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영 국
버드
[편집]William Byrd(1542?-1623) '영국의 불사조'라고 하던 엘리자베스 왕조의 대작곡가. 일생에 대하여서는 불명한 점이 많지만, 링컨셔 출신이며 토머스 탤리스(1505경-1585)에게 배웠다고 한다. 1563-1572년에는 링컨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었고, 1569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예배당의 멤버가 되어 스승 탤리스와 함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575년 두 사람은 여왕으로부터 악보의 출판 판매에 관한 특허를 부여받아, 버드의 작품 18곡을 포함한 종교 가곡집을 출판하였다. 이 독점적 특허는 1585년 탤리스의 사망으로 버드 한 사람의 것이 되어 이후 그는 계속 자기작품을 출판하였다. 1593년에 에섹스주 스턴던으로 이주하여, 재산권을 둘러싼 소송에 말려들어 한때 창작과 출판사업은 중단되었으나, 그후 2권으로 된 카톨릭 모테토집 <그라두알리아>(1605-1607), 1611년에는 존 부울, 오란드 기본즈 등과 버지널곡집 <파세니아>를 출판하였다. 이는 영국 버지널 음악의 최초 악보집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며 버드의 작품 8곡을 포함하고 있다. 버드의 창작활동은 교회음악, 세속적 합창곡, 비올을 위한 합주음악, 건반악기음악 등 당시 음악의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다. 궁정예배당에 봉직한 그는 영국국교회를 위하여 그레이트 서비스나 앤섬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으나, 자신은 평생을 카톨릭 신자로서 3, 4, 5성의 미사곡, 모테토를 비롯하여 카톨릭을 위한 작품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종교적 작품에서는 날카로운 불협화음이나 대사(對斜-착오 대립)를 사용한 탁월한 대위법 기법을 보였고, 고상한 기품에 찬 작풍을 만들어냈다. 또한 세속적인 성악곡의 분야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향하에 자라난 초기의 영국 마드리갈의 개척자로서, 영어의 독특한 리듬감을 살린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음악사적으로 버드가 이룬 가장 큰 공적은 건반악기 음악 영역에서 보게 된다. 그의 버지널 작품은 <파세니아>나 <피츠 윌리엄 버지널 북>에 매우 우수한 것이 수록되어 있으나, 그러한 작품으로 버드는 춤곡 스타일을 양식화하였고, 디비젼이나 샤콘의 변주기법을 고도로 발전시켜서 버지널의 특성을 충분히 발휘한 근대적인 피아니스틱한 작풍을 확립하여 후세의 발전에 기초를 구축한 것이다.
퍼셀
[편집]Henry Purcell(1659-1695) '영국의 오르페우스'라고 불린 영국 음악사상 최대의 작곡가. 1659년(일설에는 1658년)에 런던에서 태어났으나 5세 때 궁정예배당의 악원이었던 아버지를 잃어 숙부 토머스 집에서 자라났다. 토머스도 궁정예배당의 악원으로 있는 우수한 음악가이며 퍼셀은 이 숙부의 천거로 1669년 궁정예배당의 소년 성가대원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가대장인 쿠크와 험프리의 지도를 받아, 대륙의 새로운 음악 유행, 즉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 양식의 작곡법을 배웠다. 1673년 변성기를 맞았기 때문에 궁정예배당 성가대를 물러나서 왕실의 '리걸, 오르간, 버지널, 플루트, 리코더 그 밖의 악기의 보존·제작·수리, 조율계의 상임 무급조수'가 되었고, 한편 다음해에는 불과 15세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오르간 조율사로 임명되었으나 당시는 악기의 조율사와 연주가는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 사실만으로 어린 퍼셀의 능력이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1676년부터는 그 성당의 사보계(寫譜係)도 겸하여 이 일을 통해 버드, 기번즈, 톰킨즈 등 엘리자베스 왕조 음악의 전통을 세밀히 연구할 수가 있었다. 또한 대사원의 오르가니스트, 존 블라우에게도 직접 많은 것을 배웠다. 1677년, 18세의 그는 궁정악단의 상임작곡가로 임명되어 1679년에는 블라우의 후임으로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다시 1682년에는 궁정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은 적으나 그 중에서는 3-7성부의 현악합주를 위한 환상곡이 기번즈 등의 전통적인 대위법 기법을 이어받은 걸작이다. 궁정음악가로서의 퍼셀은 오르가니스트 외에도 악기의 조율계, 제임스 2세의 하프시코드 주자 등을 겸임했으며 예배당에서 연주되는 앤섬(讚歌)과 오우드(頌歌)를 많이 썼다. 또 1680년에 찰스 2세의 런던 귀환을 축하하는 환영가를 작곡한 것을 비롯하여 영국 왕의 대관식이나 탄생일 등 왕실 일가(家)의 경조축일(慶弔祝日)에는 거의 퍼셀의 작품이 연주되어 그 명성은 점점 높아졌다. 69곡에 이르는 그의 앤섬은 영국 국교회 합창음악의 전통에 따라 작곡되었으나 엘리자베스 왕조의 버드 등의 작품에 비교하면 독창부(獨唱部)가 한층 풍부한 표정을 지녔고 대위법적으로도 자유로운 수법을 보이고 있음이 주목된다. 1683년에 퍼셀은 12곡으로 된 2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한 3성부의 소나타집을 출판하여 국왕에게 헌정하였다. 