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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시사/정치와 생활/정치와 국가/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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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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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

국가란 정치학에 있어서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원·본질·속성(屬性) 등에 관하여 공통된 견해가 이루어져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정치학설사(政治學說史)에 관한 경우도 거기엔 국가를 에워싼 실로 많은 서로 다른 견해가 날카롭게 대립되어 왔다. 국가의 정의(定義)를 구하려는 경우에는 이런 대립에다가 역사상의 발전단계에 적응하여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 똑같이 국가라고 불리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한층 복잡하게 된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고대제국(古代帝國), 그리스의 도시국가(都市國家), 중세의 봉건국가(封建國家), 근대의 국민국가도 모두 국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로는 각기 다른 기능과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들에 공통한 것으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을 추출(抽出)하는 일이 얼마만큼의 의미를 갖는가는 무척 의심스럽다고 하겠다. 특히 근대국민국가는 역사적으로 보아서도 그 이전의 여러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H. 헬러(1891-1934, 독일의 정치학자)의 말을 빌리면 "국가라는 새로운 말은 전적으로 적절하게 새로운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state)란 개념 자체는 르네상스 때의 이탈리아에 있어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의 polis(도시국가)나 로마의 civitas(도시), 혹은 imperium(국가의 절대권) 등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때까지의 소위 국가가 자연히 형성된 것, 혹은 최소한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통사회를 기반으로 했던 것에 반해 근대국가는 인간의 작위(作爲)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 즉 부르크하르트(1818-1897, 스위스의 역사가)가 말하는 '인공품(人工品)'이었다는 점에 있다. 근대국가론의 창시자(創始者)의 한 사람이라 할 홉스(1588-1679, 영국의 정치학자·철학자)는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라는 괴수(怪獸)에 비유하였으나 이 '리바이어던'도 역시 인공적 기계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현대정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근대국가이다. 그 때문에 여기서 국가의 역사적 여러 형태를 보는 경우에도 근대국가와의 대비(對比)에 있어서, 혹은 근대국가의 특성(特性)을 밝히는 데 이바지하는 한에 있어서 고찰하려고 한다.

국가의 여러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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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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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國家

근대국가와 대비(對比)하여 고대국가 혹은 중세국가를 보는 경우에 있어 이들 국가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자연적 공동사회의 존재라 하겠다. 고대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원시적 공동사회(共同社會)이다. 그리고 원시적 공동사회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그것이 가족과 같은 일체성(一體性)을 갖고 있고, 그 내부에 있어서는 힘에 의한 강제(强制)가 자각(自覺)되어 있지 않는 점에 있다. 거기에선 일체성은 당연한 전제로 되고 있고 강제에 의한 분쟁의 해결은 다른 부족(部族)의 정복이라는 형태에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 정치의 이상(理想)은 오히려 이러한 접촉을 피하여 공동사회 내부에서의 평화를 실현하는 데 있었다. 노자(老子: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의 "정치의 이상은 닭의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웃나라 사이라도 각 나라의 백성은 자기 집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자기 집에서 짠 의복을 입고, 각자의 습속(習俗)에 만족하며, 각자의 일을 즐겨,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來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기술이나, 『사기(史記)』(중국 고대의 通史로 前漢의 역사가 사마천이 지었다)에 있는 "해뜨면 갈고(耕) 해져서 그친다. 제왕(帝王)의 힘, 나에게 있어 무엇이겠는가"라는 말은 이러한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원래 고대국가라 하여도 그 구체적 형태는 꼭 같지만은 않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경우에는 공통의 신앙과 습속을 기초로 하는 공동사회의 일체성의 틀 안에서 모든 시민의 자발적 참여(參與)에 의하여 공동의 문제를 처리한다고 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이러한 방식이 그리스의 민주정(民主政)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을 민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당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이질(異質)의 이해대립을 전제로 하면서 문자 그대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정치참여(政治參與)를 통하여 사회의 통합을 꾀하려는 근대 민주정치와 그리스의 민주정이 완전히 다른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기본적인 특질은 폴리스의 원시적 공동사회로서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겠다.

고대제국에 있어서도 그 규모의 웅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질은 분명히 존속하고 있다. 고대제국을 성립시킨 직접적인 계기는 일반적으로 말하면 외적(外敵)의 침입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이었던 것이 많았다. 그 때문에 징세권(徵稅權)이나 징병권(徵兵權)은 공동사회의 테두리를 넘어서 왕의 수중으로 집중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공동사회 그 자체는 파괴되는 일 없이 고대제국의 기반으로 남겨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원시공동사회에 있어서의 경제생활이 거의 자연경제에 가까운 형태로서 영위되어 온 것에 의하며, 많은 원시공동사회가 일개의 고대제국 밑에 결합되어도 이러한 자연경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구조(社會構造)는 거의 파괴됨이 없이 남겨졌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공동사회 내부의 동질성(同質性)이 자연 그 자체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점에 고대국가의 기본적인 특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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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國家

