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솔리스트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피아노[편집]

카마이켈[편집]

Hoagy Carmichael(1899-1981) 피아노 주자이며 가수이기도 하나, 그 이상으로 미국 파퓰러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다. 1899년 인디애나주 블루밍턴 태생. 래그타임 피아니스트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으며, 인디애나 대학 시절에 친구와 밴드를 조직, 연주하였다. 이 무렵에 저명한 재즈 코넷 주자인 빅스 바이더베크와 친교를 맺어 재즈적인 감각이 있는 곡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924년의 <워시보드 블루스> 등과 1927년의 작품 <스타더스트>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였다. 이 밖에 <내 마음의 조지아>, <로킹 체어> 등의 명작이 있다. 피아노의 연주보다도 그의 소박한 노래는 뉘앙스가 짙어 흥미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나 텔레비전의 배우로서도 그 개성적인 연기로 성공하였다.

[편집]

Frankie Carle(1903- ? ) 댄스 밴드의 리더로서도 저명한 피아노 주자. 15세 때 악계에 들어와 1930년대 말 할레트 악단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호레스 하이트 악단을 거쳐 1943년에 자기 악단을 만들었다. 스타카토로 스윙을 잘하는 연주에 특색이 있다. 작곡도 일류이며 대표작은 <선라이즈 세레나데>, <낙엽>, <연인들의 자장가> 등이 있다.

부시[편집]

Lou Bush(1910- ? ) 댄스 음악과 무드 음악 분야에서 활약한 피아노 주자. 켄터키주 태생으로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배웠다. 16세로 악계에 데뷔, 클라이드 맥코이, 조지 올센, 할 켐프 등의 악단에서 활약하였으며 1940년 중엽부터는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였다. 1949년부터 유머러스한 래그 타임 피아노를 '조 핑거스 카'의 이름으로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필스[편집]

Irving Fields(1915- ? ) 뉴욕의 호텔을 중심으로 안정된 인기를 지닌 피아노 주자. 뉴욕 태생으로 로체스터의 이스트만 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쿠바 항로의 기선 악단에서 일을 한 뒤 두 친구와 트리오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작곡가로서도 유명하며 <마이애미 비치 룸바> 등 라틴 리듬의 곡이 잘 알려져 있다.

헤이우드[편집]

Eddie Heywood(1915- ? ) 멜로디어스한 프레이징으로 알려진 재즈 계통의 피아노 주자. 조지아주 태생. 밴드의 리더 겸 피아노 주자였던 부친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1930년부터 연주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베니카터 악단을 거쳐 1943년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1944년에는 <비긴 더 비긴>의 레코드로 유명해졌으며, 1956년의 자작곡 <캐나다의 석양>이 크게 히트하였다.

[편집]

Buddy Cole(1916-1964) 재즈의 감각을 지닌 피아노와 오르간 주자. 일리노이주 어빙 태생. 1934년에 할리우드 극장 오르간 주자가 되었으며 후에 프란키 트란바우어, 알비노 레이 악단 등에 참가하였다. 1943년경부터는 스튜디오 음악가가 되어 빙 크로스비나 그 밖의 가수의 반주를 맡는 한편 자기의 트리오에 의한 레코드도 만들었다. 신선한 정서와 경쾌한 스윙감이 그의 특질이다. 피아노로는 <콜 포더를 연주하다>, 오르간으로는 <봉고의 향연>의 음반이 호평을 받았다.

카발레로[편집]

Carmen Cavallero(1917- ? )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파퓰러 피아노 주자. 뉴욕 태생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고교 졸업 후에는 많은 악단에서 일을 하였으며 1939년에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다. 1945년에는 <쇼팽의 폴로네즈>의 밀리언 히트로 스타가 되었다. 화려한 꾸밈음(裝飾音)의 사용방법에 독특한 개성이 있다. 1955년에 영화 <사랑의 이야기>의 연주를 담당하였다.

시어링[편집]

George Shearing(1919- ? ) 원래는 재즈계의 사람이었으나 파퓰러 무드 음악에서도 활약한 맹인 피아니스트. 런던 태생으로 맹인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1930년대 중엽부터 활약하였다. 1947년 이후는 미국에서 연주하여 1949년에 5중주단을 결성, 바프의 수법을 소화시킨 쿨한 연주로 압도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가 작곡한 명곡에는 <버들랜드의 자장가>가 있다.

