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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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편집]

박하우스[편집]

Wilhelm Backhaus(1884-1969) 독일 태생의 피아니스트.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 베토벤·브람스와 같은 음악가의 독일 고전파·낭만파 피아노곡 연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박하우스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8년간은 레켄도르프 교수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았고, 이어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오이겐달베르에게 사사하였다. 1900년 16세 때 독주가로서 데뷔하였다. 그 빛나는 성과로 말미암아 1905년에 루빈스타인상을 받았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나라를 독주가로서 연주여행하고, 도처에서 절찬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피아노의 사자왕'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음이 순수하고 찬연하며, 연주 테크닉이 정연하고 완벽한 점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독일 고전·낭만파 음악을 조금도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명확·단정히 치며, 그러면서도 풍성한 음악적 정감을 그 가운데에 실었다. 훌륭한 연주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전 피아노 작품에서 솜씨를 보여주며, 그 밖에 노경에 이르러서부터는 차츰 모차르트의 작품에서도 비할 데 없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크로이처[편집]

Leonid Kreutzer(1884-1953) 러시아·독일계의 피아니스트. 낭만적 정조(情調)가 풍부한 연주에 독특한 묘미·분위기를 보였다. 만년에는 일본에서 살며 일본 피아노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교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받고, 피아노는 레셰티키의 부인이었던 안네트 에시포프로부터, 작곡은 그라즈노프에게서 배웠다. 1921년부터 1933년까지는 베를린 국립고등음악원의 교수였다. 제2차대전 후는 일본의 도쿄 예술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는 주법으로서는 현대풍의 수법을 따랐으나, 연주는 매우 주관성과 정감이 풍성한 자유로운 해석을 추구하였다. 명연주는 베토벤, 슈만, 쇼팽 등 낭만파 작품에서 볼 만한 것이 있다.

피셔[편집]

Edwin Fischer(1886-1960) 피셔는 독일의 피아니스트로 불리고 있으나, 출생국은 스위스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주로 활약하고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작품에서 순수하게 독일적이고 고전적인 양식감(樣式感)과 내용을 부여했으므로, 20세기 독일 피아노계의 거봉으로 꼽혔다. 그는 바젤에서 태어났으며, 고향인 바젤 음악원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후 베를린으로 나와 슈테른 음악원에서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모교(母校)의 교수, 다시금 베를린 고등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 또 자기가 조직한 실내 관현악단과 그 밖의 합주단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그의 연주양식에는 매우 정연한 것이 있었다. 템포, 리듬은 빈틈없이 꼼꼼했으며, 완급(緩急)에 한도를 넘는 신축도 없었다. 그러면서 청결하고 짤막한 리듬감을 지니면서 연주했다. 따라서 현대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고전풍의 음악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연주에는 열이 가해지고, 기백이 따르고, 때로는 표현욕이 지나쳐서 모처럼의 고전양식에 파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바흐의 클라비어곡에서 명연주의 솜씨를 보였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작품 연주에서도 볼 만한 것이 있다.

리히터하우저[편집]

Hams RichterHauser(1912-1980) 독일에서 가장 현대적인 베토벤 해석가로서 유명하다.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그 곳 음악학교에서 지휘와 피아노교육을 받았다. 18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는 독주가로서 활동하였고, 특히 교향악단과의 협연은 지휘자로서의 지식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협주곡 연주를 매우 교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제2차대전 후, 데트몰트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으나, 1964년 이후 연주활동이 너무 많아져 교직을 사임하였다. 명연주는 특히 베토벤의 여러 곡을 다룰 때 듣게 되나, 선배인 박하우스와는 달라 해석·표현이 지적이고 현대적이며, 때로는 즉흥성도 첨가하곤 하였다.

기제킹[편집]

Walter Gieseking(1895-1956) 독일의 이른바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적 해석가로서, 20세기 전반의 피아노 연주계에 새로운 양식을 가져다준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에서 태어났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혼혈아다. 1911년 독일로 옮겨가 하노버 음악원에서 라이머 교수에게 사사하였다. 1931년에는 은사 라이머 교수와의 공저로 <현대 피아노 연주법>을 공표하고, 피아노 주법상 새로운 방법을 제창하여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그는 제1차대전 후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했고, 특히 독일인이면서 드뷔시, 라벨의 명수로서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년 이후는 점차 독일 고전에 뛰어난 해석을 가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세련된 표현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만년에는 베토벤 및 바흐의 작품에서마저 뛰어난 해석을 하였다. 그의 연주는, 이상할 만큼 뛰어난 기교적인 면이 있으며 또한 낭만주의적인 폐풍도 있었다. 이 점은 주관과잉에 의한 악곡의 왜곡을 극력 피하며, 순정(純正)·단적인 표현을 주고자 한 데 있다. 명연기는 드뷔시의 작품에서, 특히 라벨의 전(全)피아노곡에서 볼 수 있다. 그 밖에 모차르트의 작품도 있다.