중세국가도 고대국가와 같이 자연적인 공동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적 공동사회도 공동사회의 자급자족성(自給自足性)·일체성 혹은 폐쇄성(閉鎖性)이라는 점에서는 원시적 공동사회와 공통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러한 성격이 구성원에 의하여 자각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적 공동사회는 결정적으로 다른 특질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원시적 공동사회가 문자 그대로의 자연적 공동사회였던 데 비해 중세적 공동사회는 오히려 인위적(人爲的) 공동사회였다는 점이다. 중세에 있어서 지배적이었던 봉건제도의 특징의 하나는 신분제와 계층적 질서에서 구하는 것이 보통이나 그것은 정말 인위적으로 쌓여진 질서였다. 그리고 공동사회는 이 계층적 질서의 저변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중세적 공동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인위적 성격이 사람들에게 자각(自覺)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이런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인위적인 힘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만일 원시적 공동사회를 '자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중세적 공동사회는 '인위적'이라고 이름붙일 수가 있을 것이다. 중세까지를 포함한 전근대(前近代)와 근대와의 차이는 종종 '자연'과 '작위(作爲)'와의 대비(對比)로서 정식화(定式化)되어지는 것이고, 사람들의 의식의 존재방식에 착안하는 한 이 정식은 타당하다. 다만 중세의 경우에는 이 '자연'이 소위 '인위적 자연'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세에서는 '자연'이 강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적 공동사회에 있어서도 원시적 공동사회에 있어서와 같이 일반 민중의 이해는 동질화되고 자급자족적인 폐쇄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폐쇄사회는 공동사회에 밀착한 강제력, 즉 영주권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이른바 '경제외적 강제(經濟外的强制)'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경제외적 강제의 담당자는 봉건영주(封建領主)이고, 그들도 자기들의 소유지의 내부에서 징세권·징병권·재판권·경찰권 나아가 행정권을 거의 독립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공동사회를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는 장원국가(莊園國家)는 사실상 반(半)독립된 국가이고, 소위 봉건군주는 이런 장원국가의 연합체라 할 수 있으며, 봉건군주는 말하자면 최대의 봉건영주이다. 이러한 봉건사회의 할거성(割據性)에 대응하면서 그것을 하나의 봉건국가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 토지의 소유관계를 기축으로 하는 봉건적 계층제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여 중세국가는 한편에 있어서는 현저한 지역적 할거성을 띠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에선 로마·가톨릭 교회로 상징되는 보편주의(普遍主義)가 존재하고 유럽 전역에 미치는 종교적·문화적·이데올로기적 일체성(一體性)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원시공동사회에 가해진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그것에 수반되는 새로운 통합의 필요성은 고대제국을 낳기에 이르렀으나, 중세적 공동사회의 붕괴과정에서는 이것은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즉 원시적 공동사회의 경우에는 구성원의 동질성은 '자연적'으로 보증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력의 발전도 단지 사회 외곽의 양적(量的)인 확대를 가져온 데 그쳤고, 고대제국의 성립도 공동사회 그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이에 대하여 중세적 공동사회에 있어서는 동질성도 강제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강제력과의 충돌을 초래하게 되었다. 유럽 중세의 붕괴기에 있어서 와트 타일러(Wat Tylor:영국의 농민, 1381년 부당한 노동임금법과 과중한 세금 징수에 반대하여 농민폭동을 일으킨 지도자적 인물)나 자크리(Jacquerie, 1935-58년 프랑스 농민폭동 지도자)의 반란, 그리고 독일의 농민전쟁(農民戰爭:Bauernkrieg) 등이 잇달아서 일어난 것은 이와 같은 충돌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러한 반란에 있어 반란자들의 적은 봉건군주가 아니라 강제력의 직접적인 담당자였던 영주나 귀족층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질은 새로이 형성될 국가의 성격을 예시(豫示)하는 것이었다. 즉 분산하여 존재하고 있던 강제력이 강대한 군주의 손에 집중·강화되어 가는 것은 동시에 공동사회의 외곽을 붕괴시키는 것이 되었고 여기에 절대주의국가라는 형태로 새로운 통일국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절대주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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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對主義國家

