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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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독립〔槪說〕[편집]

동남아시아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유럽 여러 나라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격렬한 저항을 기도하고 있었다. 다만 타이만은 영국·프랑스 양세력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었던 관계로 다행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오히려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영국과 프랑스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을망정 대개 왕족·관리·지주 등 봉건적인 세력으로서 백인의 침입에 의하여 그들의 재산·명예·특권 등을 잃거나 제한받은 것에 대한 원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는 영국에 대한 인도의 과감한 투쟁, 청년 터키당의 운동, 중국의 신해혁명, 5·4운동 등 일련의 유색인종(有色人種)의 활약에 힘입어 서유럽적 교육을 받은 지식계급 사이에 민족계몽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제1차 대전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민족자결의 사상은 한층 더 민족적 단결과 자각을 앙양시켰고, 모든 민족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여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이 지역이 제2차 대전 중 대부분 일본군(軍)의 점령하에 들어감에 따라 항일투쟁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전후에는 옛 식민종주국과의 협상, 혹은 투쟁을 통하여 각국이 독립하게 되었으나 독립 후 동남아 각국은 곧 프랑스·일본의 기나긴 식민통치에서 비롯된 식민지 잔재 세력의 청산 문제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전후 냉전 체제의 심화로 더욱 가속화된 동남아 제국의 혼란은 반식민·민족주의자들과 구식민종주국의 후광을 입은 지주·관료층과의 내란 상태로 발전하였으며, 이 내란은 양진영의 지원으로 더욱 복잡성을 띠어 갔다. 라오스 사태,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사태 등을 그러한 전형적인 예로 볼 수가 있다. 30여 년을 끌어왔던 동남아 제국의 혼란 상태는 1975년의 월남 패망, 캄보디아 패망으로 일단 종식되었으며, 남·북 베트남을 통일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필리핀[편집]

Republic of the Philippines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가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의 결과 미국이 매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점령하에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1946년 7월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초대 대통령에 마누엘 로하스가 취임했다.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마르코스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이래 장기집권을 해왔다. 1983년 반정부(反政府) 활동을 하던 야당 지도자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서 피살된 이후 잇따라 일어나는 반정부시위와 경제적 불안이 계속되자, 1986년 조기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마르코스가 재선되었으나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전국적으로 시민불복종 운동이 일어나서 결국 마르코스는 괌으로 망명하였다. 새 대통령 코라손은 1987년 새헌법을 발효시켰으며, 1988년 5헥타르 이상 소유 지주 초과소유분 매각을 골자로 한 토지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마르코스 퇴진 후 미국, 일본, 동남아 국가연합회 회원국들과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1992년 대선에 따라 피델 라모스가 정권을 이양하였다. 1998년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외국인 투자유치확대를 목적으로 1999년에 헌법개정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다.

미얀마[편집]

Union of Myanmar

제2차 세계대전 후 반(反)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EL)을 중심으로 영국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1948년 1월 영연방(英聯邦)에 들어가지 않는 공화국으로서 독립했다. 독립 후 인민자유연맹이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분열이 일어났다. 196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네윈은 혁명평의회를 수립,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결성하여 일당체제를 유지하였다. 1973년 국민투표에 의한 신헌법 공포, 다음해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1981년 물러나고 당의장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고립, 군사정권의 파행적인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민주개혁·총선 요구에 굴복, 1990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압승하였으나 정권이양을 거부하고 가택연금시켰다. 1995년 5월 연금에서 풀려난 수지 여사는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1월 민주국민동맹을 국민회의에서 탈퇴시켰다. 1996년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수지 여사의 활동을 막기 위해 공공질서 파괴활동 금지법안을 통과시켰으며, 12월 군사정부의 철권통치에 국민적 거부감이 거세지자 군사정부는 수지를 다시 가택연금시켰다.

