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후기 문학/한문학과 실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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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편집]

漢文學

연산군(燕山君) 이후 네 차례의 사화(士禍)와 사색(四色)의 당쟁을 피해 뜻있는 학자와 문인들은 산림에 숨어 음풍 영월과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니, 이들을 산림학파라 한다. 일찍이 성리학자 조광조(趙光祖)가 조정에 나서면서부터 선비들은 서로 유파(流派)를 형성하여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 서원은 도학(道學)을 닦고, 경학을 논하는 선비들의 규합처였지만 그들의 실제 표현수단은 사장(詞章)이기 때문에 시문학 또한 그들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한편 임란을 전후해서 활동한 유학자들은 이언적(李彦迪), 이황, 기대승(奇大升), 조식, 서경덕, 이이, 성혼 등이 특히 쟁쟁한 이름을 떨쳤고, 그 뒤에 등장한 송시열(宋時烈)은 그 학문과 함께 한시인(漢詩人)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임란 이후의 한문학[편집]

壬亂以後-漢文學

임란을 전후하여 활동한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은 성당시(盛唐詩)를 배워 대성했고, 백광홍(白光弘)은 <관서별곡>으로 이름 높다. 또 차천로는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그 시재(詩才)를 떨쳤으며, 동방 문사로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고, 최립은 그 다듬어진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유몽인(柳夢寅), 이호민(李好閔), 허균, 이수광, 권필, 이안눌(李安訥), 이산해(李山海), 김상용, 김상헌 등도 뛰어난 학자들이다.

특히 월상계택(月象谿澤)의 4대가로 꼽히는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은 대문장가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장과 김창흡(金昌翕)의 시 또한 당대의 일가를 이루었고, 김만중 또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실학의 대가인 박지원(朴趾源)은 신문체(新文體) 수립과 함께 불멸의 소설들을 남겼고, 그 후계자로 한문 신파(新派) 4가인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등은 당대의 일류였다. 신위(申緯)는 천재시인으로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고,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언진,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三) 등의 위항시민(委巷詩人)과 고시언(高時彦), 홍세태(洪世泰) 등 평민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 밖에도 김춘택(金春澤), 김석주(金錫胄), 신유한(申維翰), 홍석주(洪奭周), 이건창(李建昌) 등도 이름이 높았고 특히 김삿갓이란 별명이 붙은 김병연(金炳淵)은 한문학계의 기인(奇人)이었다.

실학파와 사실주의[편집]

實學派-寫實主義

특히 임란과 병란을 지내면서부터 도학파의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을 비판해서 새로운 개량주의적 개혁사상이 일부에서 일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실증적 학풍을 이룩하니 이것이 바로 실학파(實學派)라는 학풍이다.

이 학파는 영·정 때에 전성하여 부패한 사회상과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으로 국학·북학(北學)·서학(西學) 등의 새로운 과학정신의 결정으로 이룩된 것이다. 그들은 정치·경제·언어·지리·천문·금석(金石) 등에 걸쳐 실생활에 필요한 과학을 연구하여 한국 근대화의 주체적인 주류를 이루었다. 이 학파의 선구자는 선조·광해군 때의 이수광이며 효종 때 유형원(柳馨遠)에 이르러 체계있는 학문으로 발전했다.

서학에 대해서는 이미 이수광, 유몽인, 허균 등이 관심을 가졌고, 이에 대한 이익(李瀷)의 깊은 연구가 있었다. 그 뒤 권철신(權哲身), 이가환(李家煥), 정약용 등이 관심을 쏟았는데 이것은 그 교리에 대한 공감에서라기보다 서구의 과학적 방법이 아니면 결코 당시의 전근대적인 현실과 부패성을 혁신할 수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학문의 영향을 입어 근대적 개혁사상을 가졌던 박제가(朴齊家)와 박지원은 모두 북학의 선각자로 날카로운 현실비판의 정신을 보였다. 특히 박지원에 의해 이룩된 한문 신문체운동과 그의 현실비판의 소설은 근대적인 사실주의의 한국적인 발상이었다. 이 실학파는 18세기-19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한국적 백과사전식 계몽학파의 성격을 띤 것으로 그 밖의 안정복(安鼎福), 신경준(申景濬), 유희(柳僖) 등의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송시열[편집]

宋時烈 (1607-1689)

조선 숙종-인조 때 학자.호는 우암(尤菴). 노론의 우두머리. 율곡의 후배인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배웠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로서 한시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숙종 때 남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저서에 <주자대전(朱子大全)> 백여 권이 있고 시조 몇 수도 전한다.

