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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동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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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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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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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drich Smetana(1824-1884) '체코 민족주의의 아버지'인 스메타나는 체코와 모라비아와의 접경근처에 있는 리토미슐이라는 곳의 맥주회사에서 기술장으로서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영주의 마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그곳 음악 교사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워 6세 때에는 국왕 프란츠 1세의 명명식을 기념하는 연주회에 출연하여 오베르의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딸>의 서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것을 연주하여 신동이라고 불렸다. 김나지움(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한 것 같은 것)에 재학중인 8세경부터 갤롭 등을 작곡하기 시작하였으나, 15세 때인 1839년부터 새로운 프라하의 김나지움 교장이 17세기 전반의 30년전쟁 이후 피압박민족으로 권리도 없고 빈곤에 빠져 기력을 잃은 지도자의 한 사람(요셉 융그만)이었음은 스메타나 이후의 음악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부흥운동의 대두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 때까지만 해도 억압 일변도였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소 억압의 손길을 늦춘 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나, 곧 독립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1848년 3월, 바로 그 전달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에 자극된 체코인은 수도 프라하와 그 밖의 고장에서 무력봉기를 하였는데, 이 때 겨우 24세가 된 스메타나는 혁명군에 가담하여 <혁명군을 위한 행진곡>과 <자유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또한 이해(1848년)에는 그 때까지 4년간 일하고 있던 툰백작가의 전속음악교사를 그만두고 대작곡가 리스트의 협력을 얻어 음악학교를 창설한 해이기도 하다. 다음 1849년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으며, 이 학교 경영을 8년간 계속하였으나 1855년에 장녀가 죽어 슬픈 추억이 그의 유일한 피아노 3중주곡으로 결정(結晶)되어 있다. 1856년에 스웨덴의 게테포리시로부터 필하모닉 협회의 지도자로 초빙된 것을 기회로 학교의 경영을 내던지고 5년간 스웨덴에 체재하였으며, 그동안 최초의 교향곡 <리처드 3세> 등을 발표하였다. 1848년의 혁명 실패 이래 체코에서는 관헌의 격심한 탄압이 있었으나, 1860년대에 이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만으로는 이미 부풀어오른 체코인의 민족해방에 대한 에너지를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스메타나는 1861년 프라하로 귀환하여 체코인의 오랜 꿈이었던 국민극장 설립까지의 가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외에 지휘, 작곡, 피아노, 오르간, 평론 등 폭넓게 활약하여 조국의 국민문화의 기초 구축에 분골쇄신하였다. 그 중에서도 1866년에 발표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는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의 최초의 위대한 성과로 기억되어졌다. 1874년의 여름 50세 때 귀머거리가 될 징후를 자각하였는데, 격무와 그에게 적의를 나타내는 일파의 모략으로 급격히 병세가 악화하여 그해 10월 하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으므로 모든 공직을 내놓고 보헤미아 북부의 얌게니체라는 마을로 딸의 내외를 찾아가 은둔하고 말았으며, 여생을 교향시, 실내악, 오페라 등의 창작에 보냈다. 이리하여 나온 것이 교향시 모음곡 <나의 조국>(1874-1879), 제1현악 4중주곡 <나의 생애에서>(1875-1876) 등의 걸작이다. 후자의 종악장으로는 겨우 민족주의적인 창작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때 귀머거리가 된다는 비극이 갑자기 엄습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한다.1884년에 발광하여 2, 3개월 후에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파란 많은 60년의 생애를 마쳤다.

몰다우(블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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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dau(Vltava) 스메타나 작곡(1874). 교향시 모음곡 <나의 조국>의 제2곡. 강의 수원지인 슈마우아의 숲속의 용감한 사냥 장면을 지나고, 소박한 농촌의 혼례 장면을 지나기도 하며, 달밝은 밤에는 중세의 국운이 융성했을 때의 추억에 잠기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변화하면서 점점 강폭을 넓혀 본류인 엘베르강에 합류될 때까지를 묘사곡풍으로 묘사한 것이다. 단순한 묘사로 끝나지 않고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체코인들에게 체코인의 긍지를 갖게 하며 조국애를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진 점이 '체코 민족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답다.

팔려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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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ana nevesta(The Bartered Bride) 스메타나 작곡(1866). 체코의 농촌 희극을 인용한 이 오페라는 향토색이 짙은 노래와 춤에 차 있는 데다가 칼베르크의 뛰어난 독일어역이 있어, 그로 인하여 각국어로 번역되고 상연되어 스메타나의 오페라의 대표작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음악의 스타일로나 극의 내용으로나 더 개성적이며 높은 경지에 이른 민족주의 리얼리즘 오페라의 걸작이 이 밖에도 또 있다.

