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시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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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편집]

時調

시조는 우리 문학사상 대표적인 양식(樣式)으로서 그 생성(生成)·소멸이 잦던 허다한 시가의 형태와는 달리 오랜 기간에 걸쳐 계승, 발전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고려 유신의 비가(悲歌)와 국조(國朝) 제 신의 시조가 몇몇 전래하나 대부분 회고와 송축의 뜻을 읊은 것이고, 그 작품도 한 사람이 1-2 수 정도에 불과하다.

초기 작가로 고려 말의 유신인 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의 비가가 있고, 그 밖에도 변계량(卞季良)·정도전(鄭道傳)·성석린(成石麟)·조준(趙浚)·이지란(李芝蘭)·이직(李稷)·황희(黃喜) 등이 있고, 김종서(金宗瑞)의 시조는 장부(丈夫)의 늠름한 기백을 읊었다. 단종애사(端宗哀史)를 둘러싸고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의 시조가 전하며, 왕방연(王邦衍)의 시조 역시 이 때의 작품이다. 또한 중종 때 이현보(李賢輔)의 연시조 <어부사>,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이(李珥)의 <고산구곡(高山九曲)> 등은 강호(江湖)의 시조로 시대적인 의의를 지닌다. 이들은 대개 이현보의 <어부사> 이래 가사가 분장되어 장가(長歌)로 의식되면서도 그 한장은 단가 즉 시조로서 독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조문학의 정통성을 계승한 작가로는 송순과 황진이(黃眞伊)가 있는데, 특히 황진이의 시조는 여류로서 가히 절창이라 할 만하다. 또한 기류(妓流)의 시조로는 이매창(李梅窓)·한우(寒雨)·홍랑(洪娘) 등의 시조가 한두 수씩 전한다.

이지란[편집]

李芝蘭 (1331-1402)

여진 사람으로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무신. 본명은 쿠룬투란 티므르(古倫豆蘭岾木兒), 본성은 동. 고려 공민왕 때 부하를 이끌고 귀화하여, 이성계 휘하에서 큰 무공을 세웠고 조선 건국에도 공을 세웠다. 뒤에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태조가 은퇴한 후 그를 시종하다가 중이 되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시조 1수가 전한다.

"楚山에 우난 범과 沛澤(패택)에 잠긴 룡이,

吐雲(토운) 生風해여 기세도 장헐시고,

秦나라 외로온 사슴은 갈ㄱ 곳 몰나 하돗다."

이직[편집]

李稷 (1362-1431)

조선 왕조 개국 공신·학자. 호는 형재(亨齋),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다. <가곡원류(歌曲源流)>에 다음과 같은 시조 1수가 전한다.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ㅣ야 웃지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 소냐.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슨 너뿐인가 하노라."

황희[편집]

黃喜 (1363-1452)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가 뒤에 영의정에 올랐다. 24년간 벼슬하는 동안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신(名臣)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았다. 문집으로 <방촌집>이 있고 다음과 같은 시조 2수가 전한다.

"대쵸볼 불근 골에 밤은 어이 나드르며,

벼 뷘 그르헤 게난 어이 나리난고.

술 닉쟈 체 쟝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믈 깁고 아해난 밧츨 가니,

뒷 뫼헤 엄기난 약을 언제 캐랴 하나니."

김종서[편집]

金宗瑞 (1390-1453)

조선의 문신.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1451년 <고려사>를 개찬(改撰) 간행했고, 이듬해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 간행했다.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황보인(皇甫仁) 등과 어린 왕을 보필, 뒤에 두 아들과 함께 수양대군에 의해 맞아죽었다. 단종을 돕던 재상 가운데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고, 그가 함경도 육진(六鎭)을 두고 여진을 호령할 때 지은 시조 2수가 <청구영언>에 전해 옴. 다음 소개되는 그의 시조는 장부의 호방(豪放)한 노래로서 그 늠름한 기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삭풍(朔風)은 나모 긋태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 대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집고 셔셔

긴 파람 큰 한 소래에 거칠거시 업세라."

사육신 충의가(死六臣忠義歌)[편집]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그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들의 충성이 담긴 시조. 일명 '육신애상가(六臣哀傷歌)'라고도 한다. 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유성원·하위지를 말하는데, 다섯 사람의 시조가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에 전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 하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얏다가

白雪이 滿乾坤할제 獨也靑靑하리라.