이수광[편집]

(1563-1628)

조선 선조-인조 때의 대학자·문장가.

호는 지봉(芝峯). 실학파의 선구자.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름. 저서에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비롯해서 <찬록군서(纂錄群書)> 등이 있고, 시문이 전한다. 또 가사 <조천록(朝天錄)> 전후 2곡을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유형원[편집]

柳馨遠 (1622-1673)

조선 광해군-현종 때 실학파의 대학자.

호는 반계(磻溪). 천문·지리·군사학·의약·역사·농업·경제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연구가 깊고 박학다식했으며, 저서에 <반계수록(磻溪隨錄)> <정음지남(正音指南)> <동국역사> <동국문헌(東國文獻)> <동사강목조례(東史綱目條例)> 등이 있다.

이가환[편집]

李家煥 (1742-1801)

조선 영조 때의 문신·실학자이다.

호는 정헌(貞軒)·금대(錦帶). 이익, 이용휴(李用休)의 학풍을 이어 정약용의 학문을 열어준 당시 실학파의 거성이며 천주교도. 또한 한시로 문명이 높았으며,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익[편집]

李瀷 (1681-1763)

조선 숙종-영조 때 실학파의 대학자.호는 성호(星湖). 한평생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써, 천문·지리·경서·역사·수학·의약 등 각 방면에 연구가 깊었으며,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실학의 대저서이다. 그 밖에 <성호근사록질서(星湖近思錄疾書)> 등이 전하고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편집]

숙종 때의 대학자 이익이 지은 백과서. 평생을 두고 수시로 써놓은 글을 모은 것으로 내용은 천지·만물·인사(人事)·경사(經史)·시문 등으로 되어 있다. 모두 30권 30책으로 되어 있다.

정약용[편집]

丁若鏞 (1762-1836)

조선 정조 때 실학파의 대학자이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여유당(與猶堂). 벼슬이 부승지·형조참의에까지 이르렀으나 천주교도인 관계로 오랫동안 강진(康津)에서 귀양살이를 했으며, 정치·경제·법률·의학·천문·지리 등의 각 방면에 깊은 지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서양의 신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 저서가 500여 권에 이르렀다. 그 주요 저서를 들면 <목민심서(牧民心書)> <강역고(疆域考)> <아언각비(雅言覺非)> <아방비어고(我邦備禦攷)> <대동수경(大東水經)>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이 있다.

안정복[편집]

安鼎福 (1712-1791)

조선 영·정조 때 실학파의 대학자.

호는 순암(順菴), 이익의 제자. 한문소설 <홍생원유기(洪生遠游記)> <여용국전(女容國傳)>이 저서 <복부>에 전하고, 평론에 중국의 4대 기서에 대한 논평이 있으며, 저서에 <동사강목(東史綱目)> <지리고(地理考)> <복부> 등이 있다.

월상계택의 4대가[편집]

月象谿澤-四大家

후기 한문학계에서 문장의 정통을 이어받은 4대가의 호(號)를 따서 당시 사람들이 붙인 칭호임. 즉 월사(月沙) 이정구의 유창한 문장, 상촌(象村) 신흠의 화려한 문체, 대문장가인 계곡(谿谷) 장유, 사우(師友)가 없어 두시(杜詩)를 읽고 대성한 택당(澤堂) 이식이 곧 그들이다.

이정구[편집]

李廷龜 (1564-1635)

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 호는 월사(月沙). 벼슬이 우의정·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란 때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큰 공을 세웠다. 문집에 <월사집(月沙集)>이 있고, 편서에 <대학강의> <서연강의(書筵講義)> 등이 있다.

