대전을 유발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류는 미증유의 인적·물적 손해를 인류사에 초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희생을 몇 배나 웃도는 비참한 전쟁이 겨우 20년 후에 다시 되풀이되었다.

오스트리아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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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倂合

1938년 3월 나치스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 사건. 영토 확장을 목표로 하는 나치스의 제1차 목표였고,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 속에 있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의 금지된 사항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히틀러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수뇌(首腦)는 군비가 착착 정비됨에 따라서 국제연맹의 유약성, 영국·프랑스의 소극성 혹은 독일 접근책을 얕잡아 보아 강경 방침으로 나와서, 베르사유 체제를 계속해서 파기해 나갔다. 히틀러는 1934년 이래 600만 이상의 독일인이 있는 오스트리아에 나치스 선전을 개시하고 자금을 투입하여 오스트리아-나치스를 양성, 이윽고 사회 불안을 만들어내어 무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 드디어 오스트리아를 강제합병해 버렸다.

수데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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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 Sudeten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스 독일에 있어서 영토 확장의 제2차 목표국이었다. 영국·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의 미끼가 되고 또 뮌헨 회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버림받은 바 되어 드디어 독일에게 병합당하였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성공한 히틀러는 쉬레젠의 풍부한 지하자원획득, 또 체코와 소련의 동맹 혹은 프랑스에의 접근 등을 배제하고, 더욱이 당시 중동구(中東歐) 제국의 태반이 나치스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인 체코의 나치스화 등을 목표로 침략의 창끝을 돌렸다. 침략의 구실은 체코의 수데텐 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 독일인의 체코 정부에 대한 자치 요구를 이용하였다. 1939년 히틀러는 무력행사에 의한 합병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성명을 가끔 발표하였다. 체코는 소련 및 프랑스와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있어서 이것을 의지하여 곧 동원(動員)으로 태세를 취하자 국제관계는 현저하게 긴장하였다.

뮌헨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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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談 Mnchen

1938년 영국·프랑스의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영국 수상인 체임벌린과 프랑스 수상 달라디에가 뮌헨에서 회담하여 독일의 수데텐 지방(체코) 할양 요구를 인정한 4개국 수뇌회의를 가리킨다. 에스파냐 내란 이래 소련이 서구(西歐)에 미치는 영향에 민감하게 되어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지속한 영국과 프랑스의 수뇌들, 특히 체임벌린은 전쟁 준비 부족과 민중의 평화 열망으로 인하여 히틀러의 체코에 관한 요구를 두고 1938년 9월에는 두 번이나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하였으며 또 체코 정부의 설득에 노력하였지만 용이하게 해결할 수 없었다. 현시점에서 끝까지 전쟁을 회피하려던 체임벌린은 9월 29일의 뮌헨 회담 개최로까지 몰고 갔다. 독일 요구가 전적으로 인정되어 서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기쁨에 넘쳐 영국과 프랑스 수상은 ‘명예로운 평화’의 구제자로 환영을 받았다. 유럽 사람들은 약소국가의 희생으로 얻어진 순간적인 평화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약소국가를 늑대에게 던져주는 것으로써 안전이 얻어진다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오산이다”라고 처칠은 훌륭하게 갈파하고 있다.

독·소 불가침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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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蘇不可侵條約

제2차세계대전 발발 일주일 전인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나치스 독일간에 조인된 비밀조약.

스탈린은 긴박한 전쟁 앞에 시간을 얻을 필요를 느꼈으며, 또한 히틀러는 영국, 프랑스와의 교전시(交戰時)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를 느꼈다. 이리하여 독일과 소련간에는 타협의 가능성이 생겨 동년 8월 폴란드 및 발트 3국의 분할을 비밀조항(秘密條項)으로 하는 독·소 불가침조약(獨蘇不可侵條約)을 체결하였다. 소련이 영국·프랑스 등의 동맹국을 배신하여 히틀러와 타협한 것은 스탈린의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조약의 내용은 (1) 상호불침략, (2) 일방국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 다른 일방국은 그 제3국을 원조하지 않으며, (3) 상호간에 정보교환·협의를 위하여 접촉하고, (4) 쌍방 모두가 직·간접의 적으로 삼는 국가집단에는 참가하지 않으며, (5) 상호간의 분쟁은 평화적으로 처리한다는 것 등이다.

이 협정이 양국 공동으로 공표되자 전세계는 비상한 충격을 받았으며, 이 조약에 의해 동방에서의 위협을 제거한 히틀러는 이로부터 1주일 후에 폴란드 진격을 명령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폴란드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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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侵入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배경의 적’이 없어진 나치스 독일은 9월 1일 새벽을 기해 대거 폴란드로 침입하였다. 히틀러는 “전쟁을 시작하여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정의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승리에 있다”라고 말했다. 유화 정책에 시종해 온 영국과 프랑스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갖가지 현대 무기로 무장한 독일군은 이름난 전격작전에 의하여 겨우 2주 만에 폴란드군을 격멸하였다. 한편 소련군은 독·소간의 밀약에 따라 세력권을 서쪽으로 확대할 필요를 느껴 폴란드에 진공하였다.