리베라체[편집]

Walter Liberace(1920- ) 감미롭고 핸섬한 용모에 화려하고 독특한 의상으로 이름 높은 피아노 주자.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나 모리츠 로젠탈에게 사사하였으며 16세 때 클래식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1940년대에 파퓰러 음악계에 들어가 나이트 클럽에서의 화려한 연주로 인기를 모았다. 노래나 만담의 솜씨도 훌륭하며, 특히 여성 팬이 많았다. 널리 알려진 곡으로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가 있다.

피어슨[편집]

Johnny Pearson(1925- ) 영국의 대표적인 파퓰러 피아노 주자이며 작곡 및 편집자이기도 하다. 런던 태생으로 아카데미 음악원에서 배웠으며 솔로몬에게 사사, 클래식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그 후 재즈계에 들어가 1948년에 미첼 트리오에 참가하였다. 1955년부터 라디오, 텔레비전의 음악감독도 한 바 있다. 1964년 사운드 오케스트라와 <바람이 부는 대로>를 히트시켰다.

윌리엄스[편집]

Roger Williams(1926- ) 파퓰러 콘서트 피아노의 주자.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태생. 3세부터 피아노를 배워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테디 윌슨과 레니트리스타노에게 사사하여 재즈도 배웠다. 1955년에 <고엽(枯葉)>의 밀리언 히트로 인기가 높았다. 클래식과 파퓰러를 잇는 교량 역할을 염원했으며 소프트한 터치로 정평(定評)이 있다.

하이먼[편집]

Dick Hyman(1927- ) 재즈와 파퓰러의 두 분야에서 활약한 피아노·오르간·하프시코드의 주자. 뉴욕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워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연마하였다. 1948년에 빅터 론버드 악단에서 데뷔하여 여러 악단 및 쇼 등에서 활약한 뒤 1956년에는 <모리타트(Moritat)>로 밀리언 히트판을 냈으며, 클라리넷의 명수이기도 하다.

프레빈[편집]

Andre Previn(1929- ) 클래식·재즈·파퓰러 등 넓은 범위에 걸쳐 활약한 피아노 주자. 4월 6일, 독일의 베를린 태생. 베를린 왕립음악원, 파리 음악원 등에서 배운 후 1939년에 도미하였다. 아크론과 테데스코에게 사사하여 작곡법 등을 배웠다. 1948년에 MGM 영화사에 작곡 및 지휘자로서 들어가, 이후 영화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57년에 셰리 만과 함께 취입한 <마이 페어 레디>가 베스트 셀러가 되어 재즈를 취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피아노 외에 클래식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크래이머[편집]

Floyd Cramer(1933- ) 스틸 기타에서 힌트를 얻어 '론섬 컨트리 사운드'라고 부르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창안한 피아노 주자. 루이지애나주 태생. 1955년에 테네시주의 그랜드 오울 오프리에 출연하였다. 그 후 프레슬리의 <하트브레이크 호텔>(1956) 등의 반주를 맡았으며 1960년에 자작자연(自作自演)의 <라스트 데이트>가 밀리언 히트가 되었다.

네로[편집]

Peter Nero(1934- ) 재즈계에서 장래가 촉망된 인기 파퓰러 피아노 주자. 뉴욕의 브루클린 태생.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배웠으며 1958년부터 각지의 일류 클럽에서 자신의 트리오를 이끌고 활약하였다. 1961년에 음반 <피아노 포르테>로 그래미상을 획득, 대스타가 되었다. 모던 재즈와 클래식 음악의 수법을 교묘하게 사용하는 개성적이면서도 신선한 연주를 들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음악도 작곡하였다.

듀친[편집]

Peter Duchin(1937- ) 댄스 음악에 능숙한 피아노 주자. 부친은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쳐 인기가 높았던 피아노 주자 에디 듀친이다. 예일 대학에서 프랑스의 파리 음악원으로 진학하여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레코드와 그 밖의 분야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별로 개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연주에 호감을 느끼게 된다.

우드[편집]

Del Wood(생몰연도 불명) '홍키 통크 피아노의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래그타임 피아노 주자. 테네시주 내슈빌 태생으로 5세부터 피아노를 배워 클래식 음악에 뜻을 두었으나 래그타임의 매력에 이끌려 파퓰러로 전향했다. 1951년에 <다운 얀더>의 히트 레코드를 만들어 인기를 모았으며 여류 래그타임 피아니스트로서는 희귀한 존재이다.

오거스트[편집]

Jan August(생몰연도 불명) 주로 호텔이나 클럽에서 연주한 피아노 주자. 뉴욕의 브루클린 태생. 피아노 주법을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수많은 직업을 거친 뒤 1940년대 중엽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으며 1946년에 만든 레코드 <미달>이 다음 해의 베스트 셀러가 되어 스타의 자리에 올라섰다. 강한 개성은 없으나 밝은 음빛깔과 정통적인 상쾌감 등으로 많은 팬이 있다. 줄곧 머큐리의 전속으로서 레코드로 무드 음반이 있다.