이 곡집에서 그는 영국의 오랜 비올 코소트의 수법을 떠나 이탈리아풍의 교회소나타 양식의 모방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트리오 소나타를 본으로 삼고 있지만 솔로를 중시하는 이탈리아 양식과는 달라 성부간의 균형을 지닌 다성적인 텍스처(書法)에는 영국의 환상곡 수법이 살려져 있어 그가 뛰어난 대위법 작곡가였음을 보이고 있다. 1689년에는, 퍼셀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든 걸작 <디도와 에네아스>가 작곡되었다. 이 작곡이 전기(轉機)가 되어 다음해에는 도세트 가든즈 극장의 작곡가가 되었고 이후 만년의 5년 여 동안 그의 창작의 주력은 극음악 분야였다. 그리하여 <디오크리지안>, <아서왕>, <요정의 여왕>, <돈 키호테>, <아테네의 다이몬>, <인도의 여왕>, <템페스트> 등 약 40곡에 달하는 무대작품이 계속 발표되었다. 이들 작품은 왕제복고기의 영국인 오페라보다도 음악을 곁들인 극에서 주고받는 소탈한 대사를 좋아한 경향을 반영하여, 엄밀한 의미로의 오페라가 아닌 마스크(가면극) 또는 극의 부수음악의 형식으로 작곡되고 있다. 만년에는 종교음악의 분야에도 <테 데움>, <여왕 메리의 장송 앤섬> 등 원숙한 걸작을 남겼으나 1695년 11월 21일에 36세의 젊음으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장례되었다. 18세기에 이르자 이탈리아 음악의 유행 물결에 밀려나 자기 모습을 잃은 영국음악계로서는 그의 요절은 애석한 일이었다. 퍼셀은 매우 개성적인 창조력의 소유자로, 엘리자베스 왕조의 대위법의 수법을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새로운 음악의 양식과 융합시켜 영국음악의 전통에 세련된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 작풍의 현저한 특징은 규칙에 구애됨이 없이 정열에 내맡기는 환상성과 자유분방함이다. 주제의 불규칙한 프레징, 박자와 리듬의대담한 충돌, 정통적인 악절 구조의 멜로디를 홀수마디의 낮은음으로 지탱하는 등 풍요한 천분의 빛을 보이는 독특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이같이 교묘하고 정치한 기법은 정열적으로 불타오르는 악상의 전개와 합치하여 확실한 극적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어 다른 것에 비할 바 없는 경지를 연 것이다.
디도와 에네아스
[편집]Dido and Aeneas 퍼셀 작곡(1689). 트로이의 왕자 에네아스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비련을 제재로 한 오페라이며, 퍼셀의 최고 걸작이다. 1689년 작으로서, 본래 여자기숙학교의 학생들을 이하여 작곡되었으므로 아마추어들도 상연할 수 있도록 소규모의 실내 오페라의 양식을 취하였으며, 극도로 압축된 표현수단과 간결한 구성으로 최대의 극적 효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헨델
[편집]Georg Friedrich H ndel(1685-1759) 퍼셀의 사후 영국에서 활약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는 독일인 헨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부 독일의 할레에서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시의로 있는 외과의사였다. 헨델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를 법률가로 만들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음악을 금했으므로, 헨델은 밤중에 몰래 다락방에 숨어서 달빛에 클라비코드를 쳤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결국 선제후의 설득으로 헨델은 할레의 오르가니스트 차하우에게 배우게 되었다. 차하우는 교사로서 매우 뛰어난 인물이어서 여러 나라의 음악 특질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종합적으로 전수했으므로, 헨델은 여러 가지 수법을 습득하여 국제적인 작풍을 몸에 익혔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하프시코드·바이올린·오보에 등 각종 악기도 모두 통달하였다. 1697년 아버지를 잃고 그의 유지에 따라 1702년 할레 대학의 법률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결국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음해 그는 함부르크로 가서 라인하르트 카이저가 이끄는 함부르크 오페라의 바이올리니스트 및 하프시코드의 주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카이저의 명쾌한 작풍에서 유래한 선율법과 다채롭고 표정적인 관현악법을 배웠고 이론가 매티슨이나 오르간의 대가 북스테후데의 작풍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요한 수난곡>이나 오페라 <알미라>, <네로> 등이 작곡되었으나 오페라 작품의 성공은 카이저의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어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았으므로 1706년 이탈리아로 떠나고 말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로마에서 활약했으며 예술의 보호자 옷토보니 추기경의 저택에서 개최되는 아카데미아에 참가하여 A. 스카를라티, 코렐리, 파스키니 등과 친교하여 직접 그들로부터 이탈리아풍의 칸타타, 합주음악, 건반악기 음악의 작풍을 습득하였다. 