절대주의국가는 근대국가의 원초적 형태였다. 그것은 예를 들면 절대군주 자신이 봉건적인 대토지 소유자였다는 사실과 또한 군사적 측면에 있어서 중세의 구기사층(舊騎士層)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많은 점에서 아직 봉건국가와의 강한 연속성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이미 명백히 근대적인 것이었다. 즉 무엇보다 먼저 절대주의국가는 중세적 공동사회의 붕괴과정에서 성립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공동사회에서 해방된 개개인을 기초로 하여 사회질서와 안정을 이룩해 내는 과제(課題)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세에 있어서는 최소한도 공동사회의 내부에는 이해(利害)의 동질성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사회의 질서와 안정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일반민중에 관한 한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일이 오히려 사회적 질서와 안정을 가져와야 할 조건이었다고 말해진다. 이에 반하여 절대주의국가에 있어서는 이러한 공동사회적 질서는 이미 상실되어 있었고,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이든 일반민중의 자발적 협력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많은 경우 계몽주의나 국민교육의 이념이 절대주의의 전개와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은 이러한 필요에 뿌리박은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절대주의의 형성과 함께 성립한 '주권'의 관념도 또한 절대주의국가의 근대적 성격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 보댕(Jean Bodin, 1530-96:프랑스의 사회·정치철학자)은 주권의 속성(屬性)을 '법에 의하여 구속되지 않는 시민 및 신하에 대한 절대적이고도 무제한한 권력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국가주권(國家主權)의 절대성의 요구는 그것이 교회의 권력이나 영주의 권력에 대항하여 세속적 국가(世俗的國家)를 확립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나, 그것은 동시에 국가권력을 종교나 전통의 속박에서 해방하기 위한 요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가권력을 이러한 속박에서 해방하는 일은 동시에 그 존재이유를 명백히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고 생각된다. 국가권력은 이미 종교나 전통에 의하여서는 성화(聖化)되지 않는 것이며, 그 자체의 존재이유를 질문받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었다. 절대군주의 정통성(正統性)을 옹호하기 위하여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사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 경우에도 왕은 신성하기 때문에 최고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최고권력을 갖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국가권력 그 자체의 존재이유에 관한 이론이 전개된 것은 시민국가의 시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나, 주권론의 등장이 말하자면 그 첫걸음이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그리고 절대주의국가하에서 근대국가의 통치기구의 뼈대가 형성되었던 것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인격적 지배가 전근대사회의 특질이라고 한다면 객관적 기구지배가 근대국가의 특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절대군주 자신은 인격적 지배자였으나 보편적 교회(敎會)와 봉건적 귀족에 대한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의 지배수단으로서 관료제(官僚制)나 상비군(常備軍) 등 통일적 국가기구를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한번 국가기구가 정비되자 절대군주 자신도 국가기구의 논리나 국가의 자기 보존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군주 역시도 국가이성(國家理性)에 종속하도록 요청되었다. 이렇게 하여 절대군주는 유일한 인격적 지배자가 됨으로써 도리어 거꾸로 인격적 지배를 폐절(廢絶)하고, 객관적 기구지배에의 길을 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주의국가에는 분명히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있어서의 과도기적 성격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최초의 근대국가였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시민사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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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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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國家

절대주의국가는 근대사회에 있어서의 질서와 안정을 창출(創出)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등장한 것이며, 그 의미에서는 명백한 근대국가의 최초의 형태였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날카로운 대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출발점에 있어서는 봉건영주층 혹은 귀족층의 특권을 박탈하고 중세적 공동사회를 해체(解體)시키려고

한 점에서 절대군주와 소농민층과 상인층과의 사이에는 이해가 일치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통의 적이 힘을 상실하기 시작하자 이러한 일치는 깨뜨려질 수밖에 없다. 공동사회에서 해방된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사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부(富)의 추구야말로 당연한 요구였으나, 이러한 요구는 절대군주의 이해(利害)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절대군주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의 부단한 확대가 필요하였던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군사력의 강화와 관료기구의 정비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민중에게 부과되는 조세는 봉건제 하의 공조(貢租)와 거의 같을 정도로 무거운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절대군주의 절대성은 일반민중에겐 바로 권력적 지배의 절대성으로 받아 들여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반민중의 불만이 증대하여 아나키(무정부

상태)의 위험성이 현실화되고 더욱이 절대군주가 이러한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질 수 없게 되면 절대주의는 붕괴하게 된다. 그리하여 절대주의의 붕괴를 가장 극적인 형태로 수행한 것이 부르주아 혁명(시민혁명)이었다. 다만 절대주의의 존재이유가 새로운 사회체제에 있어서의 새로운 통합의 필요성에 있었다면 비록 그 존재이유가 의문시되었다고 하더라도 통합의 필요성 그 자체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절대왕정(絶對王政)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통합의 단일추진자(單一推進者)였던 절대군주에 대체될 새로운 통합의 담당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군주 밑에서 평준화(平準化)가 강행되어 봉건영주 등 소위 중간단체의 지배특권이 배제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신민(臣民)으로서 군주의 지배에 따르고 있었던 것은 피지배자로서의 일체성(一體性)을 낳음으로써 이러한 통합의 담당자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다"라고 한 아베 시에예스(Abbe Emmanuel Sieyes, 1748-1836)의 말은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의 피지배자의 일체감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절대주의 뒤에 오는 것은 일체감을 가진 피지배자가 스스로를 지배자의 위치에 두는 일이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리 밑에서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주권의 개념은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에로 전환하고, 문자 그대로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한다. 절대주의국가도 적어도 그 판도(版圖)에 있어서는 이미 국민국가였다. 그러나 국민주권이 확립됨으로써 국민적 자각(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곧 국민주의이다)을 갖춘 국민국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자유주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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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主義國家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서 성립된 근대국가에 있어서는 국민의 자기통치에 의하여 사회의 질서와 안정이 창출되는 것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의 통합은 많은 경우 혁명의 지도세력이었던 국민의회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으로서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피지배자의 절대군주에 대한 반항이 소위 사적 이익의 관점에서 행하여진 주장의 누적적인 결과로서 국민 사이에는 강한 아나키에로의 기울어짐이 보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때문에 혁명이 성공된 뒤는 혁명목적의 다극화에 수반되어 국민의회도 다원화한 이해관계의 투쟁장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르주아 혁명 후의 정치가 종종 독재에로 이행하든가, 군주정으로 복귀하든가 하는 것도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이해될 것이다. 어쨌든간에 국민의 자기통치는 커다란 곤란에 직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곤란 밑에서 사회의 통합을 꾀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 의식에 있어서의 통합을 꾀하는 일이었다.