(성삼문)

가마괴 눈비 마자 히난 듯 검노매라.

夜光 明月이야 밤인들 어두으랴.

님 向한 一片丹心잇난 變할 줄이 이시랴.

(박팽년)

窓 안에 혓난 燭불 눌과 亂離別하엿관듸

것흐로 눈물 디고 속타난 줄 모로난고

뎌 燭불 날과 갓하여 속타난 줄 모로더라.

(이개)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落落長松이 다 기울러 지단말가

하믈며 못다퓐 고지야 닐너 무삼 하리오.

(유응부)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어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터니

문전의 수성 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라.

(유성원)

성삼문[편집]

成三問 (1418-1456)

조선시대의 학자·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세종 때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 학사를 거쳐 벼슬이 승지에 이렀다. 최항(崔恒),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음운 관계에 밝아 운서 편찬을 위해서 질문하러,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을 찾아 열세 번이나 왕복했다. 후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 처형됨. 그의 아버지, 세 동생,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그의 문집 <근보집(謹甫集)>에는 한글에 대한 소감이 적혀 전하고, 한시에도 능했으며 충성된 마음을 읊은 시조 2수가 전함. 그 중 1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首陽山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한 하노라.주려 주글진들 採薇(채미)도 하난 것가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박팽년[편집]

朴彭年 (1417-1456)

조선시대의 문신·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일찍이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협력했다. 뒤에 형조 참판으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체포,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했다. 그의 시조 2수가 <청구영언>에 전하는데 모두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것이다.

이개[편집]

李塏 (1417-1456)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옥헌(白玉軒). 이색의 증손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름.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체포되어 죽었다. 시문에 밝고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함.

유성원[편집]

柳誠源 ( ? -1456)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벼슬이 대교(待敎)에 이렀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자결했다. 수양대군의 집권을 탄식해서 지은 시조 1수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한다.

유응부[편집]

兪應孚 ( ? -1456)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일찍이 무과에 급제,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렀다. 성삼문,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여 세조의 살해를 책임졌으나 일이 탄로되자 죽음을 당함. 천성이 청렴 결백하고, 용맹이 출중했다.

하위지[편집]

河緯地 (1387-1456)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자는 천장(天章), 호는 단계(丹溪). 문과에 급제, 집현전 교리를 거쳐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렀다. 천성이 침착하고 청렴하여 세조의 간청으로 부득이 벼슬을 하는 동안에 받은 녹(祿)을 먹지 않고 별실에 저장에 두었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 죽음을 당했는데 한시 몇 수 외에 <화원악보(花源樂譜)>에 시조 1수가 전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客散門扁하고, 風徹코 月落 헐 고졔,

酒壅(주옹)을 다시 열고 싣귀를 흣 부르니,

아마도 小人 득이쳐는 이뿐인가 하노라."

왕방연[편집]

王邦衍 (생몰연대 미상)

조선 세조 때의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했다. 영월서 돌아오면서 단종을 그려 읊은 시조 1수가 <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쳔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님 여희압고,

내 마음 둘 대 업서 냇가에 안자이다.

져 물도 내 안갓도다 우러 밤길 녜놋다."

이현보[편집]

李賢甫 (1467-1555)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문인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賓翁). 벼슬이 부제학·호조 참판에 이름.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예안(禮安)으로 돌아가 산수와 더불어 독서와 시작으로 여생을 보냈다.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를 남겼는데, 작품에 <어부사> <농암가(聾巖歌)> <효빈가(效嚬歌)>가 있고 그 밖에 문집으로 <농암집>이 전한다.

어부사(漁父詞)[편집]

중종 때 이현보는 연시조인 어부단가(漁父短歌)를 지었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어부 단가 10수를 고쳐 지은 것이다. 모두 5장으로 내용은 어부의 생활을 읊은 것이며 본래의 어부 단가 10수는 전하지 않는다. 그 가사가 <청구영언> <해동가요>에 전해 오는데 그 중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듕에 시름 업스니 어부의 생애이로다.

일엽 편쥬를 만경파(萬頃波)의 띄워 두고

인셰(人世)랄 다니젯거니 날 가난 줄을 알랴."