켐프[편집]

Wilhelm Kempff(1895-1991) 독일의 명피아니스트. 특히 베토벤 및 슈만 등의 곡, 즉 이 나라의 정통적 낭만주의의 흐름을 채용하는 피아노음악의 해석에 묘연(妙演)을 발휘했다. 유타보크 태생. 음악학교의 교장이자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감화로 성장한 그는 오르간의 연주에서도 소질을 보였고, 피아노 연주에서도 오르간적 색채를 보였다. 피아노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카를 발트에게서 배우고, 졸업할 무렵에는 피아노 및 작곡 두 과목에서 멘델스존상을 받았다. 20세 안팎부터 독주가로서 활약, 1924년에는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결코 처음부터 명연주가적인 소질을 나타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음악에의 추구에 끊임없는 의욕을 보였고, 특히 베토벤 등 독일 고전에의 추구가 그의 테크닉을 개선케 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되었다.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51년, 파리에서 베토벤 전(全) 소나타의 연속 연주회를 개최했고, 그 유창한 연주해석에 의하여 움직일 수 없는 명성과 지위를 획득하였다. 20세기 들어 켐프만큼 베토벤과 바흐를 그 때의 음악적 흥취와 공상에 맡겨서 자유로이 연주하고, 거장의 깊은 음악적 정신·정서를 단적으로 청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도 없다. 명연주는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 32곡, 그 중에서도 후기의 여러 곡에서 들을 수 있으며, 베토벤의 협주곡, 슈만의 <환상곡 다장조>, 바흐의 여러 작품 등이다.

러시아[편집]

모이셰이비치[편집]

Benno Moiseivich(1890-1963) 빈의 명피아노 교사인 레셰티키의 최후의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선이 굵고 화려한 연주기교를 보이고, 영국에서 성공한 비르투오소형의 피아니스트이다. 오데사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재능을 발휘, 9세 때 루빈스타인상을 탔다. 계속해서 레셰티키의 제자가 되고, 1908년에는 런던에서 데뷔하여 호평을 받았다. 화려하고 패기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 특히 터치가 명확하며, 연주가 다소 거북스럽지만 정연하게 곡을 정리해서 연주한다. 내면보다도 외면적인 효과에 중점을 두는 피아니스트다. 명연주는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등에서 보여 주었다.

브라일로프스키[편집]

Alexander Brailowsky(1896-1976) 러시아 태생이나 파리에서 성공했다. 명피아노 교사 레셰티키에게 사사한 몇 사람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 쇼팽의 작품을 특이한 스타일로 연주한 일이 인연이 되어 악단에 이름을 날렸다. 키예프 태생으로, 키예프 음악원에서 라흐마니노프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5세 때 빈으로 나와 모이셰이비치와 함께 레셰티키의 제자가 되었고, 1919년 파리에서 데뷔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의 독특한 쇼팽 작품의 해석이 프랑스인들의 호감을 사게 된 동기인 듯하다. 그 후는 주로 쇼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걸쳐 음악여행을 계속하고 있으나, 슈만, 리스트 등 낭만파 음악가의 작품에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그의 음악가로서의 특징은 리듬을 자유로이 다루고, 그 위에다 연주의 각종 곡예적(曲藝的) 스릴을 발휘하면서 음악의 정도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다. 명연주는 쇼팽의 작품, 그 중에서도 협주곡이나 소나타와 같은 대곡(大曲)에서 보게 된다. 그 밖에도 녹턴과 원무곡과 같은 소규모적인 것에도 브라일로프스키다운 솜씨라고 생각될 만한 독특한 묘기·묘미를 발휘한다.

호로비츠[편집]

Vladimir Horowitz(1904-1989) 연주의 테크닉과 음악의 내용이 이 정도의 경지에까지 융합하여 높여진 피아니스트는 달리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현대 피아노계의 지보적 존재이다. 키에프 태생으로, 키에프 음악원에서 브루멘펠트에게 사사하고, 소년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제1차대전 후 및 러시아혁명 직후의 혼란기에 고국을 탈출, 1924년 베를린에서 데뷔하였고, 런던과 파리에서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다. 1928년 도미하고, 곧 명지휘자 토스카니니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구미에서 활약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게 되어, 1953년에는 완전히 무대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1965년 5월에는 카네기홀에서 부활독주회를 개최하여 무대에 다시 복귀하였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는 퍽 이상(理想)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몸이 허약하여 양감은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기타의 요소에서는 그에게서 부족된 것이 거의 없었다. 손가락 끝은 날카로워 명확한 터치에 능하고, 다이내믹했다. 또 옥타브의 연속도 절찬을 받을 만했다. 연주는 매우 세련되어 있는데, 그러면서도 박력있는 음악적 효과를 빚어냈다. 템포, 리듬은 빈틈없이 꼼꼼했지만(특히 토스카니니 영향시대가 그러하다), 후기에는 건강상태 때문에 음악성이 병적인 내공성(內功性)을 띠고, 점차로 주관이 강한 낭만적 기분이 강렬하게 나타나, 지난날의 확고한 템포·리듬이 자유로이 다뤄지는 경향이 점점 심해졌다. 명연주는 <스케르초 제1번>, 바르카롤, 마주르카, <소나타 제1번>, 리스트의 소나타, <오베르만의 골짜기>,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情景)>, 토카타, 스크랴빈의 <시(詩)>, 소나타 제9번,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등이다.

오보린[편집]

Lev Nikolayevich Oborin(1907-1974) 구소련에서 최장로(最長老)로 활약했던 피아니스트였으며 교육가였다. 모스크바 태생으로, 부친은 철도기사이며, 피아노를 잘 쳤다. 9세 때부터 엘레나 구네시나에게 사사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1927년에는 바르샤바의 제1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30년부터는 모교의 교사, 1935년 이후는 교수 겸 피아노과 주임이 되었다. 명쾌한 연주를 하지만, 과도한 합리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따뜻하고 평화롭다. 베토벤의 작품을 잘 연주하지만, 오히려 <사계(四季)>(차이코프스키)의 연주에 뛰어났다. 또 <전람회의 그림>(무소르크스키)이나 오이스트라프와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음반(베토벤)은 뛰어났다.

