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통일신라시대 문학/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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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讀

향찰과 함께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국어를 표기하던 것으로, 그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그 명칭은 고려 때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처음으로 이서(吏書)란 명칭이 보이며, 조선 태조 때에 지은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 이도(吏道)·이두(吏讀) 등의 이름과 그 밖에 '吏頭·吏吐·吏套·吏札' 등의 여러 가지 표기가 문헌에 보인다. 처음 신라의 설총이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吏讀'의 명칭은 고려의 <제왕운기>에 보이는 '吏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書'의 뜻은 어의 그대로 '吏'는 이문(吏文)·이서(吏胥)의 '吏'이며, '書'는 글 또는 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서리(胥吏)들을 상대로 사용하는 글, 즉 일반 공용문서나 공용문장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때 호칭된 '吏道·吏讀·吏頭·吏吐·吏札·吏套' 등의 용어는 그 머리글자 '吏'가 공통적이며, '吏書'의 '吏'와 같은 뜻이며, '道·讀·吐·札·套' 등은 관념에서 제각기 이름 붙인 것으로, 고려시대부터 이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래의 학설은 이두가 삼국시대부터 쓰여졌고, '향찰'과 같은 것이라 하는 등 이설이 분분하기도 하다.

신라 때 성했던 향찰은 신라시대의 자주적인 기풍에서 사대적인 문화에 압도당한 고려에 들어오면서 한낱 연회(宴會)의 여흥으로 떨어지거나 점차 일반 문화에서 쓰이지 않게 되었다. 고려 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 11수는 이러한 향찰 표기의 쇠퇴 과정에서 신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의욕의 발로였으나, 고려시대에는 향찰로 표기된 노래, 즉 '향풍가체(鄕風歌體)'라 하여 상층 계급에서 여흥으로만 그쳤다. 향찰이 쇠퇴함에 따라 우리의 국어 구문(構文)에 맞는 관계사(關係詞)나 특수어를 표기하여 일부 승려와 관리들에 의해 공문서·증서 및 탑비(塔碑)·종명(鐘銘) 등에 사용됨으로써 이두 표기는 그 기틀을 마련했다. 고려 때 발달한 이두는 이조에 들어와 유교문화의 융성 과정에서 그 사용 범위가 확대되었고 그 명칭은 여러 가지로 불려졌다. 이두는 한자를 차용한 문자인 점에는 향찰과 같으나 그 사용범위와 표기체계가 달랐다.

즉 이두가 국어에서 접미형태(接尾形態)나 특수어에 사용하는 문자 또는 표기체제였고, 서리(胥吏)·복예(僕隸)들을 중심으로 관민 사이에 쓰는 공용문자 또는 공용문장을 뜻한다. 향찰과 이두가 국어를 표기하려는 동일 언어 의식에서 발달한 것이기는 하나 그 목적의식에서 구별되며, 이두는 일반 문자 생활 밖에서 사용된 특수 표기인 점에서 그 사용이 제한되었다. 이두는 향찰의 뒤를 이어 고려시대에 발달했으며, 조선에 들어 <대명률직해>에 의해 그 용법과 용도가 확대됨에 따라 널리 사용, 훈민정음 창제 후에도 여전히 공용문서 등에 그대로 쓰여져 영·정시대(英正時代)까지 성했으나 마침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향찰로 표기된 신라가요를 '이두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며, 이두를 설총이 만들었다는 전설적 기록이 있기는 하나 마땅히 향찰문학이란 명칭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