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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이란 개념의 주관성
[편집]政治發展-槪念-主觀性
어느 정치체제도 변화를 겪지 않는 체제는 없다. 다만 그 변화의 속도나 내용 또는 방향에서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정치발전이란 개념은 특수한 내용 또는 방향의 정치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면 어떤 성격의 정치변화를 정치발전(또는 정치개발-political development)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경제발전 또는 개발이란 개념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경제발전이란 경제적 후진국이 경제적 선진국의 특성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경제적 후진국이나 선진국은 상대적인 개념이란 점이다. 그래서 경제적 선진국은 '비교적 선진국'이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경제개발 또는 발전은 종결점이 없는 것이다. 경제적 후진성 또는 선진성을 따지는 기준은 쉽게 합의될 수 있다. GNP나 생산성이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기준은 이념차별적(理念差別的)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체제가 다른 경제끼리도 후진성 또는 선진성이란 점에서 쉽게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발전(development)이란 개념을 사회나 정치에 적용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무어(Wilbert E. Moore) 같은 학자는 사회학에서 발전이란 개념은 쓸 수 없으며 다만 변화란 개념만 용납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다니엘 러너(Daniel Lerner)가 근대화란 개념을 정의하듯이 후진적인 사회가 선진적인 사회의 특성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사회발전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후진적인 정치체제가 선진적인 정치체제의 특성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정치발전이라고 말해 넘길 수 있으나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사회와 정치분야에 있어서 후진성이나 선진성을 논할 때 사용되어야 할 기준에 대한 합의가 어려운 데 있다. 즉 경제발전이란 개념은 다분히 가치중립적(價値中立的)이지만 사회발전이나 정치발전이란 개념은 가치주관적(價値主觀的)이라는 말이다. 학자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또는 이념적인 정향에 따라서 상이한 기준이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발전을 논할 때 또는 정치체제를 후진성 또는 선진성의 관점에서 비교할 때는 반드시 어떤 기준을 쓰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또 기준을 밝히면서 정치발전을 논할 때만 의미있는 토의가 될 수 있다.
정치발전이란 개념의 구미 편견
[편집]政治發展-槪念-歐美遍見
대체로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대정치학, 즉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정치학이 구미 특히 미국 중심으로 된 학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발전이란 개념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구미 정치학계에서 개발되어 보급된 개념이다. 그래서 정치발전을 취급하고 있는 문헌을 살펴보면 정치발전의 척도로 쓰이고 있는 기준이 다분히 구미적인 편견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정치발전이란 곧 '구미 민주적 정치개발'이라는 식으로 논해지고 있다. 그래서 구미의 정치체제, 그것도 특히 미국 영국 등 안정된 민주체제를 정치적인 선진국으로 보고, 그런 선진국의 특성을 발췌한 다음 그런 특성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정치발전으로 규정짓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인 측면에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되는 것을 정치발전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런 경향이 정당화되는가? 경험적인 학문인 정치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구미 민주적 정치개발'을 곧 '정치발전'과 동일시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입장이 못 된다.
그래서 비서구 학자들 뿐 아니라 구미학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구미적 편견이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의 비교정책이론에 공헌이 큰 앨몬드(Gabriel A. Alomnd)도 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편견지양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실질적으로 그들의 이론전개에 있어서 구미적인 편견의 지배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지적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지식의 사회학'적인 입장에서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학문하는 사람이 아무리 객관성을 추구해도 그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환경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콜먼(James S. Coleman)은 이 점에 주의하고 특수문화(즉 서구문화)에 국한된 특성을 정치발전이나 정치근대화 개념의 기초로 삼는 것은 그 개념의 보편타당한 분석적 도구로서의 사용도를 제한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민주화를 정치발전의 주요 구성인자(構成因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경험적으로도 민주화는 한 정치체제의 통합 내지 적응능력을 증대시켜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민주화를 정치발전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을 완전히 거부할 필요는 없다.
정치발전의 기준
[편집]政治發展-基準
정치발전의 척도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치발전이란 개념 자체가 가치주관적(價値主觀的)이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 다른 기준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념이나 체제에 비교적 구애없이 널리 쓰일 수 있는 기준을 좀 들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정치적 일체감(政治的一體感)'의 성장이다. 정체(政體)의 구성원들이 서로 같다고 느끼고 또 충성을 같은 대상에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각도를 좀 달리해서 보면 다른 정체의 구성원들과는 다름을 느끼고 충성의 대상에 대해서도 뜻을 달리함을 의미한다.
