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전기 문학/근대 문예사조와 본격 문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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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학[편집]

近代文學

문학을 하나의 여기(餘技)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권선징악이나 설교 또는 계몽적인 목적의식에서 벗어나 진지한 자세로 현실과 대결하는 한편 문학 본래의 예술성을 창조하려는 움직임이 3·1운동 이후 1920년부터 대두되었다. 이 본격 문학은 제재(題材)를 광범한 사회현실 속에서 구하고, 작가가 객관적으로 사건의 진전이나 작품인물을 다루며, 또 박력있는 사실적인 문장으로 묘사하려는 문학을 말한다. 또 이러한 현대문학으로서의 조건을 구비한 본격 문학기는 우리 문학에 있어 3·1운동을 전후하여, <창조(創造)> 등 문예 동인지가 속출한 시기를 가리킨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국권 강탈 이후 실시해 온 무단정치를 다소 완화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문화에 대한 쇠사슬을 늦추었다. 이 때 3·1운동 직전 일본에서 김동인(金東人)·주요한(朱耀翰)·전영택(田榮澤) 등에 의해 동인지 <창조>가 나와 현대적인 문학운동의 횃불을 들었고, 뒤이어 <폐허(廢墟)> <백조(白潮)>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등 동인지 내지 월간지가 나와 새로운 문예 창작들을 이룩하여 놓았다. 주요한의 <불놀이>는 현대 자유시를, 그리고 김동인의 문장 혁신에 의한 근대적 사실주의(寫實主義) 소설은 전영택·염상섭(廉想涉)·현진건(玄鎭健)·나빈(羅彬) 등에 의해 자연주의 내지 사실주의 문학을 이룩함으로써 한국 현대문학은 본격적인 탐구와 실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삼일운동과 문예 동인지[편집]

三一運動-文藝同人誌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정치사상의 민족적 레지스탕스 운동일 뿐 아니라 우리 신문학사를 통해서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어 주었다. 3·1운동은 일제의 무단정치와 질곡(桎梏)을 벗어나기 위한 전 민족의 저항이었고, 한국의 독립과 민족자결을 세계에 선언한 근대적 시민운동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비록 이 운동이 민족의 운명과 활로(活路)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으나, 한일합방 후 일본의 식민지로 10년 동안 실시되어 온 가혹한 무단정치는 일시 주춤했고, 외면적인 미봉책(彌縫策)이나마 문화정치로 전환, 언론·집회에 대한 약간의 완화책을 표방하게 했다. 이러한 전환기를 계기로 경제·문화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뜻에서 각처에서 주식회사의 설립 등 경제·산업 운동이 일어났고,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2대 일간신문이 창간되었다. 후일 다시 <조선중앙일보>의 전신인 <중외일보(中外日報)>가 발간되고, 일제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저항하여 민족지로서 활기를 띠었고, 그 학예란(學藝欄)은 문학작품의 발표 기관으로 커다란 공헌을 했다.

한편 그 이전에 발간한 <소년> <청춘>, 그리고 1914년 동경 유학생 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學之光)> 등은 문예 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습작시대의 준비기에 불과했다. 3·1운동 후에는 이른바 문화정치의 후광(後光)을 받아 <서광(曙光)> <서울> <공제(共濟)> <현대> 등의 종합잡지를 비롯하여 <여자계(女子界)> <여자시론(女子時論)> <신여자> 등의 부녀잡지, 그리고 <학생계(學生界)> <학원(學園)> <문우(文友)> <신청년(新靑年)> 등 허다한 잡지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 문학사상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온 것은 <창조> <폐허> <백조> <장미촌(薔薇村)> <금성(金星)> 등의 문예 동인지와 순문예 잡지 <조선문단>, 종합잡지 <개벽>의 출현이었다. 특히 <창조>는 순문학 운동과 리얼리즘 문학을, <폐허>는 퇴폐적인 상징주의를, <백조>는 낭만주의를 각각 내세움으로써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창조와 순문학 운동[편집]

<創造>-純文學運動

한국 현대문학기 최초의 문예 동인지인 <창조>는 1919년 2월 도쿄에서 창간되어 2호까지 나왔고, 3·1운동 후 국내에서 속간, 9호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요한 동인은 당시 도쿄에서 유학중이던 김동인·주요한·전영택·김환(金煥) 등이며, 이들의 활동에 의해 한국 현대문학은 비로소 본격적인 현대 단편소설과 서정(抒情)이 깃든 참다운 현대 자유시의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창조>파의 문학적 성격을 대표하는 김동인은 이광수의 문학이 사회 개량을 위한 설교문학·계몽문학이라 보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인생문제 제시'의 문학, 즉 리얼리즘에 입각한 순문학(純文學)을 제창했다.

<창조>의 동인 중 주로 소설을 쓴 김동인과 전영택의 작품 경향을 보면,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배따라기> 등과 전영택의 <천치(天痴)냐 천재(天才)냐> 등은 모두 근대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단편들이다. 또 주요한은 그 창간호에 <불놀이>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이 시는 우리 신시운동에 있어 획기적인 현대적 자유시로 그 작풍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창조> 동인들은 문학을 그 때까지의 계몽사상의 고취에서 지양하여, 예술성 위주의 본격 문학으로 다루게 되었고, 우리 문학계에 리얼리즘이란 순문예 사조가 도입되었다.

이와 같이 <창조> 동인들은 근대문학의 구체성을 파악, 이광수의 언문일치의 문장에서 일보 전진하여 신문장을 위한 혁신운동을 일으켜 국어체 문장을 확립했다. 예컨대 이광수 소설까지 우리 말에 존재치 않던 동사의 과거·현재·미래의 시제(時制)를 완전히 구분했고, 대명사를 만들고, 방언을 사용하는 등 작품 창작에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따라서 <창조> 시대에 이르러 우리의 순문학은 첫째 구어체(口語體)의 확립, 둘째 계몽문학의 배척, 사실주의에 입각한 순문학운동으로 재출발하니 이는 문예사조로도 큰 전환이며, 창작수법에서도 일대 진보가 아닐 수 없었다.

김동인과 작품[편집]

金東仁-作品

김동인의 공적은 사재(私財)를 털어 순문예지 <창조>를 발간했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중심이 된 <창조>는 순문학운동의 최초의 깃발로 그는 <창조>를 통해 첫째 구어체 문장을 확립하고, 둘째 설교나 계몽성의 목적의식에서 벗어나 근대리얼리즘을 실천했다. 그의 처녀 중편 <약한 자의 슬픔>과 제2작 <마음이 옅은 자여>는 처음부터 심리 묘사와 성격 창조에 그 특성을 발휘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사실성을 부여하였다.

1921년 <창조> 9호에 발표된 단편<배따라기>는 육친 사이의 삼각애정을 취급한 향토적이고 낭만적 정서를 풍기는 우수한 작품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전형(典型)을 창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구어체 문장과 묘사에 이어서 현재·과거에 대한 시제의 구별, '그'라는 대명사의 채택, 그리고 치밀한 구성, 실감있는 묘사를 통해 문학에서 예술성의 창조를 주장하는 등 본격적인 문학을 개척한 근대 단편소설의 최초의 개척자였다. 그는 뒤에 <감자>와 같은 우수한 전형적 자연주의 작품을 발표했거니와 <목숨> <유서(遺書)> <명문(明文)> <정희> <발가락이 닮았다> <K박사의 연구> <김연실전(金姸實傳)> 등에서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작품 경향은 <광화사(狂畵師)> <광염소나타> 등 예술성에 탐닉(眈溺)한 우수한 단편과 <붉은 산> <태형(笞刑)>, 그리고 장편 <운현궁(雲峴宮)의 봄> <젊은 그들> 등 민족주의적 경향 내지 역사소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탐미적인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와 자연주의적인 인생관이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역사소설에서조차 그 근본적 바탕에는 진지한 자세로 현실과 대결하려는 문학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생하고 박력있는 사실적인 문장으로 리얼리즘에 일관하고 있는데, 이는 김동인이 자신의 일생을 문학과 더불어 문학을 위해 죽은 작가적 정신과 아울러 선구자적인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특히 1929년에 발표한 그의 평론 <한국근대소설고(韓國近代小說考)>와 1938년의 <춘원연구>는 그 예리한 분석과 평가로 근대적인 문예 비평의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김동인[편집]

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소설가. 평양 출생. 한국 현대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신문학의 개척자.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이광수의 계몽문학에 반기를 들고 순문학운동을 내세웠다. 진정한 서구적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했고, 이 땅에 본격적인 단편소설에 대한 기반을 세웠다. 단편집에 <감자> <목숨> <김동인 단편집>이 있으며, <운현궁의 봄> <대수양(大首陽)> <젊은 그들> <견훤> 등의 역사소설이 있으며, 평론에 <춘원연구> <한국근대소설고>가 있다. 단편소설 <감자>

<배따라기> <광염 소나타> 등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전형적인 작품이며, <붉은 산>은 민족주의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중편

<김연실전>은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에 <약한 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유서> <명문>

<광화사> <발가락이 닮았다> <K박사의 연구> <대동강> <태형>등의 단편 및 중편이 있다.

약한 자의 슬픔[편집]

(1919)

<창조> 창간호와 2호에 연재된 중편소설. 김동인의 처녀작으로 신경쇠약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의 비극을 그린 것. 성격 창조와 심리 묘사에 주력한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작품이라는 데 문학사적인 의의가 있다.

배따라기[편집]

(1921년)

김동인의 단편소설. 그의 우수한 초기 단편의 하나. 내용은 주인공 '나'가 만난, 자살한 아내에 대한 뉘우침으로 뱃사람이 되고, 자기 때문에 행방을 감춘 아우를 찾아 유랑(流浪)하는 어느 표백자의 이야기.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정서가 담긴 수작으로, 작가 자신이 "여(余)에게 있어서 최초의 단편소설인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 조선글, 조선말로 된 최초의 단편소설일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단편의 기본 형태를 갖춘 한국 최초의 작품.

감자[편집]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소설. 그의 대표작으로 우리 현대문학사를 통한 전형적인 단편소설. 가난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성장한 여주인공 복녀가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인간의 본능과 동물적인 추악한 면을 분석, 현실을 폭로한 전형적인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 이 작품은 환경과 금전의 중요성을 내세운 것으로, 유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광염소나타>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1920년대에 있어서 사회운동을 문학의 배경으로 했던 신경향파의 작품들과도 비슷한 일면이 있는데, 이는 그 시대의 한 특징이기도 했다.

광염 소나타(狂炎―)[편집]

(1930년)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소설. 내용은 천재적인 작곡가 백성수(白性洙)를 주인공으로, 그가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거듭 방화와 살인을 감행함으로써 새 작곡을 한다는 정신병자의 생활을 그린 것. <광화사>와 함께 김동인의 탐미적 경향의 대표작이며, 살인·방화·시간(屍姦)·시체 희롱 등의 악마적 범죄 행위가 예술적인 충동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포, 와일드, 보들레르의 세계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으나 지극히 제한된 평면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주의의 일면인 유전의 무서움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연실전(金姸實傳)[편집]

(1939년)

<문장>에 발표된 김동인의 중편소설. 1920년대의 신여성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김연실'이라는 여주인공이 단지 무절제하게 성(性)의 개방 내지 타락을 통해 선각자연(先覺者然)하는 착각된 20년대 신여성의 일대기를 엮은 것이다. 이 소설은 적나라한 성관계의 묘사로 일제의 출판 불허가 처분을 받은 바 있으며, 작가의 자연주의적 인생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발가락이 닮았다[편집]

(1931년)

김동인이 지은 단편소설. 자연과학의 근거 위에 심리적 갈등을 그린 작품으로,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혈육을 갖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 자신을 기만하면서까지 파멸에서 자기를 구하려는 생에 대한 의지 등 무력한 인간의 숙명을 그린 작품이다.

붉은 산[편집]

(1932년)

<삼천리>에 발표한 김동인의 단편소설. 민족의식을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쓴 것으로, 일제 침략기에 수난받는 민족과 조국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잘 나타난 역작임. 내용은 만주에 이민해 가 있는 동포들의 촌락을 중심으로 '삵'이라는 주인공이 희생을 무릅쓰고 동포를 위해 투쟁한 영웅적인 행동을 그린 것.

운현궁의 봄(雲峴宮―)[편집]

(1933년)

김동인의 장편소설. 내용은 대원군의 일생과 조선 말의 복잡한 내외정세와 풍운을 그린 역사소설. 작자의 민족의식을 나타낸 대표적인 장편이다.

전영택[편집]

田榮澤 (1894-1968)

호는 늘봄, 또는 추호(秋湖). 소설가·목사. 진남포 출생.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 퍼시픽 대학 신학과를 졸업. 1919년 <창조>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 초기에는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후기에는 인도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대표작은 <화수분> <흰닭> <사진> 등이며, 단편집 <생명의 봄>이 있다. 1935년 평양에서 <기독신문> <신생명>을 주간했고, 광복 후 국립 맹아학교 교장을 지냈다. 1955년 기독교 문학인회 회장, 1961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그는 <창조> 2호의 편집여언(編集餘言)에서 "너는 어째 죽음만 쓰느냐 하실 이가 있을 듯하나 모든 비관적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외다. 다만 인생 그것을 그대로 표현해 보느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그 초기작들은 모두 시대의 어두운 면과 불행한 인생을 그렸다.

그의 후기의 단편 <화수분>은 자연주의적 수법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행랑채에 사는 빈궁한 품팔이 지게꾼의 생활을 여실하게 그렸다. 그러나 <생명의 봄> 이후 그의 작품에는 인도주의적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그의 종교적 신앙심이 크게 작용된 때문이다. 그 밖에 <독 마시는 여인> <후회> <김탄실과 그 아들> 등의 단편이 있으며, 장편에 <상춘곡(賞春曲)> 등이 있다. 그는 1925년 이후에는 별로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종교계에 전적으로 투신한 탓으로 그의 작품 생활은 기간이 짧고 양(量)으로 보아 매우 빈약한 편이다.

화수분[편집]

(1925년)

전영택이 <조선문단> 4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자연주의 경향의 소설로 1920년대의 우리 문단 대표작의 하나. 내용은 '화수분'이란 이름을 가진 지게꾼 행랑아범과 그의 아내가 가난을 못 이긴 채 서로 찾아 헤매다가, 길가 소나무 밑에서 추위와 기아(饑餓) 끝에 서로 껴안고 죽는 참상을 묘사한 것이다.

주요한[편집]

朱耀翰 (1900-1979)

호는 송아(頌兒). 시인·언론인·실업가. 평양 출신.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을 졸업했고, <창조>의 동인으로 한국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창조> 창간호에 발표했다. 한국 초창기 시단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신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시집에 <아름다운 새벽> <복사꽃> 등과 <도산전서(島山全書)> 등의 편저가 있다. 그는 일찍 시를 버리고 언론계·실업계에 종사했고, 광복 후에는 정치·시사 평론 등을 많이 발표했다. 일찍이 창가를 거쳐 신체시에서 신시(新詩)의 맹아는 싹텄지만 참다운 뜻에서 현대 자유시는 주요한에서 비롯되었다. <창조>에 발표된 그의 시 <불놀이>를 보면, 신체시의 형식에서 한걸음 더 비약하고, 계몽성의 목적의식에서 벗어나 세련된 정서를 현대 자유시의 발상(發想)으로 형상화했다.

이 시는 근대 상징주의 시의 영향을 받은 듯이 보이며, 신비롭고 낭만적인 동경(憧憬)을 노래했다. 형식은 재래의 4·4조나 7·5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분방한 시상(詩想)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펼쳐놓은 것이다. 이 시로써 한국 현대시는 비로소 본격적인 자유시의 첫 궤도(軌道)에 오르게 되었으며, 주요한은 계속하여 <빗소리> <흰꽃> <아름다운 새벽> 등 여러 작품을 통하여 한국 현대시사를 통해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 처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 …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불놀이[편집]

(1919년)

주요한이 <창조>에 발표한 현대시이다. 한국 최초의 현대시로, 내용은 4월 초파일 불놀이를 배경으로 하여, 사랑을 잃은 젊은 시인의 동경과 고민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폐허와 퇴폐적 경향[편집]

<廢墟>-頹廢的傾向

문예 동인지

<폐허>는 1920년 7월에 창간되어 2호까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동인은 염상섭(廉想涉)·오상순(吳相淳)·남궁벽(南宮璧)·김억(金億)·황석우(黃錫禹)·민태원(閔泰瑗) 등인데, 그들은 대체로 퇴폐적 내지 낭만적 경향의 작품을 썼다. 3·1운동 실패 후의 시대적 분위기 즉 비관·절망·퇴폐의 병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곧 <폐허>의 동인들이었다. 물론 이들 동인들은 그 자신들은 퇴폐적이라 자처하지 않았고, 또 뒤에 각기 자기의 작품세계를 개척했지만, 당시의 시대 현실과 문학 환경이 어두웠던 만큼 퇴폐적 내지 낭만적 경향이 주조(主潮)를 이루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3·1운동 실패 후 당시 비관적 시대에는 세기말(世紀末)적인 데카당스 풍조와 러시아의 근대적 우수문학(憂愁文學)이 스며들어 <폐허> 동인들의 작품 경향에는 감상(感傷)·허무·우울·절망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배어 있었다.