장유[편집]

張維 (1587-1638)

조선 인조 때의 학자.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 호는 계곡(谿谷).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 양명학(陽明學)의 대가. 저서에 <계곡만필(谿谷漫筆)> <계곡집>이 있으며, 그의 한시 <진도 벽파정(珍島碧波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天邀日脚射滄溟 雲際遙分島嶼靑, 閭闔風聲晩來急, 浪花飜倒碧波亭"(햇살은 쏘는 듯이 바다 위에 꽂혀 있고, 섬들은 옹기종기 구름 가에 푸르러, 밤들어 부는 서풍 급하게 몰아치며, 미친 듯 성낸 물결 벽파정을 흔드네).

이식[편집]

李植 (1584-1647)

조선 인조 때의 학자. 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 호는 택당(澤堂).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斥和派)로 청나라 선양(瀋陽)에 잡혀갔다 왔다. 일찍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집필했으며 문집에 <택당집(澤堂集)>이 전한다. 그의 한시 <영신연(詠新燕)>을 보면 다음과 같다.

"萬事悠悠 … 笑揮 草堂春雨掩松扉 生憎簾外新歸燕 似向閒人說是非"(세상일 유유히 웃고 보낼 새 초당엔 봄비 내려 사립을 치네. 미워라 저 제비는 주렴을 돌아 한가한 사람보고 시비 걸려 하느뇨).

한학신파 4가[편집]

漢學新派四家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한문의 신문체를 세운 박지원의 후배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는 실학에 입각한 신파 4가로 일컬어진다. 그들은 청국을 통해서 들어온 자유사상과 과학적 신문학을 흡수하면서 실학의 수립과 함께 새로운 문체를 수립하는 데 힘썼다.

이덕무[편집]

李德懋 (1741-1793)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 한학신파 4가의 한 사람. 박학 다재로 문장에 개성이 뚜렷하여 이름을 떨쳤으나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으며, 베이징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고 돌아와 북학을 주장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저서에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아정유고(雅亭遺稿)> 등이 있다. 그의 한시 <선연동(嬋娟洞)>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嬋娟洞草賽羅裙 剩粉遺香暗古墳 現在紅娘休艶 此中無數舊如君" (선연골 초원에 치성하는 고운 이들 분향기 그윽히 옛 무덤을 감싸네. 아가씨여 네 얼굴 뽐내지 마라. 한때는 이 님들도 한창이었네).

박제가[편집]

朴齊家 (1750-1815)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 한학신파 4가의 한 사람. 서류 출신으로 일찍이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고,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었으며, 그 후 베이징에 왕래해 그 곳 문물과 새 학문을 배워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실생활에서 기구와 시설의 개선, 그리고 정치·사회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서술했다. 저서에 <북학의> <명농초고(明農草藁)> 등이 있다.

유득공[편집]

柳得恭 (1749-1807)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자는 혜보(惠甫), 호는 냉재(冷齋)·냉암(冷庵). 한학신파 4가의 한 사람. 벼슬이 이덕무, 박제가 등과 검서관(檢書官)에 이르렀고, 북학파에 속하는 학자로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산업 진흥을 주장했으며, 문체에도 신경지를 개척했다. 저서에 <냉재집>과 작품에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소설 <유우춘전(柳遇春傳)> 등이 있다.

이서구[편집]

李書九 (1754-1825)

조선 순조 때 학자·한시인.한학신파 4가의 한 사람. 벼슬이 영의정에 이름. 특히 오언고시(五言古詩)에 능했고, 문집에 <강산집(薑山集)>이 있다.

박지원[편집]

朴趾源 (1737-1805)

조선 영조-순조 때의 실학자·소설가.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벼슬이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이르렀고, 실학파 대가로서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또는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과학정신과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구공전(地球公轉)을 밝혔고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 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으며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산초(課農山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담총외기(談叢外記)> <연암속집> 등이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편집]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기행문. 정조 4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열하까지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유명한 지동설도 이 책에 소개되었다. <열하일기>는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문학·병사·지리·천문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과 실학 사상을 소개했고, 우리 문학사상 귀중한 문헌으로, 이 책에 <허생전> <양반전> <호질> <광문자전> 등의 소설이 실려 있다.

양반전(兩班傳)[편집]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은 양반의 무능, 허례, 특권의 가면을 벗기고 풍자한 것으로 <연암외전(燕巖外傳)>에 실려 전하고 있다.