한편 그는 조선 초부터 내려오는 장가인 <어부가> 12수를 고쳤는데 모두 9장으로 첫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백과 22권 참고)

이황[편집]

李滉 (1501-1570)

조선 명종 때의 학자·문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일찍이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예조 판서·대제학에 이름.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이이(李珥)와 함께 유학계의 쌍벽을 이룬다. 안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워 후학을 지도하며 동방 철학을 집대성했다. 그의 학풍은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가 있고, 문학작품에 연시조 <도산십이곡>이 있으며, 이 밖에 <퇴계집(退溪集)>이 전한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편집]

조선 명종 때 이황은 연시조 <도산십이곡>을 지었는데 모두 12장으로 전후 각 6곡으로 나뉘어졌다. 앞의 것은 자연에서 느끼는 심정을, 뒤의 것은 학문을 닦고 수양하는 심경을 읊은 것으로 <청구영언>에 전한다. 이 <도산십이곡>은 시조로서는 치중할 바가 못 되지만 그 영향은 선조 40년에 사촌(沙村) 장경세(張經世)가 이를 본받아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 전후 12곡을 짓게 하였다. <도산십이곡>의 몇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료.

초야 우생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을 고쳐 므슴하료"(전곡 중의 하나).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 패 잇내.

녀던 길 알패 잇거든 아니 녀고 어떨고"(후곡 중의 하나).

이이[편집]

李珥 (1536-1584)

조선 명종·성종 때의 학자·문신.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어머니는 신사임당(申師任堂). 일찍이 불도로 나가려고 19살에 금강산에 들어갔으나 뒤에 성혼(成渾)을 좇아 유학을 배웠고 벼슬이 대제학·이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퇴계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성리학자로 당쟁을 없애는 데 노력하였다.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했다. 그는 말년에 해주 수양산 아래 고산면(高山面)으로 돌아가 <학규(學規)>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는 한편, 연시조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문집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편집]

이이(李珥)가 지은 연시조로 모두 10수로 되어 있다. 그가 해주 수양산 밑 고산면에 은거했을 때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그 곳 경치를 관암(冠巖)·화암(花巖) 등 9곡으로 나누어 읊은 것이다. 일명 '석담구곡가(石潭九曲歌)'라고도 하며, 그 중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곡은 어느메고, 冠巖(관암)에 해 비친다.

平蕪(평무)에 내 거드니, 원근이 그림일다.

松間(송간)에 綠樽(녹준)을 노코 벗 오는 양 보리로다."

송강의 시조[편집]

松江-時調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은 비록 정치 면에서는 실패했으나 문인으로서는 빛나는 문학적 업적을 이룩했다. 그는 시조작가로서도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니, 그가 백성의 교화(敎化)를 위해 지은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비록 도덕군자의 냄새가 나는 듯하나 현실적 효용으로 그 의의를 지니며, 그의 시조 77수가 <송강가사>에 실려 전하는데 그의 호방(豪放)한 일면과 동양적인 유적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중 4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잘새난 나라들고 새달은 도라온다.

외나모 다리에 혼자가난 저 선사야.

네뎔이 얼마나 하관대 먼 북소리 드리나니."

"劉伶(유령)은 언제 사람고 晋적의 高士로다.

季涵(계함)은 귀뉘러니 당시의 狂生이라.

두어라 高士狂生을 무러 무삼하리."

"네 아달 孝經 닑더니 어도록 배홧나니

내 아달 小學은 모래면 마찰로다.

어내제 이두를 배화 어딜거든 보려뇨."

"재 너머 成勸農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농 겨시냐 鄭座首왓다 하여라."

훈민가(訓民歌)[편집]

조선 선조 때 정철이 지은 연시조. 일명

'경민가(警民歌)'라고도 함. 모두 16수로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지은 것. 그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라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몸이 사라시랴.

하날 가탄 가업산 은덕을 어대다혀 갑사오리."

