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삼국시대 문학/삼국시대 문학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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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문학의 특성[편집]

三國時代文學-特性

삼국시대 이전의 원시문학을 집단가무시대라 한다면 삼국 문학은 개성 자각(個性自覺)의 문학시대라고 집약(集約)해서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떠한 부족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웅일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영웅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평범한 필부(匹夫)나 촌녀(村女)의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집단적·객관적·영웅적인 것에서 개인적·주관적·서정적인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 문학은 전대(前代)보다 발전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가요와 설화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가요의 유래에 대한 설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서야 겨우 그 생명을 유지한 사실로 보아 아직도 전대 문학의 잔영(殘影)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고구려는 민족 이동 초기에 한반도를 개척한 씩씩한 기상(氣像)을 물려받은 웅용(雄勇)한 부족이었기 때문에 웅혼(雄渾)한 서사문학이 특히 발달하여 많은 설화문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동남과 서남쪽에 위치한 신라와 백제는 풍요한 자원과 온화한 기후에 만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특히 서정적인 가요문학이 발달했다.

삼국문학의 전개[편집]

三國文學-展開

삼국시대에 있어 문화 교류의 중요한 기틀이 된 학자는 유교문화뿐 아니라 불교문화의 큰 힘을 입게 되었는데, 불교의 전래는 그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는 제19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보낸 중 순도(順道)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들어온 인도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고, 신라는 눌지왕(訥祗王=재위 417-457) 때 고구려의 승 묵호자(墨胡子)가 민간에 전래하고,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39) 때 이차돈의 죽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불교는 거의 천년간 한민족의 신앙을 지배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했고, 이 때부터 한문과 같이 들어온 유교와 고구려 말에 들어온 도교(道敎)의 사상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정신적·사회적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한문학[편집]

三國時代-漢文學

기원전 2세기경 한자가 전래된 이후 2천여 년간 한문화가 파상적인 영향을 끼쳐 모든 면에서 우리 고유 문화는 쇠잔·위축된 반면 또 새로운 외국 문화의 수용(受容)으로 고도의 세련된 문화를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문자를 가지지 못한 한민족(韓民族)이 한문화와 함께 전래된 한자의 사용으로 이제까지 구송된 역사·문학을 정착시켰다. 처음 한민족은 한자에 대하여 고대 동방에 새로운 광명을 가져온 한족(漢族)의 찬란한 문화의 상징으로서 애써 배웠을 것이며, 유(儒)·불(佛)·선(仙) 삼교의 심오한 교리는 또한 인생의진리와 대결하는 무기가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솟구치는 시정을 서술하는 데 한문학은 한문자와 아울러 삼국의 귀족을 매료(魅了)시키고 여기에서 이식의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이 싹트고 꽃피게 되었다.

고구려의 한문학[편집]

高句麗-漢文學

삼국 중 중국에 가장 가까운 고구려는 대략 3세기인 산상왕(山上王=재위 196-227) 때부터 위(魏)·오(吳)와 교통했으므로 많은 문물과 함께 한적(漢籍)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일례로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碑文)이 남아 있어 그 웅대한 판도와 아울러 찬란한 문물을 짐작케 한다.

또 기록에 의하면 애초에 <유기(留記)> 백 권의 사기(史記)가 있었는데 영양앙 때에 이문진이 <신집(新集)> 5권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오언고시(五言古詩)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대국(大國)인 수(隋)나라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던 늠름한 무인다운 면목이 엿보인다.

백제의 한문학[편집]

百濟-漢文學

백제는 육상(陸上)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나중에는 해상으로 중국과 연락하여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중국의 동오(東吳), 왜(倭)와도 교역하여 그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근구수왕(近仇首王) 1년(375)에는 박사(博士) 고흥(高興)에 의하여 <서기(書記)>가 이루어졌고, 그 당시 박사 왕인(王仁)은 일본에 <천자문(千字文)> <논어(論語)>를 전래시켜 일본 문화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신라의 한문학[편집]