이탈리아 체재 중 헨델은 많은 칸타타, 오라토리오, 세레나데를 작곡했는데, 특히 <로드리고>와 <아그리피나>의 성공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작곡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1710년에 그는 하노버의 궁정악장의 지위를 얻고 귀국했지만 곧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갔는데, 당시의 런던은 마침 이탈리아 오페라의 유행의 전성기여서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헨델은 <리날도>(1711)로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일단 하노버로 돌아온 뒤 다시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가서 <충실한 양치기>(목가극), <테세오>를 상연했고 에스파냐 계승 전쟁의 전승기념으로 <유트레히트의 테 데움과 유빌라테>를 작곡하여 앤 여왕으로부터 궁정 작곡가의 지위와 연금을 하사 받고 그대로 런던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런데 1714년에 여왕이 승하하자 영국 왕위에 오른 것이 구주(舊主) 하노버 후작이었다. 이것이 하노버에서의 의무를 게을리한 헨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페라 <아마디지>(1715)의 상연으로 새 국왕 조지 1세를 맞아 왕의 용서를 받았다. 헨델이 국왕과 화해하기 위하여 템스강의 뱃놀이 때 유명한 <수상(水上)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일화의 신빙성은 오늘날 거의 부인되고 있다. 1719년 헨델은 <왕립 음악 아카데미>라는 새로운 오페라 운동을 일으켜 이탈리아 오페라의 작곡과 상연에 정력을 집중하여 <라다미스토>, <율리어스 카이사르>, <아르치나> 등을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오페라 활동은 결코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1720년엔 적수 보논치니의 출현으로 아카데미는 분열·대립하였고, 영어를 사용하여 시민의 생활감정을 교묘하게 표현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는 1728년에 상연됨과 동시에 런던의 인기를 독점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헨델의 실각을 도모하는 반대파가 1733년에 새로운 오페라극장을 결성하였으므로 헨델은 포르폴라, 하세 등과도 대항하지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반대파와의 항쟁에 설가상으로 경제적인 부담에 견디지 못한 그는 마침내 1737년 졸도(卒倒)로 쓰러졌다. 병에서 회복되자 그는 다시 <크세르크세스>, <데이다미아> 등 몇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나 모두 호평을 받지 못하고, 1741년을 끝으로 오페라 작곡을 단념하기에 이른다. 오페라 기업이 실패한 뒤 헨델은 창작활동의 주력을 오라토리오 분야에 쏟았다. 그는 이미 <에스테르>, <디보라>, <알렉산더의 향연> 등 일련의 극적 오라토리오를 썼으나 1738년에는 그 계통에 속하는 <사울>과 앤섬풍의 종교적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2편의 걸작을 작곡하였다. 1741년에 그는 더블린 연주여행을 위하여 <구세주>를 작곡했고, 다음해 이곳 자선연주회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삼손>, <벨샤자르>, <유다스 마카베우스>, <요슈아>, <솔로몬>, <에프다> 등 주로 구약성서에서 취재한 오라토리오를 발표하여 중산시민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오라토리오와 병행하여 오르간 협주곡, 합주협주곡, 트리오 소나타 등의 기악곡도 작곡하였고, 1749년에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의 종결을 축하하는 아헨 강화조약 기념의 불꽃놀이대회에서 유명한 <왕궁의 불꽃음악놀이>가 연주되었다. 만년에는 백내장(白內障)의 악화로 실명하였으며, 1759년 4월 14일 74세로 일생을 마쳤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헨델의 음악은 바흐와 똑같이 중부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것이나 일생의 대부분을 국외에서 지냈으며 만년에 영국에 귀화한 그는 바흐와 달리 매우 폭이 넓은 작풍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유려한 벨 칸토의 성악적 선율성, 기악음악의 간결한 양식, 카리시미류의 오라토리오 작법을 배웠고 영국에서는 국교회의 합창음악의 전통, 특히 퍼셀의 앤섬 수법을 계승하여 그것들을 종합하여 많은 걸작을 내었다. 특히 중량감이 있는 합창은 그의 오라토리오에 있어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매우 극적, 인간적, 현세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 중에서 심리적 긴장이나 극적 표현 효과를 높이는 합창은 민중의 공동의식의 새로운 표현형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바흐의 대위법적인 합창이 심원한 종교성을 보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헨델의 작품 <구세주>가 너무나도 유명해졌으므로 다른 오페라나 오라토리오가 부당하게 등한시되어 왔으나 근년에는 점점 그 부활 상연으로, 진가가 재인식되어 가고 있다.