국민 전체의 이익이나 국민적인 것을 강조하는 일은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미 붕괴한 것으로 보여지는 공동사회를 자각적(自覺的)으로 재생(再生)하는 것이라 하겠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영국의 철학자) 이후 수없이 쓰여진 '유토피아'의 미래상(未來像)이나 마르크스주의의 목표로서의 공산사회는 이러한 방향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미래상으로서의 공동사회가 중세적인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거기에 있어서는 권력 혹은 강제력이 소멸하거나 또는 구성원에 의해 완전한 자치(自治)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던 점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일찍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있던 원시적 공동사회를 의식적·자각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 것이었다고도 하겠다. 자본주의의 순조로운 발전이 있었던 선진국에 있어서 지배적이었던 자유방임주의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즉, 통합이 행해질 범위는 기정(旣定)의 것으로 전제(前提)된 위에 인간은 '신(神)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기 때문에 각 개인이 자기이익을 위해 충실히 행동할 때에는 거기에 자연히,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서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설명되었다. 이러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가 국가관 위에서 차지하는 결정적인 중요성은 통합을 위해서는 국민의 자기통치조차 불필요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정치 그 자체를 사회의 외부로 추방하여 버렸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때까지는 권력의 정통성이 논의될 경우에는 예를 들면 중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이탈리아의 신학자)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사회의 권력구조 그 자체가 하나님이 준 질서(秩序)라고 하였으나, 자유방임사상에 있어서는 조화된 사회야말로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함에 따라 정치권력의 필요성은 극소화(極小化)되었고, 정치는 다만 사회에 봉사하는 것으로서만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야경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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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警國家

자유방임주의하에서 성립한 국가관은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도에 머무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갖가지 형태로서 생겨나는 이해의 대립을 자유롭게 방임하는 것이 사회의 질서와 안정에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국가가 수행해야 할 기능은 외적(外敵)의 침입을 막고 국내의 기본적 법의 준수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충분하다. 19세기

독일의 혁명가 라살(Ferdinand Lassalle, 1825-64)이 당시의 국가를 해학(諧謔)을 섞어서 야경국가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의미에선 분명히 표적을 적중시킨 표현이라 하겠다. 이러한 야경국가관은 처음부터 무조건으로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이러한 견해를 성립시킬 수 있는 전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민사회가 그 자체로서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높은 가능성을 갖는다고 하는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어떤 보편적인 인자(因子)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자유방임주의의 경우 그것은 이성(理性)이었다고 생각된다. 거기서는 사람들은 모두 이성을 갖고 있고 더욱이 이성의 명령에는 당연히 복종하는 것으로서 가정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성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타(自他)의 이해(利害)의 계산능력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선 상당히 높은 예측가능성(豫測可能性)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와 안정도 그것에 수반하여 성립하게 될 것이다. 19세기에 있어서는 많은 나라에서 제한선거제(制限選擧制)가 채택되고 있었던 결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는 이러한 이성, 즉 이해의 계산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던 시민에게 한정되고 있었다. 원래 제한선거제는 직접적으로는 유산자(有産者)에게만 정치참여의 자격을 주려고 하는 경제적 혹은 계급적 이해의 입장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 가장 중요한 의의는 정치에 있어서의 이성의 우위를 확보한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입법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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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法國家

자유방임주의하에서 국가의 기능이 극소화되고 있었던 시기에는 법률을 제정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국내정치에 있어서 국가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은 시민의 안전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일에 한정되고 있었기에 필요한 사항은 모두 명확히 법문(法文)의 형식으로 표시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법률을 어떠한 형태로 제정하는가가 정치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제정된 법을 어떻게 집행하는가는 제2의적(第二義的)인 의미밖에 갖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기능을 구별하는 경우에도 먼저 입법권과 사법권이 문제되고 집행권 혹은 행정권은 잔여(殘餘)의 영역으로서 생각되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입법부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입법국가라고 부를 수가 있다.