리히테르[편집]

Svyatoslav Richter(1914- ? ) 러시아 최대의 피아니스트.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이다. 우크라이나 태생이며, 부친으로부터 피아노의 솜씨를 물려받고, 15세경부터 무용곡을 반주하였다. 23세 때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10년 동안은 네이가우스에게 사사하였고, 1945년 전소련(全蘇聯) 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연주에서는 중량감이 있으며, 따뜻하고 색채가 풍성하다. 손이 크고, 굵은 손가락으로 섬세한 뉘앙스를 내었다. 스케일도 크고 내용도 깊다.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등 연주 범위가 넓다. 같은 곡이라도 때에 따라 치는 방식이 다르나, 어느 음반도 수준 이상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첼로 소나타 전집>(베토벤)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길레리스[편집]

Emil Gilels(1916- ? ) 구소련의 최대 피아니스트. 제2차대전 후인 1955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오데사 태생으로 13세 때 데뷔, 곧 오데사 음악원에 입학하고, 1933년 모스크바의 제1회 전 소련 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936년 빈 국제피아노 콩쿠르 제2위, 1938년 이자이 콩쿠르에서는 우승하였다. 그의 수많은 협주곡 레코드는 모두 뛰어나다. 3중주곡으로 <대공(大公)트리오>(베토벤), <위대한 예술가의 회상>(차이코프스키)도 잘 연주한다.

아슈케나지[편집]

Vladimir Ashkenazy(1937- ) 러시아 음악계가 낳은 이채로운 신진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 슬라브계인데도 불구하고 쇼팽이나 드뷔시와 같은 섬세하고 세련된 서구적 음악의 연주에 절묘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는 레프 오보린 교수에게 사사하였다. 재학중인 1955년에 개최된 폴란드의 제5회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 응모하여 제2위를 차지하였고, 다음 해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황태후(皇太后) 국제음악 콩쿠르에서는 제1위를 차지하였다. 1960년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1962년에는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제1위를 영국의 존 오그돈과 나눠 가졌다. 그 후 러시아를 떠나 영국에서 살며 널리 독주가로서 세계적인 활약상을 보여 호평을 얻었다. 슬라브 민족으로서는 조그만 체격을 지녔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로서 힘센 음량을 갖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아름다운 뉘앙스는 풍부히 지니고 있다. 손가락끝이 민감하고 섬세하며 속도감이 있는 것 등은 보기 드문 재능이다. 명연주는 쇼팽의 곡, 특히 연습곡과 프랑스 인상파 음악에서 볼 수 있다. 물론 러시아음악에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휘하였다.

시로타[편집]

Leo Sirota(1885-1965) 키에프 태생으로, 소년시절에는 베를린으로 나와 한때 부조니에게서 배운 일이 있다. 이어서 독주가로서 악단에 데뷔하였다. 1928년 일본을 연주가로서 방문하여 굉장한 인기를 모았기 때문에, 곧 도쿄 음악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도쿄 음악학교를 중심으로 피아노교육에 힘써 왔으며 제2차대전 후는 미국으로 가서 세인트루이스 음악학교 교수로 있었다. 그의 피아노는 손가락끝의 화려한 기교에 시종 의존하였다. 명연주는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피아노 편곡 등이다.

미국[편집]

세르킨[편집]

Rudolf Serkin(1903-1991) 나치에 쫓겨 미국을 본거지로 활약한 피아노의 거장. 보헤미아 태생으로, 12세 때 빈에서 공개연주회를 가졌고 그 후 부슈, 카잘스, 토스카니니와 협연하였다.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교 교수로도 재직하였다. 고전적인 깊은 아취의 작품을 잘 다루었지만, 미국으로 옮겨간 후로는 다소 취미가 달라졌다. 명연주는 제2차대전 전의 <황제 협주곡>(베토벤)과, 2차대전 후의 <3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제2번>(바흐)은 인상(印象)이 깊다(후자는 아들 피터 등과 협연).

페나리오[편집]

Leonard Pennario(1924- ) 미국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뉴욕주의 버펄로 탄생. 12세 때 텍사스주 댈러스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에 데뷔. 텔레폰아워의 방송으로 유명해졌다. 미국풍의 힘찬 연주, 어떤 패시지에도 걸리는 일이 없고, 음에 힘이 있다. 그가 잘 연주하는 <랩소디 인 블루>(거슈윈), 또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2번>(리스트)이 그에게 적격이다. <브루레스케>(R. 슈트라우스)(廢盤)가 유명하다.

카첸[편집]

Julius Katchen(1926-1969) 미국의 피아니스트이지만 레코드는 런던반(盤). 뉴저지주 태생. 11세로 오르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피아노 협주곡>(모차르트)을 쳤다. 외향적인 젊은 테크닉으로 비교적 덤덤하게 큰 곡을 다루는 능력이 있으며, 장래의 내면적 성장이 기대된다는 점이 그에 대한 정평이었다.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등 무수한 레코드가 나왔으며, 고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곡을 잘 쳤다. <피아노 협주곡>(베토벤, 브람스) 등은 위에서 말한 특징을 유념(留念)한 연후에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이스토민[편집]

Eugene Istomin(1925- ) 뉴욕 출신. 피아노 독주자로서 내면적인 맛이 있는 명반(名盤)을 많이 남겼으며, 리스트가 아끼는 제자 시로티에게 인정되고, 세르킨에게 사사하였다. 스턴 로즈와 함께 스턴 트리오의 멤버로 활약하였으며, 양심적이고 사려깊은 연주가이다. 테크닉도 확실하지만, 정서가 풍부한 작품을 깊은 공감을 가지고 쳤다. 그러나 감상에 빠지기 쉬운 단점이 있다. <피아노 협주곡 제2번>(라흐마니노프) 및 <녹턴집>(쇼팽) 등의 뛰어난 연주가 있었으나, 폐반(廢盤)되었다.