수상음악
[편집]水上音樂 헨델 작곡. 템스강에서 국왕이 뱃놀이를 할 때 작곡한 헨델의 대표적 관현악 모음곡. 초연을 둘러싼 전설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즉 거기에 따르면 하노버에 있을 때 궁정악장의 직무를 태만히 하다가 런던에 와서 정착한 헨델은 1714년에 하노버 후작이 조지 1세로 영국의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궁지에 빠졌고 왕이 템스강에서 뱃놀이를 할 때에(1715) 이 곡을 연주하여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화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전무하여 오늘날 거의 부정되며, 실제로 이 곡이 연주된 것은 1717년 또는 그 이후의 뱃놀이 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야외의 주악에 알맞은 밝고 대범한 음악이다. 모두 20곡의 소곡이 현존하지만 뒤에 하디가 6곡을 뽑아 근대관현악용으로 편곡한 것도 많이 연주되고 있다.
메시아
[편집]The Messiah 구세주(救世主)라고도 한다. 헨델 작곡. 고음의 오라토리오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명곡이다. 1741년 여름 가극의 연속적 실패로 불우했던 헨델은 아일랜드의 귀족으로부터 더블린에서 자선연주회를 개최하도록 의뢰를 받아 이 오라토리오를 불과 24일 만에 작성하였다. 성서를 바탕으로 한 가사는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는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과 성취, 제2부는 수난과 속죄, 제3부는 부활을 다루고 있으나 헨델은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깊은 종교적 감동과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미를 감명깊이 음악으로 힘차게 노래하였다. 1743년에 런던에서 상연되었을 때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의 부분에서 국왕 조지 2세를 비롯하여 청중 전원이 감동한 나머지 기립하였으므로, 그후부터는 이 곡을 기립하여 듣는 습관이 생겼다.
율리어스 카이사르
[편집]Julias Caesar 헨델 작곡. 이집트로 원정간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그의 오빠 프톨레메우스 왕을 둘러싼 사랑과 음모의 갈등을 제재로 한 3막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이다. 1724년에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제2차대전 후 독일에서 종종 부활 상연되어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바흐
[편집]Johann Christian Bach(1735-1782) 대 바흐와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독일을 떠나 국제적으로 활약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 '밀라노의 바흐'라든가 '런던의 바흐'로 불리고 있다. 1735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1750년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맏형 빌헬름 프리데만에 이끌려 베를린으로 가서 둘째형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밑에서 4년 여의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 무렵 베를린 궁정가극장에서 인기가 있던 C. H. 그라운, J. A. 하세 등의 오페라에 큰 흥미를 품고 그를 오르가니스트로 하려던 형의 뜻에 반하여 1756년 오페라 수업을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의 아고스티노 리타 백작의 궁정악장이 되었고, 그의 원조로 볼로냐의 저명한 이론가 마르티니 신부에게 사사하였다.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미사곡, 마니피카트, 테듐 등 카톨릭 교회음악의 작곡에 전념하였다. 1760년에는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다시 오페라에 정열을 불태워 1746-1762년에는 토리노와 나폴리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교회 일을 태만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1762년 밀라노를 떠나 런던으로 옮겼다. 다음해 킹즈 극장에서 상연한 오페라 <오리오네>로 작곡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굳혔으며, 영국 왕비 소피아 샬로트의 음악교사에 임명되어 귀족의 자제를 가르쳐 런던 사교계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다. 1764년엔 런던을 방문한 소년 모차르트를 만나 그의 작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같은 해 그는 감바 주자 아벨과 공동으로 공개연주회를 개최하였으나 '바흐 아벨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연주회는 그가 별세하기 전해까지 18년간 계속되어 하이든 등의 새로운 작품을 영국악단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바흐는 그 뒤에도 오페라나 칸타타에 걸출한 작품을 발표하였고 만하임이나 파리에서도 초빙되어 국제적 명성에 휩싸인 가운데 1782년 런던에서 46세의 일생을 마쳤다. 작곡가로서의 바흐는 이탈리아풍의 서정적인 우아한 멜로디와 탁월한 관현악법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교향곡, 클라비어의 소나타, 협주곡, 실내악곡 등 다방면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그는 완고한 부친 제바스티안과는 달리 중심이 없고 의지가 약한 데가 있었으나 그것이 도리어 호모포닉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여 교묘하게 세상의 시류를 따서 인기를 떨칠 수가 있었다. 오페라는 오늘날에 와서는 거의 상연되지 않으나 당시 압도적인 인기를 모은 것으로 주목할 만하며 교향곡이나 클라비어의 협주곡 및 소나타는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의 선구로서 고전파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뜻에서 음악사적으로 중요하다.
