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
[편집]訓民正音
고려 때부터 융성, 발전해 온 한문학은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 초에 이르러 더욱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때 민족의 문자인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것은 우리 문학사상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고유 문자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반포를 계기로 그것의 보급, 번역사업 등으로 한문학은 잠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과 관료문학으로서의 한문학도 우리 선조가 이루어 놓은 문학임에는 틀림없으나 국어의 순화(醇化) 발달에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함께 비로소 문학어로서의 국어의 정립이 이루어졌고, 민족문화 수립에 커다란 계기를 마련, 이를 기축으로 해서 우리 문학은 새로운 지표를 갖게 되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민족의 문자가 있어야겠다는 민족의식과 일반 국민들이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쓰게 해야겠다는 민중애(民衆愛)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훈민정음'이라 이름붙인 것이 그것이며, 그 서문에도 한글창제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이 많다. 내 이를 위하여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쉬이 익혀서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와 같은 취지에서 세종은 최만리(崔萬理) 등의 고루한 학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집현전 학사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 등의 협조 아래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문자이며, 민족 최대의 문화적 창조물인 한글을 창제 반포한 것이다. 한글의 창제 이후 조선 왕실의 성덕(聖德)을 찬양하기 위한 <용비어천가>, 불덕(佛德)을 찬양하기 위한 <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釋譜詳節)>이 한글로 이루어졌고, 또 유교와 불교의 많은 경전들이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한글의 제정을 계기로 이두 표기나 전승 문학으로서 내려오던 단가(短歌)·악장·가사 등이 정착되었고, 번역 사업으로 문학활동을 넓혀 표기를 가능케 해준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참된 뜻에서 우리 문학의 탄생을 가능케 해준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관찬(官撰) 사업에 의해 이루어진 허다한 중요 서적들이 대개 한문으로 편찬된 것을 생각하면 그 이용의 중요성이 아직 희박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초성체계
[편집]訓民正音-初聲體系
체계는 중국의 운서에 따랐으나 국어나 한자음에 쓰인 가벼운 입술소리 'ㅸ·ㅱ·ㆄ·ㅹ'은 제외되어 있음.
언문청과 용비어천가
[편집]諺文廳-龍飛御天歌
훈민정음의 사용
면으로 볼 때 궁중에 언문청(諺文廳=正音廳)을 설치하여 세종 27년(1445)에 권제(權提)·정인지·안지(安止)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지어 바쳤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최초의 악장으로 모두 125장의 가곡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편집]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
세종 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자 세종이 왕후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뒤에 世祖)에게 석가여래의 일생을 기록한 석보(釋譜)를 짓게 하고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석보상절>을 지어 바치기를 명하고 세종이 이에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주었다.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으로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로 출간하니 당시의 문운(文韻)을 살피는 데 귀중한 문헌이 되어 준다.
훈민정음의 구성
[편집]訓民正音-構成
세종이 창제한 '한글'의 첫이름. 세종 25년(1443) 12월에 완성, 세종 28년(1446) 9월 상순에 반포되었다. 이 글자를 만드는 데는 성삼문·신숙주·박팽년(朴彭年)·최항·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강희안(姜希顔) 등 집현전 학자들의 협조로서 이루어졌다. 글자는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든 것임. 모두 28자로 초성이 17자(ㄱㅋㆁ ㄷㅌㄴ ㅂㅍㅁ ㅈㅊㅅ ㆆㅎㅇㄹㅿ)이며, 중성이 11자(ㆍㅡㅣㅗㅏ ㅜㅓㅛㅑㅠㅕ)인데, 그 중에서 'ㆁㆆ ㅿㆍ'의 네 글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훈민정음의 체계에서 볼 때 없어진 글자는 'ㆁㆆㆍㅿ' 넷뿐인 듯하나, 이 밖에 'ㅸ'이 하나 더 있다. ① '·' : 〔∧〕와 비슷한 소리로 18세기 말에 없어졌다. ② ㆆ : <동국정운>에 '음(音)', '안(安)' 등과 같이 이 소리가 첫소리로 쓰였으나 실은 국어에는 없던 소리며, 'ㅭ'받침의 경우와 사잇소리 'ㆆ'은 모두 성대 폐쇄음의 표기임. ③ 'ㆁ':'ㅇ'의 옛 표기. 16-17세기에 모두 'ㅇ'자로 바뀜. ④ ㅿ:'z'에 해당되는 소리로 16세기경에 없어짐. ⑤ 'ㅸ' : 가벼운 입술 소리로 'β'에 해당됨. 이 소리는 세조시대 이후 없어짐.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편집]성삼문·박팽년·신숙주·정인지·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지은 국어음운 연구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원리와 초성·중성·종성에 대한 해설과 실지로 쓰인 예 등을 상세히 적어 놓았음. 내용은 제자해(制字解)·초성해(初聲解)·중성해(中聲解)·종성해(終聲解)·합자해(合字解)·용자례(用字例)의 6부분으로 나뉘어 있음.