드보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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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n Dvorak(1841-1901)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가 드보르자크이다. 출생지는 프라하의 북쪽 약 30km에 있는 넬라호제베스라는 마을로 정육점을 겸한 여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체코인이고 보면 그리 신기할 것이 없을는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만 켜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업을 계승시킬 생각으로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13세부터 15세에 걸쳐 외삼촌이 있는 즈로니체라는 곳에 보냈다(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있던 이 나라에서는 독일어가 서투르면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일찍이 가업을 승계시키려는 아버지의 의사를 무시하고 음악공부만을 하고 있었다. 독일어 선생은 오르간 연주가이기도 했던 리만이라는 유능한 음악가였다. 그 뒤 작센과의 국경 근처 체스카 카메니체라는 곳에 공부하러 보냈으나 역시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 때에 드보르자크는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친교를 맺고, 재학중부터 오케스트라에 가담하여 바이올린을 켜서 수확을 올렸다. 특히 그 오케스트라가 당시 첨단을 걷고 있던 바그너를 채택하고 있던 관계도 있어 드보르자크는 퍽 오래도록 바그너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바그너식의 오페라나 음악극의 체코판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멜로디나, 특히 화성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였다. 드보르자크는 꽤 노력형이어서 학생시절부터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프라하의 일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출연하고 있던 갈레루 코므자크악단에 가담하여 비올라를 켜게 되었으나 1842년에 체코인을 위한 국민극장이 건설될 때까지의 임시극장이 개관되어 악단과 더불어 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이 되어 약 10년간 근속하였다. 1866년부터 스메타나가 이 극장의 오페라의 감독에 취임, 자작의 오페라 등을 지휘하게 되었으므로 바그너, 슈베르트라 베토벤의 영향과 함께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그의 작풍을 채색하게 되었다. 드보르자크는 오케스트라 동료들로부터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으나 묵묵히 작곡을 하였으며 특히 1861년(20세 때)부터 실내악의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또 1865년부터 교향곡(제1과 제2를 이해에)을 작곡한 것은 당시의 슬라브계의 민족음악의 작곡가들이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대체로 이와 같은 순음악보다도 표제(標題)음악(즉 줄거리를 지닌 음악, 교향시 등)이나 오페라에 끌려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드보르자크의 이러한 순음악에 대한 정열은 죽기 약 9년 전인 1895년까지 계속된다. 후기 낭만적 음악의 화성조직이나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사용법이라든가 그러한 개개의 기법에 이끌렸어도 고전적인 음악형식을 저버리려고 하는 그 무렵의 작곡계의 일반적인 경향에는 반대였고 새로운 고전주의를 목표로 한 점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브람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사실 브람스에게는 매우 총애를 받아 드보르자크의 작품이 1877년 이후 베를린의 지므로크 음악출판사로부터 출판하게 되었고,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브람스 소개로 된 것이었다. 이 브람스를 비롯하여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뷰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 당시 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평론가 한스리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인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드보르자크의 명성과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1884년 말 영국에서만도 9회나 초빙되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국제인으로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끝까지 체코인으로 살아갔다. 빈으로 이주하도록 재삼 권유된 것을 거절한 것도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빈 정부에 대해 독립투쟁을 밀고 있던 동포들을 버리고 자신만 빈에서 안일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자크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 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의 것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하다)하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더 오래도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도중에 파기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귀국 후 만년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급서, 국장으로 모셔졌다. 드보르자크는 이른바 귀재형의 음악가는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평범 속에 위대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겠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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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響曲第九番<新世界> 드보르자크 작곡(1893).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일반의 인기가 이 교향곡 등 미국 시대의 작품에 집중된 것은 이것들이 체코의 민족음악의 특징뿐만 아니라 미국의 인디언과 니그로의 음악 특징도 채택하고 있어 애호되기 쉬운 재료가 명쾌하고 알기 쉬운 윤곽 속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에서 사용한 순환형식풍의 구성은 특히 친숙해지기 쉬운 재료로, 듣는 사람에게 인상을 가지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드보르자크는 같은 피억압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니그로나 인디언에 대하여 깊은 동정과 공감을 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교향곡은 그가 도미한 다음해 여름을 지낸 아이오와주의 스필빌 마을에서 작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며 그 전에 만들어졌다.

첼로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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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o 協奏曲 드보르자크 작곡, B(나)단조, 작품 104(1895). 미국 시대의 드보르자크의 향수(鄕愁)가 낳은 명작으로 1895년 2월에 일단 완성, 같은해 6월 손질을 하여 지금의 형태로 되었다. 드보르자크가 미국의 니그로나 인디언의 민족음악과 모국 체코의 민족음악과 결부시키려 한 작품이 여럿 있는 중에서 이는 음악으로서 가장 충실히 된 것이다. 독주부(獨奏部)는 첼리스트에게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 기술이 전체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은 한 번도 없고 관현악부와 혼연일체가 되어 교향곡적으로 발전시켜 간다는 정도의 취급방식은 작곡자가 경도되어 있던 브람스의 <피아노(또는 바이올린) 조주(助奏)가 있는 교향곡>이라는 협주곡에서 오는 영향도 느낄 수 있어 첼로 협주곡의 최고의 명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피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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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denek Fibich(1850-1900) 동 보헤미아의 프세보루지체에서 임무관(林務官)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하, 라이프치히, 파리, 만하임에서 배우고 비르나와 프라하에서 작곡하면서 교육에 종사했다. 프라하 음악원에는 비록 초빙되지 않았지만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의 체코 음악계에 미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드보르자크와 함께 알려졌으나 국외에서는 겨우 각종 편곡으로 알려져 있는 <시곡>이라는 소품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이 시곡은 관현악을 위한 목가(牧歌) <황혼>(1893)의 중간부의 칸티레나를 대바이올리니스트인 얀 쿠베릭이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야나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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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s Janacek(1854-1928) 체코의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의 경계지대에 있는 북모라비아 지방이 낳은 최대의 작곡가인 야나첵은 교원인 아버지의 14형제 중의 10번째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태어나기는 폴란드의 국경과 가까운 푸구발디라는 곳이나 11세 때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지 브르노에 가서 성 아우그스티노회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가, 이 성가대의 지도자로 뛰어난 합창곡의 작곡가이기도 한 그루제코프스키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나 뒤에 합창곡이 오페라와 함께 야나첵의 창작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은 이 선생의 영향이었다. 올드브르노중학교에서 국립브르노사범학교로 진학하여 1872년에 졸업하였으나 그 후에도 프라하의 오르간학교(1874-1875)와 빈 음악원의 하기학교(1880)에 유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브르노에서 지냈으며 모교 브르노사범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1882년의 28세 때는 브르노 오르간학교를 발족시켜 1920년까지 그 곳 교장으로 있었다. 그 전해인 1919년에는 프라하 음악원의 브르노 분교의 창설에도 협력하여 오르간학교를 발전적으로 해소시켜 이와 합병하여 1925년까지 그 마스터 클라스에서 가르쳤다. 야나첵의 작품에서 보통 연주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50세를 넘은 뒤인 만년의 작품뿐으로, 그 이전의 것은 자신의 손으로 파기된 것이 많다. 매우 특이한 개성으로 27세의 연하인 헝가리의 바르토크보다 한발 앞서 현대적인 민족주의 음악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게다가 작곡의 기초가 된 고향 모라비아의 민요나 방언의 어법의 특수성과 서양인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적 사상에 따른 구성원리 등 때문에 체코 국내에서도 인정되는 것이 늦어져, 출세작인 오페라 <예누파>(1894-1903)만 해도 브르노에서는 50세 때 인정되었지만 프라하의 국립극장이 이를 채택하기까지는 12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브르노라는 지방도시에 은거하면서 인생의 청춘을 교육에 바친 것도 세상에 알려지는 일이 늦어진 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야나첵은 1928년 여름 돌연 폐렴에 걸려 모라비아의 오스트라우의 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세계가 이 작곡가의 위대성에 주목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일관된 오페라의 하나하나가 모두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도 채택되기까지에는 그 뒤 30년 내지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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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in sonata 第三番 야나첵 작곡(1913-1914). 그의 작품 중 오페라·성악곡에 이어 중요한 것은 실내악곡과 피아노곡이다. 여기서 말한 것은 실내악 방면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제3번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로 1913-1914년의 작곡이다. 훨씬 뒤의 소교향곡(1926), 현악 4중주곡(1923, 1927)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전체가 짧은 주제동기를 씨알로 삼아 그것이 싹을 트고 뿌리를 박아 가지를 뻗고 잎과 꽃이 피듯이 이 같은 독자적인 구성법은 아직 여기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맹아(萌芽)는 물론 여기에도 있고 게다가 특히 제1악장은 야나첵의 음악법 즉 모라비아의 민족음악에 유래하는 어법이 동양인에게는 다른 나라의 음악 같지 않은 친근감을 나타내고 있다.

