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전후의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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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프랑스〔槪說〕[편집]

1944년 9월 파리해방과 더불어 드골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46년 12월 제4대 공화국이 발족했다. 그러나 극우익정당, 극좌익정당, 중도로 대표되는 군소정당의 난립은 대립과 분열의 양상을 극심하게 드러냈으며, 11년 동안 내각이 19차례나 바뀌는 혼란을 거듭했다. 특히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에서 파탄을 가져와 경제상태는 악화하고 한때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었다. 또한 다른 유럽 여러 나라와 같이 전후 경제의 부흥을 위한 미국에의 의존도도 높았다. 1958년 5월 군부와 우익의 지지를 얻은 드골 장군이 재집권, 국민투표에 의한 신헌법 승인을 거쳐 1958년 10월 제5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미·소 2대국에 의한 세계 지배체제를 타파하여 ‘위대한 프랑스’의 실현을 기본 노선으로 하였다. 드골 집권 후 프랑스는 EEC를 근거로 하여 산업근대화를 추진하고 식민지 문제 해결 등으로 내정을 수습하는 한편 핵무기의 개발, 드골의 소련 방문, 중국 승인, 베트남 중립화의 요구 등으로 프랑스의 위신을 높였다. 그러나 10년이 넘는 드골의 장기집권으로 내정의 침체를 가져와 1968년 5월 파리 대학에서 발생한 학생 소요사건을 계기로 ‘5월위기’를 가져왔다. 1969년 4월 드골은 재차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신임을 물었으나 부결되자 사임하고, 동년 6월 퐁피두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74년 4월 2일에 급서하였으며, 뒤이어 5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재상이 당선되어 1974년 5월 5일 제5공화국 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8년 다시 재선되었으나 1981년에 사회당의 미테랑이 사상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집권한 후 프랑스에서는 대기업의 대부분을 국유화하여 노사의 자주관리, 근로자의 주체적 경영참가를 의도하였으며,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미테랑이 재선되었고,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제2차 로카르 내각이 발족되었다. 1995년 5월 자크 시라크 파리 시장이 제5공화국 5대 대통령으로 당선, 14년만에 사회당에서 우파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2002년 5월 대선에서 시라크 대통령은 82.04%의 지지를 받으며 제6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조스팽 총리와 내각이 사퇴하자 시라크 대통령은 라파랭 자유민주당 부당수 겸 상원위원을 새 총리에 임명하였다. 2002년 6월 총선에서 UMP가 370석, UDF가 29석을 획득해 우파가 399석을 차지했다. 좌파는 사회당 154석, 공산당 21석, 녹색당 3석으로 총 178석에 그쳤다.

제4공화국[편집]

第四共和國

1946년 10월 신헌법 초안이 국민투표에 의하여 채택되고 제4공화국이 성립했다. 제4공화국은 군소정당이 난립하여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중도파의 여러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정계를 이끌어 왔으나 11년 동안 내각은 19차례나 바뀌게 되었다. 또한 식민지 전쟁으로 인하여 엄청난 전비(戰費)를 사용, 경제 위기를 초래하였다. 1958년 알제리 주둔군과 극우(極右)의 반란을 계기로 드골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제4공화국은 드디어 무너지게 되었다.

제5공화국[편집]

第五共和國

프랑스가 알제리의 문제로 고민하던 1958년 5월, 알제리의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 간부와 극단적 식민주의자인 프랑스계 이민들은 드골 정권의 수립을 요구하고 본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년의 대프랑스를 꿈꾸는 극우파들로서, 제4공화국의 정치구조를 전후 계속 비판해오던 드골을 지지하게 되었다. 드골은 1958년 5월 대통령 코티(Coty)의 조각(組閣) 위촉을 수락하고 의회의 신임을 얻어 그가 기초한 신헌법을 국민투표에서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드골은 그 해 12월에 제5공화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戰爭

대전 전(大戰前)의 불령(佛領) 인도차이나(Indo-China)는 코친차이나의 직할주(直轄州)와 통킹(東京)·안남(安南)·캄보디아·라오스의 4보호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통킹·안남·코친차이나에는 동일 민족인 베트남인이 살고 있었으니 옛날에는 인도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고 최근에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높은 수준의 민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1940년 파리가 함락되고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진주해오자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은 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약칭으로 베트민이라 부르고, 호치민을 중심으로 맹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일본이 항복하자 그들은 제반시설을 접수하고 1945년 9월에 호치민을 대통령으로 소위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설립하였다. 프랑스는 다시 그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하여 1946년 12월부터 무력충돌의 확대를 보게 되었다. 하노이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던 프랑스군은 우세한 듯 보였으나 소련권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전투가 장기화되었다. 프랑스는 20만의 군대를 투입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오랜 베트민과의 전쟁으로 프랑스 재정은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되어 몇 개의 내각이 무너졌다.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식을 들고 나온 망데스 프랑스 내각은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푸의 요지를 빼앗긴 채 휴전조약을 맺었다. 프랑스는 7년 동안에 9만명의 전사자와 연간 2천억 프랑의 전비(戰費)를 소모하면서 베트민과 싸웠던 것이다. 이 전쟁은 낡은 식민지정책이 민주주의운동을 좌익화시켜 공산주의 세력의 대두를 도운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알제리 전쟁[편집]