굴드[편집]

Glenn Gould(1931- ) 캐나다 태생의 비범한 피아니스트.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니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피아노로부터 하프시코드적인 음을 빼내고자 하였다. 또 매우 로맨틱한 내용을 현대적으로 처리, <골베르크 변주곡> 등 바흐의 반(盤)의 연주는 우수하다. 좀 달라진 곳에서는 쇤베르크의 곡이라든가 <이노크아덴>(R. 슈트라우스) 등이 있다.

클라이번[편집]

Van Cliburn(1934- ) 미국의 신진 피아니스트 중의 이채적 존재. 더욱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의 미래가 가장 촉망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루이지애나주의 슈리브포트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는 피아니스트였던 모친으로부터 기초교육을 받았다. 1951년에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토지나레빈 부인에게 사사하였다. 1958년에는 구소련의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에 응모했으며, 피아노 부문 제1위가 됨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후의 그의 활약은 미국 피아노계(界) 최대의 호프로서 진실로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그의 피아노는 음이 맑고 밝으며, 낭랑한 울림에 넘쳐 있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악곡의 해석도 유럽의 인습에 구속되는 일이 없고, 아메리카다운 신선한 음악성을 이들 고전에 주고자 하는 의욕에 찼다. 명연주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제1번> 외에 각종 협주곡이며 리스트의 주명곡과 같은 대규모적인 독주곡에서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었다.

게이지[편집]

Irwin Gage(1939- ) 클리블랜드 태생. 미시간 대학, 예일 대학, 빈 음악원(에리크 베리바) 졸업. 1973년에 아바도가 지휘하는 빈 폴 오케스트라와 공연하여 데뷔했다. 처음에는 솔리스트로 활동했으나 곧 반주자로 전환하여 아멜링, 야노비츠, 루트비히, 노먼, 피셔디스카우 등 명가수들과의 공연에 역점을 두고 활동했다. 슈베르트를 비롯한 독일음악에 날카로운 감성을 나타냈다.

프랑스[편집]

[편집]

Marguerite Long(1874-1966) 20세기 초두에서의 프랑스 여류피아니스트 중의 제일인자. 현대 프랑스 피아노곡, 특히 가브리엘 포레의 연주가로서 비할 데 없는 솜씨를 발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님 태생으로, 파리 음악원에서 셰네이와 피츠에게 사사하였다. 졸업 후에는 동 음악원의 교수가 되고, 특히 1920년 이래로는 명교수 디에메의 교실을 이어받았다. 문하로부터는 샹송 프랑수아를 비롯하여 많은 준재를 배출했는데, 그 동안 피아니스트로서는 불꽃 튀는 활약상을 보였다. 1947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인 티보와 함께 롱티보 콩쿠르를 창립, 격년(隔年)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국제 콩쿠르를 개최하고, 그 동안 설립자인 그녀 자신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프랑스 최고의 국제음악 경기로서의 명성을 유지해 왔다. 롱의 연주양식은 순전히 프랑스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풍요유화(豊饒柔和)한 뉘앙스를 곁들인 터치이며, 악곡을 우아하게 노래 부르게 하면서 뽑아내어가는 그녀의 연주는 프랑스의 여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명연주는 포레, 드뷔시, 그리고 라벨의 작품에서도 묘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

코르토[편집]

Alfred Cortot(1877-1962) 20세기 전반에서의 프랑스 최대의 피아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19세기 낭만파 피아노 음악의 정신을 계승했다. 또한 가장 귀중한 한 유산이기도 하였다. 프랑스인을 양친으로 하여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피아노 교육은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디에메 밑에서 배웠으며, 1896년 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즉시 악단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바그너에게 너무 경도한 나머지 1898년에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활동을 중지하고 바이로이트로 달려가, 축전(祝典)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어 바그너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902년에는 <신들의 황혼>을 스스로 지휘하여 파리 초연(初演)을 행하는 외에, 각종 작품을 취급함으로써 바그너의 선양(宣揚)에 힘을 다하였다. 물론 그 동안에도 피아노의 활동을 잊어버리는 일 없이 유럽과 미국을 순연(巡演)하였다. 1905년에는 바이올린의 티보, 첼로의 카살스 등과 함께 유명한 3중주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그 후 약 20년간 계속되었다. 1919년, 아카데믹의 폐풍에 기울기 시작한 국립음악원에 대항하여 국제적인 새바람을 불어 넣기 위하여 친구인 티보와 함께 '에콜 노르말 드 뮤직'을 설립하였다(코르토 사망 후도 계속되었다). 이것이 피아노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 프랑스 음악계의 융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제2차대전 중 어쩔 수 없이 나치스에게 협력치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후 추방되고 스위스에서 적적한 만년을 보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는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피아노계에 음악의 외면적 효과보다도 내면의 주관성을 보다 중시할 것을 극력 주장한 투지와 패기에 넘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것도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프랑스에 주입함으로써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쇼팽, 슈만, 프랑크, 드뷔시의 곡에서 독특한 해석·표현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요컨대 독일적 정신의 프랑스화(化)에 의거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템포의 움직임, 리듬의 자유스러움, 내용의 난숙성(爛熟性), 색채의 농담, 격심한 명암 등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코르토의 연주에서의 최대의 특색이다. 명연주는 쇼팽의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를 제외한 그 밖의 거의 모든 작품, 다시금 슈만의 거의 대부분의 작품, 드뷔시의 <전주곡집>, 기타 프랑크의 전곡(全曲) 등이 있다.