언문청
[편집]諺文廳
조선 세종 25년-26년 사이에 창설되어 중종 원년에 없어진 관청의 하나. 정음 및 정음에 관계되는 모든 일을 맡아 보던 기관으로, 창설 당시에는 정인지·성삼문·최항·신숙주·박팽년·강희안·이선로 등이 이 곳에 종사했음. 일명 '정음청(正音廳)'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둘 다 병칭되어 사용된 것인지 혹은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불린 것인지 확실치 않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편집]조선 세종 때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지은 악장·서사시.
한글 창제 후 첫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모두 125장으로 조선 건국의 위대함과 어려웠음을 노래했고, 그것이 하늘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내용은 목조(穆祖)·익조(翼祖)·탁조(度祖)·환조(桓祖)·태조·태종 등 조선의 선대인 6대에 걸쳐 그 사적을 노래했다. 제1장, 제125장 등 10여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장이 2절로 되었는데 앞절에는 중국 역사상의 사적을 적고, 뒷절에는 앞의 중국 사적과 부합되는 조선 건국의 사적을 노래했다. 세종 27년에 지어 세종 29년(1447)에 간행함. 첫머리 몇 장만을 들면 다음과 같다.
"海東 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제1장)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뭘쌔 곶 됴쿄 여름 하난니."(제2장 앞절) "狄人ㅅ 서리예 가샤 狄人이 갈외어늘 岐山올마 샴도 하날 쁘디시니, 野人ㅅ 서리예 가샤 野人이 갈외어늘 德源 올마 샴도 하날 쁘디시니"(제4장).
석보상절(釋譜詳節)
[편집]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지은 석가모니의 전기.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이 수양에게 명하여, 당나라 도선(道宣)이 엮은 석가보(釋迦譜) 및 그 밖의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등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내용은 책명과 같이 석가모니의 가보(家譜)를 자세하고 절도있게 기록했다. 총 24권이 있었던 듯한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제 6·9·13·19권이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또 11권과 23·24권이 전하며 그 밖에 월인석보를 통해 원문의 일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편집]조선 세종대왕이 지은 악장.상·중·하 모두 3권으로 노래 500여 수로 추정됨. 세종 29년에 왕이 수양대군이 엮은 <석보상절>을 보고, 그 대목대목을 되도록 우리말로써 가사를 지은 것이다. 현존하는 것은 상권뿐이며, 나머지는 <월인석보>를 통해서 알 수 있음. '月印天江'이란 달이 천의 강을 비춘다는 뜻으로서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나 모든 나라에 현신하여 교화함을 비유한 말이다.
월인석보(月印釋譜)
[편집]조선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해 엮은 책.
1459년에 간행. 모두 30권쯤 된 것으로 추측되나 현존하는 것은 몇 권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1·2·7·8·9·10·13·14·17·18·21·23권이 전함.
한글 번역 사업
[편집]-飜譯事業
훈민정음의 제정으로 또한 유교와 불교의 많은 경전들이 번역 출판되니 이른바 언해(諺解)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동국정운(東國正韻)> 등 한자음 연구의 책들도 지어졌다. 세조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경의 번역사업을 이룩했으니 여기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묘법연화경언해(妙法蓮華經諺解)>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아미타경언해(阿彌陀經諺解)> 등을 간행했다. 그 밖에도 세종 때의 한문본을 나중에 번역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적은 책이다. 그 뒤 성종 6년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비빈(妃嬪)의 교양에 이바지하기 위해 엮은 것으로 <내훈(內訓)>이 있다. 또 성종은 조위(曹偉) 등에게 명하여 두보(杜甫)의 시를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25권을 출간했다. 이어 선조 때에 사서 삼경(四書三經)이 언해되어 나오는 등 일련의 언해 사업은 다음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준비기간으로서 역사적 문헌이 되어 주는 것이다.