됭케르크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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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敗北 Dunkerque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서부전선에 있어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패배(1940). 독일군의 전격작전으로 폴란드를 괴멸한 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마지노선(프랑스가 동부 국경에 구축한 지하도시 같은 요새선인데 육상 마지노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1940년 6월 무너졌다)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약 반년간을 아무런 전투도 하지 않는 ‘기묘한 전쟁’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독일은 다음 작전을 계속해서 준비하여 1940년 4월에는 북구 제국을 공략하고 5월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한꺼번에 유린하였다. 이어서 불락(不落)의 요새라고 하던 마지노 요새선도 독일군의 과감한 파상 공격으로 무너져 연합군 30만은 완전히 포위당했으나 5월 27일 겨우 됭케르크(프랑스 북부의 벨기에 국경지대에 있으며 도버 해협 연안이다. 마지노 요새선의 북단에 위치한다)에서 대안(對岸)의 영국 본토로 퇴각하였다.

비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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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府 Vichy

1940년 6월 독일군에 어이없이 패배한 프랑스는 북부가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하에 들어갔고 남부는 소도시 비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적 존재였던 페탱(Petain) 원수(元首)를 수반으로 하는 친독(親獨) 정권이 수립되었다. 비시 정부는 독립 정권의 환상을 국민에게 가장하면서 제3공화국을 폐지하고 전체주의 체제를 받아들여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결합하고 독일과의 협력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고전과 더불어 정부 내부의 모순은 심각해지고 그 반국가적 본질이 벗겨짐에 따라 레지스탕스 세력도 증대해 갔다. 독일의 후퇴로 비시 정부는 1944년 와해되었고, 종전 후에 페탱은 종신형, 수상 라발(Laval)은 총살당하였다.

영국의 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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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戰

히틀러의 영국 본토 상륙작전에 대한 영국의 거국적 항전. 히틀러 작전에서 제1의 오산이었다. 프랑스의 항복으로 더욱더 자신을 얻은 히틀러는 섬나라인 영국 격멸작전을 개시하였다. 1940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공군이 영국 본토에 맹폭격을 되풀이하였다. 이것을 맞아 싸우는 영국은 보수당의 지도자이며 나치즘의 위험성을 계속해서 경고하던 처칠 수상을 중심으로 철저한 항전을 하였다. 노동당도 내각 참가를 통하여 영국의 민주주의를 과시하면서 정부가 혼연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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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

1965)

영국의 정치가·군인·저널리스트를 거쳐 보수당 소속 의원이 된다. 한때 자유당에 소속한(1904

24) 적도 있었다. 육군상(陸軍相)·군수상(軍需相)을 역임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수상이 되어 영국군의 됭케르크 철수 후의 난국을 맞아 군민을 격려해 가면서 드디어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전후에 다시 수상이 되었으나 1955년에 은퇴하였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화가로서의 재능도 유명하다.

독·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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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蘇戰爭

제2차 세계대전중의 나치스 독일과 소련간의 전쟁이다. 독일과 소련은 1939년 이래 독·러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으나 프랑스의 항복 후에 독일이 발칸을 침입한 일로 인하여 양국의 관계는 점차로 악화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동유럽을 점령하고 여기에 게르만 민족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한다는 꿈이 평소에 품어온 큰 목적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국력을 실력 이하로 얕잡아 보아서 1941년 4월부터 소련에 대한 작전계획은 급피치를 올렸다. 6월 22일――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출발의 날에 해당한다――새벽에 돌연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전선을 통하여 소련 영토에 침입하였다. 불의의 침략을 당한 소련군은 후퇴를 계속하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하였다. 그러나 소련군도 12월까지 태세를 정비하여 반격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전선은 교착상태로 들어가 히틀러의 단기 결전책은 여지없이 좌절돼 버렸다.