설리번
[편집]Arthur Sulivan(1842-1900) 설리번은 19세기 후반의 침체한 영국악단에서 기염을 토한 유일한 음악가였다. 아버지는 군악학교 교관으로 있는 아일랜드인이고 어머니쪽은 반은 이탈리아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12세부터 궁정예배당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1856년에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신설된 멘델스존상(賞)의 최초 수상자로 뽑혀 그 장학금으로 1858-1862년에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였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하우프트만, 다비도 등에게 사사하였으나 특히 슈만 작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1866년에 왕립음악원의 작곡과 교수에 임명되어 다음해 조지 그로브와 함께 빈을 방문했었는데 이 때에 <로자문테>를 비롯하여 슈베르트의 자필악보를 많이 발견하였다. 같은 해 설리번은 오페레타 <콕스 앤드 박스>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오페레타 작곡가로서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그후 1871년에 대본작가 길버트를 알았고 이후 그와 공동작으로 된 오페레타 <배심재판>(1875), <마법사>(1877), <군함 피나포어>(1878), <펜잔스의 해적>(1879), <페이센스>(1881), <아이올런시>(1882), <미카도>(1885), <곤돌라의 사공>(1889) 등이 속속 발표되어 런던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작품으로는 오페라 외에 그랜드 오페라 <아이반호>(1891),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 오라토리오 <세상의 빛>, <안테오케의 순교자>, 칸타타 등이 있으며, 생전에는 이들 작품으로도 명성을 떨쳤었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대작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지만 소품 속에는 찬송가 나 가곡 <잃어버린 화음> 등 널리 애창되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엘가
[편집]Edward Elgar(1857-1934) 엘가는 영국 서부의 중도시 우스터의 교외 브로드히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악보상을 경영하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이며 엘가 자신 "음악의 흐름이 집이나 점포 안에 넘쳐, 나는 언제나 음악에 젖어 있었다"라고 소년시절을 회상하고 있듯이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6세 때 아버지 의사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하여 런던의 한 변호사 사무소에 취직했으나 음악만이 자기의 천직임을 깨달은 그는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배워 고향에 돌아와 글리 클럽의 피아니스트 겸 지도자, 교회 오르가니스트,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일하였다. 곧 오케스트라의 지휘도 하게 되었고 이 악단을 위한 편곡도 맡아보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점차 관현악법과 지휘법의 기술을 체득하였다. 1889년에 결혼한 엘가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애처의 따뜻한 격려로 대규모의 작품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 성과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꽤 긴 세월을 요하였다. 1891년에 런던의 소음을 피하여 바르번으로 이사하여 여기서 13년을 지냈으나 그 동안에 칸타타 <검은 기사>(1893), <올라프 왕>(1896) 등이 작곡되었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 끝에 일약 엘가의 명성을 높인 것이 1899년에 런던에서 초연되는데, <에니그마(수수께끼) 변주곡>이다. 자작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이며 엘가는 각개의 변주에 친구들, 부인 알리스 및 자기 자신의 음악적 초상을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1901년에 독일에서도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고 오늘날에는 엘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1900년에 버밍검 음악제에서 초연된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은 엘가의 명성을 한층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 합창음악수법을 계승하여 탁월한 합창의 처리와 효과적인 관현악법으로 신비적인 아름다움을 보인 이 작품을 R. 슈트라우스는 진실로 대가의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1902년에는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서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한 송가(頌歌)의 작곡 의뢰를 받았고 또한 1903년 <사도행전>, 1906년 <신국>의 2개의 오라토리오를 완성하였다. 그 뒤 2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서곡과 알레그로, 교향시 <팔스타프> 등 규모가 큰 걸작을 발표하였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갑자기 애국의 정열에 넘쳐 몇 편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그것들은 음악적으로 앞선 것만은 아니었다. 대전이 종결된 뒤 그는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4중주곡, 피아노 5중주곡(1918), 첼로 협주곡(1919)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들은 말하자면 엘가의 창작력의 최후의 연소를 보인 것이었다. 엘가의 작품은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등의 대작을 포함하여 그 수도 많지만 특히 걸출한 것은 관현악곡이다. 그것들은 아주 영국인다운 견실하고 중후한 구성을 보이며, 화려하지는 않으나 풍요한 선율미와 화성적인 변화에 차서 슈만이나 브람스에 일맥상통하는, 동경에 찬 로맨틱한 서정성을 찬양하고 있다. 엘가는 그다지 일류의 대가는 아니었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으며 오래도록 극히 부진하던 영국음악 부흥의 효시라는 점에 공적이 매우 크다.