자유주의국가가 입법국가로서의 성격을 갖기에 이른 배경에는 부르주아 혁명 전후에 있어서의 역사적인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지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절대군주는 통치기구의 중추(中樞)로서 유능한 행정막료(行政幕僚)와 상비군을 육성하였다. 그 때문에 절대군주와 국민=피지배자의 대립은 권력부문간의 대립으로서는 행정부 대 입법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혁명 후의 왕정복고(王政復古)의 경우에도 입법권은 국민의회에 부여된 데 반하여 행정권은 국왕과 국왕이 직접 통솔하는 행정막료의 수중에 장악된다. 부르주아 혁명이 극적인 형태로 전개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근대국민국가의 형성에로 향한 국가의 경우에는 이러한 경향은 보다 명확히 나타났다 하겠다. 그 결과 국민주권의 확립 내지 유지는 주로 국민의회(입법부)에 의한 내각(內閣:행정부)의 억제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국민의회는 국민주권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구로서 커다란 기대를 가지게끔 되었다. 의회중심주의(議會中心主義) 내지 입법국가의 관념이 현저하게 강조된 것도 이러한 상황에 의한 바가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입헌주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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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憲主義國家

자유주의국가의 특질의 하나로 입헌주의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근대국가는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복잡화하고 대규모화하고 있는 사회에 있어서 질서(바꾸어 말하면 예측가능성)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하여 준수되어야만 할 공통의 규범이 필요하고 또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정치는 일정한 규범에 따라서 운영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는 절대주의국가에 있어서도 당연히 요청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법치주의는 반드시 법의 보편주의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법의 보편성은 권력자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통의 법에 구속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절대군주는 바로 그 권력이 절대여야 한다는 전제에 의하여 스스로 법의 테두리 밖에 서려고 한다. 그 때문에 법의 보편성을 요구하는 법의 지배 혹은 입헌주의는 종종 절대군주에 대한 권력 제한의 원리로서 원용(援用)되었던 것이다.

입헌주의는 종종 '사람의 지배'를 '법의 지배'로 바꾸려는 원칙이라고 말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권력자의 자의적(恣意的)인 통치를 폐지하고 미리 정립(定立)된 규칙에 기초한 통치를 추진하려는 견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한다면 국가권력의 극소화를 요구하는 자유방임주의가 입헌주의와 결부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서 입헌주의는 법의 지배라는 원칙에 덧붙여 개인의 자유권을 승인하는 권리장전(權利章典)을 포함한 것이었다. 중세적 공동사회의 붕괴에 의하여 개인이 전통적인 관습이나 규범의 구속에서 해방된 것은 개인의 사적 이익의 자유로운 추구(追求)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사회의 통합이 곤란하게 되고 무정부상태에의 경향이 강하게 되었던 것은 예를 들면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영국의 철학자)의 자연상태의 가설(假說)에도 나타나 있다.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은 이와 같은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로 하여 계약에 의한 새로운 정치사회의 구축을 꾀하려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논리적 타당성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사회계약론적인 사고(思考)가 현실로 근대국가의 논리에 내재(內在)하는 것이었음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즉 근대국가는 일반적으로 개인에 대하여 일정한 자유로운 영역을 승인하고(사적 자치의 원리), 스스로의 역할을 순수하게 외면적인 질서의 유지에 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개인에 대하여 승인된 자유의 영역은 개인의 기본적 인권으로서 기본법인 헌법에 의해 승인되는 것을 요구한다. 자유주의가 국가권력의 극소화와 개인적 자유의 극대화를 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입헌주의는 일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의 자유권 보장, 나아가 그 제도화로서의 입헌주의와 결합하는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사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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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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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社會-國家

자유주의국가의 기본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의 자유의 보장에 있었다.

그러나 자유의 보장이 뜻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사람들이 보장된 자유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개인의 복지를 추구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한다. 그 때문에 자율적 시민이 자기의 책임하에 각자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고, 나아가 그 원칙이 현실에서도 의미를 갖는 시민사회에 있어서만이 이러한 원칙은 그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20세기에 들어옴과 동시에 가속적으로 진행된 공업화와 도시화는 사회의 대규모화와 복잡화를 촉진함으로써 개인의 예측능력과 자율성을 현저하게 저하(低下)시켰다. 그리고 공업화의 진행과 함께 발전한 노동자의 운동은 노동조건(勞動條件)의 개선이라는 경제적 요구에서 출발하여 곧 정치적 권리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치운동으로 이행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고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 먼저 모든 성년 남자에게 정치참여의 자격을 인정하는 '보통선거'제도가 확립되고 드디어 20세기에 들어서자 여성도 포함한 성인 전체에게 선거권이 부여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시민을 대신하여 대중이 정치과정에 등장함과 동시에 시민사회의 여러 이념이 큰 통용력(通用力)을 상실하고 동시에 자유주의적 국가관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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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祉國家