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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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f Suk(1874-1935) 드보르자크의 사위인 바이올리니스트 겸업의 작곡가이다. 크르세쵸비츠에서 태어나 프라하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은 베네비츠에게, 작곡은 드보르자크에게 배웠다. 1892년 이래 유명한 보헤미아 현악 4중주단의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였고, 1922년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1930년 그 학원 교수에 취임하였다. 만년의 더욱 내면적인 깊이를 더한, 때로는 신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교향모음곡 <에필로그>(1929) 등이 그 한 예이다. 한편 현재 활약하고 있는 동성동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그의 손자이다.

마르티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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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huslav Martinu(1890-1959) 체코의 현대 작곡가 중에서 가장 많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던 마르티누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에 가까운 산악지방 출신으로, 부친은 폴리치카라는 곳의 교회의 종루지기(鐘樓手)였다. 프라하음악원의 바이올린과를 나와 체코 필하모니에 입단, 그 뒤 다시 음악원으로 가서 수크에게 작곡을 배운 뒤 1923년부터 파리에서 알베르 루셀에게 배웠으며 1940년까지 체재하면서 작곡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은 고향의 산악지방의 민족음악과도 결코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근대 감각과 청년시대의 인상주의에로의 경도(傾倒)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터전으로는 자기 나라보다도 오히려 파리가 안성맞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의 손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전쟁 후에도 프라하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미국과 이탈리아, 프랑스, 거기다 고국 사이를 왕래하면서 활약하였다. 스위스의 리스탈에 있는 사나토륨에서 68세로 별세하였다. 마르티누는 속필 대작가로 알려졌으며, 작품의 종류도 각 방면에 걸쳐 있었으나 신고전주의를 기조로 한 것이 눈에 띈다. 쉬르리얼리즘적인 줄거리를 가진 오페라 <줄리에타>(1936), 중후하며 비창한 내용을 지닌 최후의 교향곡 제6번(1953) 등은 좋은 필치를 보인 실내악 작품과 함께 마르티누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게 될 것이다.

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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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is Haba(1893-1973) 제2차세계대전 전부터 미분음(마이크로 토운)으로 된 작곡의 이론과 실천으로 체코 국내에서보다는 유럽 전체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주어온 하바는 모라비아 지방의 출신으로 프라하 음악원에서 노바크에게, 빈 음악원에서 슈레카에게 배웠고 베를린에도 유학하였다. 1923년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에 임명되어 1946-1951년 프라하음악연극 아카데미의 작곡과 주임교수, 그리고 1945년 이래 프라하의 5월 5일 극장의 디렉터이기도 하다. 작품에는 4분음 및 6분음의 현악 4중주곡, 오페라 등에 '실험을 위한 실험'으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 마음을 자극하는 곡이 있으며 그의 미분음 탐구가 본래는 민족음악이나 고대음악의 탐구로부터 발전한 것이었다는 데 주의해야겠다. 무조적(無調的)인 바가 있는 조성음악(調性音樂)이나 12음기법을 채택한 작품도 있다.