임제[편집]

林悌 (1549-1587)

조선 명종-선조 때의 천재적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벼슬이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으나, 추잡한 당쟁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시작(時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천성이 호방하여 남으로는 광한루로부터 북으로 부벽루에까지 주유하면서 많은 일화와 명문을 남겼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널리 그의 작품이 애송된다. 작품에 단편 <수성지(愁城誌)>와 시조 2수가 <청구영언>에 전하며, 문집에 <임백오집>이 전한다. 특히 시조 2수는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면서 지은 것과 평양 기생 한우(寒雨)에게 준 <한우가>로 각각 다음과 같다. 황진이의 무덤에서 읊은 시조와 한우가를 차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쳥초 우거딘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紅顔은 어대 두고 백골만 무텻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北天이 맑다커날 雨裝업시 길흘 나니,

山에난 눈이 오고 들에난 찬비 온다.

오날은 찬비 마즈니 어러 잘까 하노라."

장경세[편집]

張經世 (1547-1615)

조선 선조 때의 학자. 호는 사촌(沙村).

벼슬이 현령에 이름.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모방하여 연시조 <강호연군가> 12수를 지었고 문집에 <사촌집(沙村集)>이 전한다.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편집]

선조 때 장경세가 지은 연시조.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모방하여 전 6곡, 후 6곡의 12곡을 지었다. 문집인 <사촌집>에 실려 전하는데 전 6곡은 임금을 그리워한 정을 그린 것이고, 후 6곡은 학문과 성현(聖賢)에 대하여 노래했다. 전 6곡 첫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요공(瑤空)애 달 밝거늘 일장금(一張琴)을 빗기 안고,

난간을 디혀 안자 고양춘(古陽春)을 타온 말이

엇더타 님 향한 시름이 곡됴마다 나나니."

조존성[편집]

趙存性 (1553-1628)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수초(守初), 호는 정곡(鼎谷).

벼슬이 호조 참판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에 이렀다. 만년에 은퇴해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청구영언>에 시조 <호아곡(呼兒曲)> 4수가 전함. 그 중 1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해야 구럭 망태 어두 서산에 날 늣거다.

밤 지낸 고사리 하마 아니 늘그리야.

이 몸이 이 푸새 아니면 조석 어이 지내리."

이항복[편집]

李恒福 (1556-1618)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권율(權慄) 장군의 사위. 일찍이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제학·영의정에 이렀다. 임진왜란 때 난국을 수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 데 힘쓴 공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지니 속칭 오성대감이라 한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廢母)가 논의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저서에 <사례훈몽(四禮訓蒙)>, 한문소설 <유연전(柳淵傳)>, 한시 및 시조 몇 수가 전한다. 북청에 귀양갈 때 그가 철령(鐵嶺)을 넘으면서 지은 시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鐵嶺 노픈 봉에 쉬여 넘난 져 구룸아

孤臣怨淚(고신원루)를 비사마 띄여다가

님 계신 九重深處에 뿌려 본들 엇다리."

조헌[편집]

趙憲 (1544-1592)

선조 때의 학자·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뜻과 기품이 고상한 선비로 임진란 때는 금산(錦山)에 들어온 적을 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한다. 저서에 <중봉동환봉사(重峯東還封事)>가 있고, 시조 1수가 전한다.

조식[편집]

曹植 (1501-1572)

중종-선조 때의 학자.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溟). 지리산에 숨어 성리학을 연구. 명종·선조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야인으로 지냈다. 죽은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작품으로 가사 <남명가(南溟歌)> <왕롱가(王弄歌)>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을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고, 시조 3수가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전한다. 그중 1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三冬에 뵈옷 닙고 巖穴(암혈)에 눈비마자

구름 낀 볏 뉘도 쬔 적이 업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계워 하노라."

백광훈[편집]

白光勳 (1537-1582)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白光弘)의 아우.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五世讐(오세수) 갑흔 후에 金刀의 업을 닐워.

삼만 戶 사양하고 赤松子 좃차가니.

아마도 見機高蹈(견기고도)난 子房인가 하노라."

장만[편집]

張晩 (1566-1629)

명종-인조 때의 문신.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원훈(元勳)으로 추대됨. 문집에 <낙서집(洛西集)>이

있고, 무서운 세상을 풍자한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함.

"風波에 놀란사공 배 파라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 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밧갈기만 하리라."

