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통일신라시대 문학/향찰
鄕札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한 고대 국어, 또는 이두로 된 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니 (1) 이두문자라는 설(정인보). (2) <균여전>에는 범서(梵書=옛날 인도 문자)를 연포(連布)한 것이라는 설. (3) 이두문자 이전에 있던 고유문자라는 설 등이 있다. '향찰'이란 명칭은 <균여전>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은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보고 같은 시대의 한림학사 최행귀(崔行歸)가 감탄하여 이를 한시로 번역하면서 쓴 것으로, 여기에 보이는 향찰은 신라어로 적은 문장으로 해석된다. 첫 단계로 한문이 외국에서 들어온 국명·인명·지명 등을 표기할 때, 한자의 의미와는 아무 관계 없이 그 음만을 취하여 표기하는 가차(假借)의 용법과 같은 것으로, 향찰·이두 같은 표기법이나 일본의 만요가나(萬葉假名)·가나(假名) 등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국어에서 한자의 음을 빌어 고유명사를 표기한 예는 금석문(金石文)에서도 표기 예를 찾을 수 있다. 둘째 단계는 한문이 점차 생활과 동화됨에 따라 국어 전반을 표기하려는 의욕은 한문을 해독하려는 모든 지식층에 의하여 시도되어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문화는 창조와 모방 가운데서, 곧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민족성·자주성을 드러내게 마련이며, 향찰문자도 그러한 민족적 요구의 소산이다.
한문을 해독하려는 상류 지식층들은 제각기 자기의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한 끝에 마침내 언어에 상응(相應)하는 표기 방법을 창안하여 언어 문자 생활의 불편을 덜었다. 국어의 표기 의식은 국어의 형태 요소뿐 아니라 의미 요소까지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언어의 전면적 표기를 시도했다. 향찰은 이렇게 국어의 표기 문자로서 그 체계를 확립하니 향가가 바로 향찰로 표기된 대표적인 문학 유산이다. 향가인 <처용가>를 예로 든다면,
"東京 明期 月良 (셔불 발기 달랑)
夜入伊 遊行如可 (밤들이 노니다가)
入良沙 寢矣 見昆 (드라사 잘애 보곤)
脚鳥伊 四是良羅 (갈오이 너이라라)
二隱 吾下於叱古 (두흘은 나하엇고)
二隱 誰支下焉古 (두흘은 뉘하안고)
本矣吾下是如馬 於焉 (믿이 나하이다 말언)
奪叱良乙 何如僞理古 (밧랑을 엇다 하리고)."와 같이 향찰로 표기된 향가에는 명사·동사를 비롯한 모든 말을 우리말 문장으로 노래함에 있어 한자가 나열되어 있다. 그 표기에서 원칙적으로 의미 요소에 대하여는 훈차(訓借)를, 형태 요소에 대해서는 음차(音借)를 취하고 있다.
향찰은 이처럼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국어를 표기한 문자체계인 바, 일찍이 당악(唐樂)에 대한 향악(鄕樂). 당언(唐言)에 대한 향언(鄕言), 당사(唐辭)에 대한 향어(鄕語), 당인(唐人)에 대한 향인(鄕人)·향토(鄕土) 등 문헌적 기록의 호칭으로 미루어 한문체제에 대한 국어의 표기 문체라 할 수 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향찰은 삼국에서 발달하여 통일신라에 와서 대성되었다. 즉 5-6세기경에 발달한 향찰의 전면적 표기방식은 한자음이 국어의 음운체계에 맞도록 고정되면서 널리 성행, 7-8세기경 향가문학의 난숙과 함께 그 전성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