바인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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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r mir Weinberger(1896-1967) 프라하 태생으로, 프라하 음악원 출신이며 베를린에서 M. 레거에게도 사사하였다. 1922-1926년 미국의 이타카 음악원 교수를 지냈으며 1939년 다시 도미하여 뉴욕에서 살고 있다. 오페라 <피리 부는 사반다>(1927)와 영국민요 <밤나무숲 밑에서>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1938)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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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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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ence Erkel(1810-1893) 헝가리의 국민 오페라의 창시자이다. 쥐라에서 태어나 1838년부터 부다페스트의 내셔널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이탈리아의 명작 오페라에 필적한다고 하는 <니아지 라스로>(1844), 악극에 가까운 <항크총독>(1861) 등이 그 대표작으로, 이것들은 지금도 헝가리 국내에서는 계속해 인기를 끌고 있다. 에르켈은 헝가리의 사실(史實)을 오페라화한 데서 당시의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애국자이며, 또 공모에 의한 <헝가리국가>는 그가 1845년에 작곡한 것이다.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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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Ferencz) Liszt(1811-1886) 고금 최대의 피아니스트이며, 또 작곡가로는 후기 낭만적 음악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다. 오에덴부르크(샤프론)에 가까운 작은 마을에, 에스테르하지 후작에게 고용된 독일계 헝가리인의 토지관리인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워 일찍이 9세 때에는 근처 도시에서 협주곡을 공연하여 귀족들을 감격시켜 그들의 후원으로 빈으로 가서 체르니에게 사사하였다. 그러나 체르니는 몇 번쯤 가르쳐주면 더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1823년에는 베토벤이 이 천재 소년을 들어안아 이마에 키스를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파리로 가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면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곧 리스트는 피아노의 왕자로 각지에서 연주하게 되는데, 이는 파리 시대의 쇼팽, 베를리오즈, 시인 하이네 등과의 교유로 그의 예술을 풍족하게 해 주었다. 1848년에는 독일 바이마르의 궁정악장이 되었고, 주로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작곡도 하고 피아노의 제자도 양성했다. 1859년에는 악장을 사임하고 2년 후에 로마로 갔으나 신부복올 입고 신학을 배우면서, 한편으론 작곡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886년 여름, 친한 친구이며 사위이기도 한 바그너를 보려고 바이로이트를 방문하던 중 병사하였다. 작곡가로서의 리스트는 3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 즉 초기는 바이마르의 악장이 되기까지로, 파리를 근거로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각지에 명성을 떨친 시대인 만큼 그 작곡도 전적으로 피아노곡이며, 피아노의 새로운 연주기교를 발명, 새로운 음빛깔을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음의 중기는 1860년까지의 바이마르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베를리오즈의 표제교향곡을 하나의 악장으로 압축한 것 같은 교향시를 안출하는 등 주로 관현악곡에 주력하였으나 그런 작품은 베를리오즈와 같이 관현악법이 잘되어 화려한 효과를 지니고 있으므로 친해지기 쉬울 뿐만이 아니라 바그너나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19세기 후반의 많은 작곡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후기는 그 이후의 로마 시대로 교회음악과 기타 종교적인 작곡을 하였다. 리스트는 본래 국제적인 경향을 띤 음악가여서 에르켈과 같은 민족주의 작곡가들과는 달랐지만 부다페스트의 음악아카데미의 창설에 공헌한다든가 또 1830년대부터 1840년대에 걸쳐 연주여행을 하는 동안 틈틈이 헝가리를 방문할 때마다 토속음악을 수집하여, 그것을 뒤에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19곡의 <헝가리 랩소디>로 만드는 등 헝가리 동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였다. 그러나 리스트의 조국애의 구현이였던 19곡의 <헝가리 랩소디>(그 중 16곡은 후에 제자들에 의해 톱푸라와 공동으로 관현악으로도 옮겨졌다)는 헝가리 고래(古來)의 마자르인의 민족음악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며 헝가리에 흘러들어온 집시의 노래와 춤곡이었음이 20세기에 이르러 바르토크와 코다이의 연구에 의하여 명백해졌다. <헝가리 랩소디> 이외의 리스트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특히 애호되고 있는 것에는 <사랑의 꿈> 제3번(1850 출판), <파가니니에 의한 연습곡의 제3번>, <라 캄파넬라(鐘)>(1838 출판, 1851 개정) 등이 있으나 가장 예술성이 풍부한 명곡은 <소나타>(1853)이다.

헝가리 랩소디 제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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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arian Rhapsody 第二番 리스트(1847)의 19곡의 <헝가리 랩소디> 중 가장 유명한 작품. 그 외의 많은 <헝가리 랩소디>와 마찬가지로 라산이라고 하는 느릿한 전부(前部)와 프리스카라고 하는 빠른 후부(後部)로 되어 있으며 각기 즉흥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으나 이는 집시 춤곡의 차르다슈의 특징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렇게 된 느리게 빠르게의 교체 형식은 본래의 헝가리인, 즉 마자르의 18-19세기 모병의 음악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마자르와 집시의 사이에는 오랜 동안에 이와 같이 서로의 음악적 특징을 교환해 온 점도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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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協奏曲第一番 리스트 작곡(1848). 이것은 초기부터 계획을 세워 바이마르로 옮긴 다음해 일단 완성한 것이나, 곧바로 발표하지 않았다가 1851년에 손질하여 1855년에 비로소 그 곳의 궁정음악회에서 초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초기의 작풍의 특징인 현란(絢爛)한 피아노의 효과와 중기의 산물인 교향시풍의 독자적인 처리 방법이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곡을 구성하는 4개의 악장은 도리어 4개의 부분으로 보는 편이 좋으며 각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 관현악의 색채가 새로운 것도 리스트답고 제3악장에서 크게 활약하는 트라이앵글 등은 당시는 아직 경음악에서만 쓰고 있던 악기이다.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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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奏曲 리스트 작곡(1849-1850)이며 프랑스의 시인 라마르티느의 <시적 명상록>의 1절을 표제로 하여 '인생은 죽음에로의 전주곡이다'라는 뜻을 나타낸 이 교향시는 초기의 끝에서 중기 초에 걸치는 작품으로 리스트의 관현악곡 중 가장 인기있는 것이다. 주제의 가락도 친해지기 쉽고 곡의 진행도 매우 구체적이어서 알기 쉽고 거기다 맨 나중에 영웅주의적인 클라이맥스를 놓은 연출의 교묘한 점을 생각한다면 인기를 모았다는 것도 알 만하다.

골트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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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Goldmark(1830-1915) 헝가리 태생이며 빈에서 교육을 받아 마이어베어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를 발표했으며 빈에서 별세하였다. <시바의 여왕>(1875)은 바그너 이후의 독일 오페라의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나 <트리스탄…> 이후의 바그너로부터는 무엇 하나 배우려고 하지 않은 전통적인 오페라 작가에 지나지 않는다. 교향곡, 연주회용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실내악곡, 가곡 등도 남겼다.