간경도감
[편집]刊經都監
조선 세조가 불경을 국역(國譯)해서 출판하기 위해 세조 7년(1461)에 설치한 출판 기관. 신미(信眉)·한계희(韓繼禧) 등이 여기에 종사했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편집]조선 세조 때 엮은 불경 언해서. 능엄경을 언해한 책으로 세조 7년에 간행됨. 모두 10권 10책으로 되었음.
묘법연화경언해(妙法蓮華經諺解)
[편집]조선 세조 때 황수신(黃守信)·윤사로(尹師路) 등이 왕명을 받들어 <묘법연화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 뒤에 여러 번 중간됨.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
[편집]조선 세조 때 신미·한계희 등이 우리말로 번역한 불경 번역서. 세조 10년에 간행되었고, 선조 8년에 중간됨.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般若波羅密多心經諺解)
[편집]조선 세조 때 한계희 등이 엮은 불경 언해서. 줄여서 책명을 <심경언해(心經諺解)>라고도 한다.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편집]조선 선조 때 신미 등이 엮은 불경 언해서.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중 현각(玄覺)이 지은 불교책 <선종영가집>을 한글로 번역한 것임.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편집]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경서 번역서. 본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육조언해금강경(六祖諺解金剛經)>으로 한계희·노사신(盧思愼) 등이 번역했다. 연산군 1년과 선조 8년에 각각 중간됨.
아미타경언해(阿彌陀經諺解)
[편집]조선 세조 때 번역한 불경 언해서. 내용은 천태종(天台宗) 개조(開祖)의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중간본만 전해 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편집]조선 세종 때(1432) 설순(楔循)이 엮은 수신서. 내용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적 중 삼강(三綱)의 모범이 되는 충신·효자·열녀의 덕행을 기록하고, 한쪽에 그림을 넣어 엮었다. 번역본은 성종 때 간행됨.
내훈(內訓)
[편집]덕종의 왕비 소혜왕후(昭惠王后=인수대비)가 궁중 비빈들의 교양에 이바지하기 위해 엮은 독본. 일명 <어제내훈(御製內訓)>이라고도 함. <소학> <열녀>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의 책에서 중요한 것을 추려 모아 국문으로 썼다. 뒤에 선조·효종·영조 때에 각각 중간되었고, 궁중말이 많아 궁중말 연구에 도움이 됨.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편집]줄여서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도 함. 당 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를 유윤겸(柳允謙)이 주석하고, 조위(曹偉) 및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했다. 조선 중기의 옛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헌으로 모두 25권으로 간행됨. 초간본은 조선 성종 때(1481) 활자책으로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인조 때(1632) 목판으로 간행됨. 초간본에는 반치음(半齒音), 방점(傍點), ㆁ(牙音) 등이 사용되어 있다. 그 중 <강촌>이라는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말·간·가람 한 고·배 마잘할 아·나 흐르나·니,
:긴 녀·름 江村(강촌)애 일:마다 幽深(유심)·하도·다.
절·로
가·며 절·로 오나·닌 집 우흿:져·비·오,
서르 친(親)하·며 서르 갓.갑나·닌 ·믌 가·온·댓 갈·
며·기로·다.
늘·근:겨지·븐
죠·하·랄·그려:쟝·긔·파날
맹·갈
어·날,
져믄 아·다란 바·나·랄 두드·려 고기 낫·갈·낙·살
맹가나·다.
한 病(병)·에 :얻고져·하난 ·바난 오·직 藥物(약물)·
이·니,
·져구·맛·모미·이 밧·긔 다시 므·스·글 求(구)·
하·리오.