자유주의적 국가는 국가 기능의 면에서는 아경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성격도 갖추고 있었으나 현대사회의 여러 조건은 이러한 국가관을 크게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먼저 첫째로 보통선거제도의 성립을 촉구하기에 이른 사회의 복잡화와 대규모화가 동시에 자기와 남과의 이익을 계산하는 것을 아주 곤란하게 한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에 있어서의 이성의 기능이 현저하게 저하한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에 있어서 자기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동향과 결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할 필요가 있고, 그를 위한 특수한 기능이 요구되는 일조차 적지 않다고 하겠다. 둘째로는 새로이 정치참여를 인정받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곤란하기 때문에 기대·소망(所望)·불안 등 다양한 감정적 요소를 정치에 투입하기에 이르른 사실이다. 그 결과 정치에 불가결한 리얼리즘은 종종 대중의 모랄리즘에 의하여 흐려지고, 지도자 자신도 이러한 경향에 지배되기 쉽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생겨났을 때 사회에 있어서의 예측가능성 혹은 질서는 성립하기 어렵게 되고 사회의 불안정성도 증대한다. 그 때문에 한편에서 정치의 필요성은 현저하게 증대하나 다른 편에서는 그 중심적인 기능도 놓쳐 버리게끔 된다.

사회에 있어서의 예측가능성이 높으면 자타(自他)의 이해(利害)의 정확한 예측도 가능하기 때문에 각개인은 각자의 이익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고 또 그 실현에 필요한 방책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실패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의 책임이고 성공 역시 개인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보수(報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하에서는 정치가 개인의 복지추구(福祉追求)의 영역에 대하여 개입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또 개입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바로 최소한도의 정치야말로 최량(最良)의 정치라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있어서의 예측가능성이 저하하면 이러한 전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개인은 이미 실패의 책임을 전면적으로 지는 일엔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사실 그것은 공황(恐慌)이나 전쟁과 같은 개인의 예측능력이나 통제능력을 훨씬 넘어선 곳에서 그 원인이 구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자의 개별적인 복지의 실현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정치에 기대하게끔 된다. 그 때문에 현대사회의 여러 조건하에서는 사회 통합의 필요성에 부응(副應)하려고 하면 국가는 이러한 각개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게끔 노력하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다 하겠다.

이렇게 하여 현대의 국가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면서 각개인의 개별적인 복지의 실현의 힘을 빌려줌으로써만 이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국가는 단순히 정치체제의 상이(相異)함을 초월하여 복지국가에 이행할 필연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행정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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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政國家

이른바 야경국가에서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국가기능의 현저한 증대를 수반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노동자의 발언권의 증대와 함께 실업(失業)이나 빈곤도 국가에 의하여 구제되어야만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되고 실업구제나 사회보장 등도 국가의 중요한 임무로 되기에 이르렀다. 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에서는 공황이 비약적으로 대규모화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자본주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경제에 계획적인 통제를 가할 필요가 생겨났다. 이렇게 하여 국가의 기능은 현저히 복잡화·대규모화하였으나 그것에 수반하여 행정부의 비중이 급격하게 증대하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률은 문제를 처리하는 테두리를 표시할 뿐이므로 문제의 복잡화와 함께 법률의 시행에 있어서 법의 규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행정부에 의한 자유재량의 범위와 의미가 일찍이 볼 수 없었을 정도의 중요성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또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하게 되어 법률의 제정에 있어서도 입법부보다는 전문적 숙달자(熟達者)를 많이 갖고 있는 행정부 쪽이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끔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나라에서 입법부가 법률안을 기초하기보다는 오히려 행정부가 법률안을 기초하는 것이 상태(常態)로 여겨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입법부는 단지 행정부의 제안에 찬반의 의사를 표명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나아가 전쟁이나 공황과 같은 비상사태에 있어서는 입법부가 그 권한을 대폭적으로 행정부에 위양(委讓)하는 위임입법(委任立法)이 이루어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행정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증대하였기 때문에 현대의 국가는 종종 행정국가로 불리어진다. 야경국가에서 복지국가에로의 전환은 동시에 입법국가에서 행정국가에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의 통합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입법국가에 있어서 정부의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의회의 통합기능이 20세기에 들어오자마자 뚜렷이 저하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행정국가의 출현은 정부의 통합기능이 행정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병영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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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營國家