바르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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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a Bartok(1881-1945) 20세기 최대 작곡가의 한 사람인 바르토크는 현재 루마니아령(당시는 헝가리)의 나지센트미클로시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프레스부르크로 가서 헝가리 국민오페라의 아버지 에르켈의 아들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진학하여 케슬러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07년에는 일찍이 그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다음해 제1현악 4중주곡을 썼다. 바르토크의 위대하고 고고한 예술이 형성되어 가는 양상을 빨리 알려면 6곡으로 된 현악 4중주곡을 1번부터 차례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1번에서는 독일의 후기 낭만적 음악이나 드뷔시의 인상주의, 게다가 헝가리 민족적 요소 등이 또한 잡거(雜居)되어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음 제2번은 1915-1917년의 작곡으로 후기 낭만적임과 동시에 이미 무조성(無調性)의 접근을 보이는 제1악장, 스트라빈스키류의 원시적인 것과 헝가리인으로서의 민족주의가 결부된 압도적인 제2악장의 뒤에 매우 독창적인 바르토크의 음악을 들려주는 피날레가 수반되게 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바르토크는 음악원에서 한 반 아래였던 친구 코다이와 협력하여 헝가리 및 그 주변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다. 녹음기를 가지고 산속의 마을을 찾아가서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그것을 악보에 채보하기도 하고 편곡도 하였다. 또 작곡의 소재로 이용하기도 하는 작업을 여러 해 동안 하고 있었다. 이 작업이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음의 가능성과 보다 규모가 큰 순음악 형식의 탐구를 개시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1927년의 제3현악 4중주곡과 그 다음 해의 제4현악 4중주곡이다. 이 극히 치밀하고 강렬한 호소를 지닌 두 곡은 바르토크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가장 근접한 시기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바르토크가 여러 가지 현대기법을 채택할 경우 항상 주체성을 확보하면서 채택하였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타인의 기법에 놀아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12음기법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바르토크는 12음기법을 그대로 모방하려고 한 적은 결코 없으며 12음 음악의 유기성, 자율성, 논리성 등을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소화한 데 불과한 것이다. 이리하여 1930년대에 이르자 헝가리인으로서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주력이 되어 인상주의·원시주의·12음 기법 등의 에센스도 그의 속에서 완전히 융합되어 독자적인 위대한 스타일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제2피아노 협주곡(1930-1931), 제5현악 4중주곡(1934), 현악기와 타악기와 첼리스터를 위한 음악(1936),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1937),제2바이올린 협주곡(1937-1938), 제6현악 4중주곡(1939) 등의 명작이 차례로 나왔다.제5현악 4중주곡에는 어느 정도 과도기적인 데도 있어, 이들 최성기의 명작 속에서는 좀 약한 편의 부류이나 다음의 제6번은 그 해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의 비가(悲歌)나 히틀러의 전체주의에의 조소가 들리는 휴머니즘의 명곡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헝가리 정부는 바르토크에 대하여 냉정하였고 도리어 히틀러에 대해 경의를 보였다. 이것으로 그는 1940년 파시즘의 위협이 조국에 미치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대전이 종결된 지 6주 후 뉴욕에서 극빈과 백혈병으로 비극적인 생애를 마쳤다. 미국 시대의 작품에 대해서는 평자의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다르나 적어도 사후 제자인 셀리에 의하여 완성된 유작인 2곡(제3피아노 협주곡과 비올라 협주곡)은 쇠퇴기의 작품으로 간단히 취급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즉 거기에는 최성기의 명작 같은 정치하기 이를 데 없는 기교라든가 이상할 만큼 절박한 표현은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면을 지나고 난 끝에 겨우 도착한 시원한 경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르토크는 극장음악의 분야에도 상징주의적인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1911)이나 표현주의와 원시주의의 결합이 이상한 흥분으로 청중을 이끄는 발레 <중국의 이상한 관리>(1919)와 같은 이색작을 남겼다.

현악기와 타악기와 첼리스터를 위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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絃樂器-打樂器-音樂 바르토크 작곡(1936). 이 작품은 바르토크 최성기의 명작군 중에서도 특히 절정을 보인 것이다. 곡은 목관과 금관을 제외한 편성의 교향곡 같은 형식을 취하여 제1악장의 푸가의 주제가 전곡의 중심주제가 되어 각 악장을 순환한다. 피날레의 끝 가까이 12음 기법에 의한 긴박한 움직임 속에서 이것이 전음계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바, 광활한 개방감은 특히 뛰어났다.

코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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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ltan Kodaly(1882-1967) 바르토크와 함께 현대 헝가리를 대표하는 대작곡가. 바르토크의 작품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친 데 대하여 코다이의 경우는 그의 일생을 조국의 음악계의 발전에 바친 감이 있다. 음악적인 철도관리의 가정에 태어나 김나지움 시대부터 이미 작곡하여 15세 때 그 서곡이 학생 오케스트라로 연주되어 지방 신문에서 '다이내믹한 탤런트'라고 평가되었다. 그 후 부다페스트의 음악아카데미에서 케슬러에게 작곡을 배우는 한편 대학에서 문학도 전공하였다. 이 두 학교를 마친 뒤 작곡가·음악가로서 또는 음악교육가로서 보통 사람의 세 배는 일하였으나 일의 내용에 따라 3기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우선 1905-1922년의 고난의 시대와 1923-1939년의 작곡가로서의 가장 빛나는 시기, 1940년 이후 동포의 교육에 중점을 둔 시기인 3시기이다. 첫째 고난의 시대에는 학우인 바르토크와 협력하여 민요 수집과 연구에 임하였다(바르토크 항목 참조). 1906년부터 모교 음악아카데미의 교수에 취임, 1919년에는 젊은 나이에 교장대리까지 지냈다. 이 시대의 대표작은 무반주첼로 소나타(1915)로 더 젊었을 때의 작곡에서 볼 수 있었던 하이든, 슈베르트, 브람스, 드뷔시 등의 영향이 일소되어, 바르토크와는 다른 독자적인 민족주의의 작풍이 이미 확립되어 있다. 다음 시대에는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헝가리 시편>(1923), 오페라 <하리·야노슈>(1926), 합창곡 <마토라의 풍경>(1931) 등과 같은 코다이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만든 작품을 냈다. 1940년 이후에는 민요의 출판, 대학의 강의, 합창의 지도, 라디오 기타를 통한 계몽 등 동포에의 봉사에 정혼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학교교육과 성인교육에 혁신적인 방식으로 헝가리 민요를 채택하여 단기간에 헝가리 국민의 음악취미를 현저하게 향상시킨 공적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으로 우리들로서도 배워야 할 일이다. 국제음악교육(ISME)회장직도 지냈다.