김억은 본래 그 바탕이 서정시인이었는데 창작보다는 외국 근대시를 번역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폐허> 창간호에 19세기 말 프랑스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를 '스핑크스의 고뇌'라고 하여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 베를렌, 그리고 러시아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懊腦)의 무도(舞蹈)>를 1921년에 간행하였다. 이 때 베를렌, 보들레르 등 상징적·퇴폐적인 작품들이 주는 데카당스의 풍조는 우리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시 <폐허> 동인들은 상징주의 시의 시작법(詩作法)보다는 우울·절망·염세 등 그 부수적인 퇴폐 풍조에 더욱 민감했던 것도 사실이다. 동인 황석우는 <애인의 인도(引渡)> <석양은 꺼지다> <태양의 침몰> 등 일련의 상징시를 발표했는데, 그는 최초의 시 동인지인 <장미촌>을 주재했고, 후일 시지(詩誌) <조선시단(朝鮮詩壇)>을 주재했다. 또한 오상순은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허무혼(虛無魂)의 선언> 등의 시를 발표했는데, 그의 초기작품은 대체로 허무적인 절망·고뇌에 번민하는 일면과 영원한 사랑을 동경하는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엿보였다. 한편 프랑스의 데카당스 문학과 함께 러시아의 근대적 우수문학이 영향을 끼쳤는데 염상섭의 처녀작인 <표본실(標本室)의 청개구리>는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이기는 하나 러시아적 침통함과 우울이 반영된 작품이다.

당시 작가들은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투르게네프·체호프 등의 영향이 컸으며, 그 중 염상섭은 그의 자연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그의 초기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외에 <암야(暗夜)>(1921), <제야(除夜, 1921), 그 뒤의 <만세전(萬歲前)> 등에 나타난 침통·우울한 빛깔은 위의 러시아적인 것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리고 시인 남궁벽은 감상주의적 자연도피의 경향을 보이는 등 또 <폐허> 동인들은 점차 다양한 경향으로 제작기 작품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김억[편집]

金億 (1893- ? )

호는 안서(岸曙). 시인. 평북 곽산 출생. 오산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의숙(慶應義孰)에서 수업.

<창조> <폐허>의 동인이며 민요시의 개척자이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번역하여 소개한 베를렌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번역시집인 <오뇌의 무도>는 현대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 아니라 <눈 오는 밤>

<조약돌> 등 민요조의 서정시를 창작하는 한편 우리 시에 대한 압운(押韻)을 시도했다. 후일에는 한시의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백낙천(白樂天)의 서사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은 명역으로 유명하다. 시집에 <해파리의 노래> <안서 시집> <금모래> <봄의 노래> 등이 있고, 번역시집에 <오뇌의 무도> <망우초(忘憂草)> <동심초(同心草)> <기탄잘리> <시몬스 시선집> 등이 있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오뇌의 무도(懊腦―舞蹈)[편집]

(1921년)

김억의 역시집.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으로 주로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수록함. 수록된 작품은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작품 9편, 사맹의 작품 7편, 예이츠의 작품 7편 및 <오뇌의 무도곡> 23편으로 이루어졌다.

홍명희[편집]

洪命熹 (1888-1968)

충북 괴산 출생. 호는 가인(假人, 可人), 백옥석(白玉石), 벽초(碧初).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동경 타이세이(大成) 중학에서 수학. 1910년 귀국후 오산 고보 교장, 연희 전문 교수, 중앙 불교 전문의 교수 역임.

<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1928. 12. 21-1939. 3. 11)에 연재하여 등단했다.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린다. 광복 직후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꺽정(林巨正)[편집]

홍명희의 장편소설로서 조선 명종 때의 의적 임거정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임꺽정은 양주(楊洲)의 백정(白丁)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세력을 규합, 1559년부터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부패한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점점 세력을 확대, 장연(長淵)·옹진(甕津)·풍천(豊川) 등지에서는 관군(官軍)의 추격을 백성들의 도움으로 피했다. 한때는 개성(開城)에 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죽이기도 했으나, 이듬해 형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고, 참모 서임(徐林)이 서울에서 잡혀 투항하자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 항전 끝에 잡혀 사형되었다.

황석우[편집]

黃錫禹 (1895-1959)

호는 상아탑(象牙塔). 시인.

서울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 졸업. <창조> <폐허>의 동인으로, 상징주의 시운동의 기수로 활약했다.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을 주재했고, 후일 시지 <조선시단>을 주재했으며, 시집으로 <자연송(自然頌)>이 있다.

오상순[편집]

吳相淳 (1893-1963)

호는 공초(空超). 시인.경기도 출생.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 철학과를 졸업했고, 1920년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 초기 작품 <허무혼의 선언> 등엔 허무적인 절망과 고뇌, 영원한 사랑을 동경하는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짙다. 1920년대 이후는 작품활동을 중지, 광복 후부터 다시 민족적인 시를 발표했다. 대표작에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한잔술>(1928) 등이 있고, 시집에 <오상순 시선>이 있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남궁벽[편집]

南宮璧 (1895-1922)

호는 초몽(草夢). 평북 출생. 시인. 감상주의적인 자연도피의 경향을 지닌 작품을 발표했다.

<창조> <폐허> 등의 문예지에서 활약했고, <작별의 아픔> <말 (馬)> <대지(大地)의 찬(讚)> 등의 작품이 있다.

염상섭[편집]

廉想涉 (1897-1963)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橫步). 서울 출생.

일본 게이오 대학(慶應大學) 문과 중퇴.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우리나라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완성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신문학의 선구자이며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巨匠)으로 1953년 서울시 문화상, 1962년 3·1문화상 등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장편 <삼대(三代)> <만세전(萬歲前)> 등이 있고 그 외에 <모란꽃 필 때> <취우(驟雨)> 등의 장편과 <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 <두 파산> 등의 단편이 있다.

백조와 낭만주의적 경향[편집]

<白潮>-浪漫主義的 傾向1922년 1월 창간된 <백조>는 순수 문예지로 초기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중심적 구실을 하며 3호까지 발간되었다. 그 동인들은 홍사용(洪思容)·현진건(玄鎭健)·이상화(李相和)·나빈(羅彬)·박종화(朴鍾和)·박영희(朴英熙)·노자영(盧子泳) 등 시인·소설가로 구성되어 한국의 낭만파 또는 백조파로 불려지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때의 낭만주의는 3·1운동 이후의 민족적 비관과 절망으로 말미암아 실망·퇴폐·비애·동경 등이 주조를 이룬 감상주의와 비슷한 것이었다. 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희의 술회대로 <백조> 동인들은 모두 서정적인 애상(哀傷)의 시인·작가들로 <폐허>의 동인들과 흡사한 퇴폐·염세·감상·낭만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백조>파의 성격은 시인들로 대표되는데, 그들은 이념에서는 낭만주의, 기분은 퇴폐주의, 문학태도에서는 상징주의, 예술관에서는 유미적(唯美的)인 것을 내세웠다. 따라서 <백조>파의 문학은 감상·낭만·퇴폐·유미적인 것을 공통된 문학경향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근대 문예사조 면에서 볼 때 후기 낭만주의(後期浪漫主義)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동인 홍사용은 <봄은 가더이다>(<백조> 2호),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3호) 등의 감상적인 낭만시를 발표했고, 나빈은 소설 <젊은이의 시절>(<백조> 창간호),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백조> 2호), <옛날의 꿈은 창백하여이다> 등을 통해 감상과 이상의 세계를 그렸다. 특히 나빈은 19세의 나이에 조숙한 필치로 장편 <환희(幻戱)>를 발표하여 문단의 일대 주목을 받았고, 계속하여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三龍)> <뽕> 등 낭만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발표하여 그 앞날이 촉망되던 중 25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이상화는 <백조> 창간호에

<말세(末世)의

희탄>을 비롯하여, 명편 <나의 침실로>를 발표, 상징적인 수법으로 미지의 신비와 꿈의 세계를 동경하는 낭만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박종화는 초기 작품으로 <흑방비곡(黑房秘曲)> <밀실(密室)로 돌아가다> <정밀(靜謐)> 등의 시를 통해 낭만적 꿈의 세계를 펼쳤다. 그러나 그가 원숙의 경지를 보인 것은 <석굴암(石窟庵) 대불(大佛)> <청자부(靑磁賦)> 등의 후기 작품에서였고, 뒤에 그는 역사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한편 박영희는 <백조> 창간호에 <미소의 허영시(虛榮市)>를 비롯하여 <어둠 너머로>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꿈의 나라로> 등의 비애와 감상의 낭만시를 발표했으나 뒤에 신경향파의 등장 전후부터 평론가로 활약하였다. 또한 현진건은 <백조>의 동인으로 출발, 초기에 <빈처(貧妻)>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墮落 者)> 등 현실에 육박하는 제재(題材)를 다루어, 완벽한 구성, 치밀한 묘사로 한국소설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구현했다.

홍사용[편집]

洪思容 (1900-1947)

호는 노작(露雀). 시인.화성 출생.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백조> <토월회>의 동인으로 시·희곡 등을 썼다. 그는 김덕기(金德基)와 함께 사재를 출자하여 <백조>를 간행했고 감상적인 서사시를 발표했다. 그는 끝까지 청빈 속에서 지조를 지키다 죽었는데 대표작에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있다.

현진건[편집]

玄鎭健 (1900-1941)

호는 빙허(憑虛). 소설가. 대구 출생. 도쿄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개벽>에 단편

<희생화(犧生花)>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처음에 <백조> 동인으로 활약했고, 1921년 <빈처(貧妻)>로써 문명을 얻었다. 그는 <백조>파의 낭만적인 경향과는 달리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단편소설의 개척에 큰 공적을 이룩했다. 대표작으로 단편

<운수 좋은 날>(1924)을 비롯하여 <불>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있고 장편에 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이 있다.

나빈[편집]

羅彬 (1902-1926)

호는 도향(稻香). 본명은 경손(慶孫), 빈(彬)은 필명. 서울 출생. 배재학당을 거쳐 경성의전에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함. 1920년 19세 때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환희>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백조> 동인으로 활약하여 초기에는 애상적·낭만적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는 사실적·객관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작품에는 <환희> 외에 단편 <물레방아> <지형근(池亨根)> <뽕> <벙어리 삼룡이> <전차 차장 일기> 등이 있다. 그 중 <물레방아>는 낭만적인 문장으로 자연주의적인 내용을 그려 문학사적으로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옮아가는 시기의 문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 되고 있다.

환희(幻戱)[편집]

(1922)

나빈이 지은 장편소설. <동아일보>에 연재. 인생 무상을 주제로 한 그의 유일한 장편으로 초기작에서 나타난 감상적·낭만적 경향의 작품이다.

이상화[편집]

李相和 (1900-1941)

호는 상화(尙火). 시인.대구 출생.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과를 졸업, 귀국 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1년 <백조>의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나의 침실로>(1922) 등의 우수한 상징시를 냈다. <백조>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백조>시대의 시편으로 <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묻은 동굴> <가을의 병든 품에다> <나는 술취한 집을 세우련다> 등 당시의 퇴폐적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백조>파가 풍긴 낭만적 풍조와 상징적 수법으로 표현되었으며, 자유 분방한 시상(詩想)으로 탐미적·신비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뒤 신경향파(新傾向派)의 등장과 함께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를 발표하여 시대에 대한 고민을 담아 일제에 저항하는 한편 민족의식의 주체성을 보였다. 광복 후 대구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지고 유고시 10여 편이 백기만 편 <상화와 고월(古月)>에 전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편집]

이상화(李相和)의 시.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박종화[편집]

朴鍾和 (1901-1981)

호는 월탄(月灘)· 시인. 소설가.서울 출생. 휘문의숙을 나와 1921년 <장미촌> 동인, 1922년

<백조> 동인으로 <백조>에 시 <밀실로 돌아가다> 등의 가편(佳篇)을 발표했다. 원숙의 경지를 보여준 것은 <석굴암 대불> <청자부> 등의 후기작에 이르러서였고, 뒤에 역사소설가로 전향했다. 성균관대학 교수, 예술원 회원, 문총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에 <흑방비곡(黑房秘曲)>(1924) 등이 있고 소설에 <금삼(錦杉)의 피>(1938) <대춘부(待春賦)>(1939) <다정불심(多情佛心)>(1942) <여명(黎明)>(1944) <민족>(1947) <홍경래>(1949) <임진왜란> <세종대왕> 등과 수필집 <청태집(靑苔集)>(1942)이 있다.

노자영[편집]

盧子泳 (1898-1940)

호는 춘성(春城). 시인.평남 출생. 1921년경 <백조> 동인으로 감상적인 연정을 읊은 시를 발표했다. 시집에 <처녀의 화환(花環)>, 수상집에 <인생 안내> 등이 있다.

장미촌 금성 영대[편집]

<薔薇村> <金星> <靈臺> 1921년에 창간된 <장미촌>은 한국 최초의 시 동인지로 <백조> 전신에 해당된다. 동인들은 황석우·변영로(卞榮魯)·박종화·박영희·노자영 등으로 구성되어, 시 전문지로서 활발한 시작(詩作) 활동을 보여주었다. 또 1923년에 창간되어 3호까지 낸 <금성(金星)>은 시 전문지라는 뜻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동인은 양주동(梁柱東)·이장희(李章熙)·백기만(白基萬)·유엽(柳葉)·손진태(孫晋泰) 등으로 대체로 낭만적 풍조가 <금성>의 주조가 되었다. 1924년 평양에서 발행된 <영대(靈臺)>는 동인 구성이 <창조>와 흡사하나 민요시인 김소월(金素月)의 새로운 이름이 발견되는 것이 이채(異彩)로우며 <영대>는 여러 가지 경향의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다.

변영로[편집]

卞榮魯 (1898-1961) 호는 수주(樹州). 시인. 서울 출생. <장미촌> 동인으로 출발하여 기지와 수사에 빼어난 특색을 보였고, <조선의 마음> <논개(論介)> 등 민족적인 시정(詩情)을 표현했다. 광복 후 <코리언 리퍼블릭> 주간, 성균관대학 교수, 펜클럽 한국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조선의 마음>이 있고, 수필집에 <명정(酩酊) 40년> <수주 수상록> 등이 있다.

양주동[편집]

梁柱東 (1903-1977)

호는 무애(无涯). 시인·국문학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 1923년 <금성>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 <조선의 맥박(脈搏)>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등 민족감정이 넘쳐흐르는 작품을 발표했다. 1929년 <문예공론(文藝公論)>을 주재했고, 뒤에 국어국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숭실전문학교 교수, 연세대, 동국대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시집에 <조선의 맥박>이 있고, 국문학 연구서로 <고가연구(古歌硏究)> <여요전주(麗謠箋注)> 등이 있다.

이장희[편집]

李章熙 (1902-1928)

호는 고월(古月). 시인.대구 출생. 일본 교토 중학을 졸업. <금성> 동인. <조선문단>을

통해 문단에 등장. 청신하고 감각적이며 세련된 시를 발표해서 우리나라 현대시사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1928년 인생과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대표작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봄철의 바다> 등이 있고, 백기만이 엮은 <상화와 고월>에 그의 시가 전한다.

백기만[편집]

白基萬 (1901-1967)

시인.대구 출생. <금성> 동인으로 <개벽> 등을 통해 <아름다운 달>

<거화(炬火)> <새해를 맞자> 등 정열적인 시를 발표했으나 광복 후에는 별로 작품활동이 없었으며 편저에 <상화와 고월>(1951)이 있다.

김소월[편집]

金素月 (1902-1934)

본명은 정식(廷湜). 시인. 평북 정주 출생.