월튼
[편집]William Walton(1902- ? ) 작곡가.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한 월튼은 옥스퍼드의 교회성가대를 거쳐, 16세 때 대학에 들어가 휴 알렌에게 사사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활동은 1923년 잘츠부르크 국제 현대음악제에 현악 4중주곡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의 영향을 받아 리듬의 생동감, 불협화음의 처리, 악기 사용에서의 예리한 멋, 우울한 감정을 재치있게 변화시켜 나간 점 등이 관심을 모았다. 1931년에는 걸작 <벨샤저의 만찬>을 발표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작품활동이 그다지 없었다. 1954년에 그의 첫번째 오페라 작품인 <트로이러스와 크레시더>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벨샤저의 만찬>에서와 같은 웅장한 맛은 없으나 새로운 아름다움이 내포된 것이었다. 작품은 많지 않지만 엘가 이후의 가장 중요한 영국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딜리어스
[편집]Frederick Delius(1862-1934) 영국에 귀화한 독일인 양모상 아들로 브래드퍼드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독일로 가서 바그너의 악극에 접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84년 플로리다에서 오렌지 농원을 경영하기 위하여 도미, 여기서 오르가니스트인 토마스 워드를 사귀어 그로부터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워 마침내 음악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1886년에 유럽으로 돌아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야다스존, 라이네케 등에게 사사하였고 당시 라이프치히에 있던 글리크에게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890년 이후에는 대부분 프랑스에서 살았으며 1897년에 독일인인 여류화가 에르카 로젠과 결혼하였다. 1899년에 런던에서 자작연주회를 열었지만 그의 작품이 최초로 알려지기는 영국이 아니고 독일에서였다. 만년은 진행성마비에 걸려 실명하였기 때문에 제자인 엘리크 펜비에게 받아쓰게 하여 작곡을 계속하였다. 딜리어스는 파리 악단은 물론 영국의 음악계에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지위나 명예, 상찬이나 금전적 보수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파리 교외의 아름다운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음악적 감흥에 이끌리어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였다. 그 고독한 일생과 같이 그의 작풍은 음악사 속에 고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릴 적에 와그네리즘의 세계를 받아 글리크의 국민주의적 작풍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종종 회화적, 또는 가시적(可視的)인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점으로 인상파적인 경향도 보이고 있으므로, 그 작풍은 굳이 말하면, 인상파적인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음악적 이미지나 양식, 기법은 개성적인 그의 독자적 작풍이다. 대표작에는 오페라 <고앙가>,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플로리다 생활의 인상을 그린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애팔래치아>, 교향시 <브리그의 거리>, 환상곡 <여름의 정원에서>, <저 언덕을 넘어서>, <강물 위의 여름밤>, <봄을 알리는 뻐꾹새 소리를 듣고>, 피아노·바이올린·첼로의 협주곡 등이 있다.
윌리엄스
[편집]Ralph Vaughan Williams(1872-1958) 런던의 왕립음악학교에서 휴버트 패리와 찰스 스탠퍼드에게 배운 후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영국의 민요와 튜더 왕조의 교회음악에 관심을 보였으나 특히 민요에 깊은 애착을 품고 스스로 노어퍽 지방에서 민요를 채집하였다. 3개의 노어퍽 랩소디(1906-1907)로부터 전원교향곡(1922)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은 이 민요에 쏠린 결과 생긴 것이었다. 본 윌리엄스는 대기만성형의 작곡가로 최초의 중요한 작품,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미지의 국토로>가 발표된 것은 1907년, 35세 때였다. 이 스탠퍼드류의 고전주의에 물든 작품은 그의 존재를 일부의 음악애호가들에게 인식시켰지만 그는 더욱 연찬을 쌓기 위해 1908년 파리에서 라벨에게 8개월간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그 다음해에 발표된 가곡집 <웬로크의 봉우리에서>는 그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그후 제1교향곡 <바다의 교향곡>(1910), 제2교향곡 <런던 교향곡>(1914)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나 제1차세계대전 중엔 간호병 및 포병사관으로 프랑스에 종군하여 한동안 창작활동은 중단되었다. 전후 왕립음악학교 교수와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1922년 제3교향곡 <전원 교향곡>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부동한 지위를 확립하였다. 만년은 난청으로 괴로움을 겪었지만 최후의 10년간에는 4곡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 점점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원숙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는 앞서 나온 것과 <남극교향곡>(제7번, 1953)을 포함한 9곡의 교향곡, 오페라 <소몰이 휴우>, <사랑의 존 폴스타프>, <탈리스의 주제로 된 환상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 아카데미곡, 미사곡 사단조, 오라토리오 <성도(聖都)> 등이 있다. 그는 근대 영국의 음악가 중에서 가장 영국적인 작곡가라고 하며 그의 명상적인 작풍은 웅대한 규모와 소박한 아름다움마저 지니고 있다.