20세기는 종종 전쟁의 세기라고 불리워지는 것과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잇달은 전쟁과 전쟁의 위협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더욱이 전쟁의 규모는 확대일로를 걷는 바, 한편에서는 테크놀로지(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량파괴기술이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국민생활 전체가 전쟁에 휩싸여 들어갈 가능성이 더욱 증대하였다. 핵무기(核武器)와 총력전 체제는 이러한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수반하여 군사력의 상대적 지위도 역시 현저하게 높아졌다.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전통적으로 상무(尙武)의 기풍이 강한 곳에서는 군국주의가 확립되어서 국민생활의 모든 분야가 군사적 고려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나라에서도 정도의 차는 있으나 군부(軍部)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급속히 증대하고 있으며 오늘날엔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소위 병영국가화의 위험이 보여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위험 속에서 가장 두려워할 일은 군사적 문제이건 비군사적 문제이건간에 모든 정책결정에 군부가 개입하는 경향이 보여지고 또 군사적 관점에서 행하는 주장이 현저히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절대왕정하에서 상비군이 제도화된 이후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군부와 정치와의 사이엔 항상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어 왔다. 국가권력의 중추는 폭력장치(暴力裝置)이고 폭력장치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군사력이기 때문에 군부와 정치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근대 입헌주의국가는 군부의 정치에의 불개입, 문민정부(文民政府)에 의한 군사력의 통제를 원칙으로 하여 군부가 정치에 부당한 영향력을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여 왔다. 소위 문관통제의 원칙은 그 구체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이 원칙에 의하면 군의 최고지도권은 문관에 의하여 장악되고 특히 정치적 판단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군인이 아닌 정치가의 판단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유효하였던가는 속단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문관통제의 원칙은 단순한 기구에 의했기보다도 각나라의 정치적 전통 특히 입헌주의의 전통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그 때문에 자유주의적 국가의 변질(變質)과 그에 따른 입헌주의의 후퇴는 병영국가화의 경향에 박차(拍車)를 가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병영국가에의 경향이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국가이건 사회주의국가이건간에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나, 자본주의국가의 경우에는 군수산업(軍需産業)이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군수산업이 군부와 결합하여 정치에 개입하는 경우에는 그 지배력을 통제하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고별연설 속에서 미국 국민에게 경고한 '산군결합체(産軍結合體)'의 위협은 상비군에 대한 전통적인 강한 불신감을 전제로 하여 문관통제를 고수해 온 미국에 있어서조차도 군수산업과 군부와의 결합세력이 강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사회주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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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主義國家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수용·통치하는 국가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이 창설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동유럽의 8개국(동독·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에서 사회주의국가가 수립되었다. 아시아에서도 중국·몽골·베트남·북한 등이 사회주의국가를 표명하였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쿠바가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당의 독재)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계획경제를 그 특징으로 한다. 사회주의국가의 이론은 대체로 V. I.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서 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형 사회주의 국가체제에 강력히 저항하여 1950년 이후 노동자자치관리제(勞動者自治管理制)를 발전시켰다. 그 후에도 서유럽과 동유럽의 많은 개혁사회주의자들은 소련형 일당독재에 대항하여 다원주의적·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왔다. 특히 서유럽의 대표적 공산당인 이탈리아·프랑스·에스파냐 공산당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이것이 유러코뮤니즘으로 불리는 사조(思潮)인데, 이것은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을 부인하고,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대의제적·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하여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중·소분쟁과 더불어 1950년대 후반 이후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다중심화(多中心化) 현상을 확산시켰다.

한편 미·소 양극체제의 다극체제로의 전환, 국가이익의 이데올로기 중심에서 경제 중심으로의 전환 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국가의 수를 감소시켰다. 198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개혁·개방정책은 시장경제와 다당제의 도입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고유한 의미의 사회주의국가는 아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당의 지도적 역할을 폐지하였고, 1990년 불가리아에서는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헌법에서 수정하였다. 1989년 폴란드의 자유경쟁선거에서는 비(非)공산주의자들이 의회의 100석 중 99석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되었다. 따라서 1994년 현재 헌법상으로 사회주의국가라고 할 수 있는 국가는 북한·중국·베트남·쿠바 등인데, 이들 국가 역시 엄격한 의미의 사회주의국가라고는 할 수 없다.

현대의 국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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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적 국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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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元的國家觀

