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삼국시대 문학/삼국시대의 문학〔개설〕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三國時代-文學〔槪說〕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성립된 시기와 통일신라 시대까지 대개 서력 기원후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삼국시대의 문학에 포함시킨다. 삼국은 각기 부족연맹(部族聯盟)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국가(古代國家)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 문학은 제의(祭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집단적· 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鄕歌)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통일신라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다음에 편의상 시가문학(詩歌文學), 설화문학(說話文學), 한문학(漢文學)으로 나누어 이 시대의 문학을 설명하기로 한다.

<삼국지(三國誌)>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에 고구려 민족은 가무(歌舞)를 좋아하며 10월 제천시(祭天時) 국중(國中)에 대회(大會)를 갖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 했다 한다. 이러한 제의에서 불려진 노래가 곧 삼국 초기의 시가 문학이다.

예컨대 <구지가(龜旨歌)> <해가사(海歌詞)> <황조가(黃鳥歌)> 등이 바로 원시시가의 유편(遺篇)이다. 이 중 <황조가>는 연애감정을 표현한 서정적인 내용의 작품으로서 집단적인 원시문학으로부터 개인적인 고대 서정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 유리왕(儒理王)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兜率歌)>

<회소곡(會蘇曲)> 등은 농업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慶州)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花郞)·승려(僧侶) 등 신라의 중앙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句體)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佛敎讚歌)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시대의 설화(說話)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고려시대에 성립된 역사서에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부를 삼국시대의 문학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은 삼국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것을 채록했다고 보아 삼국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삼국시대의 문학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동명왕 건국설화나 혁거세 건국신화, 탈해 전승(脫解傳承) 등은 부족연맹간의 투쟁을 통해서 승리를 획득하여 고대국가를 건설한 영웅들의 위업(偉業)을 그린 민족적인 서사문학이다. 그리고 이민족(異民族)과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동북아시아에 강대한 고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대왕의 비문(碑文)은 그의 민족적인 위대한 업적과 고구려 민족의 긍지를 표현한 것으로 역시 한 편의 민족서사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김유신 설화 역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영웅적인 인간상(人間像)과 활동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궁예와 견훤의 설화의 경우는 통일신라 말기 사회에 있어서 중앙귀족의 지배체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지방 호족(豪族) 세력의 투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수록된 <온달 설화(溫達說話)> <호동왕자(好童王子)>, <삼국유사>에 수록된 <호원(虎願)> <노힐부득> <달달박박> 등 우수한 설화문학 작품이 많이 있다.

삼국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문화적인 접촉이 있었으며, 한문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진(先進) 고구려는 국가교육기관에서 한자 및 중국고전을 교육했으며, 일찍이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가 있어 뒤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 의해 <신집(新集)>으로 개찬되었다.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乙支文德將軍)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宇仲文詩)>는 한시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것으로 우수한 작품이다.

백제(百濟) 역시 육조(六朝)의 문물에 빈번히 접하였으며,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니 고흥(高興)이 지은 <서기(書記)>라는 역사서가 있었으며, 한문을 일본에 전한 것도 백제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후진(後進)이었던 신라는 강수(强首), 설총(薛聰) 등의 한문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최고 귀족층인 성골(聖骨)·진골(眞骨)에 대하여 육두품(六頭品) 출신 귀족으로 신라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신라 말기에 접어들어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지식계급층의 최치원(崔致遠), 최광유(崔匡裕), 박인범(朴仁範), 최승우(崔承祐) 등의 활약으로 한문학이 크게 일어났다. 육두품 이하 출신인 그들은 정치적으로 신라적인 골품제(骨品制)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더러는 현실을 도피해 신선사상(神仙思想)에 귀의하고 더러는 왕건(王建)에 협력하여 뒤에 고려의 문신층(文臣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문학은 외교문서의 작성, 비문(碑文), 역사서술(歷史敍述), 불교적인 저술(著述) 등 실제적인 데 필요했으며 자연히 형식에 치중한 변려문(騈儷文)이 발달하였다.

이들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에 의해서 한시도 본격적으로 발달되는데, 당시 한시는 최고 귀족층의 향가문학에 대립하여 선진 지식층의 문학으로 성장했으며, 당시(唐詩)의 영향을 받아 율어(律語) 절구(絶句) 등 금체시(今體詩)가 위주였다. 그리고 신흥문학이었기에 동시대 중국에서는 만당풍(晩唐風)이라 하여 염려(艶麗)한 기교를 중시하는 시가 유행하였는데 신라의 한시는 질박하고 건강한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변려문과 한시로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한문학가는 최치원이었다.

<張 德 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