나트[편집]

Yves Nat(1890-1956)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피아노계에서 코르토 등과는 색다른 각도로부터 독일 낭만파 음악에 접근하였고, 고전적 양식감 속에서 낭만파적 정감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프랑스의 베지에에서 태어나 피아노 교육은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받고, 교사(敎師)는 코르토가 사사한 같은 디에메였다. 졸업 후 1934년부터는 모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다. 교수직을 맡는 한편 연주활동도 행했는데, 1930년경부터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 후 15년간은 악단에서 멀어졌으나 1952년 병이 치유되자 다시 등장했다. 명연주는 슈만, 베토벤의 작품에서이며,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베토벤의 주명곡 전곡(全曲)의 연속 독주회를 개최하였다.

카사드시스[편집]

Robert Casadesus(1899-1972) 8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제1선의 현역으로서 신선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프랑스의 명피아니스트. 파리 근교의 음악의 명문에서 태어났으며, 11세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고, 루이 디에메르에게서 배운 뒤 1917년에 데뷔하였다. 당시 퐁텐블로에 있던 미국 음악원 피아노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제2차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이주해 가서 계속 살았다. 어떤 음이건 밝고 둥그스름한 맛을 지니며, 템포에 흐트러짐이 없다. 신선하고 청초한 프랑스풍의 명쾌함이 매력적이지만, 베토벤 작곡에서도 수준 이상의 좋은 연주 실력을 보였다. 레코드는 모차르트와 라벨 작품에서 특히 좋은 성적을 보이며,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연주하였다. <3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3곡(바흐, 모차르트), 부인과 같이 친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바르토크)와 사티의 소품 등에서도 좋은 성과를 나타냈다.

프랑수아[편집]

Samson Francois(1924-1970)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5세 때에 연주회를 열었다. 니스 음악원·파리 음악원에서 코르토, 마르그리트 롱에게 사사하였다. 1943년,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947년에는 뉴욕에서 번스타인의 지휘에 의해 <피아노 협주곡>(프로코피예프)을 연주하였다. 레코드는 독특하고 양호한 컨디션과 멋을 부린 스타일이 뒤섞여 씩씩한 맛을 나타내고 있다. 또 현대·근대를 강하게 느끼게 해준다. 쇼팽의 레코드 연주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피아노 협주곡>(라벨, 프로코피예프), <밤의 가스파르>(라벨) 등의 현대적 연주감각도 뛰어난 것이다.

베로프[편집]

Michel B roff(1950- ) 에피날 태생. 낭시 음악원(프랑수아 코레), 파리 음악원(피에르 상캉) 졸업. 이본 로리오에게 사사. 1967년 올리비에메시앙 국제피아노 콩쿠르 제1위. 메시앙, 드뷔시,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슈만을 연주. 어려서부터 바르토그와 친했으며 11세에 메시앙을 만난 이후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자작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매>의 연주에 감명을 받은 메시앙의 권유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 상캉 외에 메시앙 부인과 롤리오를 사사했다. 1970년 파리에서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매>를 초연한 이래 25년 만에 전곡 재연한 것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은 이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로프의 연주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현대작품에 대한 극히 자연스러운 접근과 고전 및 근대작품에의 유연한 적응성인데, 이러한 현대적인 감각은 유례없는 특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편집]

슈나벨[편집]

Artur Schnabel(1882-1951) 베토벤, 브람스의 고전적 해석가로서, 반(反)낭만주의적 입장으로부터 독자적 경지를 개척한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오스트리아의 리프니크에서 태어나, 9세 때 빈으로 나와 당시의 대피아노 교사였던 레셰티키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스승집에서 처음으로 브람스와 만났고, 브람스도 이 소년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재능의 풍성함에 놀랐다고 한다. 따라서 그 후의 브람스의 영향은 크다. 이윽고 그는 독일 내에서 처음으로 브람스 작품의 독주가로서 성공하였다. 1925년, 베를린 국립고등음악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였고, 그 후 영국, 미국에서 활약했다. 1935년, 카네기홀에서 베토벤 전(全)소나타의 연속 독주회를 7회에 걸쳐 개최한 일이 인연이 되어 베토벤 작품에의 권위로서 악계에 부동의 지위와 명성을 구축한 것이다. 제2차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살았지만, 대전 후인 1951년에 스위스에서 객사하였다. 그는 20세기 전반 연주계를 풍미한 낭만적 거장주의(巨匠主義) 및 주관과잉주의를 즉물적 연주양식으로 일보 전진시키기 위해 노력한 현대풍 피아노 연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명연주는 베토벤, 브람스의 전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바두라스코다[편집]

Paul BaduraScoda(1927- ) 데무스, 굴다와 함께 빈의 세 콤비로 불리고 있다. 1948년, 빈 국립음악원의 전공과인 피아노과와 지휘과를 졸업, 오스트리아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에트빈 피셔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조수직도 맡아 했다. 초기에는 매우 로맨틱하고 섬세한 명연주를 들려 주었으나, 나중에는 학구적인 느낌이 전면(前面)에 나와 있는 연주를 햐였다. 명연주는 바릴리 현악 4중주단의 연주자들과의 합주에 의한 피아노 5중주곡 <숭어>(슈베르트), 독주 분야에서도 환상곡 <방랑인>(슈베르트), <악흥(樂興)의 시>(슈베르트), <쇼팽 주옥집(珠玉集> 등이 있다.