"옛날 강원도에 한 가난한 양반이 있었는데 그는 관청의 쌀을 빌어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빚이 천석이나 되어 갚을 길이 없어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웃에 살던

지체 낮은 부자가 그 빛을 대신 갚아 주고 그 값으로 양반의 권리를 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고을 군수는 칭찬하고 양반이 될 문서를 만들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양반이 지켜야 할 형식적인 조건과 허례적인 권리 등이 적혀 있었다. 부자가 이것을 보고 양반이란 알고 보니 허례와 구속뿐이고 또한 월권이 강도의 짓이 아니냐 하면서, 드디어 양반이 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호질(虎叱)[편집]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은 과부와 한 선비와의 내면생활을 폭로한 것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위선적인 도덕생활을 폭로한 것이다. <열하일기> 중에 전해 오고 있다.

"어느날 산중 왕 호랑이는 먹을 고기를 의논했다. 의(醫=의사)는 의(疑=의심스러움)와 같은 뜻이니, 스스로 의심스러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험해서 많은 사람을 해쳤고, 무(巫=무당)는 무(誣=속임)와 뜻이 같으니,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여 이들은 먹을 것이 못 된다 했다. 마침 그 때 천하에 덕 높기로 유명한 선비 북곽 선생이 수절 과부로 이름난 동리지란 여인과 사통하던 중 과부의 아들에게 들키어 쫓겨 달아나다가 호랑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북곽 선생은 엎드려 호랑이에게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호랑이가 '유(儒=유학자)는 유(諛=아첨함)와 뜻이 같다. 너희는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고 뒷구멍으로 온갖 추한 짓을 다하고 급하면 이렇게 아첨하지 않느냐'고 꾸짖었다. 이윽고 해가 떠서 호랑이는 가버렸다. 이 때에 북곽 선생이 고개를 드니 마침 들에 나가던 농부들이 이를 발견하고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있다고 짐짓 대답하는 것이었다."

허생전(許生傳)[편집]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한문 소설. <열하일기>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리어 전함. 이 소설은 사회비판과 함께 근대 자본주의사상이 은연중 반영되어 있다.

"허생은 10년을 작정하고 남산 밑에서 공부하던 중 가난에 못 이겨 공부를 중단하고 장안의 변부자를 찾아가서 10만냥을 빌어 지방에 내려갔다. 그는 그 후 장사로 크게 치부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한 후 20만냥을 변부자에게 갚았다. 변씨가 놀라 그 뒤를 따르니 남산밑 오막살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두 사람은 깊이 사귀게 되었다. 어느날 변씨는 이완 대장을 허생에게 소개했다. 완은 시사를 논하다가 오히려 그 얕은 식견에 비웃음만 당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이완이 다시 찾아가 보니 이미 허생은 간곳이 없었다."

민옹전(閔翁傳)[편집]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은 민유신(閔有信)이란 늙은이의 일화를 중심으로 평범하고 풍자적인 말로써 양반을 희롱하고 세상사람을 훈계한 것이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편집]

조선 영·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은 인분을 나르는 예덕의 마음이 곧고 덕이 높음을 그려 양반들을 공박한 것이다.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편집]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은 유생들의 생활을 풍자한 것이라 하는데 <역학대도전>과 함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유몽인[편집]

柳夢寅 (1559-1623)

조선 광해군 때의 학자.호는 어우당(於于堂).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성품이 호방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저서에 <어우유고(於于遺稿)> <어우야담(於于野談)>이 있다.

김창업[편집]

金昌業 (1658-1721)

조선 숙종 때 학자.호는 노가재(老稼齋). 벼슬에 뜻이 없어 전원에 묻혀 시작과 저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저서에 중국 기행을 적은 <연행록(燕行錄)>과 문집 <노가재집(老稼齋集)>이 있고 시조 4수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김춘택[편집]

金春澤 (1670-1717)

조선 숙조 때의 문인.호는 북헌(北軒). 김만중의 종손으로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했고, 문집으로 <북헌집>이 있다.