하넬[편집]

Joe Harnell(생몰연도 불명) 편곡·지휘자로서도 정평이 있는 피아노 주자. 뉴욕 태생으로 14세 때 이미 자기의 댄스 밴드를 가졌다. 그 후 런던의 트리니티 음악원에 유학하여 아론 코플랜드, 미요 등에게 사사하였다. NBC 방송국의 음악감독을 거쳐 프리랜서로서 피아니스트, 편곡자가 되었다. 1962년에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보사노바 편곡으로 히트시켰다.

애트웰[편집]

Winifred Atwell(생몰연도 불명) 영국의 여류 피아노 주자. 영연방인 서인도 제도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태생. 뉴욕으로 건너가서 브라이로프스키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영국으로 가서 자선 쇼에 출연하여 각광을 받았다. 1947년부터는 방송, 클럽 등에서 활약하였으며 1952년에 <블랙 앤드 화이트 래그>, 1953년에는 <파티를 합시다>를 밀리언 히트시켰다.

페란테와 타이셔[편집]

Arthur Ferrante & Rouis Teicher(1924-) 독특한 2중주로 유명한 피아노 주자들. 페란테는 뉴욕 태생이며, 타이셔는 펜실베이니아주 태생. 두 사람은 6세 때 입학한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알게 되어 친교를 맺었다. 졸업 후 한동안은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있었으나 음악원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1947년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 후 2중주로 미국 각지를 비롯하여 캐나다 등으로 순회공연, 클래식과 파퓰러곡에 의한 프로그램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 1950년대의 시초에 두 사람은 피아노의 현에 나무 조각이나 고무를 대어 북 등의 야릇한 음빛깔을 내는 시도에 성공, 이것이 사운드 플룹이라 불려 화제가 되었으며 그 후 줄곧 이 연주를 들려주었다. 또한 1960년에는 영화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줍니다>의 주제곡 레코드가 밀리언 히트로 선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밖에 <영광에의 탈출>, <안녕을 다시 한 번>,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 일련의 영화 주제곡에서 히트를 내고 있다.

웨이크먼[편집]

Rick Wakeman(1949- ) 영국 미들섹스 페리베일에서 출생. 부친은 테드 히드 밴드의 피아니스트였다. 4세 때 피아노를 시작하여 명문인 왕립음악원에서 배웠다.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약한 뒤, 1970년에 '스트로브스'에 가담한 것이 계기가 되어 록뮤직에 데뷔했으며, 이듬해에 '스트로브스'에서 '예스'로 옮겼다. 키스 에머슨과 어깨를 겨누는 록 키보드 플레이어의 제1인자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예스에 있었을 때의 앨범 <헨리 8세의 6인의 아내>가 세계적 히트곡이 되었다. 1974년 '예스'를 탈퇴하여 본격적 솔리스트가 되었고, 런던 필하모닉과의 공연인 <지저탐험(地底探險)>은 록과 클래식의 융화란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올드필드[편집]

Mike Oldfield(1953- ) 영국 태생. 14세 때 언니와 함께 듀엣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에는 데이빗 베드포드, 케빈 어어즈 등과 4인조 록그룹, 호올 월드를 조직하여 베이스를 맡았다. 구상한 지 4년, 녹음에 1년이 걸려 제작한 음반 <튜브러 벨즈>는 기타·피아노 등 모든 악기를 스스로 연주하여 다중녹음(多重錄音)한 것으로, 1974년 5월에 발매되어 크게 히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영화 <엑소시스트(무당)>에 영화음악으로 사용되어 전 세계에서 300만장이 팔렸다. 제2작 <하제스트 회지>를 발표한 후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 요양생활을 보내다가 1975년 가을 제3작 <오마든>을 발표했다.

클래이더맨[편집]

Richard Clayderman(1953- ) 파리 출생. 콩세르바투아를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 1977년 데뷔곡 <아들린을 위한 발라드>가 경음악으로는 매우 드물게 파리를 강타했고, 유럽 지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후 앨범 <가을의 속사임>을 발표하여 타이틀곡과 <사랑은 핑퐁>이 호평을 받았다. 데뷔앨범의 성공으로 그는 4년 동안 세계순회공연을 하며 3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1983년 앨범 <무지개 마음>을 발표하여 발라드한 가 호평을 받았다. 이 곡은 후에 올리비에 투생이 직접 노래하여 히트되기도 했다. 1984년 JVC 레이블에서 앨범 Richard Clayderman을 발표하여 <엘자의 첫 슬픔>을 히트시켰다. 1985년에 내한해 국내에서도 리처드 클래이더맨의 선풍이 일었으며,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세계로 인하여 그의 앨범들은 히트를 기록했다.