운서의 간행
[편집]韻書-刊行
한글 창제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나라 한자운(漢字韻)을 바로잡으려는 의도하에서 세종의 명으로 <동국정운(東國正韻)>이 편찬되었고, 한글에 대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한 성음학적(聲音學的) 연구서로 정인지·최항·박팽년·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이 지은 <훈민정음 해례>가 있어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완성되었다. 그러다가 중종(中宗) 2년 최세진(崔世珍)에 의하여 <훈몽자회(訓蒙字會)>가 이루어져 팔종성법(八終聲法:ㄱㄴㄷㄹㅁㅂㅅㅇ)으로 말미암아 국어학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훈몽자회(訓蒙字會)
[편집]조선 중종 22년 최세진이 지은 한자교본. 어린이를 위해서 한자 3,360자를 종류별로 갈라 한글로 음과 뜻을 붙인 것으로 옛말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특히 머리 범례에 실린 한글에 대한 언급은 또한 국어 연구상 중요한 자료임. 이 책에서 정음을 '반절(反切)'이라 하고, 'ㆆ'을 실제 소리에서 없애고, 정음의 낱자 이름을 정하고, 그리고 받침은 "ㄱ·ㄴ·ㄷ·ㄹ·ㅁ·ㅂ·ㅅ·ㅇ'의 8자로 한정했음. 이 책 가운데 초성 종성 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로 'ㄱ(其役)·ㄴ(尼隱)·ㄷ(池末)·ㄹ(梨乙)·ㅁ(眉音)·ㅂ(非邑)·ㅅ(時衣)·ㅇ(異凝)"을 들었고, 초성독용팔자(初聲獨用八字)로는 "ㅋ(箕)·ㅌ(治)·ㅍ(皮)·ㅈ(之)·ㅊ(齒)·ㅿ(而)·ㅇ(伊)·ㅎ(屎)"로 규정한 것이다.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집]세종 29년 신숙주·성삼문·최항·박팽년 등이 왕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 10월에 반포한 운서(韻書). 내용은 당시 우리나라 한자음이 운서의 음과 거리가 먼 것이 많아 중국의 운서를 참고로 하여 우리나라 한자음을 새로 정리한 것으로 조선조 초기의 한자음 및 훈민정음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된다. 이 책은 자모의 수가 23, 운모(韻母)의 수가 91개로 되어 있으며, 자모 23은 훈민정음의 초성(初聲) 23과 일치됨.
연산군의 한글 탄압
[편집]燕山君-彈壓
당시 한문학이 주류적인 문학활동을 이루던 시기에 한글이 민족문학의 용어로 확립되기에는 많은 파란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대주의에 중독된 상층 관료계급에서 한문학에 대한 숭상열은 대단한 것인데다가 연산군(燕山君)은 한글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니, 이제 겨우 자라나던 정음(正音)의 싹은 폭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먼저 성종의 왕비 윤씨(尹氏)는 연산군을 낳고 방자(放恣)하기 이를 데 없자 인수대비가 이를 폐출(廢黜)시켰다. 그래도 윤씨는 잘못을 뉘우침이 없으므로 성종은 언문전교(諺文傳敎)로써 사약(賜藥)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이에 관여한 신하를 죄로써 다스리니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그 뒤 어떤 이가 연산군의 잘못을 일일이 한글로 적어 격문(檄文)을 던진 일이 있으므로, 이 때부터 연산군은 민간의 한글 가르침을 금하고, 한글을 행사하는 자는 제서훼기율(制書毁棄律)로 목베었다. 또한 가르치는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는 제서위반율(制書違反律)의 죄로 다스리고 사대부 집에 배치된 한글 구결 서적은 모두 불사르게 하는 등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못지않은 죄과를 저질렀다. 연산군이 물러난 뒤에도 한문에 중독된 사대부들은 한글을 돌보지 않아 궁중이나 규중(閨中)의 아낙네들에 의해 겨우 그 명맥을 보존하는 형편이었다. 이 때부터 한문을 진서(眞書)라 하고, 한글을 '언문(諺文)·언서(諺書)·암글'로 격을 낮추어 부르니, 민족문학의 발달도 이에 큰 장애에 부딪친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뒤에 자아(自我)의 성찰과 함께 실학(實學)이 태동하고, 다시 이서(吏胥)를 중심으로 평민문학이 대두하여 한글은 차츰 문학의 표기 수단으로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