오산학교 재학 때 김억에게서 시를 배웠고, 고향에서 신문 지국 등을 경영하면서 시작에 전념했다. <진달래꽃>

<산유화(山有花)> <초혼(招魂)> 등 고유정서가 넘치는 그의 시는 현대시사의 빛나는 한 자리를 차지한다. 시집에 <진달래꽃> <소월시초(素月詩抄)>가 있고 유일한 단편 <함박눈>이 전한다. 김소월은 은사 김억의 영향 아래 민요풍의 서정시로 우리 신시상의 뚜렷한 위치를 확보한 전통 시인이다. 그는 지방에서 <영대> 동인으로, 그의 <진달래꽃>은 고려 속요 <가시리>를 현재화한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겨레의 전통적인 애조(哀調)를 세련된 시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시 속에는 낭만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는 전통적인 민족정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 천재적인 시인은 32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진달래꽃[편집]

김소월의 시. 1922년 <개벽>에 발표된 처녀작으로 시집 <진달래꽃>에 실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애송되고 있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축복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그가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점에서 민요 시인이었다면 그 본보기가 될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용운[편집]

韓龍雲 (1879-1944)

호는 만해(萬海). 시인·승려·독립운동가.

충남 출생. 한말 의병운동에도 참가, 3·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종교적·민족적 전통 시인인 동시에 저항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깊은 사색과 신비적인 점에서 인도 시성(詩聖) 타고르와 비교된다. 시집 <님의 침묵>은 그의 대표작이며, 장편소설에 <흑풍(黑風)> 등이 있고, 논문에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 불교서적에 <불교대전(佛敎大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이 있다. 그는 3·1운동이 낳은 최대의 민족시인으로서 아무런 동인활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이고도 전통적인 시의 세계를 이룩했다. 그는 불교의 승려이자 급진적인 불교 개혁론자였고, 또한 3·1운동의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일세(一世)의 지사(志士)였다.

1916년부터 <유심(唯心)>이란 잡지를 통해 시작을 해온 그는 당시의 퇴폐적인 사조에 초연,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탁월한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의 시는 연애시인 동시에 종교시요 무엇보다 민족적 저항시(抵抗詩)로서 의미를 지닌다. 한용운은 그의 시대를 '님의 침묵'의 시대로 밝혀 놓고, 조국·중생·진리 등으로 표상(表象)되는 '님'을 통해 민족의 현실과 염원을 노래했다. 시집 <님의 침묵>은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이지만, 그 속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또한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이며 명상적(冥想的)인 점에서 인도의 타고르와 비견되며, 종교적·민족적 전통에 뿌리박은 시인으로서, 또 고도의 역사의식을 간직했던 민족시인으로서 평가된다. 그는 문단과의 직접적인 교류도 없이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行人)> <알 수 없어요> 등 명상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독특한 경지를 나타냈다.

님의 침묵[편집]

-沈默

한용운(韓龍雲)의 시집. 1926년에 동서관(東書館)에서 간행. 대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해서 <독자에 게> <최초의 임>을 비롯해서 <칠석(七夕)> <잠없는 꿈> <참말인가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 9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 속에 수록된 일련의 시들은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이면서, 그 속에는 깊은 사상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또한 이 시집 속에 수록된 시들은 모두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씌어진 것들이어서 여기에서 '님'이란 우리로 하여금 무한히 동경케 하는 영원자(永遠者), 혹은 절대자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집 속의 작품들을 통해 종교적·사회적 활동의 전체를 관류(貫流)하는 세상에서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슬픔과 고뇌가 희망과 의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시가 형이상학적이고 명상적이면서도 종교적·민족적 전통에 뿌리박은 고도의 역사의식 때문일 것이다.

자연주의 소설[편집]

自然主義小說

한국의 자연주의 문학은

<창조>파에서 싹터 1921년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이르러 본격적인 소설로 등장했다. 본래 자연주의 문학은 19세기 말엽 근대 부르주아 역사가 해체되면서 사실주의 다음 등장한 것으로 졸라에 의해 실험소설이라 불릴 만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생태적(生態的) 연구와 관찰 실험을 문학에 적용했다. 따라서 자연주의 문학은 시대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추악상을 폭로하는 것이 특징인데, 1920년대는 3·1운동 뒤의 비관적이고 어두운 시대였으므로 이 사조가 소설의 주조를 이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며, 염상섭은 그 대표적인 작가로 <암야>

<제야> <만세전>(1923) 등을 통해 식민지하의 어둡고 황폐해 가는 현실을 반영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염상섭은 인생이나 현실을 객관적으로 해부·묘사하겠다는 자연주의적 태도 아래 광인 김창억(金昌億)이란 인물을 통해 당시 지식인의 어둡고 절망적인 감정을 보여주었다. 또 <만세전>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상, 몰락해 가는 중산계급, 추방되는 농민, 그리고 20년대를 묘지(墓地)와 같은 어두운 현실로 보았다. 현실의 암흑면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는 염상섭의 초기작의 특징이며, 뒤의 <잊을 수 없는 사람> <금반지(金半指)> <윤전기(輪轉機)> 등에 이르러 점차 냉철한 관찰과 객관적인 묘사로 심화되었다.

현진건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빈처> <할머니의 죽음> <지새는 안개> <운수 좋은 날> <불> 등의 대표작들을 통해 치밀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로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당시 '한국의 모파상'이라 불릴 만큼 리얼하고 치밀한 묘사로 한국소설의 리얼리즘을 개척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운수 좋은 날>과 <불>은 하층계급의 적나라한 생활을 소재로 어두운 현실의 폭로와 비애를 그린 작품이다.

<운수 좋은

날>에는

하층계급의 조야(粗野)하면서도 인정있는 생활감정이 잘 나타나 있고 <불>은 봉건 인습의 하나인 '민며느리'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창조>파의 거장 김동인의 <감자> <명문(明文)> 등은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이후의 자연주의 문학을 한층 발전시킨 전형적인 작품들이다.

또 전영택의 <화수분> <사진>

<흰닭>도 자연주의적 경향의 작품들이며, 낭만적인 것에서 자연주의적인 문학으로 전환한 나빈의 후기작 <물레방아> <지형근>

<벙어리 삼룡> <뽕> 등도 우수한 작품들이다.

또 그 밖에도 이기영의 <가난한 사람들>, 최서해의 <탈출기(脫出記)>, 주요섭의 <추운 밤> 등은 신경향파(新傾向派)에 속하지만 일면 자연주의적인 수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1920년대 초부터 대두된 한국의 자연주의 문학은 그 개념상 서구 문학처럼 사실주의 다음으로 시대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이루어진 엄격한 우리의 자연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혼성(混成) 사조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 문학 속에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구별이 무의미하며,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으로 형성 발전해 왔음은 이들 작품의 성격이 잘 말해 주고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標本室―)[편집]

(1921년)

염상섭이 <개벽>에 발표한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작품. 박물(博物)선생이 청개구리를 실험대에 놓고 해부하는 것처럼, 1920년대의 현실을 냉철히 관찰한 작품이다. 1인칭 소설로 현실고(現實苦)에 지쳐 있는 '나'라는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광인 김창억을 부주인공으로 해서 성격 분석과 함께 인생의 어두운 면을 폭로했다. 특히 작자는 광인 김창억을 통하여 인생을 자기 신조대로 충실하게 살 것을 내세우고 있다.

만세전(萬歲前)[편집]

(1923년)

염상섭이 지은 중편소설. 처음 <신생활(新生活)>에 <묘지(墓地)>라는 이름으로 연재했으나 1924년에 제목을 고쳤다. 1919년 이전 일제 식민지하에 신음하는 암담한 시대 현실을 배경으로 몰락해 가는 중산계급과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비판, 폭로하고 있다. 완고한 아버지, 전형적으로 보수적인 형, 협잡꾼인 김의관, 자포자기한 '나'라는 주인공 등 절망적인 현실에서 생활하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비애와 환멸이 주를 이룬다.

삼대(三代)[편집]

(1932년)

염상섭이 발표한 장편소설. 한국 신문학사를 통해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다. 사실적인 수법으로 시대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과 인간 심리를 미묘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만세전>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이다.

운수 좋은 날[편집]

(1924)

현진건의 단편소설. 그의 대표작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전형을 이룩한 우수작. 하층계급 인력거꾼의 생활과 비애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하층계급의 소박하면서도 인정적인 생활감정이 그들이 사용하는 조야(粗野)한 일상어를 통해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빈처(貧妻)[편집]

(1920년)

현진건의 단편소설. 묘사가 치밀하고 섬세한 사실주의적 작품이다. '나'라는 가난한 무명작가와 그 아내를 중심으로 일상생활 속의 사소한 사건을 통하여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의 정신과 '나'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했다.

B사감과 러브레터[편집]

-舍監-

현진건의 단편소설.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하였다. 객관적인 삼인칭 서술계열의 소설로서, 반어적 대립과 전환을 통해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격의 이중성 내지 위선의 문제를 희극적으로 해석한 심리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과 상황의 괴리와 대립으로 규정지어지는 '아이러니'의 이원적(二元的) 대조는 현진건 소설의 구조적 미학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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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현진건의 단편소설. 자연주의 내지 사실주의 경향의 대표작의 하나. 내용은 하층계급의 인습적인 가족제도에서 취재. 나이 어린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지나친 학대와 노동, 그리고 밤이면 나이 많은 남편에게 받는 시달림으로 결국은 견딜 수 없어 집에 불을 지른다는 이야기. 민며느리의 심리적인 갈등이 세련된 문장으로 그려져 있고, 작자의 사실적인 역량이 반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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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개벽>에 발표된 나빈의 단편소설. 성적으로 방종한 농촌의 하층계급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 생활감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실주의적 작품.

물레방아[편집]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나빈의 단편소설. 초기의 낭만적 경향에서 자연주의 경향으로 전환한 작품. 나빈의 대표작으로 <뽕>과 같이 하층계급의 방종한 여성의 생활과 비극을 그린 작품.

조선문단과 개벽[편집]

<朝鮮文壇>-<開闢>

1920년에 창간되어 1926년까지 계속된 종합지 <개벽>은 복잡·미묘한 문예사조의 혼류(混流)와 대립 속에서 순문예지 못지않은 신문학의 중요한 발표기관이었다. 특히 한국의 자연주의 문학은 <개벽>과 1924년에 창간된 순문예지 <조선문단>을 중심무대로 형성 발전했다. 예컨대 자연주의 작가들, 염상섭·현진건은 <개벽>을 통해 등장하고 성장한 사람들이며, 김동인·나빈 등의 자연주의 소설은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특히 <조선문단>은 동인지가 아닌 최초의 순문예 잡지로 자연주의 문학의 중요한 온상(溫床)으로, 또 신인의 등용(登龍)을 비롯하여 신문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당시 문학적 경향으로 <개벽>은 자연주의 문학에서 신경향파 작가들의 중요한 활동무대였고, <조선문단>은 이광수·염상섭·김동인·현진건·나빈, 그리고 전영택·김억·주요한·박종화 등 자연주의 내지 인생파의 작가들이 활동했다. <조선문단>은 그 지상을 통하여 최학송·채만식(蔡萬植)·박화성(朴花城)·임영빈(任英彬)·한설야(韓雪野) 등 유력한 신진 작가들을 배출시켰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자연주의 문학은 <개벽>과 <조선문단>을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이 두 잡지는 당시 문예사조의 주류를 대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개벽(開闢)[편집]

1920년에 창간, 1926년까지 72호 이상을 낸 종합지. 천도교에서 경영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 잡지로 그 창작란은 신문학사상 불멸(不滅)의 업적을 남겼다. 처음 자연주의와 신경향파 작가들이 활동했으나, 당시의 문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시대조류를 반영하여 박영희·김기진 등이 계급주의에 입각한 프로 문학론을 발표했다. 이 잡지를 통해 염상섭·현진건·김동인·이상화·최학송·김기진·박영희·나빈·김동환 등이 활약했다.

조선문단(朝鮮文壇)[편집]

방인근(方仁根) 출자, 이광수 주재로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1924년 9월에 창간되어 20호 내외로 휴간, 1927년 김여수(金麗水)·남진우(南進祐)에 의하여 속간되었으나 다시 휴간, 1935년 이학인(李學仁)에 의해 복간되었으나 1년 후 다시 폐간되었다. 이광수·김동인·김억·염상섭·주요한 등이 중심이 된 이 문예지는 자연주의 문학과 반(反)계급주의의 방향을 취했다. 최학송·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영묵 등 역량있는 많은 신인들을 배출해서 신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920년대의 신극운동[편집]

-年代-新劇運動

신파극을 제거한 참다운 뜻에서의 근대적인 신극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룩되었다. 1910년대에 시작된 신파극은 원각사·혁신단·유일단의 시기를 거쳐 1921년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에서 신극으로 재출발했다. 이 신극 단체의 동인들은 홍해성(洪海星)·김우진(金祐鎭)·조명희(趙明熙)·마해송(馬海松)·김수산(金水山)·홍난파(洪蘭坡) 등 유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조명희 작 <김영일(金英一)의 사(死)>, 홍난파 작 <최후의 악수> 등의 공연을 통해 우리 극단에 혁신적인 기풍을 불어넣었다.

특히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는 관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 대본은 1923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어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집이 되었다. 1922년 윤백남은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하고, 윤백남의 <운명(運命)> <기연(奇緣)> 등을 공연했는데, 그 동인은 안종화(安鍾和)·원수일(元秀一)·이월화(李月華) 등이었다. 그러나 이 창작들은 희곡이 지녀야 할 여러 가지 조건에 미비한 점이 많았고, 본격적인 근대극에는 미치지 못했다.

1922년 신극단체 토월회(土月會)가 결성되어 비로소 신극사상 획기적인 신극운동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토월회는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는 종래의 신파극에서 탈퇴, 연극의 예술성을 위주로 한 참다운 신극을 수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 동인은 도쿄 유학생을 중심으로 박승희(朴勝喜)·김복진(金復鎭)·김기진·김을한(金乙漢)·이승만(李承萬)·이서구(李瑞求) 등으로 조직되어, 전후 87회의 공연을 가졌다. 그들은 체호프의 <곡>, 유진 필로트의 <부활(復活)>, 마이어 펠스터의 <알트 하이델베르크>, 스트린드 베리의 <채귀(債鬼)> 등의 외국 희곡을 상연하는 데 주력했고, 그 중 본격적인 창작극으로서는 박승희 작 <길식(吉植)> <이 대감(大監) 망할 대감> <사(死)의 승리(勝利)> <아리랑 고개> 등 당시 민족의 수난과 비애를 표현해서 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뒤 춘추극장(春秋劇場)·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신흥극장(新興劇場) 등 신극 단체가 있었으나, 1931년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를 중심으로 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창립으로 유치진(柳致眞)의 <토막(土幕)> <소> 같은 본격적인 창작 희곡이 현대극의 무대 위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김우진[편집]

金祐進 (1897-1926)

전남 장성 출생. 아호는 초성(蕉星).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1920년대 한국 신극 운동의 주도자였으며 '극예술 협회', '동우회 순회연극단'을 이끌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근대극다운 희곡을 남겼으며, 서구의 표현주의 문예이론을 수용하는 한편, 이를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버나드 쇼의 사회 문제극과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 극의 영향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정오(正午)> <이영녀(李永女)> <산돼지> 등이 있다.

윤백남[편집]

尹白南 (1888-1954)

본명은 교중(敎重). 극예술가·대중소설가.

공주 출생. <매일신보> 편집장. 광복 후에는 서라벌예대 학장. 1954년 예술원 회원을 역임. 신극 운동 초창기에 <예성좌> <민중극단> 등을 지도했고, <대도전(大盜傳)> <흑두건(黑頭巾)> 등의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그 밖에 영화감독도 하고 잡지 <월간야담(月刊野談)>을 발간하기도 했다.

홍해성[편집]

洪海星 (1893-1957)

연출가·배우.1921년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후에 '신흥극장' '극예술연구회'의 중심인물로 연출을 담당, 한국 신극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토월회[편집]

土月會

1922년 도쿄 유학생을 중심으로 박승희·김기진·김복진·이서구·김을한·안석주 등이 종래의 신파극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근대적 신극을 수립하기 위해 조직된 동인제(同人制)의 극단. 주로 번역극을 공연, 87회의 공연기록을 남겨 신극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박승희[편집]

朴承喜 (1901-1964)

극예술가.신극운동의 선구자이며 토월회의 대표자. 토월회 운영에 따른 재정면을 전담하는 한편 희곡 창작과 연출로 신극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광복 후 토월회의 재건을 꾀했으나 유지곤란으로 실패했다. 그의 희곡으로 <길식> <이 대감 망할 대감> 등이 있다.