색소폰[편집]

보스틱[편집]

Earl Bostic(1913-1965) 리듬 앤 블루스 등의 무드 음악으로 유명했던 알토 색소폰 주자. 오클라호마주의 타르사 태생. 뉴올리언스의 자비아 대학에서 화성 등을 배웠다. 그 후 에드거 헤이스와 돈 레드만 악단을 거쳐 1941년에 자기 악단을 조직했다. 1945년에 재결성을 한 악단이 성공하였으며 히트 레코드에는 <플라밍고>(1951) 등이 있으며 작곡 및 편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테일러[편집]

Sam Taylor(1916- ? ) 재즈계의 사람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무드 댄스의 음악면에서 인기가 높은 테너 색소폰 주자. 테네시주 태생으로, 양친과 형제가 모두 음악가. 클라리넷 주자로서 형 폴의 악단에서 일하였으며 후에 테너로 바꿔 1941년에 쿠티 윌리엄스 악단에 참가하였다. 럭키 밀린더, 캡 캐로웨이 악단을 거쳐 1955년에 스스로 악단을 조직, 호쾌한 연주 스타일로 이름이 높다.

올드[편집]

Georgie Auld(1919- ? ) 원래는 스윙 재즈의 명수였으나 최근에는 주로 무드 음악의 일을 하는 테너 색소폰 주자. 캐나다의 토론토 태생. 1929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30년대 후반의 스윙 시대에 아티 쇼 악단에서 이름을 떨쳐 1940년대에는 베니 굿맨 악단 등에 참가하였다. 1944년부터는 자기의 악단을 만들거나 스튜디오 음악가로도 활약하였다.

오스틴[편집]

Sil Austin(1929- ) 재즈계의 출신이긴 하나 오히려 파퓰러 무드에서 인기가 높은 테너 색소폰 주자. 플로리다주 태생으로서 1949년에 로이 엘드리지 악단에 참가하였다. 쿠티 윌리엄스, 타이니 브래드쇼 악단을 거쳐 1954년에 자기 악단을 창설, 1956년에 <슬로우 워크>가 히트, 이어 <대니 보이>로 파퓰러한 스타가 되었다.

워싱턴 주니어[편집]

Grover Washington Jr.(1943- ) 뉴욕 버펄로 출생. 1971년 첫 솔로앨범 Inner City Blues를 내놓았으며 1973년에 발매된 3집 Soul Box로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그 후 최초의 골드를 기록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앨범 Mr. Magic을 1974년에 발매하여 타이틀곡을 히트시켰다. 1980년 Winelight를 발표하여 아름다운 가 대히트했다. 그 곡은 재즈 차트는 물론 팝 차트에도 올라 그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1981년에는 Come Morning을 발표했으며 1982년 The Best Is Yet To Come을 내놓으며 전성기를 이루었다. 1986년에 A House Full Of Love를 발표하였다. 꾸준한 음악 활동을 펼치는 그의 창작력은 1987년에 발표한 Strawberry Moon 앨범에서 빛을 발하며 히트를 거두었다. 1989년에는 퓨전 재즈의 기본에 충실한 Time Out Of Mine을 내놓았으며 1992년 Next Exit를 발표, 데이빗 블루벡의 를 멋지게 리메이크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케니 지[편집]

Kenny G(1957- ) 미국 시애틀 출생. 데뷔앨범 Kenny G 중 가 호평을 받았으며, 1984년 2집 G-Force를 공개하여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의 과 를 히트시키면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세계적인 명성을 확고히 한 4집 Duotones를 1986년에 공개했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를 내놓아 소프라노 색소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케니 지는 2년 동안 세계 순회공연을 치른 다음 1988년에 5집 Silhouette을 내놓아 을 히트시켰다. 이어 영화 의 사운드트랙을 발표했다. 1993년 4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 Breathless를 발표하여 아름다운 를 히트시켰다.