신위[편집]

申緯 (1769-1847)

조선 정조-순조 때의 시인·문신·서화가. 자는 한수, 호는 자하(紫霞).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천재적 시인으로 그의 이름은 국내보다 중국에 널리 알려졌고, 청조(淸朝)의 시풍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참신한 시를 썼다. 그의 시작품 속에는 애국 애족적인 정신이 잘 나타나 국산품 애용, 양반 배척, 서얼(庶孼)의 차별대우 철폐, 당쟁의 배격 등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서도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소악부(小樂府)>에는 45수의 시조가 한역되어 실려 있다.

김병연[편집]

金炳淵 (1807-1863)

조선 순조 때의 방랑시인.속칭 김삿갓(金笠).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어려서 홍경래의 난 때 선천(宣川) 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가 비굴하게 항복했음을 듣고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방랑생활을 했다. 그의 시재는 천재적이며 골계(滑稽)·해학·풍자의 시로 부패된 세상을 냉소, 자약(自若)했다. 아들로부터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받았으나 방랑을 계속하다가 객사, 영월(寧越)에 묻혔다. 작품집에 구전된 것을 후세에 모은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生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스무나무 밑에서 설운 손님이 망할놈의 집속에서 쉰밥을 먹는다. 인생이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집으로 돌아가서 설은밥을 먹느니보다 못하다.)

위항시인과 송석원시사[편집]

委巷詩人-松石園詩社

위항시인이라 하면 중인(中人)·서얼(庶孼)·서리(胥吏)출신의 하급관리나 선비들로 시작(詩作)을 즐겼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문학은 조선 선조 때부터 싹터 갑오경장 후까지 계속되었다. 순조 때 천수경(千壽慶)은 대표적 위항시인으로, 그는 옥류천(玉流泉) 근처의 소나무 바위 아래 초라한 집을 짓고 동인(同人)들을 모아 시를 읊었는데 당시 시인으로 이 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유명했다. 이 위항시인들의 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또는 서사(西社)·서원시사(西園詩社)라 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서민 출신의 시인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三), 차좌일(車左一), 김낙서(金洛瑞), 최북(崔北), 왕태(王太), 박윤묵(朴允默) 등은 위항문학의 대표적인 시인들이었다.

천수경[편집]

千壽慶 ( ? -1818)

조선 선조 때 위항시인.자는 군선(君善), 호는 송석원(松石園).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시작에 뛰어났다. 일찍이 송석원시사를 만들어 위항시인을 규합하여 서민문단의 모체가 되었다.

장혼[편집]

張混 (1759-1828)

조선 영조-순조 때의 시인.자는 원일(元一), 호는 이기(而己)·공공자(空空子). 빈한한 집에 태어났으나 효성이 지극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조수삼[편집]

趙秀三 (1762-1849)

조선 영조-헌종 때의 시인.일명 경유(景維). 호는 추재(秋齋). 문장과 시작에 천재적 소질이 있어 여섯 차례나 중국에 왕래하면서 시명(詩名)을 떨쳤고 중국어에 능했다. 글씨도 잘 썼다 한다.

차좌일[편집]

車佐一 (1753-1809)

조선 영조-순조 때의 문인.호는 사명자(四名子). 벼슬이 겸이포(兼二浦)의 만호(萬戶)를 지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시작에 전심했다. 만년에는 천수경, 최북(崔北)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를 맺어 시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실학 이후의 국어학[편집]

實學以後-國語學

한편 실학의 태동과 함께 한글 연구의 서적이 속출했는데 이들은 단편적이나마 자아성찰(自我省察)에 대한 구체적인 업적이며 이로써 갑오경장 이후의 한글에 대한 연구의 선구자적 구실을 했다. 즉 숙종-영조 때의 박성원(朴性源)의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계희(洪啓禧)의 <삼운성휘(三韻聲彙)>,영·정조 때의 홍양호(洪良浩)의 <경세정운도설서>, 이의봉(李義鳳)의 <고금석림(古今釋林)>,황윤석(黃胤錫)의 <자모변(字母辨)>,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晝永編)>, 순조 때 실학의 대가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 그 밖의 석범(石帆)의 <언음첩고(諺音捷考)>, 철종 때 정윤용(鄭允容)의 <자류주석(字類註釋)> 등은 모두 한글에 대한 주체적인 관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박성원[편집]

朴性源 (1697-1767)

조선 영조 때의 학자.자는 사준(士濬), 호는 포암(圃菴),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진사로서 예학(禮學)에 뛰어나고 음운학(音韻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영조 23년에 <화동정음통석운고>를 간행하였다.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편집]

속칭으로 '화동정음' 또는 '정음통석'이라고도 함. 영조 23년에 박성원이 지은 운서. 내용은 최세진의 <사성통해>보다 간단하며, 이 책의 범례에 그의 한글에 대한 견해가 적혀 있는데 그 속에 입술소리로서 ◇자가 들어 있어 주목을 끈다.