신경향파와 프로 문학시대[편집]

新傾向派-文學時代3·1운동 이후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문예사조가 한 동안 번성했으나 그 퇴조와 함께 1933년을 전후해서 신경향파라는 하나의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 문화정치의 외형적인 완화책에 따라 언론·집회에 대한 약간의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의 민족운동은 그 양상을 달리하여 새로운 거점을 찾으려는 기운이 농후했다.

때마침 1920년을 전후하여 사회적·사상적으로 어떤 신경향, 즉 일본을 통해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과 그 운동이 식민지적 민족의식과 공감·합류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당시 객관적인 정세로 3·1운동까지는 오직 순수한 민족주의적 사상과 운동 방법을 지상(至上)의 것으로 생각했으나, 3·1운동 실패 후에는 다른 새로운 민족운동을 기대하던 때인 만큼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공감과 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 방면의 민중 단체가 속출하여, 1922년 서울청년회, 1923년 북성회(北星會),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聯盟)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등이 각각 조직되었고, 각지에 소작쟁의(小作爭議)·노동쟁의(勞動爭議) 등 사회주의적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 이후 이러한 사회운동을 배경으로 문학상에 나타난 것이 이른바 신경향파 문학이다. 신경향파는 조직적인 문학운동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문학 경향이었는데 이 시기에 그 문학적 이론을 담당했던 박영희와 김기진 간에는 문학 자체의 방법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1925년 카프(KAPF)가 결성되어 정치성이 농후한 목적의식이 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자 종래 경향파에 속하던 작가·시인도 여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카프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공명하고 동조하는 일부 작가를 동반자(同伴者) 작가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의식의 문학에 대하여 반기(反旗)를 들고, 순수문학 지향의 입장에서 문학의 정통성(正統性)을 주장한 염상섭·양주동 등의 국민문학운동이 있었고, 또 이에 절충적인 태도로 나온 절충파도 있었다. 문단을 둘러싸고 이러한 사조적인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외부 정세와 카프의 내부적 분열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1931년부터 위축기(萎縮期)로 들어가 검거(檢擧) 선풍과 함께 카프는 1935년 해체되고 말았다. 거의 10년간의 격심한 문단 대립기는 지나고, 다시 전 세계를 휩쓴 전체주의적 압력이 문단에도 가해져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으나 우리 문단은 암흑기 직전의 순수문학 지향의 성황기(盛況期)를 맞이했다.

신경향파의 특색[편집]

新傾向派-特色

신경향파 문학은 1920년 이후의 당시 사회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직접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그 문학적 경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것은 <창조> <폐허> <백조> 등 동인지(同人誌) 시대의 문학이 탐미적·퇴폐적·낭만주의적 문학으로, 현실에 무력하고 감상적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성과 염증으로 좀더 현실적인 문학이 요청되었고, 따라서 신경향파와 같이 사회의식과 계급의식이 농후한 문학경향이 문단의 주조로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신경향파는 직접 <백조>파의 무력한 감상과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동으로 대두되었다.

처음 신경향파 문학을 우리 문단에 도입한 사람은 후기 <백조> 동인으로 참가했던 김기진인데, 그는 일본 유학중 그 곳의 프로문학 현상에 크게 자극받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초기 김기진의 신경향파에 찬동하고 나선 사람들은 박영희·박종화 등 <백조> 동인들이었고, 1923년 <백조>파는 붕괴되고 드디어 신경향파 문학의 이름으로 계급문학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은 뚜렷한 계급의식이나 목적의식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고, 자연발생적으로 유산계급(有産階級)에 대한 막연한 항거의식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신경향파 문학을 대변하는 최학송의 <탈출기(脫出記)>에서 주인공은 어떤 목적의식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항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이 빈궁한 데서 오는 본능적인 반항의식이었다. 따라서 신경향파와 뒤에 조직적인 계급문학을 지향한 카프의 프로 문학과는 그 목적의식 면에서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시기적으로 보아 1923년부터 대두한 신경향파는 조직적인 문학운동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문학의 경향이었다. 따라서 신경향파 문학과 조직적이며 정치성을 띤 1925년 카프 이후의 프로 문학 시기와는 구별된다. 둘째, 신경향파 시기는 무산계급에 대한 인도적인 동정심(同情心)과 본능적인 반발에서 출발하고 있는 만큼 혁명적·전투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카프 이후의 프로문학보다는 계급적인 각성이나 자각이 미약했다. 셋째, 신경향파 시기의 작품이 대체로 단순한 빈궁문학(貧窮文學)이 아니면 소박한 반항문학인 데 대하여 카프 이후의 작품은 목적의식 면에서 그러한 빈궁의 사회적·계급적 원인이 추구되고 그에 대한 반항을 혁명적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으로 인도적인 동정심과 본능적인 반발에서 출발한 신경향파는 점차 확고한 계급의식의 기초로서의 프로문학으로 발전될 소지(素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 신경향파의 작품 성격에는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불>같이 아직도 자연주의적 색채와 민족주의적 의식이 남아 있었으나 점차 계급적인 목적의식으로 발전해 갔다.

신경향파에 참가한 사람들은 김기진·박영희를 비롯하여 이상화·조명희·최서해·이익상·주요섭 등이었으며, 박종화·안석주·김형원·심훈 등은 지지자들이었다. 김기진과 박영희는 이 방면의 이론가로 활약하는 동시에 소설 <붉은 쥐>

<사냥개>를 각각 썼으나, 당시 이 시대의 인기 있는 작가로서는 <탈출기>의 최학송을 들 수 있다. 이 문학파의 특색은 빈곤한 하층인물을 중심으로 반항적 요소가 현저하며, 결말은 으레 살인이나 방화로 끝나는 것이 예사였다.

신경향파의 이론[편집]

新傾向派-理論

신경향파 초기에 김기진은 후기 <백조>파 동인으로서 감상과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백조파를 붕괴시킨 주동적 인물이었다. 김기진과 더불어 박영희는 신경향파 초기의 이론적인 면을 담당했지만, 이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박종화였다. 신경향파 문학의 이론은 1923년부터 대두되어 주로 <개벽>을 통해 발표되었다. 김기진은 1924년 <개벽>지에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 계급> <금일(今日)의 문학, 명일(明日)의 문학>이란 논문을 통해 "금일의 문학, 이것은 자연주의에 반항해 일어난 모든 현상을 요소로 하는 문학이다." 라고 했다. 또 1923년 <개벽>에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世界化)>라는 논문을 통해 예술과 문학의 새로운 운동은 근본적으로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에서부터 시작할 것, 예술과 문학도 그 사회의 개혁을 위한 투쟁의 문학, 행위의 문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경향파 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시 <백수(白手)의 탄식(嘆息)>(1924년<개벽>)을 통해 무력한 지식인을 비판했고 소설

<붉은 쥐>(1924)를 쓰는 등 시·소설·평론을 통해 초기 신경향파 문학의 전위적 역할을 했다. 박영희 또한 1924년의 <문제의 조선문학>(<개벽>)에서 '자연주의에서 신이상주의로 기울어지는'경향을 지적하고 "기형적으로 발달한 부분적 생활을 마취시키는 문학은 말고 생활의 수평적 향상을 위한 민중적 문학을 건설할 때가 이르렀다"고 김기진의 이론에 찬동했고, 1925년

<신경향파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에서 신경향파는 무산계급에 유용한 문학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초기에 박종화 또한 <역(力)의 예술>을 통해 새로운 문학의 필요성을 요구했고, 1925년 <계급문학 시비론(階級文學是非論)>(<개벽>)에서 "인간 생활의 필연적 발생의 계급문학"이라 했고, 한때는 <아버지와 아들>(1924<개벽>)<여명(黎明)>(1944<개벽>) 등의 작품을 통해 신경향파 문학에 투신하기도 했다.

신경향파의 주요 작품[편집]

新傾向派-主要作品

1922년 <염군(焰群)>과 1923년 <파스큘라>가 조직되고, 그에 따라 신경향파 문학의 이론적인 맹아가 나타났으나, 그 작품 형태는 1924-5년에야 비로소 그 첫모습이 보였으며, 작품보다 이론이 선행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신경향파 문학에 참가한 주요 작가들로는 김기진·박영희를 비롯하여 이상화·조명희·최학송·이익상·이기영(李箕永)·주요섭 등이었다. 그 구체적 작품의 양상을 보면 초기부터 이론을 담당했던 김기진의 <붉은 쥐>(1924),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死)>를 비롯하여 박영희의 <사냥개>(1925), <전투(戰鬪)>(1925) 등이 대체로 당시 호평을 받은 가작들이다. <사냥개>는 주제와 사건 전개가 비교적 자연스럽고, 수전노인 늙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분위기 묘사가 치밀하여 당시 신경향파 작품으로서 높은 수준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을 뚜렷하게 대변하고 또 가장 인기가 있던 작가는 최서해로 그는 어릴 때부터 하층의 노동생활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작품화해서 각광을 받았다. 그는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故國)>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 1925년 그의 대표작 <탈출기>를 비롯해 <박돌(朴乭)의 죽음> <기아(飢餓)와 살육(殺戮)>(1925) <큰물 진 뒤>, 그리고 <폭군>(1926) 등을 발표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간도(間島)를 무대로 한국인의 고난과 빈궁, 그리고 중국인에 대한 반항을 그렸고, 국내를 배경으로 한 것도 대부분 빈궁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의 특색은 빈곤한 하층계급을 주인공으로 한 반항적 요소가 깃들어 있으며, 결말은 대개 살인이나 방화로 끝나는데 이러한 경향은 신경향파 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같은 시기의 신경향파의 작품으로, 이익상의 <광란(狂亂)> <쫓겨가는 사람들> 주요섭의 <인력거꾼>(1925) <살인>(1925) 등이 있다. 이익상의 <광란>은 금전만능의 속된 사회와 그 모순을 풍자하기 위해 돈을 요정과 길거리에 뿌린다는 내용이고, <쫓겨가는 사람들>도 이 시대의 작품으로 비교적 평판있는 소설이다. 주요섭의 <인력거꾼>은 '아찡'이라는 중국인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반(反)종교의식 과정을 그린 것이고, <살인>에서는 매춘부를 여주인공으로 하여 싹터 가는 반항의식을 그렸다.

또한 조명희의 <땅 속으로>(1925) <농촌 사람들>(1926), 이기영의 <가난한 사람들>(1925), <농부 정도룡(農夫鄭道龍)>, 송영(宋影)의 <용광로(鎔鑛爐)>(1926) 등도 신경향파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신경향파의 특색은 빈궁을 공통적인 소재로 삼고 있으며 자연주의 소설과 다른 점은 반항의식을 크게 강조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일반적인 특징은 첫째 빈궁을 소재로 노동자·소작인·매춘부 등 하층계급의 인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둘째 빈궁에 대한 반항의식이 나타나 있으며, 셋째 그 반항의 방법이 계급의식적인 투쟁이 아니라 방화 또는 살인으로 결말을 맺는다. 끝으로 신경향파의 작품은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빈부의 관념을 과장해서 표현하거나, 계급의식을 관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기영[편집]

李箕永 (1896-1984?)

충남 아산 출생. 호는 민촌(民村). 동경 세이소쿠(正則)학교 중퇴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카프 맹원이 되었다. 1924년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후 <서화(鼠火)>, <인간 수업(人間受業)>, <고향(故鄕)>, <신개지>, <땅>,

<두만강>, <봄> 등을 발표하였다. 희곡 작품으로 <그들의 남매>,

<월희(月姬)> 등이 있다. 광복 후 월북하여 조선 예총 위원장 등 각종 기관의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집단성과 프로 문학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을 쓴 작가로 평해지고 있다.

조명희[편집]

趙明熙 (1894-1942)

충북 진천 출생. 호는 포석(抱石).

3살 때 부친을 여읨. 서당과 진천 소학교를 다니고, 서울 중앙 고보를 중퇴하고 북경 사관학교에 입학하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3·1운동에 관계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도일 후 도쿄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1920년 <김영일의 사>를 발표하여, 희곡무대에서 상연하였다. 귀국 후 1924년 봄 잔디밭 우에 간행. 1928년 구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지도부에서 근무했다. <땅 속으로>, <농촌 사람들>, <춘선이>, <이쁜이와 용이> 등을

발표하였다.

이태준[편집]

李泰俊 (1904- ?)

강원도 철원 출생. 호는 상허(尙虛). 도쿄 상지 대학 예과를 중퇴했다.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五夢女)>로 등단. 이화 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역임.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 <문장(文章)>지를 주관하였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부의원장으로 좌익 문학 운동을 하다가 1946년에 월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까마귀>, <달밤>, <사냥>, <제2의 운명>, <불멸의 함성> 등이 있다. 그는 탁월한 미학적인 문체로 예술적 정취가 짙은 단편을 남겼으며, 그러한 서정적인 작품 속에서도 시대 정신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최서해[편집]

崔曙海 (1901-1933)

본명은 학송(鶴松). 함북 성진(城津) 출생. 일찍 부모를 잃고 국수집 머슴·역부(驛夫)·나무장수, 그리고 간도 등지의 방랑생활을 통해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그의 기구한 생활과 체험을 뒤에 작품화하여 작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장. 1925년 대표작 <탈출기>를 비롯하여 <기아와 살육> <박돌의 죽음> <큰물 진 뒤> 등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중견작가로 성장했다. 그의 작품은 빈궁문학으로 신경향파 시대에 크게 각광을 받았으나 그 후 발표된 문학작품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 작품집으로 <혈흔(血痕)> <홍염(紅焰)>이 있다.

탈출기(脫出期)[편집]

(1925년)

최서해가 <조선문단>에 발표한 단편소설. 그의 대표작이며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다. 서간문 형식의 1인칭 소설로 내용은 주인공 '나' 박군이 친구에게 글월을 보내는 형식으로, 빈궁한 생활고로 허덕인 끝에 집을 뛰쳐나온다는 것으로,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반항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고난의 생활체험을 작품화한 것으로, 간도를 무대로 한국인의 수난과 빈궁한 생활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익상[편집]

李益相 (1895-1930)

소설가·언론인.전북 출생. 1925년을 전후로 4-5년 동안 작품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학예부장,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역임. 작품으로

<광란>(1925), <쫓겨가는 사람들>(1926), <어촌(漁村)>(1925),

<흙의 세례> 등이 있다.

주요섭[편집]

朱耀燮 (1902-1972)

호는 여심(餘心). 소설가·교육자.

평양 출신. 상해 호강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1년 <개벽>에 <추운 밤>을 발표해서 문단에 등장, 그 후 <인력거꾼>(1925), <살인>(1925), <개밥> 등 하층계급에서 취재한 신경향파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활약했다. 그 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추물(醜物)> 등의 단편소설과 장편 <구름을 잡으려고>가 있다. 1931년부터 <신동아> <아이생활> 등을 편집, 광복 후 <길> 등의 장편을 썼고, 펜클럽 사무국장을 거쳐 경희대 교수를 지냈다.

신경향파 시대의 시[편집]

新傾向派時代-詩

신경향파 시대는 이론과 소설이 주조를 이루기는 했으나 한편 그 경향을 띤 시인도 등장했다. 일찍이 <백조>파의 감상과 퇴폐적인 경향에 대하여 반기를 든 김기진은 1924년 <개벽>에 시 <백수(白手)의 탄식>을 발표하여 무기력한 지식인을 풍자했다.

<백조>의 동인 이상화는 처음에는 퇴폐와 낭만에 젖은 <말세의 회한> <허무교도의 노래> 등의 시를 발표했고, <나의 침실로>는 그의 초기 시를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신경향의 주제로 1925년 <가상(街相)>(<개벽>)에서 현실의 낙오적 존재인 달구지꾼과 거지를 노래했다. 그러나 이상화는 1926년 <조선병(朝鮮病)> 등 민족의 비애와 절망을 노래했는데, 그 대표작은 1926년 <개벽>에 발표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그는 초기의 낭만적인 동경과 꿈의 세계를 읊은

<나의 침실로>에서 일대 경향을 바꾸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20년대의 식민지적 현실과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서사풍(敍事風)의 작품을 썼다.

1920년대의 식민지 현실을 '빼앗긴 들'로 사실화(寫實化)하고, 민족의 울분을 격조 높게 노래한 이 시는 한국 신시사상 명편(名篇)일 뿐 아니라 민족의식의 주체면을 강조하고 일제에 항거한 민족시, 저항시로서의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 무렵에 등장한 박팔양(朴八陽)의 초기 시 <여명이전(黎明以前)>, 1925년 <개벽>에 발표된 김창술(金昌述)의 <촛불>과 1926년의 <긴 밤이 새어지이다>(<개벽>) 등도 모두 신경향파 시대의 시로서 공통적 경향인 새시대의 막연한 여명과 이상을 노래했다. 한편 신경향파에 직접 속하지 않았으나 그 경향에 가까운 사회의식을 가졌던 시인은 김동환(金東煥)과 김형원(金炯元)이다. 김동환은 처녀시집 <국경(國境)의 밤>으로 문단에 등장했는데, 이것은 애국적인 감정으로 황량한 북국(北國)의 정서를 유감없이 노래한 서사시였다.