데무스[편집]

Joerg Demus(1928- ) 바두라스코다, 굴다 등과 함께 빈의 트리오로 불리며, 솔로 외에도 바두라스코다와 협연하기도 하고, 피셔디스카우의 <겨울의 나들이> 전곡(슈베르트)의 반주를 하였다. 빈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였다. 유순하고 밝은 성격이 연주에 항상 반영되었다. 의외로 많은 레코드판이 팔린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드뷔시의 작품에까지 손을 뻗쳤지만, 역시 슈베르트의 작품이 최적이다.

헤블러[편집]

Ingrid Haebler(1929- ) 오스트리아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여류피아니스트. 빈 태생으로,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6세 때부터 피아노·작곡·음악이론을 공부한 이후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과 빈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1954년, 제1회 슈베르트콩쿠르 제1위에 입상하였고, 1958년 디스크대상(大賞)을 수상하였다. 니키타 마가로프, 마르그리트롱 양 여사에게도 사사하였다. 레코드는 모차르트 작품이 제일 많은데, 슈베르트의 작품도 하이든의 것도 양심적이며 깨끗한 맛이 있다. 변덕스런 데나 불안정한 데가 없고, 따뜻한 내용을 느낄 수 있으며 성실하고 매력적이다.

굴다[편집]

Friedrich Gulda(1930- ) 바두라스코다, 데무스와 함께 빈의 세 콤비 중의 한 사람으로, 셋 중에서 가장 손가락을 잘 움직인다는 정평이 있다. 12세에 빈 음악원에 입학하고, 1946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할 때는 악보에 없는 음부를 치기도 했다. 재즈에도 조예가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내림나장조>(모차르트) 등에 굴다의 흩뜨리지 않는 연주의 특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헝가리[편집]

크라우스[편집]

Lili Kraus(1908-1986) 헝가리 출신의 영국 국적을 가진 여류 피아니스트. 부다페스트 태생. 8세 때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 입학, 코다이, 바르토크에게 사사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 빈에서는 슈나벨에게 사사하고, 20세로 빈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제2차대전 전에는 시몬 골드베르크와 함께 일본 등지를 방문하고 바이올린 소나타를 많이 협연했으나, 2차대전 후에는 극동 각국을 순회하며 독주자로서 활약하였다. 그의 정신 속에는 불꽃같이 훨훨 타는 격렬한 정열이 약동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의 빛나는 지성이 번뜩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피아노 협주곡 가장조>, <동내림 나장조>(모차르트) 등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작품이 많다.

파르나디[편집]

Edith Farnadi(1911- ? ) 부다페스트 태생. 프란츠 리스트상을 두 번이나 받은 우수한 여류피아니스트. 남녀를 불문하고 이만큼 대담 솔직하고 기분 좋게 난곡(難曲)을 다루어서 깊은 감명을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협주곡(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헝가리 랩소디>, <메피스트 왈츠>, <피아노 소나타>(리스트), 바르토크의 여러 작품이 모두 폐반(廢盤)되고, 다만 <피아노 5중주곡>(드보르자크)만 발매된 것은 극히 유감스런 일이다.

푈데스[편집]

Andor Foldes(1913- ? ) 부다페스트 태생의 피아니스트. 다소 모난 느낌이 들지만, 바르토크 작품에서는 정평이 있었다. 황제 협주곡과 3대주명곡(소나타) 등의 음반이 외국에 많이 팔렸다. 그에게서는 교육가적인 면도 볼 수 있다.

시프라[편집]

Gyorgy Cziffra(1921- )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동성동명의 아들(지휘자)과 구별하기 위해 자기는 단순히 '시프라'라고 일컫고 있다. 시프라만큼 열정적인 테크닉을 지닌 피아니스트는 세계에 그 예가 없다. 그 굉장함에 압도되어서, 의외로 세미(細微)한 정서의 아름다움은 빠뜨리고 못들을 정도이다. 뛰어나게 잘하는 리스트곡의 레코드는 물론 그 밖의 작곡가의 음반도 많이 있다. 쇼팽의 곡도 잘 치지만 이것은 다소 색다르다. <교향적 연습곡>(슈만) 등의 곡이 꽤 좋다.

바사리[편집]

Tamas Vasary(1932- ) 헝가리 태생. 9세 때 리사이틀을 열고 그 후 프란츠·리스트상을 받았다. 코다이(작곡가), 아니 피셔(여류 피아니스트)에게 인정받았다. 발매중인 음반은 모두 쇼팽곡이며, 섬세하고 우아한 연주이다.

폴란드[편집]

파데레프스키[편집]

Ignacy Ian Paderewski(1860-1941)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그 위에 위대한 연주가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폴란드 공화국의 탄생과 동시에 초대 수상이 되고, 그 명성은 한층 빛나게 되었다.폴란드의 쿠리를후카 태생. 1872년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졸업 후 5년간은 모교의 피아노과 교수였고, 다시 1881년 이후는 베를린에서 수년간 작곡법 기타를 배웠으나,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결심하고 곧바로 빈으로 가서 레셰티키에게 사사하였다. 1887년, 빈에서 독주회를 열게 되자 명성은 점차 높아가고, 1909년에는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자 도미했고, 전쟁이 끝나자 폴란드 공화국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수상직은 단 1년으로 사임하고,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화려한 활동을 하였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도 살았으나, 다시 미국으로 가서 객사하였다. 20세기 초두에서, 그를 피아니스트의 왕자가 되게 한 첫째의 원인은 그의 굉장한 풍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둘째로는, 무대에서 훌륭한 배우적 효과를 빚어내는 수법이 교묘했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 또한 극적 효과가 풍부했던 것으로서, 때로는 환상적(幻想的)인 상태로 되기까지 감정이 승화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도 있었다. 이것이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준 듯하다. 하지만 그만큼 그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하기보다도 위대한 음악가였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명연주는 쇼팽의 폴로네즈, 마주르카, 녹턴 등이며, 또 스스로 작곡한 유명한 미누에트의 자연(自演)도 좋은 솜씨였다.