티페트
[편집]Michael Tippett(1905- ? ) 변호사의 아들로 콘월에서 태어나 런던 왕립음악학교에서 찰스 우드와 R. O. 모리스에게 사사하였다. 마침 제1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청년기에 이른 그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전쟁의 현실, 인류의 깊은 쓰라림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학생시절에는 공산주의에 흥미를 보인 시기도 있지만 곧 그것에 실망하여 열렬한 인도주의자가 되어 제2차대전 중에는 양심적 참전거부자로서 구금되었다. 29세 때 교향곡 내림나장조를 발표하여 일부 사람들로부터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뒤에 티페트 자신에 의해 파기되었지만 시벨리우스에게 입은 바가 컸다고 한다. 그후 1937년 브레이크의 시로 된 합창곡 <자유의 노래>, 다음해에는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소나타>를 발표하였다. 특히 후자는 탁월한 피아노 서법을 보인 최초의 원숙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9년 <2개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텍스처와 구성의 대담성에서 완전히 티페트의 개성적인 표현력을 확립한 것이며, 그의 대표작으로 종종 연주된다. 그는 이 작품에 흑인영가풍의 선율을 사용했지만 다음의 대작 오라토리오 <현대의 아들>(1941)에서는 흑인영가를 채택함으로써 학대받는 인간의 고뇌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 오라토리오는 나치스가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시키는 구실이 된 독일인 외교관 살해사건을 일으킨 유태인 소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티페트는 여기서 전쟁이라는 잔인한 시대의 톱니바퀴에 말려든 불행한 소년의 모습을 빌려 그 자신이 괴로워하는 현대의 아들임을 나타냈으며 초연과 동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 밖에 2개의 교향곡,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코렐리의 주제에 의한 협주적 환상곡, 3개의 현악 4중주곡, 오페라 <한여름밤의 꿈>(1955 초연), <프라이엄 왕>(1962 초연), 칸타타 <성 어거스틴의 환상> 등이 있다. 그의 음악은 복잡한 대위법과 복선율적인 변화에 차 있어 연주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내용이 난해하고 추상적인 경향이 강하여 브리튼 등에 비하면 연주되는 기회가 적은 듯하다. 그러나 현대 영국의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 존경되어 강렬한 개성에 물든 그 작품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브리튼
[편집]Edward Benjamin Britten(1913-1976) 영국의 동해안 서퍽주 로스토프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뛰어난 아마추어 소프라노 가수이며, 음악의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2세 때 이미 집의 피아노에 비상한 관심를 보였고, 5세 때 노래를, 7세 때 피아노곡을, 9세 때는 최초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12세부터 작곡을 프랭크 브리지에게 배웠는데, 이는 브리지가 소년 브리튼의 재능에 놀라 자진 지도를 맡고 나섰을 정도였으며 그의 엄하고 적절한 지도는 작곡가로서의 브리튼의 인격형성에 큰 힘이 되었다. 16세 때 장학금을 받아 런던 왕립음악학교에 입학, 작곡은 아일란드, 피아노는 벤저민에게 사사하였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기본적인 기법은 모두 마스터하여 교향곡, 6개의 현악 4중주곡, 10곡의 피아노 소나타 등의 습작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현악합주를 위한 <심플 심포니>는 후에 이들 습작을 기초로 새로 쓴 것이다. 음악학교 재학 중의 그는 쇤베르크나 베르크의 12음기법에 흥미를 가지고 빈에서 베르크에게 사사하려고 생각하였으나 보수적인 영국에서는 12음음악은 위험사상처럼 간주되어 학교 당국도, 옛 스승인 브리지도 한사코 반대했으므로 이 희망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음악학교를 졸업하기 전의 1933년에 아버지가 별세하였기 때문에 자활의 길에 몰린 브리튼은 다큐멘터리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는 후년 오페라를 만드는 데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영국 시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W. H. 오든과 만난 사실은 브리튼의 예술과 인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리튼은 오든에 의하여 영시(英詩)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시와 음악의 미학적 관계를 재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예술가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든의 시에 의한 몇 개의 작품이 작곡되었다. 그동안 1937년에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프랭크 브리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초연되어 브리튼은 비로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39년에 브리튼은 친구인 피터 피어즈와 함께 오든이 귀화한 미국을 방문하였다. 