新羅-漢文學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시대에 한자가 전래되었으리라고 추측되나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국사(國史)>를 수찬한 것은 진흥왕(眞興王) 6년(545)이므로 백제보다 2세기나 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한문학 작품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은 비록 굴욕적인 송시(頌詩)이나 외교문학의 소산으로 현재까지 전한다. 또 한문학의 전래와 함께 당나라에 많은 유학생들을 보내어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이름이 전하는 한문학자로서는 태종무열왕 때의 강수(强首)를 비롯하여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골번(骨番) 등이 있고, 신라 <국사>를 수찬한 거칠부 등은 그 사적은 없어졌으나 영원히 이름을 기억할 만한 사람들이다.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편집]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 2년(414)에 그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비를 세우고 비에 대왕의 사적(事蹟)을 새겼다. 이 비는 만포진(滿浦鎭) 건너편 만주 지안 현(輯安縣)에 있는데 높이 24자(尺)에 고구려 임금 대대의 계통과 대왕이 나라를 크게 일으킨 역사를 예서(隸書)로 새겼다. 이는 한민족에 한자가 전래된 연대와 우리나라 글씨의 본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이문진[편집]

李文眞 (생몰연대 미상)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때의 태학박사(太學博士).

왕 11년(600)에 왕명으로 그 때까지 나온 책을 간추려 쓴 <신집(新集)> 5권을 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책은 전하지 않는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편집]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611년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지어 보냈다는 오언절구(五言絶句). 이 시를 받은 우중문은 때마침 피로하고 굶주려 전의(戰意)를 잃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이 틈을 타서 을지문덕이 추격하여 살수(薩水), 곧 지금의 청천강에서 대승(大勝)했다 한다.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헤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공이 하마 높았으니

만족하고 이만 그쳐 주게나.)

왕인[편집]

王仁 (생몰연대 미상)

백제의 학자.근구수왕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오진 천황(應神天皇)의 태자를 가르쳐 일본에 한문학을 일으켰다. 그의 후손들은 일본의 서부 고치(河內)에서 살았다. <고지키(古事記)>에는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라 기록되어 있고, <니혼쇼키(日本書記)>에는 와니(王仁)라 기록되어 있다.

고흥[편집]

高興 (생몰연대 미상)

백제의 학자. 375년(근구수왕

1)에 박사가 되어 백제에서 최초로 역사책 <서기(書記)>를 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는 또 의약(醫藥)·시귀(蓍龜)에 의한 관상술·음양오행술(陰陽五行術)에도 능했다 한다.

거칠부[편집]

居柒夫 (생몰연대 미상)

신라 진흥왕 때의 대신으로 성은 김씨.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

내물왕의 5대손으로 545년(진흥왕 6) 대아찬으로서 왕명으로 <국사(國史)>를 수찬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 고구려를 공략하여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철령) 이남의 10여 군을 빼앗고 576년(진지왕 1) 상대등(上大等)이란 벼슬에 올랐다.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편집]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이 650년(진덕여왕 4년)에 법민(法敏)을 시켜 당나라 태종(太宗)에게 지어 보냈다는 한문 오언시(五言詩).

이 시는 사대(事大)의 예의를 갖추어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첨문학(阿諂文學)의 효시(嚆矢)이기는 하나 신라 외교술의 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시풍(詩風)은 비록 한문이지만 아름답고 풍치가 깃들여 신라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와 중국의 <전당시(全唐詩)>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幡旗何赫赫 鉦岐何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강수[편집]

强首 ( ? -69)

신라의 한학자·문장자. 초명은 두(頭),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 어릴 때부터 한문학에 뛰어나 벼슬길에 오른 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654년(태종무열왕 1년)에 당나라에서 온 어려운 국서(國書)를 쉽게 해석, 그 답서(答書)를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성품이 본래 청렴하여 집안이 가난했고, 문무왕 때는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또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을 풀이했다고 한다.

설화문학[편집]

說話文學

일찍이 북방에 자리잡은 고구려는 최초로 한반도를 개척하여 들어온 웅혼(雄渾)한 기상과 함께 광활한 국토를 지배한 활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 문학적 성격도 정적인 서정문학보다는 동적인 서사문학을 이룩해 놓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일찍이 나라가 망하고 또한 그 문헌을 불살라 버린

외적 조건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이렇다 할 문학적 업적을 전할 수 없었다.