미국의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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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戰

물량면(物量面)의 전쟁이기도 했던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미합중국이 영국과 프랑스측에 서서 참전한 것은 추축국(樞軸國)측에 대하여 커다란 중압이었다. 유럽에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의 불개입을 선언한 미국은 일본·독일·이탈리아 등의 파시즘 국가의 침략이 확대됨에 따라 겨우 침략의 위협을 몸 가까이에 느꼈다. 더구나 국내에서는 아직껏 공황을 벗어나지 못하여 부단히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1940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창(兵器廠)’임을 성명하고 이어서 1941년 3월에 확정한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을 통하여 반추축국측에 다량의 군수품을 제공하자 동년 8월 루스벨트는 처칠과 대서양에서 회담하여 전쟁 및 전후의 여러 문제를 토의하였다. 미국이 대전에 참전하려는 동향을 굳혀가기도 했지만 일본군에 의하여 돌연 감행된 12월 8일 새벽의 진주만(眞珠灣) 기습 공격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과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스탈린그라드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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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攻防 Stalingrad

제2차 세계대전 중 독·러 전쟁의 귀추를 결정하여 대전 전체의 공방전에 전환점이 된 전투이다. 얼마동안 교착상태에 있었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은 1942년 5월과 6월에 걸쳐 남러시아에서 재차 공격으로 나와 소련군의 스탈린그라드에 8월에서 11월까지 맹공격을 계속하여 대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소련군은 겨울에 반격으로 전환하여 이제는 역으로 33만의 독일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미친 듯이 저항하는 독일군을 물리쳐 1943년 1월말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가 되어 유럽의 연합국 승리에 큰 희망을 주게 되었다.

제2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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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戰線

나치스 독일의 군사력을 둘로 분산시키기 위하여 영국군과 미국군의 북프랑스 상륙으로 ‘제2전선’의 형성을 요구한 것인데, 처칠의 반대로 1944년까지 실현이 지연되었다. 1942년 전선(戰線)에서는 독일군이 보유하는 256개 사단 가운데 240개 사단은 독소전에 투입되고 사실상 소련 단독으로 나치스 독일의 침략과 싸우는 상태가 되어 소련의 부담은 매우 무거웠다. 그리하여 1942년 말에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카사블랑카에 상륙하여 1943년 5월까지 롬멜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및 이탈리아군을 항복시켰다. 이어 7월 영국군은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고 나아가서 9월에 남이탈리아에 상륙, 이탈리아를 항복케 하였다.

레지스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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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istance

1940년 패전한 프랑스에 침입한 독일은 일체의 민주주의를 파괴하여 프랑스를 종속적 농업지대로서 전체주의적인 질서 속으로 편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주의의 전통을 가진 프랑스 국민은 이와 같은 점령정책에 저항운동(레지스탕스)으로 궐기하였다. 국내에서는 ‘콘바’ ‘리벨리 시옹’ ‘프랑 티를’ 등 여러 저항단체가 나왔고, 해외에서는 드골 장군이 영도하는 자유 프랑스 정부가 영국에 수립되고, 연합군의 원조하에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내외에 걸친 레지스탕스는 1942년 독일군이 프랑스의 전영토를 점령하면서부터 급속히 성장하여 독일에의 노동 징용(徵用)을 거부하는 청년들의 ‘마키’라 불리는 산악 게릴라도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레지스탕스는 독일군 및 그에 추종하는 비시 정부에 의하여 체포 15만명, 총살 3만 명이라는 참혹한 탄압 희생자를 냈으나 계속 프랑스 독립을 위하여 과감히 저항하여 1944년 8월 파리 독립으로 광복을 찾았다.

이탈리아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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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降伏 프랑스의 패배에 힘입어 참전한 이탈리아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패배를 계속하였고 군사력도 현저히 저하되어 독일에의 예속이 한층 굳어갔다. 이탈리아 민중은 오랫동안에 걸친 파시스트 독재 통치에 반감을 갖기 시작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이 퍼져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지배층에서도 무솔리니 정부에 실망하여 미국과 영국에 의존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1943년 7월 미국·영국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을 계기로 무솔리니 정권이 타도되어 그는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바드리오 원수의 신정부 아래 9월 3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추축국측의 일각이 무너지고 반파시즘 세력에게는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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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談 Teheran Conference

1943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중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의 3거두회담(三巨頭會談)을 말한다. 이 회담으로 연합국측의 전쟁 협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연합국이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자 전쟁 처리와 전후 문제가 연합국측의 과제로 되어 9회에 이르는 연합국 회의가 열렸다. 1943년 10월에 미국·영국·소련의 회의가 모스크바에서 열렸고, 이어서 동년 12월에 3거두의 테헤란 회담으로 진전하였다. 그 결과 (1) 3국의 협력과 전쟁수행 선언 (2)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반격에 호응한 제2전선의 결성 등이 약속되었다.