1942년 봄까지 2년 반에 걸친 미국 체재는 그의 창작활동에 풍요한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랭보의 시에 의한 <일루미네이션>, <미켈란젤로에 의한 7개의 소네트>, <진혼교향곡>, <현악 4중주곡 제1번> 등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지금도 많이 연주되는 걸작이 많다. 1942년 봄 망향의 염원으로 마침내 제2차대전 중의 조국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양심적 이유에서 종군을 거부하는 것이 법정에서 인정이 되어 서퍽주에 틀어박혀 창작에 몰두했다.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주의자이던 그의 양심으로부터는 <성 체칠리아에의 찬가>, <캐럴의 제전>,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기뻐하라> 등 공습하의 영국민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맑은 종교적 작품을 만들어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브리튼은 지휘자인 쿠세비츠키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 오페라 작곡을 위촉받았다. 동향의 시인 크래브의 장편시를 바탕으로 한 이 오페라 <피터 그라임즈>는 퍼셀 이래의 본격적 영국의 오페라라고 하여 일약 브리튼의 명성을 높였다. 이 때부터 그는 <루크리시아의 능욕>(1946), <앨버트 헤링>(1947), <거지 오페라>의 자유로운 개편판(1948), <오페라를 만들자>(1949), <빌리 버드>(1951),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기념하는 <글로리아나>(1953), <나사의 회전>(1945), 기적극(奇蹟劇) <노아의 홍수>(1958), <한여름밤의 꿈>(1960), <마도요의 강>(1964), <구약성서>에서 제재를 딴 <불붙는 용광 로>(1966) 등 거의 매해마다 화제가 되는 무대작품을 발표하였다. 브리튼은 1947년 이래 영국 동해안의 어촌 올드버러에 살면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으며, 1948년부터 해마다 그 곳에서 음악제를 주최하였다. 이 음악제는 브리튼의 작품을 중심으로 했고, 매년 반드시 새 작품이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유명했던 음악제이다. 근년의 작품으로는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하여 작곡된 첼로 소나타, 첼로 심포니, 무반주첼로모음곡, 제2차대전 중 공습으로 파괴된 코벤트리 대성당의 재건 헌당식을 위해 작곡한 <전쟁 레퀴엠>(1961)이 있다. 브리튼은 매우 다채로운 변화에 찬 작품을 썼으므로, 그 작풍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엘리자베스 왕조 이래의 영국음악이나 영국의 민요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그 전통에 입각하여 현대적인 음감각을 나타낸 작곡가라고 하겠다. 여러 가지 기법에 숙달하고 멜로디에도 뛰어나 화성, 음빛깔, 리듬감 등의 표현 효과에는 감각적인 날카로움을 보이고 있으나, 그 작풍은 영국인답게 중용(中庸)을 존중하며 결코 과도한 일이 없다. 불협화음도 결코 지나침이 없고 멜로디도 대체로 조성적(調性的)이어서 친해지기 쉽다. 또 화음도 오케스트레이션이 자아내는 특징적인 음빛깔의 콘트라스트가 그의 작품을 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칸타타 아카데미카>(1960)에서는 12음기법도 사용하고 있으나 <전쟁 레퀴엠> 이후 그 작풍은 크게 변화하여 더욱 응축한, 간결한 표현이 추구되기에 이르렀다. <마도요의 강>, <불타는 용광로>는 이러한 경향을 보인 최근의 걸작이며, 중세의 기적극을 재흥하여 거기에 새로운 오페라 형식을 찾으려는 의도에서도 주목을 끄는 것이다.
피터 그라임스
[편집]Peter Grimes 브리튼 작곡(1944). 브리튼의 명성을 높인 최초의 중요한 오페라 작품이다. 제2차대전 직후인 1945년 6월에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크래브의 장편시를 바탕으로 한 프롤로그와 3막 6장으로 되었다. 이야기는 서퍽주의 작은 어촌을 무대로 외고집 늙은 어부 그라임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용인 학대의 혐의를 받자, 지역사회에 어울리지 않고 스스로 거센 바다에 배를 가라앉혀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다. 타협을 모르는 마음이 사회의 편견과의 갈등에 고투하다 결국은 패한다는 테마는 브리튼이 자주 사용한 것이다.
전쟁 레퀴엠
[편집]戰爭 Requiem 브리튼 작곡(1961). 제2차대전으로 파괴된 코벤트리 대성당의 재건 헌당식을 위하여 작곡되었다. 3관편성(三管編成)의 대관현악과 실내관현악, 3인의 독창자, 혼성합창, 아동합창을 위한 대규모의 작품으로 6장으로 되어 있으며 연주에는 1시간 25분을 요한다. 가사는 라틴어로 된 미사 전례문과 반전시인 윌프레트 오웬 시에서 취하였고 전쟁의 비극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자는 평화주의자 브리튼의 전쟁부정의 비통한 기도가 들어 있다.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편집]靑少年-管絃樂入門 (퍼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작품34). 브리튼 작곡(1946). 교육영화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위한 작곡, 후에 독립된 관현악곡으로 출판됐다. 퍼셀의 '아브데라자르'에서 딴 주제를 바탕으로 목관·금관·현·타악기의 각 섹션을 소개하는 변화무쌍한 13의 변주와 장려한 전주(全奏)의 푸가가 전개된다. 각 악기의 특성을 적확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순한 계몽적인 의도를 넘어 음악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