둘째로는 정치적 통합의 정도이다. 이것은 일체감(一體感)과 관련이 있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일체감은 강하면서도 통합에 있어서 약할 수 있다. 즉 모두가 "우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란 나라에 대해 충성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계층간이나 지역간에 상당한 분열이 가능하다. 통합이란 ① 정치적 목적가치에 대한 합의를 의미하며, ② 합의된 목적가치의 성취를 위한 행동의 통합된 조직을 의미한다.
셋째로는 정치적 합당성(合當性) 또는 정통성의 증대를 들 수 있다. 립셋(Seymour Martin Lipset)에 의하면 합당성이란 정체의 구성원들이 그 정체의 체제에 대해서, 특히 정권을 잡고 있는 집단에 대해서 느끼는 바를 의미한다. 그 정체의 구성원의 대다수가 "마땅히 정권을 잡아야 할 사람들이 마땅한 방법으로 온당한 목적각치의 실현을 위해서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느낄 때는 그 정체의 합당성은 높은 것이다. 일체감이 높고 결합이 잘 되어 있는 정체에서는 정치적 합당성도 높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정치적 합당성은 정치적 만족도와 정비례적인 관계가 있다.
넷째로는 구조적 분화(structural differentiation)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기능 또는 역할의 분화에 따라서 정치적 구조도 분화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분화와 정치적 효율성이 무한히 정비례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정치구조가 분화되면 될수록 그 정치체제의 효율성이 증대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구조적 분화가 가장 적당한 것인지는 보편적으로 잘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섯째로 정치적 효율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 기준은 앞서 든 네 가지 기준과 중요한 관계가 있다. 정치적 효율성이란 정치체제가 추구하는 목적가치를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알몬드가 말하는 상징·규제·수응·징수·분배능력이 정치적인 효율성과 관련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체제의 합당성이 높고 추구하는 목적가치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경우는 설득적 방법으로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체제적 수단에 호소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체제를 막론하고 설득에 의하건 강제에 의하건 최소한의 효율성은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 체제 자체 유지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정치참여를 정치발전의 기준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정치참여의 범위와 도가 넓고 높을수록 그 체제는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정치참여 중에서도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주시된다. 그래서 참여적 민주주의(參與的民主主義)가 정치발전의 모형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사상이 널리 보급됨과 동시에 정치참여의 요구도 하나의 세계적인 현상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참여의 문제가 중요 정치적 과제가 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참여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상황은 지속적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참여의 보편화와 정책결정의 합리화간에 마찰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정책문제는 자꾸 복잡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대안의 창출은 전문적인 지식과 집중적인 전념을 요구한다. 그런데 일반시민은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결핍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면 정책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전념할 여유도 의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론에 의한 정책결정의 비합리성이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참여문제의 효율적인 해결이란 참여의 요구로 만족시키면서 정책결정이 합리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요구하는 것 같다. 지적(知的) 과정과 사회적 과정의 적절한 배합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론에 대한 수응성(隨應性)과 정책결정자의 지도성의 적절한 배합이 요망된다.
정치발전의 인과문제
[편집]政治發展-因果問題
정치사회학(政治社會學)에서는 정치발전을 종속변수(從屬變數)로 다루는 것이 지배적인 현상이었다. 러너, 립셋, 콜먼, 커트라이트(Phillips Cutright), 뱅크스(Arthur Banks), 텍스터(Robert Textor) 등의 연구가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정치발전을 사회·경제·문화변화의 종속변수로 보아 왔다. 그래서 바람직스러운 정치발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가설이다.
정치가 사회·경제·문화 등 분야의 여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치를 종속변수로만 취급하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사회·경제·문화 등과 정치간의 상관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양방적(兩方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몽고메리(John D. Montgomery), 시픈(William Siffin), 스피로(Herbert J. Spiro) 등이 정치를 종속변수로만 믿는 학풍(學風)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정체의 자율성이 전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해 온 블랙크(Cyril E. Black)도 정체의 자율성과 주도성(主導性)이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중국·일본·터키·멕시코 등의 근대화 과정을 연구한 학자들(특히 S. N. Eisenstadt와 Tang Tsou)은 정체가 자율성이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사회·경제문화 등을 앞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 견해를 모았다.
아무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지적했듯이 정치와 사회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하나 괴리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적인 선진성(정의의 문제는 여기서 따지지 않기로 하고)과 정치적 후진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사회적 후진성과 정치적 선진성이 같은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착안하고 페이지(Glenn D. Paige) 같은 학자는 정치지도력의 주도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같은 여건하에서도 정치지도력에 따라 정치발전현상이 유발될 수도 있고 헌팅턴이 말하는 바 정치적 퇴보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 정치체제에 안겨진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급격한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여, 변화에 적응할 뿐 아니라 변화를 한국인이 바라는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한국의 내적·외적 환경을 한국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증대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정치발전일 것이며 그런 정치발전은 창조적인 정치지도력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李 永 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