기타[편집]

고메스[편집]

Vincente Gomes(1911- ? ) 미국에서 활약한 세계적 기타 주자. 에스파냐의 마드리드 태생으로, 13세 때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하여 유럽 각국이나 중남미를 순회공연, 1938년에 뉴욕의 타운 홀에서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음악도 담당하였으며, 1941년에 영화 <피와 모래>를 위하여 에스파냐 민요 <로맨스>를 편곡 연주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편집]

Les Paul(1916- ? ) 테이프 녹음을 이용한 한 사람으로서, 중주(重奏)로 인기가 높은 기타 주자. 위스콘신주 태생으로 시카고 및 그 밖의 곳에서 활약, 1944년에 자기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1949년에는 가수인 아내 메리 포드와 함께 만든 다중녹음(多重錄音)의 레코드 <하우 하이 더 문>이 1951년에 밀리언 히트가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비범한 기교가 놀라우며 타고난 솜씨도 훌륭하였다. 메리와는 1963년에 이혼하였다.

알메이다[편집]

Laurindo Almeida(1917- ? ) 재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하는 기타 주자. 브라질의 상 파울루시에서 태어났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자기 악단을 운영, 1947년에 도미, 스탠 켄턴 악단에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 후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솔리이스트로서 높은 인기를 유지하였다. 현대적인 감각과 지적이며 약간 싸늘한 느낌이 드는 연주의 솜씨가 놀랍다.

모톨라[편집]

Tony Mottola(1918- ? ) 주로 레코드나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활약한 기타 주자. 뉴저지주 태생. 클래식 기타를 배운 뒤 파퓰러 음악계에 데뷔했으며, 스튜디오 음악가로서 활약했다. 가수 페리 코모의 쇼나 레코드에서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어 각광을 받았다. 자신의 레코드도 많이 만들었으며 로맨틱한 연주가 그의 특질이다.

카이올라[편집]

Al Caiola(1920- ) 스튜디오 음악가로 제1급으로 꼽히는 기타 주자. 뉴저지주에서 태어났으며 뉴욕시의 CBS 방송국에서 활약, 1955년부터 유고 윈터할터, 파시 페이스, 안드레 코스텔라네츠 악단 등에 참가하였다. 1958년부터 자기의 솔로를 중심으로 한 레코드 제작에 힘을 써 파퓰러한 존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가수의 훌륭한 반주로도 유명하다.

애트킨스[편집]

Chet Atkins(1924- )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계의 한 사람으로서, 일반적인 파퓰러나 무드 음악에도 활동이 많은 전기기타 주자. 테네시주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에 악계에 데뷔, 이후 소프트한 터치와 뛰어난 기교의 연주로 많은 팬을 확보하였다. 프로듀서로서도 일류이며 모던한 웨스턴(내시빌 사운드)을 보급시켰다. '미스터 기타'의 애칭으로 유명하다.

베이커[편집]

Mickey Baker(1925- ) 파퓰러와 재즈의 두 분야에서 활약한 전기기타 주자. 켄터키주 태생으로 1945년부터 베이스 주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기타 주자로 전향하였다. 1950년대 중엽에는 실비어 반더플과 콤비가 되어 '미키와 실비어'로서 성공하였다. 1949년부터는 역시 키티 노블과 콤비가 되어서 활약하였다. 기타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흑인다운 강렬한 개성으로 유명하다.

예페스[편집]

Narciso Yepes(1927- )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스파냐의 클래식 기타 주자. 13세 때 탈레르가 문하의 가르시아 데 라 로사에게 사사하여 발렌시아 음악원에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세고비아의 뒤를 잇는 명수로서 그 교묘한 기교와 음악성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52년에 르네 크레망 감독의 영화 <금지된 장난>에서 음악을 담당하여 민요 <로맨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에디[편집]

Duane Eddy(1938- ) 낮은음현(低音絃)을 울리는 트왱기 기타로 인기가 높은 주자. 뉴욕주의 코닝 태생. 1955년에 알 케이시 악단에 들어갔으며 그 후 자기가 만든 더 레블루즈라는 그룹을 이끌고 1958년에 레코드 <레블 리더>가 밀리언 히트가 되어 그 이름을 전 미국에 떨쳤다. 작곡 솜씨도 훌륭했으며 1960년부터는 배우로서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치아리[편집]

Claude Ciari(1944- ) 많지 않은 프랑스의 파퓰러 주자. 11세 때부터 기타를 익혀 13세 때에는 파리 근처 폰템블로의 어느 미군기지에서 연주를 하였다. 1960년에는 밴드를 이끌고 각지를 순회공연한 바 있으며 1965년에 레코드 <밤안개의 데이트>가 히트,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스페니시한 타입의 기타를 쓰며 약간 딱딱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맑은 음빛깔과 신선함이 연주의 특색이다.

뮤어[편집]

Billy Mure(생몰연도 불명) 젊은 파퓰러 음악 애호가 사이에 인기가 높은 전기기타 주자. 뉴욕시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고 하였으나 기타를 배움과 동시에 그리니치 음악원에서 작곡법도 배웠다. 1950년대 중엽부터는 뉴욕의 WNEW 방송국에서 활약, 또한 히트곡을 무드 음악이나 댄스 음악에 편곡 연주한 레코드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1955년부터는 영화음악도 작곡하였다.