<국경의 밤>은 소박한 민족의식과 야성적인 울분을 토로한 것으로, 밀수길에 남편을 보낸 아내의 안타까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또 <밤불>에서 소작쟁의(小作爭議)에 남편을 보낸 아낙네의 심정을 노래했는데, 김동환은 무산파의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향토적인 민족정서를 노래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김석송은 미국의 민중 시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 <벌거숭이의 노래>(1923), <아! 지금은 새벽 4시>(1924<개벽>) 등에서 민중시인(民衆詩人)적인 경향으로 민족애와 함께 새시대의 꿈을 노래했다.

김동환[편집]

金東煥 (1901- ? )

호는 파인(巴人). 시인.함북 경성(鏡城) 출생. 일본 도요(東洋) 대학 문과에서 수업, 1924년 처녀시집 <국경의 밤>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향토색이 짙은 민요시인으로 <눈이 내리느니> <국경의 밤> <북청(北靑) 물장수> 등 주로 북국적인 이국정서를 담고 있다. 종합잡지 <삼천리(三千里)>, 문예지 <삼천리 문학> 등을 주재하여 문단에 공헌이 크며 6·25 때 납북되었다. 시집으로는 <국경의 밤> 외에 <승천(昇天)하는 청춘> <삼인(三人) 시가집> <해당화> 등이 있다.

국경의 밤(國境―)[편집]

(1924년)

김동환의 처녀시집. 이 시집에는 한국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 외에 <북청 물장수> 등 몇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서사시 <국경의 밤>은 밀수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슬픔을, 일제의 압박 밑에 억눌린 민족의 비애로써 읊었고, <북청 물장수>에서는 황량한 북국의 정서와 향토미를 노래한 것이다. 그는 이 시집 하나로써 문단에 등장하여 역량 있는 시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카프의 조직과 프로문학[편집]

-組織-文學

1923년을 전후하여 사회의식을 강조하며 등장한 신경향파 문학은 1925년 8월 카프의 결성과 함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전환했다. 카프가 결성되기까지에는 신경향파적인 조직이 선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조직이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PASKYULA)였다. 염군사는 1922년 9월 이적효(李赤曉)·이호(李浩)·김홍파(金紅波)·김두수(金斗洙)·최승일(崔承一)·심훈(沈熏)·김영팔(金永八)·송영(宋影) 등으로 조직된 최초의 프로문화 단체였다. 이 단체의 강령(綱領)은 "본사는 해방 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이라 하여 문학에 국한하지 않은 광범한 문화운동을 내세웠는데, 이 단체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좌익 문학청년 집단이었다. 또한 파스큘라는 박영희·안석영·김형원·이익상·김기진·김복진(金復鎭)·이상화·연학년(延鶴年)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산계급 문학운동의 한 단체였다. 'PASKYULA'란 명칭은 그들의 두문자(頭文字)를 따서 명명(命名)한 것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배격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을 건설한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강령이었다. 염군사가 문화적인 집단의 성격을 띠고 무산계급 운동에 정치적인 행동으로 가담했으나, 파스큘라는 중견 문학인들의 집단으로 처음부터 문단적인 현상으로 일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파크큘라가 중심이 된 신경향파 문학운동이 점차 활기를 띠어감에 따라 미묘한 불화와 상위성(相違性)에도 불구하고 염군사와 파스큘라는 계급의식을 내세운 이념적인 공통성에서 결국 합동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8월 염군사와 파스큘라는 통일된 단일조직으로 합동하여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orea Artists Proletariat Federation의 약칭)> 즉 'KAPF'가 결성된 것이다.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합동한 카프의 구성원은 박영희·김기진·이호·김영팔·박용대(朴容大)·이적효·이상화·김온·김복진·안석영·송영·최승일·심훈·조명희·이기영·박팔양·한설야(韓雪野)·김양(金陽) 등이었다. 카프의 결성과 함께 파스큘라가 중심이 되어 종래의 신경향파 문학은 뚜렷한 목적의식에 기초를 둔 계급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카프의 사회적 근거가 분명하여진 것은 1926년 1월 <문예운동(文藝運動)>이라는 준기관지(準機關誌)를 발간한 이후부터였다. 카프는 1927년 9월 전국대회를 열고, 철저한 계급의식의 체제를 갖춤으로써 혁명적·전투적인 성격과 함께 볼셰비키적인 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여기서 '제3전선'을 들고 나온 세칭 동경파(東京派)의 조중곤(趙重滾)·김두용(金斗鎔)·한식(韓植)·이북만(李北滿)·홍효민(洪曉民) 등이 새로운 조직으로 등장하고, 카프의 기관지로 <예술운동>을 간행, '무장(武裝)한 계급의식'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과감한 이론 투쟁·조직 운동·대중 투쟁이 아울러 병행해야 한다"는 방향 전환을 모색하여 일본의 동경·평양·수원·개성 등의 카프 지부(支部)가 결성되고, 대회 이후 임화(林和)·윤기정(尹基鼎)·김유영(金幽影)·신고송(申鼓頌) 등이 카프 조직에 참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 자체 내의 논쟁, 절충파와의 논쟁, 내용과 형식의 창작 방법론에 대한 재검토가 제기되었다.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이 연합, 항일민족통일전선으로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가 그 분파작용 끝에 1931년 해체되자, 사회주의 운동은 한층 볼셰비키화했고, 영향은 카프에도 반영되어 '당(黨)의 문학'으로서의 프로문학과 카프의 볼셰비키화가 시작되었다. 1930년 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권환(權換)·안막(安漠) 등은 공산당의 문학으로서 그 지령에 따라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함으로써 카프는 재조직되었고, 문학의 정치 예속화와 함께 '전투하는 계급의식'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러나 1930년을 전후로 한때 성황했던 프로문학은 1931년과 1934년 2차에 걸친 일제의 검거선풍과 탄압, 자체 내의 내분(內紛)·전향(轉向)으로 1935년 카프가 해체되고 순문학의 대두와 하께 프로문학은 점차 퇴조(退潮)하기 시작했다. 프로문학기를 통해 무수한 기관지가 발간되었으나 그 중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문예운동(文藝運動)[편집]

1926년 1월에 창간된 문예지. 프로문학파의 최초의 기관지로 박영희가 주재했다. 창간호에 박영희·김기진·홍명희(洪命憙)·김복진·이상화·조명희·이익상·최학송·이기영 등이 중심이 되어 집필활동을 했고, 3호까지 발간되었다.

예술운동(藝術運動)[편집]

1927년 11월 창간된 카프의 본격적인 기관지. 카프 전국대회 후 발간되어, 이른바 제1차 방향전환의 계기를 이루었다. 1928년에 2호까지 나오고 <무산자(無産者)>로 개칭되었다.

제3전선(第三戰線)[편집]

1927년 2월 도쿄에서 발간한 순문예지. 카프파의 조중곤·김두용·한식·홍효민 등이 1927년 7월 YMCA 회관에서 강연 후 이 잡지를 배부하다가 압수당했다.

조선지광(朝鮮之光)[편집]

1922년 발간된 종합지. 학술논문 및 문학작품의 발표로 큰 역할을 했다. <개벽>과 함께 프로문학의 활동무대였고, M·L당 기관지로 이성태(李星泰)가 주간.

조선문예(朝鮮文藝)[편집]

1929년 5월 고병돈(高丙敦)이 발행한 문예지. 박영희 주간으로 카프 준기관지로 2호까지 발행했고, 사상적 근거는 계급주의에 두었다.

조선문학(朝鮮文學)[편집]

1936년 4월에 창간한 순문예지. 카프 해산 이후 이갑기(李甲基)·한식·한호 등 소장 개량주의파(改良主義派)가 주로 활동했다.

프로문학의 특색과 이론[편집]

-文學-特色-理論

1925년 카프의 결성과 함께 1934년까지 약 10년간 문단을 풍미한 프로 문학은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내포한 목적의식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문학의 구심점(求心點)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즉 '카프'는 일반적인 문학 단체와는 달리 정치성이 농후한 조직적인 단체로, 프로문학의 정치성은 이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신경향파 문학과 프로문학이 같은 사회의식에서 출발하면서 서로 구별되는 것은, 전자가 자연 발생적인 막연한 빈궁과 반항의 문학인 데 대하여 후자는 조직적인 정치투쟁을 의식한 목적의식의 문학이란 점이다. 프로문학이 카프의 지도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1926년 기관지 <문예운동>을 통해 조직적인 문학운동을 전개한 것은 프로문학의 정치성을 잘 말해 준다. 또 1927년 박영희가 <문예 운동의 방향전환론>에서 "자연생장적 소설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문예운동은 계급적 혁명을 위한 목적의식을 갖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 프로문학은 계급투쟁의 한 부문이라 한 것은 프로문학이 목적의식의 문학임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문학이란 독자적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대중에게 계급의식을 계몽·선전하는, 즉 정치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1926년 김기진이 <조선지광>에서 "신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서까래에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건축이 있는가" 라고 하며 프로문학이 너무 형식을 무시하고 정치투쟁의 개념에 몰두한 데 대한 비평을 가했다. 이 때 과격파이던 박영희는 1927년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에서 "프로 작품은 군(君)의 말과 같이 독립된 건축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큰 기계의 한 치륜(齒輪)인 것"이라고 맹렬한 반박과 공격을 가해 왔다. 이것이 자체 내의 제1차 카프 논쟁인데, 여기서 김기진이 패배했다는 것은 당시 프로문학의 공식주의(公式主義)적 경향을 그대로 반증한 것이다. 또한 이 무렵 윤기정·이북만 등이 목적의식론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여 이 시기의 기계주의적 문학관은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형식을 도외시한 내용 편중의 문학관과 관련하여 1929년에는 프로문학파와 양주동 사이에 내용과 형식의 논쟁이 있었는데, 프로문학의 내용 편중에 대하여 양주동은 예술파적인 입장에서 문학작품은 내용보다 형식미(形式美)가 더 본질적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프로문학은 작품활동의 강조와 형식의 중요성을 반성하게 되어, 1928년 박영희는 "예술 운동이 대중을 획득하려면 작품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최근 문예시감>)라 하여 작품활동을 강조했고, 따라서 작품형식의 문제도 프로문학의 대중화와 관련해서 강조되었다. 1929년 김기진에 의해 제기된 형식론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프로문학이 계급투쟁을 위해 대중에게 계몽·선전을 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일반 하층 서민들이 친근미를 느낄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와 대중적인 문학형식이 요구된다고 하여, 작품의 대중화를 전제로 한 문학형식의 필요성을 밝혔다. 1928년 11월 김기진이 <춘향전>식 가정·통속소설의 형식을 그대로 이용하자고 한 것이 그 예로, 한때 카프 내의 소장파들에 의해 논쟁이 있었는데, 작품 형식은 단순히 평이한 것, 통속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의 세계관에 의한 신리얼리즘 수법이며, 이에 부수되는 신형식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내용과 형식문제와 관련해서 창작방법에 대한 재검토도 요청되었는데, 1928년 김기진이 <변증법적 사실주의>를 발표한 것을 비롯하여 1932년 이후에는 구소련의 문학론에서 영향받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 등으로 발전되었다. 이 창작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김기진·박영희를 비롯하여 신유인의 <창작의 고정화에 대하여>, 백철의 <창작 방법론제>, 임화·안함광(安含光)·김두용·한효(韓曉)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검토>, 김남천의 <창작 방법의 전환 문제> 외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당시 창작방법을 중심으로 검토된 것은 과거 프로문학의 공식적인 기계주의 문학관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대두된 것이며, 또 이것이 동기가 되어 프로문학은 차츰 약화(弱化)·분열되어 갔다.

프로문학의 작품과 작가[편집]

-文學-作品-作家

1926년 1월 카프의 준기관지로 발간된 <문예운동>은 3호를 내고 폐간되었으나 프로문학 제1기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역할을 한 잡지였다. 여기 발표된 김기진의 <본능의 복수(復讐)>, 이익상의 <위협의 채찍>, 이기영의 <쥐 이야기> <팔아먹은 딸>, 최학송의 <의사(醫師)> 등은 아직 신경향파의 자연발생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고, 1927년 자체 내의 이론 투쟁을 거쳐 박영희의 <문예운동의 방향>이 발표된 이후 목적의식기의 프로문학운동은 그 이론과 함께 작품에도 방향 전환이 반영되었다.

프로문학의 이러한 전환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조명희의 <낙동강(洛東江)>이었다. <낙동강>은 이른바 제2기의 작품으로, 종전의 신경향파 문학이 빈궁에 항거하는 반항적인 특색이 자연발생적인 데 대하여, 이 작품은 그 빈궁의 원인을 민족적·계급적 사정과 환경으로 제시했다. 즉 <낙동강>에서 작가는 낙동강변의 빈궁한 주민의 생활이 자본계급과 일제의 수탈에 의한 것이라 보고, 자각적인 계급의식에 의한 반항을 시도했다. 또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목적의식이 투철한 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구체적으로 중농(中農)의 몰락, 소농(小農)의 빈농화(貧農化)를 강조했다. 따라서 신경향파 문학에서 자각적인 계급의식을 내세움으로써 목적의식에 입각한 프로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저기압(低氣壓)>(1926) <동지(同志)>(1927) <한여름의 밤> 등이 있으나 역시 <낙동강>이 가장 유명하다.

그 밖에 박영희의 <지옥순례(地獄巡禮)> 이기영의 <천치(天痴)의 윤리>, 최학송의 <홍염(紅焰)> <가난한 아내>, 주요섭의 <개밥>, 송영의 <석공조합 대표(石工組合代表)> 등이 있으나 이른바 목적의식기의 작품으로서는 그 이론에 못 미친 작품들이며, 작품으로서의 형상화에도 많은 미숙성이 발견된다.

한편 1929년 문학의 대중화가 강조된 후 1932년까지는 프로문학의 볼셰비키화 과정을 통해 작품활동이 크게 강조된 시기였다. 1929년을 전후해서 발표된 작품으로는 최서해의 <먼동이 틀 때>, 한설야의 <과도기(過渡期)>, 이기영의 <고향(故鄕)>(1933)

<서화(鼠火)> <홍수(洪水)> 등이 당시의 평판을 받은 작품들이다. 한편 시인으로서는 유완희·김창술·홍양명(洪陽明)·임화·박팔양 등이 활동했고, 프로 시로서 평판을 받은 것은 1929년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火爐)>가 있을 정도이다. 유완희의 <우리들의 시>(1930), 이북명(李北鳴)의 <질소비료공장(窒素肥料工場)>(1933) 등도 전형적인 프로문학작품이었다. 그러나 1934년 프로문학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박영희가 "얻은 것은 이데롤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다"고 자기비판의 결론을 내렸던 것처럼, 당시 프로문학은 대부분 도식적(圖式的)인 목적의식의 선행으로 작가의 창조성을 위축시킨 결과 참다운 작품의 생산이 이룩될 수 없었다.

김기진[편집]

金基鎭 (1903-1985)

호는 팔봉(八峰). 소설가·평론가.

충북 청주 출생. <백조> 후기의 동인으로, 백조파의 낭만주의적 경향이 무너지자 신경향파 문학의 선도자(先導者)로 활약했다. 1924년 신경향파 시대에서 1936년 카프가 해체될 때까지 가장 역량있는 평론과 소설을 썼다. 프로문학의 최초의 제창자였고 박영희와 함께 1920년대의 유일한 평론가였다.

초기 평론에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1924<개벽>), 소설에 <붉은 쥐>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청년 김옥균> <해조음(海潮音)> <통일 천하> 등이 있다. <매일신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 생활을 했고, 광복 후 침묵을 지키다가 6·25 이후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5·16군사정변 후에는 국민운동 재건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박영희[편집]

朴英熙 (1901- ? )

호는 회월(懷月). 시인·평론가. 서울 출생. 1921년 <백조> 동인으로 등장하여 처음에는 탐미적이며 상징적인 서정시 <꿈의 나라로>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 1924년경 급진적인 신경향파 문학으로 전향 가담하여 소설을 쓰는 한편 프로문학의 이론면을 감당하여 '목적의식론'을 제창, 평론가로 지도적 위치에서 활동했다. 이어 1925년 김기진(金基鎭)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조직했으나, 1933년 카프 탈퇴를 선언하고 순예술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작품에 프로문학 당시의 <전투>, <사냥개> 등의 소설과 광복 후 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 <현대조선문학사>가 있고 시집에 <회월시초(懷月詩抄)>가 있다.