웅건한 고구려의 벽화(壁畵)와 함께 그 문학의 수준도 짐작할 수 있으나 나라가 망하자 문헌적 유산도 인멸의 비운을 겪게 되니 예술도 민족·국가와 더불어 융성하고 전통을 살릴 수 있음을 직감케 한다. 고구려의 시가는 앞서 소개된 <황조가> 외에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명주가(溟州歌)> 등이 문헌 가운데 전하고 있으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줄거리만이 <고려사(高麗史)>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에 적혀 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할 때 문헌의 진보함에 놀라 불살라 버렸다 하니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고구려의 대표적 설화인 <온달 설화> <미천왕 설화>를 비롯하여 몇 개의 설화는 고구려 설화문학의 귀중한 유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외에도 질투를 하다 가죽 주머니에 담겨 죽은 <관나부인(貫那夫人) 설화>, 나랏 돼지를 잡으러 갔다가 도읍지를 발견하고 주통촌녀(酒桶村女)를 발견하고 혈통을 이을 왕자를 낳았다는 <교축일 설화>, 낙랑(樂浪)왕 최리(崔理)의 딸과 결혼하여 그 나라의 수호적인 자명고(自鳴鼓)를 파괴케 하고 마침내 싸움에 이긴 <왕자호동(王子好童) 설화>, 활을 잘 쏘며 주춧돌 밑에 감추었던 단검(斷劍)을 발견하고 부왕(父王)을 찾아보았다는 <유리태자(類利太子) 설화> 등은 모두 고구려의 설화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는 <도미전>이 전해 오고 있다.

온달 설화(溫達說話)[편집]

고구려의 대표적인 설화.<삼국사기>에 전하며 뒤에 민간설화로 전승되었다. 이 설화에는 유교의 삼강의리(三綱義理)가 가미된 색채를 발견할 수 있고, 유교적인 열(烈)과 효(孝)와 충(忠)을 보게 된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평강왕 때 얼굴이 못생기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바보 온달이라 불리는 마음씨 좋은 사나이가 있었다. 왕이 울기만 잘하는 그의 딸, 평강공주에게 울려거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 후 공주는 커서 가난하고 어리석은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청하니 이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주는 온달과 부부가 되어 왕궁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살림을 장만하고 온달로 하여금 용맹과 지혜를 갖도록 내조(內助)를 한 끝에 온달은 용맹한 장군이 되었고, 드디어 후주(後周) 무제(武帝)의 군사를 맞아 예산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임금의 칭찬을 받아 부마(駙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공을 세운 후 전사하였다.

미천왕 설화(美川王說話)[편집]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표적인 설화.

미천왕이 왕손으로서 일반 상민과 같은 불우한 생활과 갖은고초를 겪다가 뒤에 왕위에 오른다는 것으로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봉상왕(熢上王)은 그의 아우 돌고가 왕위를 탐낸다 하여 돌고를 죽였는데 돌고에겐 아들 을불(乙弗)이 있었다. 을불은 화를 피해 음모(陰牟)라는 사람의 집에 머슴을 살았는데 주인은 그에게 온갖 어려운 일을 시켰다. 그는 달아나 압록강에서 소금장수를 하던 중 도둑으로 몰려 관가에서 태형(笞刑)을 당하기도 하고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때 봉상왕이 폭군으로 악정을 하자 신하들은 새 임금을 세우려고 왕손인 을불을 찾게 되었다. 오랜 수소문 끝에 평민생활을 하던 을불을 찾게 되는데 봉상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을불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미천왕이다.

도미전(都彌傳)[편집]

백제의 대표적 설화.<삼국사기> 및 <오륜 행실도> 권3 열녀조에 실려 전함.

주제는 정절(貞節)로 백제 여인의 결백한 생활을 반영한 것임. <삼국사기> 열전 제8 도미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실려 전한다.

도미는 백제 사람인데 그 아내가 매우 아름답고 정절이 있었다.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시험해 보고자 신하에게 거짓왕의 차림을 시켜 도미의 처에게 보내니 도미의 처가 꾀를 써서 속였다. 뒤에 속은 줄 알고 도미를 잡아 눈을 뺀 후 배에 실어 강에 흘려 버리고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니, 처가 다시 지금 월경(月經)이 있는 중이라 속이고 도망쳐서 강에 이르러 통곡했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이르기에 그것을 타고 천성도(泉城道)에 이르러 우연히 아직 살아 있는 남편을 만나 함께 고구려로 도망하여 거기서 한평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다.

가요[편집]

歌謠

우선 백제의 가요를 살펴보면 지리적으로 아늑한 위치에서 생활했으므로 그들의 문화도 찬란했을 것이나 문헌의 유실로 그 모두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백제 시가의 일부는 고려·조선를 통하여 궁중가악(宮中歌樂)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고려사> 악지(樂志)나 <증보 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의 문헌에

<선운산가(禪雲山歌)> <무등산가>

<지리산가(智異山歌)> <정읍사(井邑詞)> 등의 민요를 전하고 있다.

백제인들은 온화하고도 치밀하여 음악을 좋아했고, 역대의 왕들은 모두 노래를 좋아하여 그 가락이 청신하고 화려했다.