말레이시아[편집]

Malaysia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일본에 점령되었고, 전후 다시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라만(T. A. Rahman)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과 독립교섭을 추진, 1957년 8월 영국연방 내의 독립국으로 발족했다. 1963년 9월 영국의 협조 아래 라만 수상은 싱가포르와 영국령(領) 북(北)보르네오·사라와크를 통합, 말레이시아 연방을 수립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도네시아·필리핀과 분쟁을 초래하였으며, 1965년 8월에는 싱가포르가 독립하여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떨어져 나갔다. 주민의 44%를 차지하는 말라야계와 36%를 차지하는 중국계의 대립은 1969년 5월 쿠알라룸푸르에서 폭동화하여 전국에 번져나갔다. 이 사건은 복합민족국가(複合民族國家)의 문제점을 나타낸 것으로 이 나라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이다. 1987년 말레이족과 화교간의 대립이 심각, 야당과 집권세력 내에서 비판이 일자 통일말레이국민당(UMNO)의 총재 마하티르 총재는 민주행동당(DAP)의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1988년 통일말레이국민당은 불법정치단체이며 1987년의 총재 선거도 무효라고 판명받자 신당(新黨)을 결성하였으나 힘이 약화되었다. 친서방(親西方)을 외교의 기조로 삼고 있으며, 1975년 중국과 외교관계 정상화 이후 실질적 경제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1995년 4월 마하티르 총리가 국왕의 동의 아래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한 결과 국민전선이 압승하였다.

싱가포르[편집]

Republic of Singapore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일본에 점령됐으나 전후 다시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57년 4월 영연방 내 자치국이 되었다가 1959년 5월 선거로 리콴 유(李光耀)의 인민행동당(人民行動黨)이 정권을 장악, 6월 독립을 선언했으나 외교·군사는 영국의 수중에 있었다. 1963년 9월 말레이시아의 일개주(一個州)로 편입했으나 중국인과 말라야인의 대립이 격화하여 1965년 8월 연방을 탈퇴하고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1959년 최초의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집권을 하면서 40년에 달하는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비동맹·중립주의 모든 국가와의 통상외교 중시, 동남아 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과의 우호관계 강화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으며, 동남아에서 가장 안정돼 있는 나라이다. 인구의 약 75%가 중국인으로 말레이시아인, 인도인과의 인종대립이 문제이다.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직을 맡았던 리콴유(李光耀)가 총리직을 1991년 고척동(吳作棟) 총리에게 이양했으나 당·정에서의 막후영향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으며, 그의 장남 리셴룽(李顯龍)은 부총리 및 집권당(PAP)의 부서기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태국[편집]

Thailand

타이라고도 한다.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식민지화(植民地化)를 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서 1932년 무혈혁명(無血革命)이 성공하여 차크리 왕조(王朝)의 전제정치가 끝나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과 군사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전후 문치파(文治派)가 집권했으나 1947년 무혈 쿠데타를 겪었으며, 1958년 10월 국방상 사리트 원수(元帥)의 쿠데타 성공으로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1963년 12월 사리트 수상의 병사(病死)로 뒤를 이은 타놈 정권은 1968년 신헌법을 공포, 1969년 3월 선거를 거쳐 타놈 수상의 신내각이 성립됨으로써 군정 9년 만에 민정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1971년 11월 의회에서 예산안이 부결되자 타놈 수상은 친위(親衛)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켜 전권(全權)을 장악하였다. 타놈정권은 집권 후 야당인사와 언론인, 학생 등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등 독재체제의 구축에 힘을 쏟았으나, 족벌정치에 의한 부정부패 등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여 1973년 학생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민간내각이 탄생되면서 1974년 군사통치에 종지부를 찍는 신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1976년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평의회를 수립, 전권을 장악했다. 타놈 정권이 무너진 계기로 정부는 미국 일변도 정책에서 탈피, 1975년 미군을 철수시켰다. 1995년 1월 군부 쿠데타에 의해 1991년 채택된 비민주적 헌법을 폐지,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97년 9월 의회는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차왈릿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했으나 부결되었다. 11월 6일 경제실정 등으로 사임압력을 받아온 차왈릿 총리가 사임하고, 11월 9일 민주당의 추안 릭파이가 23대 총리로 임명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월남)[편집]