송영[편집]

宋影 (1903-1978)

서울 출생. 배재 고보 수학. '염군사' 회원. 1923년 도일하여 노동자 생활을 체험하였다. 1925년 <개벽> 7월호에 <늘어가는 무리>가 3등으로 당선, 문단에 데뷔한

이후 <용광로> <교대 시간> <오전 9시>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고, 희곡 <일체 면회을 거절하라>, <신임 이사장> 등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이기영, 한설야 등과 KAPF 결성. 월북 후 1959년 제1회 인민상 수상. 월북 후의 작품으로 <인민은 조국을 지킨다>, <강화도>, <연암 박지원>, <송영 선집> 등이 있다.

박팔양[편집]

朴八陽 (1905- ? )

시인.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서울 배재고보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법전 졸업 후에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약하고, 1937년 만주 신경으로 가서 <만주일보>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를 발간하였다. 그는 일찍이 카프의 창립 멤버로 문단에 등단했는데 등단작품은 <신(神)의 주(酒)>로 알려진다. 광복 후 다시 좌익계 신문을 만들면서 1945년 9월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참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56년 <박팔양 시선집>을 발행했고 1962년에는 집체작 <인민은 노래한다>를 발표하는 등 북한 문단의 지도자로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화[편집]

林和 (1908-1953)

시인. 비평가. 문학사가.서울 가회동에서 출생.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다다풍의 습작시기를 거쳐 1920년대부터 프로문학에 참가하여 문단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카프의 서기장에 취임, 프로문학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935년 카프 해산 이후에는 순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시집 <현해탄>(1938), 비평집 <문학의 윤리>(1940), <조선문학사>를 집필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출판사 '학예사'를 경영하면서 영화에도 관계하고,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어 서기장을 지내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 남로당 노선의 문학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4월경 월북하여 북한에서 문화선전부장,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6·25 때 종군했다가 1953년 8월 '미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 이외에 공동시화집 <카프 시인집> <찬가> <회상시집(回想詩集)>이 있고, 평론집으로 <조선신문학사론서설> <개설조선신문학사> <신문학사의 방법론> 등이 있다.

한설야[편집]

韓雪夜 (1900-1963)

소설가.1925년 단편소설 <그 날 밤>을 <조선문단>에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카프 창립 초기부터 가담하여 계급문학의 이론적 확립과 그 문학적 실천에 앞장섰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그 전후>와 <뒷걸음질> 등에 이르러서는 경향적 색채를 짙게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당시 농촌의 현실인 빈궁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몰락해 가는 농촌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한설야는 1934년 다른 카프 문인들과 일경에 의해 검거되는데, 이 시기를 맞이해 일대 전환의 모습을 보인다. 즉 그의 작업은 삶의 구체성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화에 집중된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작품이 1936년에 발표된 <황혼>이다. <황혼>에서는 당대 자본가의 삶과 노동자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후 여러 작품을 발표했고 월북 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흥섭[편집]

嚴興燮 (1906- ? )

충남 논산 출생. 경남 도립사범학교 졸업. 1929년 KAPF 가맹, <조선문예> 1호에 시 <세거리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51년 월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파산 선고>, <온정주의자>, <숭어>, <방울 속의 참소식>,

<야생초>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동반자적인 경향의 현실참여와 계급주의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안회남[편집]

安懷南 (1909- ? )

서울 출생.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아들이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이 3등 입선, 등단하였다. 일본 징용 후 귀국 KAPF에 가담, 1947년을 전후하여 월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애인>, <탁류를 해치 고>, <소>, <상자>, <대지(大地)는 부른다>, <전원(田園)> 등 발표. 그는 인생의 현실적 단면을 묘사하면서, 역사·현실의식을 폭넓게 수용한 작품을 쓴 작가로 알려져 있다.

김남천[편집]

金南天 (1911-1953)

평남 성천 출생. 본명은 김효식(金孝植). 평양 고보 졸업. 일본 법정 대학 수학. 1929년 임화·안확·이북만 등과 카프계열의 동인지 <무산자(無産者)>를

간행하였다. 1931년 <공장 신문(工場新聞)>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남매> <소년행> <누나의 사건> <무자리> 등이 있다. 그는 구체적 현실의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적 작품세계를 보여 준 작가였다.

이북명[편집]

李北鳴 (1910- ? )

함흥 출생. 본명은 순익(淳翼). 함흥 고보 졸업 후 흥남 비료 공장에 근무. 1932년에 소설 <질소 비료 공장>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등단. 주요 작품으로

<암모니아 탱크> <기초 공사장(基礎工事場)> <공장가(工場街)>

<지방어(地方語)>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노동자 작가로 카프 의 한설야로부터 영향을 받아 계급 문학적 태도를 보였으며, 노동자 생활의 현실을 다루었다.

이동규[편집]

李東珪 (1913-1951)

서울 출생. 1928년부터 KAPF의 맹원으로 활약. <민주조선(民主朝鮮)> 편집국장 역임. 1932년 <게시판과 벽소설>을 <집단(集團)> 2호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우박>, <자유 노동자>, <어느 노인의 죽음>, <변절자> 등을 발표. 그는 카프의 맹원으로서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사회적 갈등을 주로 다룬 작가였다.

박노갑[편집]

朴魯甲 (1905-1951)

충남 논산 출생. 호는 도촌(島村). 일본 호세이 대학 문과 졸업.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안 해>를 발표하면서 등단. <조선중앙일보> 기자 역임. 6·25 이후 행적 미상.

홍구[편집]

洪九 (1908- ? )

서울 출생. 경기상고 졸업 후 KAPF에 참가.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 동맹' 총무부장 역임. 1933년 <마차(馬車)의 행렬(行列)>을 <신동아>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코뿔 선생> <서분이> <목마> <자웅(雌雄)> 등 발표. 그는 사회주의 문학관을 가지고 문학 활동을 하였으나, 계급의식보다는 남녀의 애정 관계를 감상적으로 다룬 작가로 알려져 있다.

최인준[편집]

崔仁俊 (생몰연대 미상)

1962년 <대간선(大幹 線)>이 <조선 농민(朝鮮農民)>에 2등 입선, 1934년 <황소>가 <동아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암류(暗流)>, <폭양 아래서>, <여점원>, <춘잠>, <우정>, <두 어머니>, <호박> 등 발표. 그는 일제 식민지하 민족적 현실의 삶을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보고 유산자와 무산자의 갈등을 주로 그려 내었다.

현경준[편집]

玄卿駿 (1909- ? )

함북 명천 출생. 일명 금남(錦南). <동아일보> 기자 역임. 광복 직후 북조선예술가총연맹 함북 중앙위원으로 활동. 1934년 <마음의 태양(太陽)>을 <조선일보>(1934. 5. 18-9. 15)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격랑> <별> <사생첩> <길> 등을 발표. 그는 생활문학과 예술 문학에 대해 고민하였으며, 목적의식이 강한 작품세계를 지향하려 했다.

이근영[편집]

李根榮 (1910- ? )

전북 옥구 출생. 보성전문 법과 졸업. <동아일보> 사회부기자 역임. 광복 후 KAPF에 가담. 1935년 단편 <금송아지>를 <신가정(新家庭)>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과자 상자> <제3 노예> <이발사>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등 발표. 그는 일제 식민지하의 빈곤과 외부적 세력에 의해 수탈되는 농촌현실을 주로 다룬 작가였다.

현덕[편집]

玄德 (1912- ? )

서울 출생. 제일 고보 중퇴. 1938년 <조선일보>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광복 후 KAPF 출판부장 역임. 6·25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려 내는 데 있어 사실적인 방법을 추구함으로써 한국 문학의 폭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

지하련[편집]

池河蓮 (1912- ? )

경남 거창 출생. 본명은 이현욱(李現郁). 1940년 단편 <결별>을 <문장>지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직후 남편 임화(林和)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KAPF)에 가담하여 활동. 주요 작품으로 <체향초(滯鄕秒)>, <산길>,

<도정(道程)> <광나루> 등 발표. 그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광복 후의 지식인이 사회인식과 사회문제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동반작가와 그 작품[편집]

同伴作家-作品

1925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는 프로문학이 문단을 주도(主導)했던 시기인 만큼, 이 기간에 등장한 시인들은 당시 사정으로 보아 대체로 경향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동반작가가 나온 것도 당시 문단의 주도권을 잡았던 프로문학의 세력과 여파(餘波), 즉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된다. 동반작가란 정식 카프의 맹원(盟員)은 아니지만, 프로문학에 대한 동정적 이해에서 경향적인 이론과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동반자(同伴者)'란 말은 본래 러시아 문학에서 온 명칭으로, 10월 혁명의 의의를 승인하고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와 동조한 초기의 경향을 말한다. 러시아적인 개념으로 볼 때 동반작가는 혁명을 자연현상으로 보고 볼셰비키 당의 지도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 작가이며,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항상 인텔리를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아무튼 프로문학 전성기를 통해 경향적 작품을 쓴 대표적 동반작가로는 유진오(兪鎭午)와 이효석(李孝石)이 있다. 유진오는

<갑수의 연애(戀愛)>와 <빌딩과 여명(黎明)> <여직공(女職工)>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동반작가로서 뚜렷한 작품활동을 했다. 그 뒤 프로문학이 기울어질 무렵 지식인의 양심과 고민을 그린 <김강사와 T교수>를 발표했고, 후기에 많은 가작인 <가을> <창랑정기(滄浪亭記)>, 1938년 장편 <화상보(華想譜)> 등을 창작했다. 이효석은 1928년 <도시와 유령(幽靈)> <북국 사신(北國私信)>

<노령 근해(露嶺近海)> 등 관념적인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뒤 <돈(豚)> <산> <들> <분녀(粉女)> 등을 통해 과거의 경향성을 버리고 자연에 대한 예찬과 본능적인 감각의 세계로 새출발을 했고, 이어서 <화분(花粉)> <메밀꽃 필 무렵>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 두 작가 외에 일종의 동반자적 입장에서 작품활동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엄흥섭(嚴興燮)·채만식(蔡萬植)·한인택(韓仁澤)·박화성(朴花城) 등은 1930년대를 전후해서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 작가들이다. 엄흥섭은 카프와 접근하여 활동한 작가로서 초기의 <흘러간 마을>(1925)에서는 동반적인 입장에서 청신한 작풍을 나타냈고, 그의 대표작인 <번견탈출기(番犬脫出記)>(1935)를 발표하여 평판을 얻었다. 장편 <선풍시대(旋風時代)>(1931)로 등장한 한인택(韓仁澤)도 경향적인 작품에 치중했다. 1925년 단편 <세길로>로 <조선문단>에 추천, 문단에 등장한 채만식은 1933년까지 <사라지는 그림자> <하물자동차(荷物自動車)>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 프로문학의 동반자적·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박화성은 카프와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1925년

<추석전야(秋夕前夜)>를 <조선문단>에 발표할 때부터 그 주제가 신경향파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뒤 <하수도 공사(下水道工事)>와 함께 연작으로 평판 있는 <불가사리> <고향없는 사람들> <한귀(旱鬼)> <홍수전후(洪水前後)> 등은 모두 현실을 대담하게 비판한 경향적인 역작들이다.

<崔 洪 奎>

유진오[편집]

兪鎭午 (1906-1987)

호는 현민(玄民). 소설가·법학자. 서울 출생. 경성제대(京城帝大) 법문학부 졸업. 1927년경부터 <조선지광> <현대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프로문학 전성기에 동반작가로 <갑수의 연애>(1927) <빌딩과 여명(黎明)>(1929) <여직공>(1931) <5월의 구직자>(1931) <5월 제전(祭典)>(1931) 등 경향적인 작품을 썼다. 1935년 프로문학 퇴조기에 쓴 <김강사와 T교수>(1935)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시정(市井)문학으로 <가을>(1939) <이혼(離婚)>(1939) <나비>(1940) <창랑정기(滄浪亭記)>(1940) 등의 단편을 썼고, 장편 <화상보(華想譜)>(1938)를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광복 후 문단을 떠나 법학자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고려대학교 총장·신민당 당수 등을 역임했고, 1954년 학술원 회원. 명예법학 박사.

이효석[편집]

李孝石 (1907-1942)

호는 가산(可山). 소설가.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경성제국대학 문과 졸업, 숭실전문(崇實專門) 교수 등을 역임. 프로문학이 왕성하던 무렵의 재학시대부터 작품을 발표, 유진오와 함께 동반작가로 불린다. 1928년 자유 노동자의 생활을 취재한 <도시와 유령>(1928)을 <조선지광>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으며, <노령 근해(露嶺近海)>(1930), <상륙(上陸)> <북국 사신(北國私信)> 등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1932년경 한때 총독부 도서과(圖書課)에 취직했던 일로 비난을 받아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지했다가 1933년 <돈(豚)>을 발표했으며 <돈> 이후에는 작품 경향을 전환하여 자연과 인간의 본능적인 순수성을 추구했고, 소설관으로 서정성을 내세우고 있다. 후기 작품으로는 <성화(聖畵)>(1935) <산>(1936) <분녀(粉女)>(1936) <장미 병들다>(1938) 등이 있고, 1936년에 발표된 <메밀꽃 필 무렵>은 광복 이전 우리 문학의 대표작이다. 장편에 <화분(花粉)>(1942) <벽공 무한(碧空無限)> <창공(蒼空)> 등이 있으나, 단편작가로서 뚜렷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메밀꽃 필 무렵[편집]

이효석(李孝石)의 단편소설. 1936년 <조광(潮光)>에 발표. 한국 현대 단표소설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왼손잡이요, 곰보인 허생원은 장돌뱅이다. 그 허생원이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선달을 따라 충주집으로 갔다. 그는 동이라는 애송이가 충주댁과 농탕을 치는 것에 화가 나서 뺨을 때려 쫓아버린다. 그러나 그 날 밤 그들 셋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걸었다. 허생원은 젊었을 때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개울가 물레방앗간에서 어떤 처녀와 밤을 같이 새운 이야기를 한다. 동이도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빠지는 바람에 동이의 등에 업힌다. 그리고 동이 모친의 친정이 봉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동이가 자기와 똑같이 왼손잡이인 것을 안 허생원은 착잡한 감회에 젖으나, 이내 그들은 동이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발길을 옮긴다. 전편(全篇)에 시적(詩的)정서가 흐르는 따뜻하고 애틋한 소설이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애욕(愛慾)의 신비성을 다루려 했다'고 그의 논문 <현대 단편소설의 상모(相貌)>에서 밝히고 있다.

채만식[편집]

蔡萬植 (1904-1950)

호는 백릉(白菱). 소설가.전북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업했고, 1925년 단편소설

<세길로>로 <조선문단>에 추천, 문단에 등장했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개벽>지 기자를 지내면서 <사라지는그림자>(1931) <화물자동차>(1932) <부촌(富村)>(1932) 등 1933년경까지 프로문학에 대한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그 뒤 작품 경향이 달라져 풍자적인 사회소설을 썼다. 신문학사를 통해 대표적인 풍자작가로서 작품으로는 단편 <레디메이드인생>(1934) <인텔리와 빈대떡>(1935) <치숙(痴叔)>(1938) <냉동어(冷凍魚)>(1939) 등 가작이 있으며, 장편으로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탁류(濁流)>(1938) <태평천하(太平天下)> 등이 있다. 그 밖에도 희곡 <흘러간 고향>(1937), <쑥국새>(1938) 단

편집에 <집> <잘난 사람들>이 있다.

박화성[편집]

朴花城 (1904-1988)

여류 소설가.전남 목포 출생.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야>를 발표했고, 1931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동광>에 <하수도공사>를 발표, 문단에 재등장했다. 초기작인 <불가사리> <홍수전후(洪水前後)> <고향 없는 사람들> <한귀(旱鬼)> 등은 경향성이 짙은 작품이다. 대표작에 <논갈 때>, 장편 <백화(白花)>(1931), <사랑> <고개를 넘으면> <타오르는 별> 등이 있다.