기류의 시조[편집]

妓流-時調

시조를 창작한 기녀(妓女) 작가로는 황진이를 비롯하여 선조 때의 한우(寒雨), 이매창(李梅窓), 홍랑(洪娘) 등을 손꼽을 수 있으며 각각 1수씩 전한다. 기녀 작가는 그 이전에도 있어 고려 말로 생각되는 홍장(紅粧)의 시조 1수와 성종 때 소춘풍(笑春風)의 작품 3수가 있으며, 이후의 작가로는 숙종-영조 때까지의 다복(多福), 문향(文香), 명옥(明玉), 매화(梅花) 소백주(小栢舟), 구지(求之) 등의 단형시조 9수와 관녀(官女) 작품이라고 하는 중형시조(中型時調)가 또한 가집(歌集)에 전한다.

황진이[편집]

黃眞伊 (생몰연대 미상)

성종-중종 때의 명기.많은 절창을 남겼다. 본명은 진(眞). 기명은 명월(明月)로 재색이 뛰어나고 가창에 능하여 그의 작품은 시조문학의 최고봉(最高峰)을 이룬다.

본래 개성 황진사의 딸로서 서녀(庶女)임을 비관, 기문(妓門)으로 들어가 세상의 풍류 남아와 시문·묵객을 상대로 일생을 보냈으며 한시와 서화도 남겼다. 서경덕(徐敬德)·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로 불렸으며, 그의 시조 6수는 조선 시조문학으로 으뜸이 되는 걸작이다. 그 중 유명한 작품 5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타야보내고 그리난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동지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랄 버혀 내여

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소겻관대

月沈(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내.

추풍에 지난닙 소래야 낸들 어이하리요."

"산은 녯 산이로되 물이 녯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녯 물은 잇슬소냐.

인걸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아니 오노내라."

"청산리 벽계수ㅣ야 수이 감을 쟈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월명이 만공산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한우[편집]

寒雨 (생몰연대 미상)

조선 선조 때의 평양 기생. 선조 때의 시인 임제(林悌)에게 준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에 실려 전함. 이것은 임제가 한우에게 준 <한우가(寒雨歌)>에 대한 답가인데 다음과 같다.

"어이 얼어 잔고 무삼 일 얼어 잔고.

원앙침 비취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잔고.

오늘은 찬 비 마즈니 더욱 덥게 자리라."

이매창[편집]

李梅窓 (생몰연대 미상)

조선 중종-명종 때의 부안(扶安) 기생.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癸生), 계랑(桂娘·癸娘) 등으로도 불린다. <화원악보>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이화우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 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홍랑[편집]

洪娘 (생몰연대 미상)

조선 선조 때 경성(鏡城) 기생.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경성에 머물던 최경창(崔慶昌)이 서울로 돌아갈 때 지었다는 시조 1수가 전함.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곤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다복[편집]

多福 (생몰연대 미상)

본이름과 연대 미상의 기생. <해동가요>에 다음 시조 1수가 전해 온다.

"북두성 기울어지고 更五點 자자간다.

十洲佳期(십주가기)는 허랑타 하리로다.

두어라 煩友(번우)한 님이니 새와 무슴 하리오."

명옥[편집]

明玉 (생몰연대 미상)

본명과 연대 미상의 수원 기생. <청구영언>에 그의 시조 1수가 전한다.

"꿈에 뵈는 님이 연분 업다 하건마는

탐탐이 그리온 제 꿈 아니면 어이 뵈리

저 님아 꿈이라 말고 매양 보게 하소서."

구지[편집]

求之 (생몰연대 미상)

본명과 연대미상의 평양 기생. 유일지(柳一枝)를 사랑하여 지었다는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長松으로 비를 무어 대동강의 뛰워 두고,

柳一妓 휘여다가 구지 구지 매엿난대,

어대셔 망녕읫거슨 소희들나 하나니."

소백주[편집]

小栢舟 (생몰연대 미상)

본명과 연대 미상의 평양 기생. <해동가요>에 다음과 같은 시조 1수가 전함.

"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잇자오니,

졸직(把直)한 마음의 병들가 넘녀러니,

이리마 뎌리차하시니 빅년 동포 하리이다."

송이[편집]

松伊 (생몰연대 미상)

조선시대의 기생. 본명과 연대 미상. 다음 시조 1수가 전한다.

"솔이 솔이라 하니 므슨 솔만 너 기난다.

쳔심 졀벽의 락락댱숑 내 긔로다.

길 아래 쵸동의 졉나시야 거러 볼 줄 이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