-共和國(越南) Republic of Vietnam1954년 주네브 협정 성립 후 미국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한 고 딘 디엠 대통령은 가족 중심의 지나친 독재로 민심을 잃은 끝에 1963년 11월 두옹 반 민 장군이 영도하는 군부 쿠데타의 성공으로 쓰러지고 고 딘 디엠과 그의 아우 고 딘 누는 피살되었다. 민 정권은 성립 후 3개월을 채 못 넘기고 1964년 1월 구엔 칸 장군의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이후 군부간의 쿠데타의 연속으로 정국은 극도의 혼란을 계속하였으나 1967년 티우·키가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 정국은 일단 안정되었다. 그러나 티우·키 체제는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면서 이견이 노출, 와해되었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티우 대통령의 단독 출마·당선으로 1인 독재체제가 강행되었다. 그러나 티우의 독재, 정부의 부정 부패 등으로 민심은 이미 사이공 정부에서 떠나 있었으며, 사이공 정부군은 1975년 3월 월남의 북부도시 후에·다낭 등에서 대패주를 계속하였다. 사이공 함락을 목전에 둔 동년 4월 21일 티우는 후옹 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국외로 탈출하였으며, 후옹 역시 두옹 반 민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하였으나 민 장군은 1975년 4월 30일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1954년 건국 이래 20년을 지속하였던 베트남이 패망했으며, 30여 년을 끌었던 베트남 전쟁 역시 종식되었으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고도 독재·부정부패 등으로 민심을 잃어 붕괴되는 한 국가의 비극적 몰락이 역사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베트콩[편집]

Viet Cong 越共

1960년 12월에 결성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으로 북베트남 지원을 받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남베트남군과 싸운 반란세력이다. 1946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던 호치민 지휘하의 베트민이 이들의 모체이다. 1954년 베트민이 북으로 넘어갈 때 남겨두고 갔다고 하는 5천명의 잔류공작원들로부터 시작한 베트콩은 월남전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1969년경에는 20여 만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침투·파업·선동·테러 등을 수반한 그들 특유의 게릴라전은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성공을 거둬 점차 베트남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1975년에는 드디어 남베트남을 패망시켰다.

월맹(베트남 민주공화국)[편집]

越盟(-民主共和國)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1941년 5월 호치민(胡志明)을 중심으로 베트민(Viet Minh, 베트남 독립연맹)이 결성되어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다가 1945년 9월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 호치민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거쳐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북위 17도선 이북을 통치,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하고, 중공과 소련의 화해로 반(反)제국주의 전선의 통일을 주창하였다. 1969년 9월 호치민(胡志明)의 사망에 따라 대통령에 톤 둑 탕, 부통령에 구엔 루옹 반웅을 선출하고 트루웅 친국민의회 상임위원장, 레 두란 당제 1서기, 괌 반동을 수상으로 하는 집단지도제를 채택하였다. 베트콩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미국의 폭격을 받는 등 전국토가 황폐화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1975년 남베트남의 항복을 받아 1976년 7월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 남·북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호치민[편집]

胡志明 (1892

1969)

북베트남 대통령. 북부 베트남 개안에서 출생. 반불운동(反佛運動)에 참가중 관헌의 추격으로 1920년 탈출, 선원으로 런던을 경유하여 파리에 가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 1923년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교육을 받은 후 1925년 중국의 광둥에서 활약했다. 1930년 베트남 공산당 창설 활동중에 투옥되었으나 탈옥하여 1941년 베트민을 결성,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45년 9월 북베트남 수립을 선언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프랑스와 싸웠고,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에는 베트남을 지원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막대한 군사력을 가진 미군·남베트남과 맞서 싸웠다.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편집]