루빈스타인[편집]

Artur Rubinstein(1886-1982) 폴란드의 장로(長老)피아니스트로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약한 거장(巨匠). 4세 때 이미 공개연주를 하였고 요아힘이 바이올린을 가르치려고 했으나 피아노에 재능이 있어서 카를 발트에게 사사하였다. 요아힘 지휘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했고, 또 파데레프스키에게도 사사했다. 연주는 항상 당당한 폼을 취하고 있고, 모범적 연주 거동으로 열의에 차있고 친절하다. 고령이지만, 후퇴하지 않는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레코드는 이름높은 대가답게 취입했으며, 쇼팽의 작품 등 실로 많은 종류의 것이 판매되고 있다. 그 중의 어느 것을 놓고 보더라도 모두 다 여유 만만한 초인적 연주 솜씨를 나타냈다. 모차르트의 협주곡, 베토벤의 소나타(悲愴, 月光, 熱情) 등도 훌륭하게 연주하였다.

말쿠진스키[편집]

Witold Malcuzynski(1914-1977) 바르샤바 태생이나, 아르헨티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폴란드의 수상까지 된 명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에게 사사했다. 1937년 쇼팽 콩쿠르에서 제3위에 입상했고, 그 이래 스위스에 정주하고 있으면서 구미에서도 활약하고 있지만, 레퍼토리의 범위는 역시 쇼팽의 작품이 중심이며, 다소 과다한 표정에 휩싸였다고 하지만 쇼팽이 지녔던 남성적인 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

스테판스카[편집]

Stefanska(1922- ) 20세기 여류피아니스트 중의 일인자로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쇼팽 연주가이다. 피아노 교칙본(敎則本)을 남긴 카를 체르니의 피를 잇고 크라코프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코르토에게 사사하고, 그 후 바르샤바 음악원으로 돌아가 유명한 교사 투르친스키에게서 배웠다. 1949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 그 후 각국에서 활약하였다. 아름다운 음빛깔을 지니고, 침착하고 섬세한 연주를 하나, 여류에게 있기 쉬운 가냘픈 선은 느낄 수 없다.

루마니아[편집]

하스킬[편집]

Clara Haskil(1895-1960) 단순히 루마니아에 한정하지 않는, 20세기 여류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다. 부쿠레슈티 태생으로 처음에는 빈에서, 이어서 파리 음악원에서 배운 후 여기에서 포레와 코르토에게 사사하였다. 재학시절부터는 이자이에게, 그리고 졸업 후에는 에네스코 및 카살스와 같은 대바이올리니스트라든가 첼리스트의 반주를 담당했던 것은, 그녀의 기량(技量)과 음악성이 젊었을 때부터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가를 말해준다. 그 후 스위스에서 살며 독주자로서 구미 각국에서 공연과 레코드 녹음에 활약하였다. 특히 1953년 이래 명바이올리니스트인 아르튜르 그루미오와의 콤비는 유명하다. 그러나 만년엔 신병이 잦았고, 1960년 심장마비로 브뤼셀에서 사망하였다.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모차르트곡 피아노 연주가로서 정평이 있지만, 확실히 그녀의 명확하고도 거침없이 흐르는 울림의 아름다운 음, 고고(孤高)하다고도 할 수 있는 기품의 높이는 '모차르트의 재래(再來)'라고 평가할 만하다. 다른 작곡가의 연주는 자칫하면 모차르트의 뛰어난 점 때문에 표면에 나타나지 않지만 베토벤, 슈베르트, 라벨 등을 칠지라도 역시 그녀 독자(獨自)의 순도(純度)높은 서정성과 향기를 잃는 일이 없어 호평을 받고 있었다.

라파티[편집]

Dinu Lipatti(1917-1950) 하스킬과 함께 20세기 루마니아가 낳은 세계적 명피아니스트이다.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동지의 음악원에 입학, 1934년 빈의 콩쿠르에서 2위를 획득했으나, 이 때 그의 1위를 주장하고 심사원의 직책을 사임한 코르토에게 초빙되어 파리로 나갔다. 제2차대전 중에는 루마니아로 귀국하였다가 나치의 손을 피해 스위스에 숨어 있었다. 2차대전 후 유럽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여, 불세출의 천재라고 격찬받았다. 그러나 백혈병에 걸려, 1950년 브장송에서의 리사이틀을 마지막으로 33세의 젊음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연주는 굉장한 테크닉이 정확히 컨트롤되고, 시적 표현과 지적 표현이 훌륭한 균형을 형성하고 있다. 레퍼토리도 스카를라티나 바흐에서 시작되어 고전, 낭만, 근대에 걸쳐 다양하며 남겨진 레코드도 모두 인정받은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쇼팽,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작품이 깊은 조성(彫性)의 점에서, 또 격조의 높이에서 뛰어나며, 그가 얼마나 드물게 나타나는 천재였던가를 증명하고 있다.