헨드릭스[편집]

Jimi Hendrix(1942-1970) 미국 시애틀 출생. 60년대 일렉 기타의 귀재로 평가받는다. 1966년 런던으로 건너가 지미 핸드릭스 익스피어리언스를 결성하여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였다. 이어 발표한 데뷔앨범인 Are You Expe­rienced는 영국차트 상위권에 올랐으며 Axis : Bold As Love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에서 완숙한 연주 실력을 보여주었다. 1986년 익스피어리언스의 마지막 앨범인 Electric Ladyland를 발표하여 가 히트되었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원더가 오르간을 담당한 명곡 가 수록되었다. 이후 익스피어리언스는 해체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1970년 The Band Of Gypsys를 발매하여 와 을 히트시켰다. 그러나 1970년 영국 런던에서 바르비투르산염 숙취에 의한 토제흡입으로 인해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아이키델릭 사운드와 퓨전이라는 새로운 음악 영역을 개척한 그는 지금도 많은 아티스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트럼펫[편집]

존스[편집]

Jonah Jones(1909- ? ) 재즈계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파퓰러한 댄스 음악에서도 인기가 높은 트럼펫 주자. 켄터키주 태생으로 1929년에 윌리스 브라이언트 악단에 참가하였다. 지미 랜스포드, 프레쳐 헨더슨, 캡 캘로웨이 악단 등을 거쳐 독립하였다. 1957년에 4중주단을 이끌고 뉴욕의 클럽에서 활약하였다. 뮤트(弱音器)를 단 경쾌한 연주를 뮤테드 재즈의 대스타가 되어 인기가 높았다.

해켓[편집]

Bobby Hackett(1915- ? ) 딕실랜드 스윙이 장기인 코넷 주자이다. 또한 트럼펫 및 기타의 주자이기도 하다. 로드 아일랜드주 태생이다. 18세 때부터 코넷을 불었으며 1930년대 중엽부터는 많은 재즈맨과 공연하였다. 1941년에는 글렌 밀러 악단에 참가, <진주 목걸이>나 그 밖의 곡에서 솔로를 담당하였다. 1953년부터 재키 그리슨 악단 등에서 무드 음악을 연주하였다.

버터필드[편집]

Billy Butterfield(1917- ? ) 스윙 재즈의 명수였으나 후에 무드 음악으로 인기가 높은 트럼펫 주자가 되었다.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1937년에 밥 크로스비 악단에 참가하여 각광을 받았으며 1940년에는 아티 쇼 악단에 옮겨 <스타더스트>의 훌륭한 솔로로 유명해졌다. 그 후 베니 굿맨 등 많은 재즈맨과 공연을 가졌으며 남성적인 박력있는 연주로 이름을 떨쳤다.

허트[편집]

Al Hirt(1922- ) 딕실랜드와 파퓰러한 댄스 무드 음악의 분야에서 활약한 트럼펫 주자.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태생으로 부친은 경찰관이다. 6세경부터 트럼펫을 불었으며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배웠다. 지미와 토미 도시 형제의 악단 등을 거쳐 1950년대 중엽부터 뉴올리언스에서 악단을 지휘, 그 인기가 높았다. 1963년에는 <자바>가 밀리언 히트가 되었으며 노래 또한 잘 불렀다.

캘버트[편집]

Eddie Calvert(1922- ) 영국의 가장 유명한 파퓰러 트럼펫 주자. 랭커셔주의 프레스턴 태생이다. 처음에는 부친에게서 코넷을 배웠다. 1942년 이후 지미 맥머레이, 빌리 제럴드 악단 등에 참가하였다. 1951년에는 스스로 악단을 창설, 클럽이나 라디오 등에 출연하였으며 1953년에 만든 <오, 마이 파파>가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로소[편집]

Nini Rosso(1927- ) 이탈리아 파퓰러 음악계의 대표적인 트럼펫 주자. 밀라노 근방의 토리노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서커스의 트럼펫 주자였다. 1940년대의 중엽부터 주둔 미군의 클럽 등에서 연주를 하였으며 1957년에 악단을 이끌고 유럽 각국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순회공연을 가졌다. 귀국 후에는 라디오 및 레코드에서 인기를 획득, 1962년에 <저녁놀의 트럼펫>으로 대스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화음악에도 관계를 가졌으며, 노래솜씨도 훌륭하였다.