社會主義-共和國 Socialist Re­public Vietnam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월남과 월맹이 합하여 된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을 항복시킨 북베트남은 베트남 임시정부와 함께 1년여 간의 남북통일 준비를 끝내고 1976년 4월 남북단일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492석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총선을 통하여 구성된 남북베트남 단일 국민의회는 1976년 7월 2일 역사적인 통일 베트남 수립을 선포하였고 국호를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 수도를 하노이로 정하고서 북베트남의 대통령 톤 둑 탕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해 국명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선포했다. 1980년 신헌법을 채택, 공포하여 국가평의회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1986년 제6차 베트남 공산당대회에서 부분적인 사유경제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 우호협력 조약을 체결한 소련과의 동맹 관계, 라오스·캄보디아와의 유대 관계가 외교기조이다. 중국과는 캄보디아 문제, 국경 분쟁 등으로 적대적이었으나 1988년 국경전쟁 종식에 합의함으로써 적대적인 관계는 청산되었으며,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과 관계개선을 위해 조력중이다. 구 소련의 경제원조를 받고 있으며 구 소련에 칼라만 해군기지를 제공했다.

2001년 7월 트란 둑 루옹 부총리가 국가주석으로, 판 반 카이가 총리로 재선출된 후 지속적인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해 아시아지역 경제위기의 영향 최소화 및 외국인투자유치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편집]

-戰爭

동서간(東西間)의 격화된 냉전(冷戰)은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하여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 베트남을 북위 17도를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공산세력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할 기회로 북베트남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산주의의 끊임없는 침투에 대하여 미국의 입장은 자유세계의 수호국으로서 이들의 침략을 막아야 했다. 협정에 따라 북베트남군은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때 약 5천 명의 잔존 공작원을 메콩·델타 지역을 중심으로 남겨둠으로써 베트콩 게릴라전의 모체(母體)를 이루었다. 이들은 남부 베트남에 그 세력을 계속 확장하다가, 드디어 1960년 12월에 이르러서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조직,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였다. 1963년 11월의 군부 쿠데타 이후에 연달아 일어난 쿠데타로 베트남 정국은 불안해졌고, 이에 따라 공산 게릴라의 준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리하여 미국은 1961년 5월 존슨 부통령을 파견, 베트남정부군의 증가와 무기의 공여를 결정하고 게릴라전의 전문가를 파견하여 전략촌의 설정 등 베트콩의 소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63년 이후 중공 세력의 팽창에 힘입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무력 침공에 총력을 기울이니, 1964년 8월의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1965년 2월에는 반란의 진원지(震源地)인 북베트남을 폭격하기 시작해 3월 미해병대(美海兵隊)가 다낭에 상륙함으로써 미군개입이 본격화되었다. 1964년 미국이 자유진영의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함으로써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타이·필리핀 등 자유세계 여러 나라가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국은 한국전쟁 때의 국제적인 신의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호소와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요청을 받아들여 1965년 1월 1개 대대의 공병대(工兵隊)로 구성된 비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해 8월에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전투부대인 해병대와 육군을 파병하였다. 이로써 ‘선전포고 없는 전쟁’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전쟁은 국지전의 성격을 벗어나 국제전화되었으며, 그 뒤 전쟁은 계속 확대되어 1969년 3월 주월미군수는 54만 2천 5백명에 달하게 되었다. 확대일로에 있던 베트남 전쟁에의 미국의 개입은 1969년 닉슨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닉슨은 키신저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레둑 토 북베트남 정치국원과 파리에서 비밀평화협상을 하고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월남전의 월남화 계획을 명확히 하고 철군계획을 발표했다. 1973년에는 사이공 정부가 베트남 임시혁명정부(PRG), 제3세력(중립)으로 민족화해단합평의회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되었고, 동년 3월 27일에는 주월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어 베트남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무능을 드러내어 사이공 정부와 가까운 제3세력을 포섭하지 못하고 민족화해 단합평의회의 구성을 거부하였으며, 내정은 독재와 탄압정치를 강행, 남베트남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다. 반면에 북베트남측은 폭격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착실히 재건, 군비증강에 몰두하였으며, 드디어 1975년 1월 7일 남베트남에 대한 대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중부고원 북부, 중부해안 등지에서 남베트남 정부군은 대패주를 거듭하였으며, 후에 다낭을 함락시킨 공산군이 사이공 함락을 위하여 ‘호치민 작전’을 전개하자, 후옹에 이어 티우의 10년 독재로 인하여 파탄된 정권을 이어받은 두옹 반 민 장군은 1975년 4월 30일 10시 정부군에게 무조건 항복령을 내렸고, 정오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전차부대가 사이공에 진주하였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인도차이나 침투를 저지하고 자유주의 정체(正體)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한때 55만에 이르는 군대를 투입하기도 하였으나 건국 이래 최초의 패전을 맛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국은 또한 전쟁 목적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심각한 국론 분열이 있게 됐으며, 북베트남에의 대량폭격은 세계여론의 비난을 받아 국제정치에 있어서 미국의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다. 2천 4백억 달러라는 거대한 전쟁비용의 투입이 원인이 되어 달러화가 폭락하는 등 1970년대 이후 미국 경제의 파탄 또한 이 전쟁의 결과였다. 많은 교훈을 남긴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군의 패주로 노획한 군사 장비(50억 달러 상당)로 무장한 70만의 병력을 가진 강대국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을 인도차이나 반도에 탄생시킨 채 끝을 맺은 것이다.