신경준[편집]

申景濬 (1712-1781)

조선 숙종-정조 때의 실학파 학자.

호는 여암(旅菴). 벼슬이 승지에 이름. 천문·지리 등 각 방면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저서에 <훈민정음운해>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의표도(儀表圖)> <강계지(彊界志)> <수차도설(水車圖說)> <동음해(東音解)> 등이 있다. 그 밖에 <여지고(輿地考)>를 썼고, <팔도지도(八道地圖)>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했다. 그의 <훈민정음운해>는 유희의 <언문지>와 더불어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음운·문자학 연구서이다.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편집]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국어 음운 연구서. 국어학사에 나타나는 중요한 문헌의 하나. 내용은 초성·중성·종성의 풀이와 용자례(用字例)의 4부로 되어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자모를 36으로 하고 병서는 갈바 쓸 것을 주장하고 홀소리에 '‥' (=ㅣ+·) 등을 첨가했다.

홍계희[편집]

洪啓禧 (1703-1771)

조선 순조 때의 학자·문신.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공조참의·부제학·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1757년 편집당상(編輯堂上)으로 <열성지(列聖誌)>를 증보하고, 왕명으로 <해동악(海東樂)>을 지었다. 그는 벼슬이 봉조하(奉朝賀)에 이르고 글씨를 잘 썼으나, 1777년(정조 1)에 아들 술해(述海)와 손자 상간(相簡)이 대역혐의로 사형되자 그의 관직도 모두 추탈당하고 말았다. 그의 국어학에 관한 저서로 <삼운성휘>가 전하고 있다.

삼운성휘(三韻聲彙)[편집]

조선 영조 때 홍계희가 엮은 운서. 한자의 조선화를 확인하여 재래의 조선의 운서가 한갖 중국음을 맹종한 잘못을 바로잡아 우리 음을 표준해서 지은 것이 이 책의 특색이다.

경세정운도설서(經世正韻圖說序)[편집]

조선 숙종 때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경세정운도설>(이 책은 전하지 않음)의 서문. 홍양호(洪良浩)가 서문을 쓴 것으로 최공의 도설에 상형설(象形說)이 빠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해서 이를 보충한 것이다.

황윤석[편집]

黃胤錫 (1729-1791)

조선 영조-정조 때의 유학자이다.

호는 이재. 문집 25 및 잡저(雜著) 중에 있는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와 문집 26의 <자모변>은 국어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자모변(字母辨)[편집]

조선 영조 때의 학자인 황윤석이 지은 국어 음운 연구서. 순조 때 간행된 것으로서 <이재유고>중 26째 권 속에 실려 전하며, 내용은 한글의 자모에 대하여 소리값을 중심으로 연구한 것이다.

유희[편집]

柳僖 (1773-1837)

조선 말기의 학자.호는 방편자(方便子)·서파(西陂). 저서에 <문통(文通)>이 있는데 이는 60항목에 걸친 거편으로 이 속에 순조 24년(1824)에 지은 유명한 음성 연구서(音聲硏究書) <언문지>가 들어 있다.

언문지(諺文志)[편집]

조선 순조 24년(1824) 유희가 지은 국어 문자·음성 연구서. 내용은 우리 소리를 초성·중성·종성·전자(全字)의 넷으로 나눠 소리 및 자모에 대하여 해설한 것으로 그는 이 책에서 ① 정음 기원이 몽고 문자에서 유래함 ② ㅇ과 ㅇ의 혼용됨은 잘못임 ③ 사성정은 한문에는 필요하나 정음에는 필요 없음 ④ 된소리는 갈바쓰는 것이 옳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언음첩고(諺音捷考)[편집]

조선 헌종 12년 본명 미상의 석범(石帆)이 지은 국어사전의 하나. 이 책은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상권은 국어의 맞춤법 사전이고, 하권은 한자의 표준음 사전이다. 그의 한글 학설은 이 책의 범례 및 그 다음에 붙은 언문원류(諺文源流)에 전한다.