영국[편집]

무어[편집]

Gerald Moore(1899-1987) 영국의 명반주자이자 실내악 주자이기도 했다. 워퍼드 태생으로 샐랴빈·피셔디스카우·슈바츠코프 등과 편성되어 성악·기악을 불문하고 반주 피아니스트로서는 귀중한 존재였으나 1967년 2월 애석히 여겨지는 가운데 은퇴하였다. 반주자로서의 진귀한 저작 도 있다.

솔로몬[편집]

Solomon Cutner(1902-1988) 런던 태생. 8세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하고 그 재능이 주목되었으나, 그 후 파리에서 라자르레비 밑에서 공부하여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그 견실한 테크닉과 정통적 해석은 높이 평가되었다. 9세 때 버킹엄 궁전에서 영국 국왕 앞에서 연주한 바 있으며, '신동 솔로몬'이라고 불렸으므로, 그 후 성(姓)의 쿠트너를 쓰지 않고, 단순히 솔로몬으로 통용되었다.

커즌[편집]

Clifford Curzon(1907-1982) 솔로몬과 함께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런던에서 태어나고, 그 곳 왕립음악원에서 배웠다. 졸업 후 한때 동악원의 조교수직을 맡았었으나 곧 베를린으로 유학, 란도프스카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유럽·미국 양쪽에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레코드 녹음도 활발하여 자신의 작품을 음반으로 남겼다. 스케일의 크기는 없으나, 정통적이고 가식미 없는 연주는 각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림파니[편집]

Moura Lympany(1916- ? ) 라흐마니노프 작품을 잘 연주하는 사람으로서 유명한 여류피아니스트이다. 영국 태생이지만 러시아계이며, 그 점이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잘 치게 되었다.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배우고 1938년의 이자이 국제콩쿠르에서는 구소련의 길레리스 다음으로 제2위에 입상하여 주목을 끌었다.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여류답게 섬세한 서정성을 지니고, 라흐마니노프 외에 그리그, 슈만, 쇼팽 등도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탈리아[편집]

베네데티미켈란젤리[편집]

Arturo BenedettiMichelangeli(1920-1995)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피아니스트의 한 사람. 바이올린 제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브레시아 태생으로, 그 곳 벤투리 음악학교에서부터 밀라노 음악원으로 진학하고, 1939년의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그의 활동은 한때 중단되었으나, 2차대전 후 영·불 양국에 최초로 연주여행을 하고, 이 센세이셔널한 성공으로 일약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현대의 연주가로서는 좀 색다른 기질을 지니는 매우 독자적인 존재로서, 연주회도 거의 열지 않았으며, 또 연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는 바로 앞에서 삭제·취소하는 일도 있었으며, 레코드도 매우 적다. 끊임없이 자기의 음빛깔과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외의 연주회에서도 반드시 자기의 피아노와 조율사(調律師)를 대동했다. 그의 연주는 날카롭고 맑은, 얼핏 보기에는 담채(淡彩)된 음이지만, 그러면서 힘있게 곡을 구축(構築)해 가고, 그 위에 엄격한 시정(詩情)도 품고 있다. 레퍼토리 범위는 넓으나, 특히 라벨 등 근대적 작곡가의 것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편집]

바카우어[편집]

Gina Bachauer(1913-1976) 그리스가 낳은 대표적인 피아니스트. 아테네 근교에서 태어나고, 왈데말 프리만에게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대작곡가이자 명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에게 배웠다. 1935년, 명지휘자 미트로푸로스와 협연하여 데뷔했는데, 1937년에는 파리로 나와서 코르토에게 사사, 독주회도 열었다. 2차대전 후에는 영국으로 건너갔고, 1950년엔 미국으로 데뷔, 각지에서 연주회를 열고 절찬을 받았다. 착실한 기교의 소유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리스트 등 그 레퍼토리의 범위는 넓으나 스승인 라흐마니노프의 곡목 연주에서는 정평이 있으며, 자신도 또한 그것을 가장 좋아하였다.

브라질[편집]

노바에스[편집]

Guiomar Novaes(1895-1979)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출신의 여류 피아니스트. 9세 때 연주회를 연 것을 계기로, 천재소녀로 명성을 불러일으키고 브라질 정부의 원조를 받아 파리에 유학,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이시도르 필리프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구미에서 독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고 '피아니스트의 여왕'이라 불렸다. 그녀의 명연주는 쇼팽, 슈만 등 낭만파 작품 중심이며, 레코드로 듣는 한에서는 어느 것이나 우아한 서정에 넘쳐흘러 풍만한 여류의 본성을 살려서 아름답다.

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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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 Ts'ong 傳聰(1934- ) 중국 출신으로서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일의 피아니스트. 상하이에서 태어나 마리오 파치에게 사사했고, 1953년에는 부쿠레슈티의 국제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하였다.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 1955년에는 쇼팽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 마주르카상을 탐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그 후 동유럽, 서유럽, 미국 등지로 연주여행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경력으로부터도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쇼팽곡을 가장 잘 쳤으며, 매끈하고 서정적인 연주를 하였는데, 고전으로부터 현대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칠레[편집]

아라우[편집]

Claudio Arrau(1903-1991) 칠레의 명피아니스트로 남미를 대표하는 유일의 명수이다. 산티아고 음악원으로부터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으로 진학하고, 1927년의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레코딩도 활발하게 행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다분히 낙천적인 면이 있으나, 어디까지나 빛나는 음빛깔과 유연한 리듬에는 관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그가 잘 연주하는 것은 쇼팽, 베토벤, 리스트 등의 작품 연주인데, 현대 중남미의 음악 작품도 즐겨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