라오스[편집]

Laos People’s Democratic Republic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나 대전중 일본군의 점령에서 독립운동을 전개, 1945년 라오스 왕국으로서 독립을 선언했다. 1949년 7월의 대불협정(對佛協定)과 1953년 10월의 연합조약으로 불연합(佛聯合) 내의 독립을 획득했다. 한편 북베트남군과 협력하여 반불항전(反佛抗戰)을 계속하던 좌파(左派) 파테트 라오(라오스 애국전선)는 1954년의 주네브 협정으로 정전(停戰)에 동의하여 1957년 11월 왕국통일의 실현을 보았다. 파테트 라오 친공책동을 싫어한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1958년 푸마 정권이 쓰러지고 친미(親美)·반공(反共)의 사나이콘 정부가 등장했다. 이 정부는 주네브 협정 파기 태도를 표명하고 파테트 라오를 탄압하니 1959년 7월 좌·우 양파의 내전이 발생했다. 1962년 다시 연립정부가 성립하였으나 1963년 결렬,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1970년 이후 자르 평원을 두고 정부군과 공산 파테트 라오간(間)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1973년 일단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1974년 4월에는 제3차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에 자극된 좌파의 군사정치적 압력에 부딪혀 우파각료들이 사퇴하자 파테트 라오는 전국인민대표회의를 거쳐 600년간의 라오스 왕정을 폐지하고 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초대 대통령은 수파 누봉이다. 베트남·캄보디아와의 긴밀한 연대, 러시아(구 소련)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와의 협력관계가 외교기조이다. 1993년 2월 국회는 누하크 폼사반 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98년 폼사판 대통령이 고령으로 퇴진한 후 캄타이 시판돈 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캄보디아(크메르)[편집]

Cambodia(Khmer)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점령당하였다. 전후 프랑스의 지배하에 다시 들어갔으나 1947년 5월 노로돔 시아누크왕(王)은 왕국헌법을 공포, 1949년 11월 대불조약으로 불연합(佛聯合) 내에서의 독립을 획득하고 1954년 10월 완전독립을 달성했다. 1957년 11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였다. 1960년 시아누크공(公)이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69년 8월 론놀 내각이 등장, IMF에 가입하는가 하면 경제자유정책을 취했으나 시아누크 원수와 대립이 심각하였다. 특히, 캄보디아 영내에 침입한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軍)에 대하여 이를 묵인하는 시아누크와 극력 반대하는 론놀 내각의 대립이 첨예화했다. 1970년 3월 시아누크가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쿠데타가 발생, 론놀이 정권을 장악하여 크메르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실각한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왕국 민족연합정부를 조직, 키우 삼판의 크메르 루주군과 연합하여 1975년 론놀 정권을 전복시켰으나 그 자신도 크메르 루주군에 의해 실각하였다. 1976년 키우 삼판은 민주 캄보디아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의 캄보디아 구국전선에 의해 전복되고 헹 삼린의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프놈펜 정권에 반대하며 1982년 내전에 돌입, 1990년 내전이 종식되었으나 1997년 7월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1998년 실시된 총선에서 연립정부가 출범하여 훈센당수가 단독총리로 취임하였다.