주뱅[편집]

Georges Jouvin(생몰연도 불명) 프랑스의 무드 음악에서 인기가 높은 트럼펫 주자. 소년시절부터 트럼펫 주자인 부친에게서 배웠다. 스튜디오 음악가, 샹송가수 티노 롯시의 반주자를 거쳐 1956년부터 솔로이스트로서 레코드에서도 활약하였다. 약간 선이 섬세하기는 하나 아름다운 음빛깔을 특색으로 한다.

아코디언[편집]

마그난테[편집]

Charles Magnante(1905- ? ) 오랜 경력을 과시한 아코디언 주자.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부친도 아코디언 주자로서, 그 영향을 받아 소년시절부터 주법을 배워 천재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였다. 1930년대부터 레코드를 통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였으며 레퍼토리는 클래식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하다. 탁월한 기교의 소유자이나 풍부한 정서표현을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제1인자이다.

반담[편집]

Art VanDamme(1920- ) 재즈 센스가 있는 멋진 연주로 알려진 아코디언 주자. 미시간주 태생. 1941년에 벤버니 악단에 참가하여 관심을 모았으며 그 후 NBC 방송국에 들어가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에서 활약하였다. 이윽고 5중주단을 이끌고 클럽에 출연, 성공하였다. 그의 교묘한 아트리브의 놀라운 솜씨는 1950년대 시초에 재즈계에서도 호평이었다.

마슈즈[편집]

Mat Mathews(1924- ) 재즈에서 파퓰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한 아코디언 주자. 네덜란드의 헤이그 태생. 소년시절에 독일에서 연주하였으며 제2차대전 후에는 영국에서 재즈를 연주하였다. 1952년에 도미하여 그 신선한 연주로 호평을 받았다. 재즈맨과 공연한 레코드도 많으며 재즈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 담보다 선배라고 하겠으나 나중에는 무드 음악을 많이 연주하였다.

콘티노[편집]

Dick Contino(1930- ) '미스터 아코디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파퓰러 아코디언 주자. 캘리포니아주 태생으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7세 때부터 아코디언을 익히기 시작하여 후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명수(名手) 안젤로 카나츠오에게 사사하였다. 고교를 졸업하자 출생지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핸섬한 용모로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구미나[편집]

Tommy Gummina(1931- ) 재즈계에서 많은 각광을 받은 아코디언 주자. 위스콘신주 밀워키 태생. 13세로 시카고의 클럽에 출연, 안디 리초에게 인정되어 5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동안 아서 고드프리의 탤런트 스카우트 쇼에서 우승하였다. 1951년에는 해리 제임스 악단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바디 데프랑코 등 재즈맨과 공연하였다.

클라리넷[편집]

빌크[편집]

Acker Bilk(1929- ) 영국의 딕실랜드 재즈의 클라리넷 주자. 나중에는 무드 음악에서도 많은 활약을 보였다. 서머싯주 팬즈포드 태생. 부친은 메도디스트의 목사이며 모친은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다. 일찍부터 클라리넷을 배워 1958년에 자기 악단 더 파라마운트 재즈 밴드를 결성하였다. 1960년에는 <하얀 물결의 블루스>가 크게 히트하였다.

파운틴[편집]

Pete Fountain(1930- ) 딕실랜드 재즈와 무드 음악으로 파퓰러한 인기를 얻은 클라리넷 주자.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태생. 부친도 재즈맨이었으며 1942년에 고교에서 클라리넷을 배우고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필지트 악단 등에 참가하였다. 그 후 자기의 소편성 악단을 이끌고 로렌스 웰크 악단과 함께 공연했다. 유머러스한 연주로 유명하다.

드럼[편집]

넬슨[편집]

Sandy Nelson(1938- ) 젊은 세대에 인기가 높은 파퓰러 드럼스 주자.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 태생. 키프 틸러 악단과 지방의 로큰롤 쇼에 출연한 것을 시초로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 많은 레코딩에 참가하였다. 1959년에 자신의 솔로에 의한 레코드 <틴 비트>가 밀리언 히트가 되었다.

스나이더[편집]

Terry Snyder( ? -1963) 한때는 선풍적인 인기를 지녔던 드럼 주자. 뉴욕 태생으로서 고교시절부터 드럼스의 명수로 알려졌으며 수많은 메달을 받았다. 16세로 악계에 데뷔, 폴 화이트먼, 베니 굿맨 악단 등에서 활약한 후 스튜디오 음악가로서 편곡 면에서도 활동이 많았다. 1959년에 음반 <타악기의 설득>이 밀리언 히트가 되었다.