국민문학론과 절충파 이론[편집]

國民文學論-折衷派理論

프로문학의 세력이 문단을 풍미할 무렵 1926년경부터 민족주의적인 국민문학론이 대두되어 프로문학과 대립되었다. 계급주의를 내세운 프로문학에 대항하여, 주로 종래의 민족주의적 입장에 서 있던 작가·시인·이론가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 국민문학운동이다. 국민문학론은 그 동기에 있어 민족주의적 입장과 순문학적 근거 위에서 출발한 것으로 염상섭·양주동·조운(曺雲)·김영진(金永鎭)·이병기 등 주로 소장 문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1926년을 기해 시조 부흥론과 함께 국민문학의 전통적인 것을 찾으려 한 이 운동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하나의 복구주의(復舊主義)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국민문학운동에 있어 시조문학의 부흥론은 그 대표자인 최남선·이병기·주요한·염상섭 등에 의해 1925년부터 논문과 작품이 발표되었다. 즉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1925) 등의 논문과 1926년 <심춘순례(尋春巡禮)> <백팔번뇌> 등 시조집의 간행은 그 대표적인 것이며, 1925년 이병기의 <시조란 무엇인가>, 손진태(孫晋泰)의 <시조와 시조에 표현된 조선 사람>, 염상섭의 <시조에 관하여> 등의 논문은 이러한 움직임의 반영이었다. 1927년에는 국민문학파의 염상섭·양주동·김영진 등과 프로문학의 김기진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다. 염상섭은 프로문학의 해독과 한국적인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김기진은 보수적인 국수주의(國粹主義)라고 비판했다. 1926년을 전후로 한때 큰 세력으로 대두된 국민문학운동은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으나, 민족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조운·이병기 등의 혁신적인 시조시인, 최남선·이광수·이은상 등의 활발한 작품활동이 현저했다.

한편 1926년부터 대두된 민족주의적인 국민문학운동은 1928년에 와서 절충파(折衷派)의 민족문학론으로 전환되었다. 이 절충파의 이론은 주로 양주동·정노풍(鄭蘆風)·염상섭 등이 내세웠는데, 이들의 중립적인 이론은 당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단일당(單一黨)으로서 통합된 '신간회(新幹會)'의 이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 현실로 보아 민족문학은 곧 무산문학(無産文學)이라는 데 그 절충파의 이론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며, 1927년 염상섭은 <반동(反動) 전통문학의 관계>라는 논문을 통해 민족주의 문학과 프로문학의 통합을 제기했다. 당시 절충파의 이론을 끝까지 내세운 것은 양주동·정노풍으로 그들은 김기진과 논쟁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은 전혀 별개의 것이고, 민족문학으로서 병행·제휴할 것을 주장했다. 즉 프로문학의 김기진이 "현단계의 문예운동은 무산계급적 운동이 그 전부다"라고 한 데 대하여, 절충파의 양주동은 "현단계에 우리는 조선 민족인 동시에 무산계급"이라 보고, 문학운동은 "민족문학의 건설과 무산문예의 진출 두 가지의 병행 또는 제휴로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

1929년 양주동은 <문제의 소재와 이동(異同)>에서 "조선심(朝鮮心)이란 결코 관념적으로 공중에 매달린 유령적(幽靈的) 현상이 아니요 … 조선이라는 땅과 민족의 생활관계 중에서 그야말로 제씨가 흔히 말하는 유물론적 사회관계로 해서 필연적으로 산출된 의식이다"라고, 민족 제일주의에 입각한 민족문학론을 전개했다. 한편 정노풍은 대체로 양주동의 입장과 가까운 민족문학론을 내세웠으나, "민족적으로 지배민족과의 계급적 대립관계에서" 민족을 파악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절충파의 민족문학론과 관련하여 1929년 프로문학의 김기진·박영희와 양주동 사이에는 내용과 형식의 논쟁이 있었다. 즉 프로문학이 계급주의적인 내용 만능주의(萬能主義)를 주장한 데 대하여 양주동은 형식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여 "예술상의 형식은 존재의 양식(樣式)을 결정하는 동시에 가치를 부여하는 곳에 그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절충파적 이론과 형식주의는 결과적으로 순문학적(純文學的) 입장을 보여준 것이지만, 1929년을 전후하여 프로문학에서도 초기의 내용 편중을 지양하고 형식에 의한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절충파의 민족문학론은 양주동이 주재하던 <문예공론(文藝公論)> 등에 발표되었고, 이 무렵 양주동은 시 <조선의 맥박>(1929)을 발표하는 등 작품과 이론을 통해 많은 활동을 했다.

문예공론(文藝公論)[편집]

1929년 양주동·방인근 주간으로 발간된 순수문예지. <조선문단>의 휴간에 뒤이어 나와 <개벽>의 프로문학적인 경향과 <조선문단>의 민족주의적인 경향에 대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고, 당시 절충파의 이론은 이 잡지를 중심으로 해서 발표되었다.

국민시로서의 현대시조[편집]

國民詩-現代時調

최남선은 서구의 소네트, 중국의 한시, 일본의 단가(短歌) 등에 필적(匹敵)하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시가로서 시조의 현대화를 기도하여 국민시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과거 시조작품의 집대성적인 정리를 하여 <시조유취>를 간행하는 한편 의식적인 노력으로 현대시조를 창작, 1926년 <백팔번뇌>라는 창작 시조집을 발간했다. 현대 시조운동은 잊혀진 문학유산에 대한 부흥운동의 기운으로 나타나, 최남선의 뒤를 이어 이광수·정인보(鄭寅普)·이병기(李秉岐)·이은상(李殷相)·안확(安廓) 등 민족애가 담긴 참신한 현대감각으로 새로운 시조를 낳게 했다. 1932년에 나온 이은상의 <노산 시조집(鷺山時調集)>은 새로운 감각으로 시조를 의식한 뚜렷한 성과였으나, 현대적인 국민시로서의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시조시(時調詩)의 활발한 창작과 부흥은 장래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시조유취(時調類聚)[편집]

1928년 최남선이 엮은 시조집. 시조 총수는 1405수로, 그 때까지 전해온 역대 시조를 거의 모았다. 서두에 곡조에 관한 설명이 있으며, 본문은 시조 내용에 따라 계절·화목(花木)·짐승 등 21부문으로 나누어 실었고, 끝에 작가와 색인(索引)이 붙어 있다.

백팔번뇌(百八煩惱)[편집]

1926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창작 시조집. 내용은 108수의 창작 시조를 모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시조집. 시조 부흥을 꾀해서 신문학운동 초기에 쓴 작품이다. '백팔번뇌'란 불교에서 나온 말로 온갖 괴로움을 말한다.

정인보[편집]

鄭寅普 (1892-1950)

한문학자·사학자.호는 위당(爲堂), 또는 담원. 1910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 1918년 귀국 후 연희전문·이화여전·중앙불교전문 등의 교수로 국학 및 동양학을 강의했다. <시대일보>·<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고, 광복 후 국학대학 학장,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서에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조선문학원류고(朝鮮文學源流考)> <담원 시조집> 등이 있다.

담원 시조집[편집]

1948년에 출판된 정인보의 창작 시조집. 고아한 품격과 현대시조로서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병기[편집]

李秉岐 (1891-1968)

국문학자·시조 작가.호는 가람(嘉藍). 전북 익산 출생. 한성사범을 나와 휘문고보 교사, 서울대학교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시조 부흥을 꾀해 1926년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을 담은 새로운 시조를 창작함으로써 침체된 시조문학을 크게 일으켰고,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냄으로써 참신한 현대시조 창작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 국문학자로서도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 <송강가사주해(松江歌辭註解)> <한중록(閑中錄)> <의유당 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선(近朝內簡選)>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어우야담(於于野談)> 등의 고전문학 해설서가 있고,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공저) <국문학개론> 등 많은 저서가 있다.

김상옥[편집]

金相沃 (1920- ) 시조시인·시인. 호 초정(草汀·艸汀). 경남 충무 출생. 1938년 김용호(金容浩)·함윤수(咸允洙) 등과 <맥> 동인으로 활동, 시 <모래알> <다방> <고목> 등을 발표했다. 1939년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추천되었으며,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추천> <사립문> <살구나무> <꽃의 자서(自敍)> <애도(哀悼)>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시조집 <초적(草笛)> <삼행시 육십 오편>을 비롯하여, 시집 <의상(衣裳)> <목석(木石)의 노래> <삼행시(三行詩)>, 동시집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

그의 시는 초기의 전통적 서정에서 생명의 구원을 위한 광명에의 희구, 사물의 배후에 깃든 생명감 등을 포착하여 영롱하고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조는 문화재 등을 소재로 민족 고유의 예술미와 전통적 정서를 형성화한 것이 많고 특히 이은상(李殷相)의 관념적 특성과 이병기(李秉岐)의 사실적인 청신한 감각성을 융합한 경지를 보여준다. 1982년 제1회 중앙시조 대상을 수상했다.

안확[편집]

安廓 (1886-1946)

국학자·시조 연구가.호는 자산(自山). 서울 출생. 일본 니혼 대학(日本大學)을 졸업, 한문·시조·문학사 등에 관한 연구가 깊었다. 저서에 <조선문학사>(1923) <시조시학(時調詩學)>(1940) <조선 무용전>(1947) 등이 있다.

이은상[편집]

李殷相

(1903-1982)

시인·수필가·문장가.

호는 노산(鷺山). 마산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조선문단>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이화여전 교수,

<조선일보> 편집국장, 청구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노산 시조집>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 <노산문선> <무상(無常)> <충무공 일대기> <주해이충무공전서(註解李忠武公全書)> <나의 인생관> 등이 있다.

민족주의 문학의 양상[편집]

民族主義文學-樣相

프로문학의 전성기에 있어 민족주의 문학은 국민문학운동으로서 시조 부흥을 제창했고, 절충파의 이론을 거쳐 1932년경부터 역사소설과 귀농(歸農)의 문학으로 그 방향을 돌렸다. 먼저 이 시기의 현실에서 일제에 항거하려는 민족적인 잠재의식은 작품 제재(題材)를 과거의 역사 속에서 구하여 암암리에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광수의 <단종애사> <마의태자> <이순신>, 김동인의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윤백남의 <흑두건(黑頭巾)> <대도전(大盜傳)> 등이 유행했으며, 이들 작품 속에는 공통적으로 민족적인 울분과 호소가 잠재되어, 뒤에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을 시기에는 모두 판매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193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과 농촌으로 들어가라는 브나로드 운동이 전개되어 농촌소설을 낳게 했다. 이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집단적으로 계몽대를 파견하여 농촌계몽을 꾀하여 민족적인 자체 역량을 충실히 하자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잠재했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암암리에 일제에 대한 민족적인 투쟁의 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 무렵 프로문학에서는 빈농(貧農)에서 취한 이기영의

<고향>, <서화>, 권환(權煥)의 <목화(木花)와 콩> 등의 경향적인 농민소설이 발표된 데 대하여, 민족주의파에서는 이 브나로드 운동을 계기로 농촌에서 취재한 작품으로 이광수의 <흙>(1932)이

<동아일보>에 발표되었다. 그 뒤를 이어 <동아일보> 창립 15주년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한 심훈의 <상록수(常綠樹)>는 브나로드 운동을 주제로 한 우수한 작품이었다. 심훈은 이미 1932년 <영원의 미소> <직녀성(織女星)>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으나 <상록수>가 그의 작가적 역량을 과시한 대표작이다.

이러한 농촌 계몽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은, 종말에 그 작중 인물들의 민족의식이 좌절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그 이상 민중적인 토대 위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이 시기의 민족의식과 브나로드 운동의 시대적인 조류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심훈[편집]

沈薰 (1901-1936) 본명은 대섭(大燮). 소설가.서울 출생. 1922년에 신경향파적인 '염군사' 조직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동아일보> 기자 등을 거쳐 1932년경 <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영원의 미소>(1930) <직녀성>(1935) 등 장편소설을 <중앙일보>에 발표했고, 1934년 <동아일보> 현상문예에 장편 <상록수>가 당선되어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립했다.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1933) 등이 있으며 영화인으로서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감독한 일이 있다.

상록수(常綠樹)[편집]

1934년 <동아일보>의 장편소설 모집에 당선된 작품. 심훈의 대표작으로, 이광수의 <흙>과 함께 브나로드 운동을 주제로 한 대표작이다. 내용은 농촌계몽대의 귀환 보고에서 남주인공 박동혁과 여주인공 채영신이 서로 알게 된 후, 두 사람이 동지가 되어 학교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농촌으로 돌아가 농민계몽·부인계몽·아동교육에 헌신한다는 이야기로서 이 시대의 농촌계몽의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작품이다.

해외문학파와 시문학파[편집]

海外文學-詩文學派

프로문학 전성기에 이에 대한 문학사적인 반동으로 해외문학파가 등장하여 신흥문학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7년 도쿄에서 주로 외국 문학도들이 모여 해외문학연구회(海外文學硏究會)라는 동인회를 구성하고, 그 기관지 <해외문학(海外文學)>을 창간, 2호까지 냈다. 이에 활약한 동인들은 김진섭(金晋燮), 이헌구(李軒求), 정인섭(鄭寅燮), 이하윤(異河潤), 함대훈(咸大勳), 서항석(徐恒錫), 김광섭(金珖燮), 손우성(孫宇聲) 등으로 그들은 주로 외국문학에 대한 이론 및 작품의 번역·소개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외국 문학의 동향을 알리고 작품의 번역을 통해 새로운 문단의 조류로서 해외문학의 이식에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0년경 프로문학이 고조(高潮)에 달하였을 무렵부터는 이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전개되었고, 외국문학의 조류를 도입, 신흥문학운동을 주장하자 세칭 해외문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1931-1932년은 카프와 해외문학파의 논쟁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는데, 이헌구가 <조선에 있어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1932)에서 카프파를 비판한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 뒤 1931년 해외문학파가 중심이 되는 신극연구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조직, 신극운동에 청신한 기풍을 불어넣었는데, 그 중 유치진은 <토막(土幕)> <소> 등의 희곡으로 그 역량을 과시했다. 이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한 해외문학 동인들은 서항석(徐恒錫), 김진섭, 장기제(張起悌), 이하윤, 정인섭, 유치진, 함대훈, 홍대성, 최정우(崔珽宇) 등이 그 주동 멤버였고, 1937년까지 주로 번역극을 통해 20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한편 해외문학파의 동인 중 다수가 참가해서 발행한 잡지로는 <시문학(詩文學)>과 <문예월간(文藝月刊)>이 있다. 1930년에 발간된 <시문학>은 순수시(純粹詩) 동인지로서 박용철(朴龍喆)을 비롯하여 김영랑(金永郞), 정인보(鄭寅普), 변영로(卞榮魯), 신석정(辛夕汀), 이하윤(異河潤) 등이 그 중심적인 동인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절정을 이룬 구호, 사상 과잉의 카프파 시에 대하여 새로운 시어(詩語)의 연마(硏磨), 세련된 시상(詩想)으로 세칭 '기교파(技巧派)'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들이 남긴 순수시운동은 한국 현대시의 모태(母胎)가 되어 뒤에 시의 주류를 형성했고, 한국시를 세련된 아름다운 경지로 비약하게 했다. 특히 이 <시문학>파에는 처음부터 정지용(鄭芝溶)이 참가하였고 김기림(金起林)도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김영랑·정지용·박용철·이하윤 등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이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극예술연구회[편집]

劇藝術硏究會

1931년 7월에 결성된 신극단체·동인회. 그 후 1937년경까지 20회의 공연을 가져, 우리나라 신극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그 회원들은 주로 해외문학파 동인들이 참가했고, 서항석·유치진·이하윤·정인섭·함대훈·김광섭·김진섭·장기제·조희순(曺喜淳)·홍해성·최정우 등이다.

유치진[편집]

柳致眞 (1905-1974)

극작가·연출가.경남 충무 출생. 일본 릿쿄 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9년간 극작·연출활동을 했다. 희곡 <토막(土幕)>(1931)을 발표하여 극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고, 그 뒤 <소> <자매(姉妹)> <버드나무 선 마을의 풍경> <조국><원술랑(元述郞)>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의 희곡을 발표했다. 1941년 극단 '현대극장'을 창립했고, 1952년 국립극장 원장을 거쳐 연극학회 회장·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

오영진[편집]

吳泳鎭 (1916-1974)

극작가. 호 우천(又川). 평양 출생.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1938). 1937년 <조선일보>에 논문 <영화예술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그 후 한국 영극계의 고질적인 파벌에 말려들지 않고 오로지 극작에만 전념하여 왔다. 1942년 <국민문학>에 <배뱅이굿>과 <맹진사댁 경사>를 발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희곡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지적(知的)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한국적인 해학과 풍자로서 추악한 것을 극복하고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출(抽出)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주요 작품으로 장막 <맹진사댁 경사> <배뱅이굿> <종이 울리는 새벽> <해녀(海女) 뭍에 오르다> <인생차압>

<허생전(許生傳)>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시나리오와 방송극이 있다. 저서로 수기 <하나의 증언>이 있다.