또 신라의 노래는 유리왕 때의 <도솔가>에서 시작되어 가악(歌樂)적인 형태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1세기의 <회소곡> <돌아악(突阿樂)>, 3세기의 <사내악(思內樂)> <물계자가(勿稽子歌)>, 5세기의 <우식악(憂息樂)> <치술령곡> <대악>, 6세기 말-7세기 초의 <실혜가(實兮歌)> <해론가(奚論歌)> <원사(怨詞)> 등의 곡명을 전하다가 7세기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는 <서동요(薯童謠)>에 이르러 비로소 향찰(鄕札)로 정착되었다.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혜성가(慧星歌)>, 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풍요(風謠)>까지는 민요적인 형태를 보여주면서 삼국통일기에 위치한 7세기 말에 이르러 향가의 독특한 형태인 사뇌가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또 이 향가는 처음에 가요의 성질상 유동문학으로 존재했을 것이나 향찰이나 표기 수단을 빌어 정착되었을 것이며 그 문학적인 성격도 분명해졌을 것이다.

정읍사(井邑詞)[편집]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유일한 백제의 노래.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노래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 구백제(舊百濟)에 유행하던 민간노래인 듯하며, 고려·조선 때 궁중음악으로 쓰였다. <고려사>악지에, "정읍(井邑)은 전주의 속현(屬縣)인데 그 현인(縣人)이 행상(行商)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매 그 아내가 근처 바위에 올라 바라보며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害)를 입을까 함을 이수(泥水)에 탁(托)하여 노래하였다 하는 바, 세상에 전하기는 등점망부석(登岾望夫石)이 있다"고 기록되어 남편을 기다리는 행상의 아내가 부른 노래라 한다.

<악학궤범>에는 이 노래의 가사가 실려 있어 그 원형은 알 수 없어도 소박한 표현 속에 면면한 향토적인 서정과 여심(女心)이 깃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前腔)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小葉)아흐 아으 다롱디리

(後月空 全)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디랄 드리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金善調) 어긔야 내가논대 졈그랄 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葉) 아으 다롱디리"

(달아 높이 돋으샤/ 멀리 멀리 비취오시라/ 저재 다니시는가요/ 즌듸를 드대올세라/ 어찌다(마음) 놓으시(리)라/ 당신 가는 데 점길세라)

이 노래는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음에도 이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몸이나 편안히 다니시라고 달에게 축원하는 아름다운 여심의 간절한 표현이다.

이 노래에서 달은 곧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뜻하며 이를 향해 여인이 축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읍사>가 음악으로 이렇게 작곡된 것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일 것이다.

선운산가(禪雲山歌)[편집]

<고려사> 권71에 기록되어 이름만 전해오는 백제 가요.

<선운산가>는 "장사(長沙=茂長) 사람이 전쟁터에 출정하여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지라 그 아내가 남편이 그리워 선운산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長沙人征役 過期不至 其妻思之 登禪雲山 望而歌之)"하며,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무등산가(無等山歌)>도 "무등산은 광주(백제, 武珍州)의 진산(鎭山)이요, 광주는 전라의 큰 읍인데 이 산에 성을 쌓고 백성이 의뢰하여 편안하고 즐겁게 살며 노래를 불렀다 (無等山 光州之鎭 州在全羅爲巨邑 城此山 民賴而安 樂而歌之)"라고 기록되었다.

<방등산가(方等山歌)>에 대해서는 기록하기를 "방등산은 나주의 속현 장성 지경에 있는데, 신라 말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이 산에 웅거하여 양가(良家)의 자녀가 많이 잡혀 갔다. 장일현(長日縣)의 여자가 또한 그 중에 있어 이 노래를 지어 즉시 와서 구원하지 않음을 슬며시 나무랬다 한다. (方等山在羅州屬縣長城之境 新羅末 盜賊大起 據此山 良家子女 多被擄掠 長日縣之女亦在其中 作此歌 以諷其夫 不卽來求也)"고 기록되었다.