바이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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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 Weiner(1885- ? ) 바르토크, 코다이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헝가리의 작곡가로, 이 두 사람과 같이 부다페스트의 아카데미에서 케슬러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 빈·베를린·라이프치히·파리에 유학하였고 1913년부터 모교에서 이론을 가르쳤다. 또 그 곳의 코미크 오페라의 코치로도 있었다.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새로운 낭만적인 작풍의 소유주로 알려져 있다.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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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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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yderyk Franciszek Chopin(1810-1849)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쇼팽은 바르샤바 근교의 제라조바블라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성장하여 일찍이 천재의 자질을 나타냈다.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하여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으로, 쇼팽의 음악성 가운데에는 프랑스적인 면과 폴란드적인 면이 끊임없이 공존했던 것은 그러한 관계에서였다. 8세경부터 공개연주를 열었고 또 작곡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초기의 작품은 당시 바르샤바의 연주회에서 인기를 끈 푼메르, 베버, 필드 등의 외면적 화려함을 추구한 피아노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 12세경부터 사사한 바르샤바 음악원장인 유제프 엘스너가 쇼팽의 독창성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고식적인 규칙에 갖다 맞추는 것 같은 교수방법을 피하고 화성학이나 대위법을 가르친 것은 그에게 매우 도움이 되었다. 20세 때인 1830년 바르샤바에서 초연된 2개의 피아노 협주곡에는 이미 뒤에 원숙해진 작품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가 싹을 보이고 있어, 신문의 비평에서도 "쇼팽은 폴란드의 모차르트가 되도록 운명을 타고났다"라고 하였다. 1836년에 이르러 독일의 작곡가 슈만에게도 "모차르트가 만약 현대에도 생존한다면 이 쇼팽의 협주곡과 같은 협주곡을 만들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서 쇼팽을 낳은 폴란드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5세기부터 16세기의 초엽에 걸친 황금시대에는 3개의 바다로 나가는 문호를 가졌고, 유럽에서 최대의 문화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17세기에 러시아와 싸워 국력을 소모하였고 독일도 그 지배하에서 빠져나가는 쇠운(衰運)의 일로를 걷게 되어 18세기가 되자 우선 러시아가, 다음으로 독일이 폴란드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1772년, 1791년, 1795년 3차례에 이르는 이들 열강의 분할의 운명에 직면하여 1795년 드디어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나폴레옹의 뒷받침으로 19세기 초에 작으나마 한때 국토를 회복하였으나 겨우 15년밖에 지탱하지 못하였고, 1830-1831년의 혁명의 실패로 결국 국가는 멸망,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6년에 독립을 회복할 때까지 러시아인이나 독일인의 억압하에 슬픈 운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쇼팽의 음악을 비롯하여 이 나라의 예술작품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는 비운을 신의 손에 맡기려고 하는 듯한 중세적인 멜랑콜리와 프랑스 문화에의 전통적인 동경은 이와 같은 이 나라의 역사에서 온 바가 많다. 1831-1916년의 암흑시대의 폴란드의 문인, 예술가의 대부분은 근거지를 파리로 옮겨 조국부활의 열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쇼팽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두 번째의 협주곡(출판형편상 이것이 제1번으로 되었다)을 스스로 피아노를 쳐서 초연한 3주 후인 1830년 11월 2일, 바르샤바를 떠나 파리로 향하여, 도중에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혁명실패의 뉴스를 듣고 분격한 나머지, 피아노를 때려부수는 듯이 작곡한 것이 <혁명연습곡> 작품 10의 12였다고 한다. 183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 후 39세에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연주도 하고 교수도 하면서 작곡하였으나 본래가 허약체질로 결핵에 걸린 다음부터는 연상인 작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지냈다. 그리하여 상드의 주위에 모여드는 정치가, 예술가 등에게 귀여움을 받았고, 제자의 대부분은 귀부인이나 처녀들이었던 관계상 자연 그녀들이 좋아하는 자잘한 살롱용의 소품을 많이 작곡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로는 녹턴 등이 가장 좋은 예이나 원래는 현악기나 오르간에 비해 산뜻하면서도 드라이한 울림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피아노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윤택한 표현력을 나타내고 있음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장식방법과 정치한 페달의 사용방법으로 풍부하게 피아노를 쳐가는 곡이 많으므로, 쇼팽이라 하면 십대에 알맞는 분위기 뮤직을 만든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녹턴 이외에도 통속화된 쇼팽의 명곡 중에는 그러한 요소가 다분히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곡이라는 작업은 좀더 웅장하고 강한 면이 없으면 도저히 오래 계속할 수 없으며 대성하지도 못한다. 쇼팽도 피아노 소나타나 발라드, 스케르초, 폴로네즈, 또는 전술한 <혁명연습곡> 등에서는 그러한 웅대하고 힘찬 일면을 유감없이 보이고 있어, 미국의 쇼팽 연구가 제임스 허네커는 그러한 그의 참으로 대가다운 한 면을 '위대한 쇼팽'이라 이름붙이고 있다. '위대한 쇼팽'이 그의 조국애로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그의 조국애의 격렬함이 멘델스존이나 슈만과 나란히 중기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는 쇼팽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쇼팽의 작품은 대체로 피아노 독주곡으로 그 이외는 이미 말한 2개의 협주곡, 17개의 가곡, 약간의 실내악곡 등이 있을 뿐이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달인(達人)의 영역에 이르고 있었으며 1837년경부터 1846년 가을까지 계속된 상드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뒤 그의 보호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초청으로 그 곳을 연주여행하였는데 한기와 악천후 때문에 지쳐버린 건강은 결국 치명상을 받았다. 파리에 돌아와서 1년 가까이 요양하였으나 보람없이 사망하였을 때 묘 위에는 1830년에 바르샤바를 떠났을 때부터 항상 지니고 다녔던 고국의 흙이 뿌려졌다.

영웅 폴로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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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雄 polonaise 쇼팽 작곡 작품 53(1842). 허네커가 말하듯이 '위대한 쇼팽'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곡이며 호화롭기 비할 데 없다. 폴란드의 민족무용의 형식으로 작곡된 쇼팽의 작품 중에서도 폴로네즈는 본래 귀족과 기사의 춤인 만큼 남성적이며 당당한 점이 많으며 이에 반하여 농민의 춤에 유래한 마주르카에는 여성적인 것이 많다.