-戰爭

알제리(Algelie)는 1830년 이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전전(戰前)에도 여러 번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1954년에 알제리 해방군(ALN)을 조직하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하여 무력저항을 개시하였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중해 건너편에 둔 프랑스 판도의 연장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편견은 오랫동안 알제리에 이주해온 전인구의 10%를 차지한 프랑스 이주민, 즉 콜롱(colon)에 의해 고집되었다. 콜롱들은 자신들이 가진 알제리의 막대한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극단적인 식민주의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프랑스 정계에 주는 압력은 컸다. 제4공화국 정부는 거액의 전비(戰費)를 투입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였지만 해방전선은 오히려 강화되어갔다. 1958년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반란을 계기로 나타난 드골은 1960년 재차 극우(極右)와 군(軍)의 반란을 눌렀고, 1962년 3월에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과 독립승인을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알제리는 독립하게 되었다.

드골[편집]

Charles Andr Josephe Marie de Gaulle (1890

1970)

군인(軍人)·정치가.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전후 1944년에 임시정부 수상이 되었으나 의회와의 대립으로 하야(下野), 1958년에 알제리의 반란을 계기로 정계에 재등장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1962년 알제리 문제를 해결했다. 대외적으로는 미·소 2대 세력에 대항하여 EEC 가맹 거부, 베트남 중립화 제창, 1964년 중공과의 국교 수립, 1966년 소련방문 외교 등에 나타났다. 그러나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배하고 하야(下野)하였다.

5월혁명[편집]

五月革命

드골의 장기집권과 사회경제개혁의 부진, 권위주의적 통치에 반발한 1968년 5월 프랑스 대학생들의 반드골·반체제운동. 드골은 집권 후 경제의 재건, 식민지 문제의 해결 등으로 내정을 수습하고 핵무기 개발 등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기에 현저해진 내정의 침체는 드골의 권위주의적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어 1968년 5월에 파리 대학 낭테르 분교 학생들의 소요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전대학에서 드골 체제에 대한 저항을 일으키게 하였다. 드골은 동년 6월 총선에서 압승하여 일단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1969년에는 심각한 경제위기로 사회불안이 조성되었고, 재차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패배하여 사임하게 되었다. 5월혁명은 결과적으로 드골의 사임을 가져왔고 또 드골의 사임과 함께 일단락지어졌으나, 이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좌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상·문학·예술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적·사회비판적 경향이 강해졌다.

지스카르 데스탱[편집]

Valry Giscard D'Estaing (1926

)프랑스 대통령. 코브래스 출생. 이공대(理工大), 국립행정학원 졸업. 대장성 근무 후 1956년 국민회의 의원 당선, 드골 정권·퐁피두 정권의 재상 역임. 1974년 퐁피두의 사거로 인한 대통령선거에서 국제경제위기의 타개를 외침으로써 사회·공산당 연합 후보 미테랑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① 세계각국과의 협력증진, ② 유럽통합정책의 추진, ③ 나토에 적극 협력, ④ 미국과의 협력을 그 기본외교정책으로 삼았으며, 인플레 극복, 국제수지 개선에 중점을 두어 경제정책을 수행했으나 파업, 실업, 석유파동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미테랑[편집]

Fransois Maurice Marie Mitterand (1916

1996)프랑스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대독일 저항운동에 참가했다. 1971년 사회당의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한 후 사회당 M. 로카르를 총리로 임명함으로써 좌우동거체제를 끝냈다. 1990년 연두교서에서 유럽 연방구상을 발표하고, 1991년 독·프 통합군 창설 구상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1993년 유럽연합의 발족을 성사시켰다. 1993년 3월 총선거에서 우파연합이 압승, 공화국 연합의 E. 발라뒤르가 총리로 임명되어 또다시 좌우동거체제가 출범하였다. 1993년 9월 한국을 방문하여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간 규장각 도서 반환문제에 합의하였으며, 1996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1995년 신드골주의자 자크 시라크가 5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