<지리산가(智異山歌)>는 "구례현의 여자가 자색(姿色)이 있으며 지리산에 사는데 집이 비록 가난하되 부도(婦道)를 극진히 하는지라 백제왕이 그 아름다움을 듣고 욕심을 채우려 했으나 이 노래를 지어 죽기를 맹세하고 좇지 않았다(求禮縣人之女 有姿色 居智異山 家貧盡婦道 百濟王國其美 欲內之 女作是歌 誓死不從)"고 역시 <고려사> 권71에 기록되었는데 노래의 가사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회소곡(會蘇曲)[편집]

신라 때의 민간 노래.유리왕(儒理王) 9년(32)에 6부의 여자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한 패씩 거느리게 하여 7월 기망(旣望=음력 16일)으로부터 길쌈 내기를 시켜 팔월 보름에 이르러 그 성적을 심사하여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여 노래와 춤으로 즐기게 하였다 하는데, 그것을 '가위(嘉俳)'라 하였다.

그 때에 진 편의 한 여자가 '회소(會蘇), 회소(會蘇)'라 하여 그 소리가 매우 슬프고 아름다웠으므로 뒷사람들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것이 곧 <회소곡>이라는 것이며, 노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회소'는 지금의 '아서라, 말아라'의 뜻인 '아소, 마소'의 뜻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에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물계자가(勿稽子歌)[편집]

신라의 가요, 내해왕(奈解王, ?-230) 20년(215)경의 군인 물계자(勿稽子, 생몰 연대 미상)의 작이라 한다.

물계자가 보라(保羅)와 갈화(曷火)의 싸움에서 모두 큰 공을 세웠으나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아내를 하직하고 산에 들어가 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5 물계자 편에 " … (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 사비산에 들어가 대나무의 성벽을 슬퍼하고 그것에 기탁하여 노래를 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맞춰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지으며 은거,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우식악(憂息樂)[편집]

신라의 가요.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눌지왕이 지었다 함.

이는 왕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이 박제상(朴堤上)의 수단에 의해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지었다 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음. <삼국사기> 권45 박제상전에 이 가요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음.

달도가[편집]

신라 때의 가요. 지은이와 지은 때는 미상.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경의 노래라 함. 가사는 전하지 않고, <증보 문헌비고> 권106에 그 사실만 기록되어 있음.

치술령곡[편집]

신라 가요. 지은이와 지은 연대는 미상이다.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러 일본에 갔다가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왜왕(倭王)에게 붙들려 참혹하게 살해를 당했다. 박제상의 처가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여러 날 동안 통곡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지어 불렀다 함. 가사는 전하지 않고, <문헌비고>에 그 유래와 가요명이 전한다.

돌아악(突阿樂)[편집]

신라의 가요. 탈해왕(脫解王) 때의 작품으로 그 가사는 전하지 않음.

양주동은 '突阿'는 곧 '돌아'의 차자(借字)라 하여 노래의 첫 부분이 '달아 달아'로써 시작한 노래이니 이는 아마 신라 가요 중에 자연을 노래한 최고의 서정가라 할 수 있다.

실혜가(實兮歌)[편집]

일명 <피척가(被斥歌)>라고 함. 신라 진평왕 때 실혜가 지음.

가사는 전하지 않으나 내용은 하사인(下舍人)이던 진제(珍提)가 참소를 입어 억울하게 귀양살이하게 된 사실과 그의 충성심을 읊은 것임. <삼국사기>

권48 <실혜전>에 다음과 같이 전함.

" … 이 때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선조 때부터 충성으로써 나라를 위하고 공의 재량도 드러나는데, 지금 영신의 참소를 입은 바 되어 멀리 죽령 밖 황벽한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또한 원통하지 않은가, 어찌 이 사실을 바른 대로 변명하지 않은가 하니 실혜는 대답하기를 옛날 굴원(屈原)은 결백하고 곧아 초빈으로 귀양을 갔고,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했으나 진(秦)의 극형을 받았으므로 영신에 현혹되는 임금과 충성스러운 선비를 배척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옛날도 또한 그렇거늘 이를 어찌 슬퍼하랴" 하며 드디어 왕에게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장가(長歌)를 지어 그 뜻을 전했다.

해론가(奚論歌)[편집]

신라의 가요.신라 진평왕 40년 해론(奚論)이 백제 군사와 싸우다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자 그를 조상해 불렀다는 노래. 가사는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 권47 계론전에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 … 군사들이 서로 싸움에 임할 때 해론은 모든 장병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친께서 운명하신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내 또한 백제 사람과 여기서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은 나의 죽을 날이다 하고 드디어는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적 몇 명을 죽이며 싸우다가 전사했다. 진평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 유족에게 후한 상을 내려 구휼했는데, 이 때 어떤 사람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장가를 지어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양산가(陽山歌)[편집]

신라의 가요. 지은이와 지은 연대는 미상.신라 태종무열왕 때 김흠운(金歆運)이라는 귀골이 백제 군사와 싸우다가 양산(陽山)에서 최후를 마치니, 그때 사람들이 이 노래를 지어 서러워 했다 함.