인도네시아[편집]

Republic of Indonesia

네덜란드의 오랜 식민지였으나 대전중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1949년 12월 헤이그 원탁회의 결과 연방공화국이 되었다가 1950년 8월 단일공화국이 되었다. 1950년 서구 민주주의적인 잠정헌법(暫定憲法)을 시행, 1955년 제헌의회가 성립했다. 그러나 수카르노 대통령은 정당정치의 부패와 비능률의 근절을 목표로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를 제창(提唱), 1959년 7월 의회를 해산한 데 이어 1963년 5월 종신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굳혔다. 그러나 1965년 9월 용공(容共) 쿠데타의 실패를 계기로 반공적(反共的)인 군부세력이 대두, 1966년 3월 수카르노는 수하르토 수상에게 전권(全權)을 맡겼으며, 1967년 대통령직마저 빼앗기고 수하르토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수카르노 시대에는 반제·반식민주의·반동맹외교를 폈으나 수하르토 시대에는 친서방·비동맹외교로 전환했다. 중국과는 1965년에 일어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주동한 쿠데타인 '9·30사건' 이후 외교관계를 단절하였으나 1985년 직접교역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98년 3월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7선에 도전하는 수하르토의 29년 장기독재체제가 끊임없는 저항을 받던 끝에 무너지고, 하비비가 새 대통령이 되어 새 과도정부를 구성하였다. 1999년 국민협의회(MPR)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서는 하비비 당시 대통령이 중도에 후보를 사퇴해 메가와티가 총선승리의 여세를 몰아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는 당초 기대와는 달리 국민각성당(PKB)의 압두라만 와히드가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와히드의 추대로 출마한 메가와티가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국은 곧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이슬람학자 출신으로 온건성향인 와히드와 민주화 투쟁을 통해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개혁성향의 메가와티가 이끄는 쌍두마차가 인구 세계 4위의 거대한 인도네시아를 이끌게 됐다. 2001년 7월 23일 메가와티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수카르노[편집]

Achmed Soekarno (1901

1970)

인도네시아의 정치가. 반둥 공과대학을 졸업. 1927년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조직하여 민족독립운동에서 활약하였으며, 1933년 네덜란드군에 잡혀 10년간 유형생활을 하였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해 석방되어 일본군의 군정에 협력, 1945년에 네덜란드군이 복귀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6년에서 49년까지 네덜란드군과 싸웠으며, 헤이그 협정이 성립되어 네덜란드로부터 주권을 인수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55년에는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열고 반(反)식민주의를 주장, 신생국가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9년 이후에는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를 주장, 독재체제를 굳혀 종신대통령이 되었다. 중립주의 정치가로서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기대를 받았으나 친중공(親中共)적인 경향으로 흘러 1965년 9월 30일 군부 쿠데타 이후 실각되었다.

동남아 국가연합[편집]

東南亞國家聯合 ASEAN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의 약칭. 1967년 8월 타이·인도네시아·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5개국이 설립한 지역협력기구이며, 군사적 색채를 배제하고 경제·사회·문화발전의 촉진, 평화와 안전의 확보, 상호협력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남아의 평화·자유·중립지대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1980년 유럽공동체(EC)와 상호최혜국 대우·관세장벽 철폐·경제협력공동위 설치 등을 골자로 한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1984년 1월 브루나이, 1995년 7월 베트남, 1997년 7월 라오스·미얀마, 1999년 4월 캄보디아의 가입으로 2003년 3월 현재 총 10개국이 가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