오르간[편집]

스미스[편집]

Ethel Smith(생몰연도 불명) '해먼드 오르간의 여왕'이라 불리는 유명한 여류 파퓰러 오르간 주자. 펜실베이니아주 태생. 엔지니어에 뜻을 두고 카네기 공업학교에 들어갔으나 어릴 때부터의 뛰어난 오르간 솜씨로 결국은 음악계에 들어섰다. 뉴욕의 슈버트 쇼에 출연함으로써 인정받아 1943년에는 <티코 티코>의 레코드가 크게 히트하였다. 오르간뿐만 아니라 피아노, 기타, 그 밖의 각종 타악기의 연주로도 유명하다.

가트[편집]

John Gart(생몰연도 불명) 살롱 음악풍의 기품있는 연주로 인기가 높은 오르간 연주자. 폴란드 태생으로 5세 때부터 작곡가로서도 유명한 글리엘과 보리스 레벤슨에게 사사하여 피아노, 음악을 배웠으며, 12세 때 연주활동에 들어갔다. 1934년에 도미, 허버트 시슨에게 오르간을 습득, 1940년부터 오르간주자로 파퓰러 음악계에서 활약하였으며 콘 전기 오르간을 사용하였다.

하프[편집]

풀턴[편집]

De Wayne Fulton(1932- ) 로버트 맥스웰의 뒤를 잇는 신진 하프 주자. 오클라호마주 타르사 태생. 16세 때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하프 주자인 카지에탄 아텔에게서 사사하여 다음해부터는 NBC 교향악단의 에드워드 비트에게 사사하였다. 1954년 빈 음악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 후 터키나 독일에서 활약하였다. 1958년부터는 하와이에서 살며 각국을 연주 여행하였다.

맥스웰[편집]

Robert Maxwell(생몰연도 불명) 파퓰러 음악에서의 대표적인 하프 주자이다. 소년시절부터 하프를 익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배웠다. 졸업한 뒤 내셔널 교향악단과 공연했을 때에는 17세였다. 이후 클래식 음악계에서 연주를 계속하였으며 제2차대전 중에는 연안 경비대원으로 근무하다가 가수 루디 바리의 권유로 파퓰러에 전향하였다. 작곡도 하며 대표작에는 <썰물>(1953)이 있다.

하모니카[편집]

애들러[편집]

Larry Adler(1914- ? ) 세계적으로 저명한 하모니카 주자. 메릴랜드주 태생으로 피포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으나 1927년에 출생지인 볼티모어의 하모니카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클럽이나 극장 등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높은 예술성을 지녔으며 레퍼토리는 파퓰러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 영화에서는 <백만인의 음악> 등에 출연한 바 있다.

헤이먼[편집]

Richard Hayman(1919- ? ) 하모니카의 명수이나 작곡·편곡·지휘자로서도 일류이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태생이다. 보라 미네비치에게 하모니카를 배워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을 담당하였다. 1952년에 <루비>라는 레코드가 히트하여 스타가 되었다. 작곡 면에서는 <단셀로>가 대표작이며, 보스턴 팝스 기타에 편곡을 제공하였다.

틸만스[편집]

Jean Toots Thielemans(1922- ) 가장 훌륭한 재즈 센스를 지닌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모니카 주자. 벨기에의 브뤼셀 태생. 1939년부터 하모니카를 불었으며 1947년에 도미하여 각광을 받았다. 1950년에는 베니 굿맨의 유럽 음악 여행에 참가하였으며 1951년부터 미국에서 시어링이나 진 쿠르퍼 등과 공연하였다. 근래는 유럽에서도 활약하며 기타의 솜씨도 훌륭하다.

무라드[편집]

Jerry Murad(생몰연도 불명) 고도의 기교를 지닌 파퓰러 하모니카 주자. 터키 태생으로서 6세 때 도미, 고교 시절에 하모니카를 배웠으며, 1941년에 보라 미네비치가 이끄는 하모니카 래스칼즈에 참가하였다. 1944년에는 알피올 돈 레스와 하모니캐츠라는 트리오를 조직하여 시카고에서 활약하였다. 1947년에 <페그 오 마이 하트>의 히트로 스타가 되었다.

치터[편집]

카라스[편집]

Anton Karas(1906- ? ) 세계적으로 가장 저명한 치터 주자. 오스트리아의 빈 태생이며 13세경부터 치터를 익혔으며 빈 음악원에서 배웠다. 1948년 말에 카페에서 연주 중, 영국의 영화배우 트레버 하워드에게 발견되어 캐럴 리이드 감독의 영화 <제3의 사나이>의 음악을 담당, 자작 자연의 테마가 크게 성공하여 일약 세계적인 인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