운니요(運泥謠)[편집]

일명 풍요(風謠). 신라의 가요.선덕여왕 때 승려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 불상을 조각할 때 흙을 나르던 남녀들이 부른 노래라 함. 현존하는 향가 중

<혜성가> 다음으로 오래된 작품. <삼국유사> 권4 양지사석(良志使錫) 조에 그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함.

"석 양지는 그 조고(祖考)가 향읍이 자세하지 않고 오직 선덕왕조에 사적을 나타냈다. 석장(錫杖=중의 지팡이) 위에 포대의(布代衣) 하나를 걸어 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곡식 등속을 넣되 포대가 차면 날아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 했다.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신이(神異)함이 이와 같았다. 한편 잡예(雜譽:藝)에 통하여 그 신묘함이 비길 바 없으며 또한 서화(書畵)에 뛰어나 영묘사의 장육삼존(丈六三尊)·천왕상(天王像)·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 탑 밑에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 좌우금강신(左右金剛神) 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 그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만들 때 … 성중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민요에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럽더라 서럽도다 이 몸이여, 공덕(功德) 닦으러 온다' 하여 지금도 향인(鄕人)들이 방아를 찧을 때 그렇게 부르니, 대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 논평하건대 사(師:양지)는 가히 그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실하여 대방가(大方家)로서 뒷구석에 숨은 사람이라 하겠다. 칭송하기를 "제파(齊罷)하니 당전(堂前)의 석장은 한가롭도다. 가만히 옷을 입고 노압(爐鴨)에 분향하면서 잔경(殘經)을 읽고 나니 남은 일이 없도다. 원만한 소상(塑像)을 만들고 나서 합장하고 보리라."

화랑문학[편집]

花郞文學

처음 신라는 경주 지역의 6부를 근거로 일어났으며, 진한·마한·가락·가야(伽倻) 등을 통합하여 부족국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아 오다가 뒤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비로소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삼국통일을 이룩하기까지에는 화랑제도(花郞制度)와 화백(和白)과 같은 제도적 운영의 효과가 큰 힘을 발휘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그때 들어온 불교를 정치와 문화 방면에 이용하여 유(儒)·불(佛)·도(道) 3교의 결정체인 원화(源花)와 화랑을 신봉하게 되었다. 고려 때 각훈(覺訓)이 찬한 <해동 고승전(海東 高僧傳)> 법운조(法雲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했다.

"37년 비로소 원화를 받들어 선랑(仙郞)을 삼았다. 처음에 군신(君臣)이 사람을 알 도리가 없어 모여 함께 놀게 하고 그 행위를 보아 들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녀 두 사람을 골랐으니 하나는 남무(南無)요 하나는 준정(俊貞)이다. 3백여 인을 모았더니 그 두 여자가 서로 시새워하여 준정이 남무를 유인,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에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 무리들은 싸우고 흩어지매 그 후로는 남자를 뽑아 단장을 시켜 받들어 화랑을 삼았다. 이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닦고, 혹은 가악으로써 서로 기꺼워하고, 산수(山水)에 놀아 멀어도 아니 미치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고 그 옳은 이를 뽑아 조정(朝廷)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는 현좌(賢佐) 충신(忠臣)이 이로 좇아 뛰어나고, 양장(良將) 맹졸(猛卒)이 이로 말미암아 생겼다 하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르되 풍류(風流)라, 실은 3교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였으니, 말하자면 들어서는 집에 효하고, 나서는 나라에 충함은 노사구(魯司寇)의 뜻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하여 말이 없는 교를 행함은 주주사(周柱史)의 종(宗)이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화(化)라 하고, 또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아름다운 이를 골라 단장을 시켜 받들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나라 사람이 다 높이 섬겼으니 이는 대개 왕화(王化)의 방편이라 했다. 원랑으로부터 나말까지 무릇 3백여 인인데 그중 사선(四仙)이 가장 어질고 또한 세기중(世記中)과 같다."

또한 <삼국사기> 진흥왕조와 사다함조(斯多含條)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부터 비롯하여 신라 통일 때 그 무리가 큰 활약을 했고, 통일 후에는 한 풍류적 존재로 변모한 듯하다. 그들은 도의와 가락과 자연을 통하여 단결을 도모하였고, 이들 화랑의 생활은 풍류의 도를 이룩하고 이것은 곧 신라 향가문학의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