알타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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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協定 Yalta Agreement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4일에서 11일에 걸쳐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3거두가 회담하여 성립된 협정. 주요결정사항은 (1) 국제연합문제―1945년 4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의 국제회의를 개최할 것,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대국의 거부권을 인정할 것, 외상회의를 적시(適時)에 개최할 것, (2) 독일 문제―독일의 무조건 항복 요구의 확인, 그 전후 처리에 있어서 미·영·소·프에 의한 독일의 분할관리문제, 2년 이내에 독일 전력(戰力)을 완전 파괴할 것과 종전 후의 배상금 징수 문제, 전쟁 책임자의 처벌 등, (3) 소련의 대(對)일본참전문제―독일항복 후 3개월 이내에 소련은 대일전에 참가할 것, 그 조건은 사할린 및 쿠릴열도의 소련 귀속, 뤼순(旅順) 조차권의 소련에 의한 회복, 다렌(大連)항은 소련의 우월하에 국제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관리, 소련은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유일한 중국 정부로 인정할 것 등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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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陸作戰 Normandie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부전선의 자웅(雌雄)을 결정짓는 연합군의 일대 작전이다. 1944년 들어 독·러전에 있어 독일의 수세는 명백해져서 공군의 독일 폭격이 격화되고 그렇게도 기다렸던 제2전선의 구축과 북프랑스의 상륙작전이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으로 감행되었다. 이것이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41개 사단 약 백만의 병력이 5천 척의 선박과 압도적인 공군의 원조하에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였다. 상륙 완료 후 연합군은 즉시 독일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고 8월에는 남프랑스에도 연합군이 상륙하여 독일군을 휘몰았다. 이에 호응하여 레지스탕스 운동도 크게 고조하고 8월의 철도 파업을 발단으로 19일에 파리 시민이 궐기하여 미·영군(美英軍)의 도착에 앞질러 25일에는 파리가 시민 스스로의 손으로 해방되었다. 이에 앞서 7월 20일에 베를린에서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돌발하였다.

독일·일본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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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日本-降伏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기로 독·러 전선에서도 소련군은 맹공격을 전개하였고, 나치스 및 그 추종 지배층에의 저항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각국의 파르티잔(Partisan:프랑스어에서 기원. 외국의 침략자나 국내 봉건세력에 의하여 무기를 잡고 싸우는 사람. 게릴라와 동의어) 세력과 호응하였다. 1945년에 들어서자 소련군은 총공격을 취하여 4월에는 베를린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미·영 연합군도 진격을 계속하여 1944년말에 독일의 아르덴에서 맹렬한 반격을 물리쳤다. 1945년 2월 미국·영국·소련 3국 수뇌(首腦)는 얄타에서 회담하여 독일의 전후(戰後) 처리의 대강을 결정하고 동시에 소련의 대일 참전을 확정하였다. 동과 서에서 진격을 계속한 미군과 소련군은 4월 25일에 엘베 강가의 한 촌락인 토르가우에서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양국간의 병사는 굳게 악수를 나누면서 ‘엘베, 부전(不戰)의 맹세’를 서로 다짐하였다. 절망한 히틀러가 30일에 자살하자 5월 7일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남은 일본군도 미군의 잇따른 도서(島嶼) 공략과 일본 본토에 대한 끊임없는 폭격, 그리고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의 원자폭탄 투하 및 소련의 대일참전도 가해지자 드디어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여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대전쟁은 종결을 고하였다.

대서양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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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西洋憲章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 처칠(영국 수상)과 루스벨트(미국 대통령)가 대서양에서 회담, 전후의 세계 질서에 대하여 8개조의 평화조항으로 된 구상을 발표하였다. 미국이 파시즘에 대항하는 민주 세력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임무와 결의를 표명한 것이며, 소련을 위시한 33개 국가가 승인했다. 이 내용은 전후에 성립한 국제연합의 원칙이 되었다.

덤바턴오크스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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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議 Dumbarton Oaks Conference국제연합 설립을 위해 1944년 개최된 국제예비회의. 미국의 수도 워싱턴 교외에 있는 덤바턴오크스에서 열린 회의로 8월 21일부터 9월 28일까지는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9월 29일부터 10월 7일까지는 미국·영국·중국의 3개국이 각각 회의를 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과의 교전국이 아닌 소련이 중국과 동석함으로써 일본과 교전관계가 발생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일반적 국제기구의 설립에 관한 제안’은 강대국의 협조 아래 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안전보장기능을 발휘하려는 평화유지가 내포되어 있으며, 후에 국제연합헌장의 원안이 되었다.

국제군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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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軍事裁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2차세계대전 후 나치스 독일지도자들의 책임을 추궁, 처벌하기 위하여 미국·영국·소련·프랑스 등 4개국이 연 재판으로 재판소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있다 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이라고도 한다.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군측은 독일군의 잔혹한 행위 등에 대한 처벌을 위해 통상적인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죄, 인도(人道)에 대한 죄 등을 규정하여 공정하고 신속한 처벌을 위한 국제군사재판소를 설립했다. 국제군사재판은 이를 모델로 한 극동국제군사재판과 함께 침략전쟁을 범죄로 규정하고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도 개인의 책임을 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이 평화에 대한 죄나 공동모의에 중점을 둔 데 반해, 국제군사재판은 전쟁범죄와 인도에 대한 죄에 중점을 두었으며, 패전국의 부정을 알리며 전승국의 정의를 과시하는 정치적인 동기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