국가에 절대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국가권력의 윤리적 의의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교회와 영주의 권력에 대항하면서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성립한 주권론은 근대에 있어서의 일원적 국가관의 최초의 형태였다. 홉스나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78:프랑스의 사상가·철학자)에서 볼 수 있는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도 공동사회에서 해방된 원자적 개인에서 출발하여 근대국가의 주권을 변증(辨證)하려는 것이며 일원적 국가관에 속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완성에 수반되는 자유주의국가의 성립은 이러한 일원적 국가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이유를 상실케 했다고 하겠다. 다만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독일의 철학자)은 독일의 후진성 때문에 국가권력의 존재이유를 강하게 주장할 입장에 있었고, 시민사회에 일정한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국가를 일정한 윤리적 이념의 현실태로서 높이 평가하였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이 갖는 모든 가치, 모든 정신적 현실성을 국가를 통해서만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겔적 입장이 자유주의적 국가관을 전제로 하는 한 적극적인 영향력을 못 가진 것은 말할 나위 없으나 공업화의 진전에 수반되는 사회문제의 격화와 제국주의의 성립에 의한 국제긴장의 증대에 수반하여 국가권력의 적극적 의의가 평가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일원적 국가관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자유주의국가의 전형(典型)으로 되어 있는 영국에 있어서도 헤겔의 영향하에 국가의 원리적 의의를 강조하는 신(新)헤겔 학파가 등장하고 이른바 이상주의적 국가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그린(Thomas Hill Green, 1836-82:영국의 철학자, 보즌킷과 함께 영국 헤겔학파, 즉 옥스퍼드학파의 대표자), 보즌킷(Bernard Bosanquet, 1848-1923:영국의 철학자), 브래들리(F. H. Bradley, 1846-1924:영국의 철학자) 등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 관한 연구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독일의 철학자), 헤겔 등의 철학적 영향하에 국가의 윤리성을 강조하면서 국가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헤겔적 입장은 나중에 현저하게 왜곡(歪曲)된 형태로 나치즘이나 파시즘 국가관에 반영되었으나, 그러나 거기에서는 적어도 헤겔 철학의 합리성은 전부 배제되어 국가일원론은 아주 비합리적·신화적(神話的)인 형태를 취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다원적 국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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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元的國家觀

이상주의적 국가일원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주로 영국에 나타난 국가관으로, 국가의 다른 사회집단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성(優位性)을 거부하고 국가를 다른 경제적·문화적 혹은 종교적 단체와 같이 특정의 유한(有限)한 목적을 갖는 집단의 하나라고 간주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주로 폴레트(Mary Parker Follett, 1868-1933:미국의 정치학자), 바커(Ernest Barker, 1874-1961:영국의 정치학자), 콜(George Douglas Howard Cole, 1889-1959:영국 노동당의 원로이며 이론가·정치학자), 라스키(Harold Joseph Laski, 1893-1950:영국의 정치학자) 등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다원적 국가관은 먼저 국가와 사회를 엄격히 구별할 것을 주장하고, 국가는 사회 전체에서 보면 그 기능의 일부를 분담하고 부분사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아가 지금까지 국가주권이라고 불리어 온 권능은 다른 여러 집단에 있어서도 집단통제를 위하여 행사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의 주권은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하고 주권의 복수성이 주장된다. 다원적 국가론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주권의 다원성 혹은 가분성(可分性)의 주장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국가와 다른 사회집단이 병렬적(竝列的)으로 취급되는 경우에는 국가의 존재이유를 그 기능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는 다원적 국가론은 국가의 구조나 형식보다도 국가의 활동내용을 중시하는 기능적 국가론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이론의 배경에는 야경국가로부터 복지국가에로의 전환에 따르고 국가기능의 압도적 증대와, 그것에 의한 자유주의의 위기의 자각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고, 이 국가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경향 속에서 국가의 절대화를 막고 자유주의의 원칙을 관철하기 위하여 주장된 이론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계급국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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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級國家觀

국가를 계급억압(階級抑壓)의 기관이라고 보는 입장. 이 이론은 주로 마스크스주의의 국가론으로서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생산력(生産力)이 증대함에 따라서 모든 사회에는 계급대립이 발생하는 것이나, 그와 함께 사회에 필요한 공동사무의 수행을 위한 공권력(公權力)은 그 사회기능과 동시에 지배계급에 의한 피지배계급의 억압이라는 정치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계급대립의 형태가 고대사회(노예제), 중세사회(농노제), 근대사회(자본제)로 역사적으로 변천해 온 데 대응해서 국가의 형태 역시 고대국가·봉건국가·근대국가로 변화하여 왔다. 이러한 계급대립은 지금까지 긴 역사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초역사적(超歷史的)인 것이 아니다. 원시사회에 있어서는 아직 계급대립은 발생하지 않았고 따라서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의 기원(起源)은 원시사회의 씨족적(氏族的) 권력조직이 붕괴하여 노예제사회가 형성되었던 때에서 구하게 된다.

이와 같이 국가의 기원이 계급대립의 발생에서 구해진다 한다면 계급대립의 소멸은 당연히 국가의 사멸(死滅)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최후의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사회가 폐지되어서 사회주의사회가 형성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거쳐서 마침내 국가는 사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과도적으로 국가권력의 일시적 극대화를 나타내지만 그것은 국가권력의 역할의 긍정을 개입시켜 그것을 부정하는 과정으로서 말하자면 변증법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주의국가에 있어서는 자본주의국가와 같이 행정국가·병영국가화에 의한 국가기능의 현저한 확대가 보이고 오늘날까지는 국가의 사멸을 예고할 아무런 징후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