환상즉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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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想卽興曲 쇼팽 작곡 작품 66(1834). 앞의 곡과는 정반대로 분위기 음악적인 쇼팽을 대표하는 통속명곡(通俗名曲)이며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연주되는 일도 있다. 너무나 감미로운 음악이어서 쇼팽 자신도 출판하지 않고 '죽은 뒤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악보의 뒷면에 썼다고 한다. 그것을 제자인 폰타나가 사후 출판하였다.

이별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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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別-曲 쇼팽 작곡 작품 10의 3. 이것은 남아 있는 연습곡 중 하나로, 주제의 멜로디가 쇼팽의 전기영화 <이별의 곡>의 주제로 쓰인 것. 피아노 기교의 연습을 위한 곡에 쇼팽만큼 시적인 내용을 둔 사람도 없음을 이 연습곡은 말하고 있다. 작곡 연대는 불명이지만 1833년에 작품 10중의 다른 1곡과 함께 출판되었다.

전주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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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奏曲集 쇼팽 작곡 작품 28. 그의 다채로운 작풍과 그것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빨리 알려면 24의 소곡으로 된 이 전주곡집을 들어보면 된다. 작곡 연대는 예외적으로 1831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이 있으나 대개는 1836-1839년의 창작력의 절정기로 그 중 가장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 등 수곡이 상드와 함께 생활을 한 최초의 해를 지낸 지중해의 말료르카섬에서 작곡되었다.

왈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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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z集 쇼팽 작곡. 쇼팽의 프랑스적인 면을 대표하는 것은 십수곡의 왈츠이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것은 그 중의 14곡이며, 일괄하여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 그 무렵 유행했던 빈의 왈츠와는 관계가 없으며, 파리 살롱의 기분을 반영시킨 것이 대부분이나 때로는 곡상이나 리듬의 형식이 고국의 춤 마주르카에 가까워진 것도 있다. 작곡 연대는 1829년부터 1847년까지이며 <화려한 왈츠>, <강아지 왈츠> 등의 제목이 붙은 것이 특히 사랑받고 있다.

모뉴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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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islaw Moniuszko(1819-1872) 폴란드 민족주의 음악의 아버지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베를린에 유학한 뒤 비르나에서 오르간 연주자와 음악교사로 있으면서 작곡하였다. 1858년 이후로는 바르샤바로 가서 가극장에서 지휘도 하고 음악원에서 가르치면서 작곡을 계속하였다. 모뉴시코는 가곡작곡가로서도 알려져 폴란드의 가곡사(歌曲史)에 대하여 슈베르트가 독일 리트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과 같은 역할을 다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칸타타,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도 작곡, 특히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5곡의 오페라인데 그 중에서도 <할카>(1848, 1858 개작 초연)이며 <유령이 나오는 집>(1865)은 폴란드를 중심으로 오늘날도 상연되고 있다. 이들 오페라가 암흑시대의 폴란드인의 사기를 얼마나 북돋워주고 기쁘게 하였는지는 모뉴시코의 장의에 7만명이나 되는 폴란드인이 운집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비에니아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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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k Wieniawski(1835-1880) 대바이올리니스트이며 또 쇼팽과 시마노프스키의 중간시대에 가장 국제적으로 알려진 폴란드의 작곡가이기도 하였던 비에니아프스키는 르브링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파리에 나와 음악원에 입학, 마사르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1세 때에 1등상을 받았고 바이올린과를 마쳤다. 바이올린의 신동으로 파리에서 빛나는 성공을 거둔 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절찬을 받았다. 그로부터 동생인 명피아니스트 유세프와 함께 각지를 연주여행하였으며 186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음악가의 칭호를 얻어 1872년까지 이 곳에 살면서 음악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그는 같은 해 A. 루빈스타인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자기만 1874년까지 남았다. 그 후 라이벌인 뷔외탕이 병상에 있는 동안 브뤼셀 음악원에서 대신 가르쳤으나 다시 연주여행에 올라 '파가니니의 후계자'라 하여 절대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44세의 젊음으로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을 때에는 무일푼이나 다름이 없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작품으로는 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약간의 바이올린의 소품이 있을 뿐이지만 슬라브적인 우수(憂愁)와 큰 시(詩)를 지닌 제2협주곡이나 기교의 화려한 소품이 오늘날에도 때로 연주회의 곡목에 오르고 있다.

시마노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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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ol Szymanowsky(1882-1937) 1960년대에 이르러 폴란드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이 일제히 세계의 주목을 끌게 되기까지는, 폴란드의 대표적 현대 작곡가라고 하면 누구나 이 시마노프스키를 들었다. 우크라이나의 벽지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유복한 상류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작곡을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20세 때부터 약 2년간 바르샤바에서 당시 폴란드 최고의 작곡가로 생각하던 지그문트 노스코프스키에게 사사하였으나 노스코프스키에게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한다. 그의 작곡은 각종의 곡종(曲種)에 걸쳐 있으나, 초기 쇼팽, R. 슈트라우스, 스크랴빈, 브람스의 영향을 받아 베를린으로 가서 유럽 작곡계의 중앙무대에서 활약하게 된 중기에는 서정미와 함께 작곡기교의 정확을 더하여 1914년경부터는 무조적인 수법이나 인상주의 수법도 창조적으로 소화하여 채택하였으며 때로는 그 작풍은 도피적인 신비주의로 쏠리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 시마노프스키는 독립을 회복한 바르샤바로 돌아왔으며 이 때부터가 후기가 된다. 후기에는 <스타바트 마테르>(1930)라고 하는 합창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신선하고 강한 설득력을 갖춘 독자적인 민족주의 음악을 낳았으나 건강을 해쳐 요양차 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54세의 생애를 마쳤다.

탄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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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Tansman(1897- ? ) 바르샤바 음악원 출신. 피아니스트 겸업의 작곡가로 1920년대의 초엽부터 파리를 근거로 활약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있었으나 전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작풍은 절충주의적이며 특별히 언급할 만한 작품은 없다.