정윤용[편집]

鄭允容 (1792-1865)

조선 순조-철종 때의 학자.호는 수암(睡庵). 밀양 부사·공주 판관(公州判官)을 지냈으며, 저서에 수필집 <수암만록(睡庵漫錄)>과 국문 연구서인 <자류주석(字類註釋)>이 있다.

자류주석(字類註釋)[편집]

조선 철종 때 정윤용이 지은 한자 독본. 내용은 최세진의 <훈몽 자회>를 본떠서 하늘·땅·사람·사물 등 4부분으로 나누어서 한자 약 1만 8백 자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 책의 첫머리와 끝에 작자의 한글에 대한 견해가 적혀 있다.

고금석림(古今釋林)[편집]

조선 정조 때 이의봉(李義鳳)이 지은 어학자료사전. 1천 5백 종의 문헌에서 뽑아 엮은 큰사전. 우리 말을 비롯하여 중국·일본·안남·섬라(지금의 타이)·요·금 등 각국 말에 대하여 주석을 붙이고, 이두에 대해서는 주석했다. 모두 11항목으로 40권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기타 명저[편집]

朝鮮時代-其他名著

시화총림(詩話叢林)[편집]

조선 효종 때 홍만종(洪萬宗)이 엮은 시화집. 모두 4권으로 되어 있음. 이 속에는 <백운소설> <역옹패설> <용재총화> <지봉유설> <어우야담> 등 작품집이 모아져 있고, 끝에 부록으로 증정이 붙어 있다.

의유당 김씨[편집]

意幽堂金氏 (생몰연대 불명)

조선시대의 여류시인.

판관(判官)의 아내. 1829년 남편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하자 부근의 명승고적을 탐승하며 지은 기행(紀行)·전기(傳記)·번역(飜譯) 등을 모아 엮은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가 있다. <의유당일기>는 순한글로 되어 있으며, 그 중 <동명일기(東溟日記)>는 국문학사상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의유당일기[편집]

意幽堂日記

조선 순조 때 판관(判官) 이희찬(李羲贊)의 아내 연안 김씨가 쓴 한글기행문. 1829년 그의 남편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할 때 같이 가서 그 부근의 명승고적을 탐승하여 지은 기행·전기·번역 등을 합편한 문집이다.

원명은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이다. <낙민루(樂民樓) <북산루(北山樓)> <동명일기(東溟日記)> <춘일소흥>

<영명사득월루상량문> 등이 실려 있으며, 그 중 <동명일기>가 가장 우수하다. 적절한 묘사, 참신한 어휘력구사, 순수한 우리말의 표현을 통하여 수필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집으로 국문학적으로 의의가 크다.

조침문[편집]

弔針文

조선 순조 때 유씨(兪氏)부인이 지은 수필. 일명 '제침문(祭針文)'이라고도 한다. 바늘을 의인화하여 제문형식으로 쓴 글이다. 일찍이 문벌좋은 집으로 출가했다가 슬하에 자녀도 없이 과부가 된 윤씨가 오로지 바느질을 낙으로 삼고 있는데 하루는 시삼촌에게서 얻은 마지막 바늘이 부러지자 그 섭섭한 심회를 누를 길이 없어 이 글을 지었다.

규중칠우쟁론기[편집]

閨中七友爭論記

조선시대의 작자·연대 미상의 구소설. <망로각수기(忘老却愁記)>에 전한다. 규중부인들이 바느질하는 기구로 없어서는 안될 일곱가지, 즉 바늘·자·가위·인두·다리미·실·골무를 등장시켜 인간사회의 능란한 처세술과 쟁공 행위를 풍자하여 쓴 글이다. 신변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점이 흥미롭다.

어면순(禦眠楯)[편집]

조선 중종 때 송세림(宋世琳)이 지은 설화집. 내용은 음담패설을 모은 것이지만 그 문학적 묘사가 뛰어남. <고금소총>에 실려 전한다.