루토수아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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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old Lutoslawski(1913- ) 현대 폴란드 작곡계의 최고의 지휘자인 루토수아프스키는 바르샤바 태생이며 그 곳의 음악원에서 마리세프스키에게 사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교향변주곡>(1938)에서 보인 그의 빛나는 악기법과 독자적인 흥미를 지닌 화성의 어법은 일부 층의 주목을 끌었으나 전전의 작품의 대부분은 1944년 바르샤바에서의 항독투쟁시 소실되고 말았다. 전후 재출발한 그는 우선 교향곡(1947)에서 거장적 서법과 색채가 풍부한 화성적 효과와의 뛰어난 결합을 보여, 그 뒤에도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54), <현악을 위한 장송곡>(1958) 등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높였다. 루토수아프스키의 창작의 자세를 말하는 한 예로서 이 <장송곡>을 든다면 이 작품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은 12음부로 된 음렬(音列)이다. 그러나 이는 쇤베르크나 베베른적 계통의 내폐적(內閉的)인 12음 기법이 낳은 것과는 매우 다른 극히 독창적인 음악인 것이다. 그 자신도 "자기가 작곡하는 것은 빈 악파(쇤베르크, 베베른)와는 너무나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발레이즈 계통으로 더욱 친근감을 지닌다"고 하였다. 현대의 첨단을 걷는 기법을 차례로 소화하여 채택하면서도 독자적인 것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유럽 시대의 바르토크를 상기시킨다. 1961년부터 우연성(불확정성)의 수법도 쓰고 있고, 이미 그런 식으로 <베네치아의 유희>(1961), 앙리 미쇼를 바탕으로 한 <세 개의 시(詩)>(1962), 현악 4중주곡(1964)과 같은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른바 전위적인 음악작품이며 루토수아프스키의 곡만큼 의도가 진실하고 감동을 깊게 하는 것도 드물어, 재삼 국제적인 상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1959-1965년 국제현대음악협회의 위원, 1962년 이래 스웨덴 왕립음악 아카데미 멤버, 미국이나 영국에도 초빙되어 작곡을 강의하였으며 지금이야말로 폴란드의 국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겠다.

바체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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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zyna Bacewicz(1909-1969) 여류 작곡가로서 이 사람만큼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던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우지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음악원의 바이올린과 작곡과를 나온 뒤 1932년부터 파리에서 나디아 푸란지에게 사사하였다. 일단 귀국하여 우지 음악원의 선생이 되었으나 1934년 다시 파리로 가서 카를 플레시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우선 바이올리니스트로 출발하였다. 작곡가로서도 다작인 편으로 작품은 각종의 장르에 이르렀다. 1950년대 후반까지의 작곡은 신고전주의적인 것이 주였으나 그 후 다소 급진적인 작용으로 흘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펜데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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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tof Penderecki(1933- ) 현대 폴란드의 작곡가 중에서 국제적인 지명도가 가장 높은 펜데리키는 덴비차에서 태어나 크라쿠프 국립고등음악학교에서 말라프스키와 비에초비츠에게 배웠다. 최초 베베른적인 12음기법 내지 그에 계속되는 음렬기법의 연장상에 있는 것 같은 것을 작곡하고 있었으나 1960년경부터 현악기의 표현력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펼치는 실험과 우연성의 수법을 결합시켜 현악 4중주곡(1960)이나 52의 현악기를 위한 <히로시마 희생자에의 애가>(1961) 같은 강렬한 역작 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고, 1961년부터는 전자음악이나 구체음악의 방면에서도 걸작을 내놓았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그의 최대 걸작은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누가복음에 의한 수난곡>(1965)으로 일류(一流)의 대담한 실험적 수법과 전통적인 교회음악의 수법과의 오묘한 조화가 듣는 이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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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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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Enesco(1881-1955) 바이올리니스트 겸업의 현대 루마니아의 작곡가이며, 루마니아 동부의 리베니 태생이다. 7세 때부터 빈 음악원에서 바하리히와 헬메스베르거, 그리고 프츠리스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3세 때부터 파리에서 마르시크에게 바이올린을, 마스네와 포레에게 화성과 작곡을 각각 배웠고 1897년에는 파리에서 자작의 발표회를 열었다. 그 후 한때 귀국하여 루마니아 여왕의 궁정독주가로 활약하고 있었으나 다시 파리로 돌아와 에콜 노르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주로 파리에서 지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특히 바흐의 명해석으로 알려져, 그의 문하에서 메뉴인과 같은 뛰어난 음악가를 배출했다. 작곡가로서도 각종의 장르에 걸쳐 다소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고, 루마니아에선 지도적인 지위에 있었으나 제일 잘 연주되고 있는 초기의 <루마니아 랩소디> 제1번(1897)을 뒤덮고 있는 흙내나는 향토색은 반드시 에네스코의 작풍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작품은 브람스나 바그너의 영향도 같이 받으면서 점차로 민족주의와 인상주의를 결합시킨 작풍 같은 것으로 되어갔다.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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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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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ov Gotovac(1895- ? ) 현대 유고의 작곡가의 원로격으로 빈에서 교육을 받았고 1923년 이래 자그렙의 크로아티아 국립가극장에서 지휘하면서 다수의 작품을 작곡하였다. 독일에서도 상연된 일이 있는 오페라 <악한 에로>(1935)와 거장적인 관현악 효과를 지닌 민족주의 음악 <교향적 콜로 춤곡>(1927)으로 유명하다.

켈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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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ko Kelemen(1924-1979) 현대 유고의 혁신적인 작곡가들 중에서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켈레멘은 크로아티아 출신이며 자그렙 음악원을 나온 뒤 메시앙에게 사사하였으며, 독일에서 포루트너에게 사사하였다. 1961년에는 자그렙 현대음악 비엔나레를 창설, 그 회장직을 지내고 있다. 자그렙 합창단에 의해 소개된 <협주적 즉흥곡>(1955)은 바르토크에게 일맥상통하는 현대적인 민족주의 음악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 밖에도 관현악곡이나 피아노곡이 있고 오페라와 발레곡에도 손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