고금소총(古今笑叢)[편집]

엮은이와 연대 미상의 설화집. 음담패설집인 강희맹의 <촌담해이>, 송세림의 <어면순>, 성여학의 <속어면순> 등을 모은 것이다.

속어면순(續禦眠楯)[편집]

조선 영조-인조 때 성여학(成汝學)이 지은 설화집. 송세림의 <어면순>의 뒤를 이어 지은 것으로 내용은 해학스러운 설화로서 음담에 관한 소재가 많다.

명엽지해(蓂葉志諧)[편집]

조선 효종때 홍만종이 지은 설화집. 내용은 여러 가지 설화를 모은 것이다.

어수록(禦睡錄)[편집]

조선 정조 때 열청재(閱淸齋)가 지은 설화집. 내용은 음담·재담 등이 대부분이며 문학적 표현의 수준이 높은 설화들이 많다.

파수록(罷睡錄)[편집]

지은이·연대 미상의 야담집. 영조·정조 때 간행되었으리라 추측됨. 민간에 전하는 속담·이야기·전설·음담패설 등이 모아져 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편집]

영조 때 홍봉한(洪鳳漢)이 엮은 사전류이다. 내용은 우리나라 문물제도 전반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편집]

조선 헌종 때 학자 오주 이규경(李圭景, 1788- ? )이 지은 백과서. 동서고금의 학문의 여러 부분에 대해 의심되는 점을 고증해서 해설한 책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편집]

조선 선조-영조 때의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역사책. 조선 태조 때부터 헌종 때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 원집 20권, 속집 8권, 별집 19권이 있음.

해서기문(海西奇聞)[편집]

조선 숙종-철종 때 나온 듯한 구소설. 작자 미상. 해학소설로 내용은 골계설화를 소설화한 것이다.

부담(浮談)[편집]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야담집. 낙선재문고(樂善齋文庫)에 단권의 사본으로 전함. 내용은 정객·시인·문인들의 설화·일화·시화 등을 모은 것. <어우야담>과 더불어 국문으로 된 야담의 백미이다.

한말의 한문학[편집]

韓末-漢文學

평민 서류(庶流)들의 위항시인과 실학파의 한학신파 4가 이후 한문학은 계속 발전하여 강위(姜瑋), 이건창(李建昌), 황현(黃炫), 김택영(金澤榮) 등의 뛰어난 시인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한문학은 근대적인 의식의 성장과 언어의 민족적 양식(樣式)인 정음(正音)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구시대의 유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수많은 문집과 한적(漢籍)들이 독자를 상실한 채 서고(書庫)에서 잠자게 되었다. 그러나 한문학의 유산은 우리 민족의 유산임에 틀림없으니 그것에 대한 재평가와 아울러 우리 문학의 발전적 계기로서 수용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강위[편집]

姜瑋 (1820-1884)

조선 말기의 한문학자. 호는 고환자. 문집에 <고환당집>이 전하고 국어학 연구서로 <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가 전한다.

이건창[편집]

李建昌 (1852-1898)

조선 말기의 문신·한문학자이다. 호는 영재(寧齋). 벼슬이 참판에 이름. 글씨에도 뛰어났고 고문에도 능했으며, 저서에 <당의통략(黨議通略)>과 <명미당고(明美堂稿)>가 있다.

황현[편집]

黃玹 (1855-1910)

조선 고종 때의 학자·한시인·지사이다. 자는 운향(雲鄕), 호는 매천(梅泉). 어릴 때부터 시문에 뛰어났고, 고종 때 생원시에 장원했으나, 시국이 혼란함을 개탄하고 향리에 은퇴했으며,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자살했다. 저서에 <동비기략(東匪紀略)>이 있고, 유고집에 <매천집(梅泉集)>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이 있는데, <매천야록>은 조선왕조 최근세 사료로서 귀중한 문헌이다.

김택영[편집]

金澤榮 (1850-1927)

조선 말기의 시인·한학자.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8년 중국에 망명, 한문과 문장 수업으로 일생을 보냈다.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났고, 문장과 학문으로 청나라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어깨를 겨루었다. <문헌비고> 속편 편찬원의 한 사람이며 <한국 소사(韓國小史)>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