김진섭[편집]

金晋燮 (1903- ? )

수필가·독문학자.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독문과 졸업. 1927년 해외문학연구회 동인, 1931년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약했고 광복 후 서울대학·성균관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수필가로서 그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수필문학에 크게 이바지했음. 6·25 때 납북되었다. 수필집에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정인섭[편집]

鄭寅燮 (1905-1983)

평론가·영문학자·명예 문학박사. 경남 울주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와 런던 대학 대학원을 수료. 색동회·해외문학연구회·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외국문학 번역과 소개에 주력했다. 연희전문 교수를 거쳐 외국어대학 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저서에 <한국 현대시 영역집> 등이 있다.

이헌구[편집]

李軒求 (1905-1983)

평론가.함북 명천(明川)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를 나와 해외문학연구회·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약. 1932년 <조선일보>에

<조선에 있어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란 평론을 발표한 뒤, 외국문학 소개와 문학평론을 발표했다. 1935년 지식인들이 어두운 외부 정세에 고민할 때 함대훈, 홍효민 등과 함께 행동정신을 주장, 행동주의 문학사조를 일으켰다. <민주일보> 부사장, 공보처 차장, 문총(文總) 최고위원, 이화여대 문리대학장을 지냈으며, 저서에 평론집 <문화와 자유>가 있다.

함대훈[편집]

咸大勳 (1906-1949)

호는 일보(一步). 소설가·러시아 문학자.

황해도 송화(松禾) 출생. 1931년 외국어대학을 졸업한 후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광복 후 공보국장, 경찰전문학교장 등을 지냈으며, 고골리의 <검찰관> 등을 번역했고, <순정해협> <무풍지대> <폭풍전야> <청춘보(靑春譜)> 등의 작품이 있다.

김광섭[편집]

金珖燮 (1906-1977)

시인.함북 경성(鏡城)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후에 해외문학연구회·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약했다. 외국문학을 번역·소개하는 한편, <꿈> <동경(憧憬)> <명상> 등의 시를 발표했는데, 초기 시는 꿈과 관념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특색이다. 일제 말 2년간 옥중생활을 했고, 광복 후 대통령 비서, 자유문협 위원장, 문총 간부 등을 역임했고, 문예지 <자유문학>을 발행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정치적인 이상을 노래했고, 1960년대에 발표한 시집 <성북동 비둘기>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사색의 깊이를 보여주었으며, 시집에 <동경> <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반응>, 번역시집에 <서정시집> 등이 있다.

이하윤[편집]

異河潤 (1906-1974)

시인·영문학자.강원도 이천(伊川) 출생. 1929년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영문과 졸업. 1927년 해외문학연구회 동인. 1930년 박용철과 <시문학> <문예월간> 등을 주재하면서 해외문학 소개와 서정시를 발표했고, 카프파의 경향문학에 대항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를 발기했고, <시원(詩苑)> 등에 작품을 발표, 광복 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회장, 문총 최고위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역임. 시집 <물레방아>, 번역시집 <실향(失香)의 화원(花園)> <불란서 시선> <영국·애란 시선> 등이 있다.

박용철[편집]

朴龍喆 (1904-1938)

호는 용아(龍兒). 시인.전남 광주(光州) 출생. 동경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과 연희전문에서 수업.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1930)과 문예지 <문예월간>(1931)을 출자 간행. 정지용, 신석정,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경향파에 대립하여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시는 릴케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회의·모색·상징 등이 주조를 이루었으며, 작품집에 시·번역시·평론을 모은 <박용철 전집>이 있다.

김영랑[편집]

金永郞 (1903-1950)

본명은 윤식(允植). 전남 강진 출생. 일본 아오야마 학원 수업.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 <문예월간> <시원> 등에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했으며, 예술파적인 순수 서정시인으로 유명하다. 광복 후 공보부 출판국장 등을 지냈고, 시집에 <영랑시선(永郞詩選)>이 있다.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설움받는 민족의 희망의 봄을 기다리는 작자의 마음에 의탁하여 읊은 격조 높은 서정시이다.

문예사조의 모색기[편집]

文藝思潮-摸索期

1920년대까지 문단의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프로문학은 1931년에 접어들면서 차츰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의 발발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의 정치적·사상적 탄압은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를 해체시켰고, 문단에도 그 압력이 극심해져 이해 5월 제1차 카프 검거사건이 있었다. 60여 명의 카프 작가들이 구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카프 진영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또 내부적인 대립과 분쟁 끝에 지도급 이론가인 박영희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다"는 술회를 남기고 전향(轉向)한 데 이어, 1934년 제2차 검거가 있은 뒤 카프는 1935년 말 마침내 해산되었다.

이와 함께 문학사적으로는 문학 경향의 교체(交替)가 요구되었고, 일제의 전체주의적인 압력이 문단을 억누르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가·시인들은 내성적인 면으로 침잠하였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주지주의(主知主義)·모더니즘 등 서구문예사조에 연유된 것이기도 하나, 이 시대의 핵심적인 경향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적인 목적의식에서 떠나 예술과 인생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순수문학에의 지향이었다. 예술파와 주지파의 문학이 등장함과 동시에 불안의 시대를 반영한 고민의 문학, 풍자소설 등은 이 시대 지식인의 양심·고민·실직 문제 등을 취급했다.

1933년에 결성된 순문학 지향의 9인회(九人會)는 문학사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며, 모더니즘·초현실주의·주지주의 등의 문예사조도 새로운 모색의 한 표현이었다. 1930년대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행동주의가 파시즘에 대한 저항적인 의미로 소개되었으나 국내적으로 정세는 더욱 험악해져 문학운동은 차츰 고난의 과정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9인회의 활동[편집]

九人會-活動

시문학파가 <시문학>과 <문예월간> 등을 중심으로 한 순수시 운동을 한창 전개하고 있을 무렵 순수문학 지향의 집단적인 문학운동이 일어나니 이것이 1933년 8월에 발족된 9인회(九人會)이다. 9인회는 처음 이종명(李種明). 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趙容萬) 등 9명의 문인이 모여 일종의 문학 친목단체를 만든 데서 명칭이 비롯되었다.

이들은 은연중 경향문학에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태도로 나왔는데, 회원은 그 뒤 발기인이었던 김유영, 이종명과 평양에 있던 이효석이 탈퇴하고, 대신 박태원(朴泰遠), 이상(李箱), 박팔양 등 작가·시인들이 새로 보충되었다. 그러나 다시 1935년을 전후하여 조용만, 유치진이 탈퇴하고 대신 김유정(金裕貞), 김환태(金煥泰)가 보충되어 3-4년 동안 소극적이나마 순수문학 지향의 단체적인 활동을 지향했다. 그들은 1935년에 동인지의 성격을 띤 <시와 소설>을 간행했고, 3-4회의 문예 강연회를 가졌으나 얼마 후 동인간의 작품 경향의 불일치와 분열이 동기가 되어 결국 문학적으로 큰 공적은 남기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9인회는 순수문학 단체로서 등장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문단적으로 쟁쟁한 활동을 하던 문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감각과 기교를 지닌 예술파·기교파의 작가·시인들이었던 만큼, 여기에 소속되었던 대표 작가인 이효석, 이태준 등은 세련된 문장으로 우수한 단편소설을 다수 발표해 문장 면에서 한국 현대소설의 독특한 스타일을 이룩하였다. 이 무렵 이효석은 초기의 동반작가로서의 경향적인 작품에서 일전(一轉), 서정적인 아름다운 작품의 세계를 이룩했으며, 특히 단편소설로써 현대문학사상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9인회의 중심인물인 이태준은 종래 프로문학이 퇴조한 후 문단의 인기작가로 등장, <불우선생(不遇先生)> <복덕방(福德房)>

<영월영감(寧越令監)> <달밤> <밤길> <까마귀> <돌다리> <패강령(浿江令)> 등 일련의 한국적인 애수(哀愁)와 정취가 담긴 단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이효석과 이태준은 순수문학 지향의 대표적 작가며, 박태원도 예술파적인 경향의 작가로, 초기작 <옆집색시> <5월의 훈풍(薰風)> 등과 단편

<소설가 구보씨(仇甫氏)의 일기>, 장편 <천변풍경(川邊風景)>은 세태소설(世態小說)로 당시의 대표적인 평판작이었다.

초기의 이무영은 경향적인 작가로 출발, 농촌을 제재(題材)로 한 <농부(農夫)>(1934) <황보노인(皇甫老人)>(1935) <흙을 그리는 마음>(1935) 등 일련의 농촌소설을 썼고, 후기작인 <제1장 제1과> <흙의 노예>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정지용의 감각적인 순수시, 김기림의 모더니즘시와 주지적인 이론, 이상의 신심리주의적인 작품, 김환태의 예술지상적인 평론, 김유정의 인생파(人生派)적인 소설 등은 모두 이 9인회의 순문학적인 입장을 대변한 것들이었다.

박태원[편집]

朴泰遠 (1909-1987)

서울 출생. 호는 구보(丘甫, 仇甫, 九甫). 경성 제일 고보·일본 호세이 대학 수학. 1933년 이태준·김기림·이효석·이무영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26년 시

<누님>이 <조선문단>에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최후의 모욕>, <누이>, <훈풍>, <낙조>,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풍경(川邊風景)> <성탄제> <수호전> 등이 있다. 그는 인간의 내면 의식의 추이와 고정화된 공간 속의 세태적 풍물의 소설적 재현을 추구한 작가였다.

소설가 구보씨의 1일[편집]

小說家仇甫氏-一日

박태원(朴泰遠)의 단편소설. 1934년 <중앙일보>에 발표되었다.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료한 사람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이상분일증(理想奔逸症)·언어도착증·과대망상증·지리멸렬증 등 … 문득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예술파의 순수시운동[편집]

藝術派-純粹詩運動

1930년대부터 시의 주류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문학파의 순수시운동은 예술지상주의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1930-1931년대 <시문학> <문예월보> 등을 통해 유미적(唯美的) 서정시를 발표하던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이하윤 등 시문학파의 경향은 세칭 예술파·기교파(技巧派)로 불릴 만큼 세련된 정서와 언어감각을 중요시했다.

당시 프로문학이 사상 위주인 데 대해 그들은 언어예술로서의 시의 기능을 인식했고, 이러한 순수 서정시운동은 1934년 오일도(吳一島) 주재의 <시원(詩苑)> 시대로 오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1935년을 전후하여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을해명시선집(乙亥名詩選集)> 등이 발간되어 순수시의 대표적인 지표(指標)가 되었고, 박용철은 <시적 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 <기교주의설의 허망(虛妄)>(1936) 등을 통해 순수시파의 시론을 전개했다. 이 때에 평론가로 등장한 김환태는 예술 지상주의자로서 순수문학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여, 프로문학의 공리성을 배격하고 비평의 순수한 독립성을 주장했다.

박용철은 민족의식이 담긴 서정시를 발표했고 <효과주의비평론(效果主義批評論)>(1931)에서 작품의 예술성이 선행된 문학비평을 주장, 평론가로서 활동했고 무엇보다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청색지(靑色紙)> 등의 문예지를 발간, 순수 서정시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특히 예술파의 경향을 대표하는 시인은 김영랑으로 그는 시의 운율법(韻律法)을 중요시하여 언어의 음악적인 배치에 세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시는 섬세한 서정, 상상의 깊이와 함께 유미적(唯美的)인 점이 특색으로, 과거의 감정시와 모더니즘적 현대시와의 중간에 위치한 과도기적인 서정시인이었다.

박용철과 <시문학>을 주재하던 이하윤도 민요풍의 서정시를 발표했는데 그의 시 <물레방아>는 이 시기의 가작이었고, <시원>을 발간한 오일도는 독특한 시의 세계를 이룩한 순수 서정시인이었다. 한편 1935년 <시문학>을 통해 등장한 신석정(辛夕汀)은 동경과 신비스러운 시풍으로 자연을 심화시킨 서정적인 전원시인(田園詩人)이었다.

모더니즘의 시운동[편집]

-詩運動

1934년경 우리 문단에는 영미문단의 에즈라 파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감각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시풍이 도입되었다. 그 하나는 시인 김기림에 의한 모더니즘의 시운동이요, 또 하나는 평론가 최재서(崔載瑞)에 의해 전개된 주지주의 문학의 소개와 그 비평이었다. 특히 모더니즘 시운동은 우리 시문학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당시 김기림은 "주지주의는 자연발생적인 시와 명확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단순 묘사자(描寫者)와도 대립한다 … 시는 우선 '지어지는 것'이다. 시적 가치를 의욕하고 기도(企圖)하는 의식적 방법론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론(詩論)과 신선한 감각으로 현대문명을 노래해야 한다는 시의 창작방법을 내세웠다.

김기림의 시론은 에즈라 파운드 등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것이지만 한국의 모더니즘은 그에 의해 도입·전개되고 우리 시단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되었다. 모더니즘은 과거의 영탄(詠嘆)적인 것을 버리고 전원적인 취미에서 벗어나 도시의 현대적인 감각을 표현하자는 것으로 현대시의 회화성(繪畵性)이 크게 강조되었다. 즉 과거의 우리 시가 청각적인 시라면 모더니즘은 시각적인 시로서 주요 특징으로 표현의 시각성과 함께 시인의 복잡한 경험을 중요시했다. 모더니즘의 시론은 김기림에 의해 도입되었고, 김광균(金光均) 등의 시작(詩作)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었으나, 우리 신시사상 그 선구자는 정지용이었다.

정지용은 과거의 자연 발생적인 감정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새로운 감각으로 즉물적(卽物的)·시각적인 표현을 시도했고, 시적인 언어의 기능을 의식한 최초의 시인으로, 참다운 뜻에서 언어감각의 혁명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가 발표한 <유리창(琉璃窓)>(1929)에서 그 참신한 언어감각과 함께 시각적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정지용의 대표 시집으로 <정지용 시집> <백록담(白鹿潭)> 등이 있거니와, 그에 의해 개화(開花)된 한국의 주지적인 시운동은 김기림에 의해 1934년경 이론화되었다. 김기림의 시론은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를 비롯해 다수이며 <기상도(氣象圖)>(1936) <태양의 풍속> 등의 문명 비판적인 시가 있으나 그 이론이 우세하며, 1937년경 김광균에 의해 구체화된 모더니즘의 시는 크게 주목을 받았다. 김광균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1934년경 시단에 등장, 모더니즘 시론을 실행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와사등(瓦斯燈)> <외인촌(外人村)> <설야(雪野)>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당시 시단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활약한 장만영(張萬榮)도 기억할 만한 모더니스트의 한 사람이었다. 김광균의 시가 도회적인 것인 데 대하여 장만영은 서정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 밖에 장서언(張瑞彦), 박재륜(朴載崙)도 신선한 감각의 시인이었고, 인생파적인 강렬한 서정시의 세계를 추구한 오장환(吳章煥)의 <The Last Train> 같은 시는 모더니즘의 계열에 드는 우수한 작품이다.

정지용[편집]

鄭芝溶

(1903-1950)

충북 옥천 출생. 일본 도어시샤 대학 영문과 졸업. 휘문고교 영어 교사, 이화여대 교수, 경향신문 주간 역임. 1926년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프란 스> 등을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감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쓰다가 후에는 고전적인 서정시를 썼다. <시문학> 동인이며 <문장>지 심사위원이었다. 6·25전쟁 때 북한군에 끌려가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시집으로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다.

백석[편집]

白石 (1912-1995)

본명은 백기행. 평북 정주 출생.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여 등단,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 졸업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여성>을 편집했다. 일제 말 중국의 신경과 안동에 있다가 광복 후 북한에 정착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 <백석 시선집>(1987)이 있다.

주지주의와 자의식 문학[편집]

主知主義-自意識文學

모더니즘의 시운동에 앞서 1934년경 평론가 최재서는 현대 주지주의 문학을 우리 문단에 소개했다. 주지주의파의 이론은 김기림 등의 <시론>도 있으나 체계적인 것은 최재서에 의해서였고, 현대시는 감성으로 씌어질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많은 비평활동을 통해 지성문학을 전개, 이러한 지성론(知性論)은 한때 문단에 많은 논의를 일으켰다.

그의 주지적인 비평은 김기림의 <기상도>, 이상의 심리주의 경향의 작품 <날개>

<종생기(終生記)>, 최명익(崔明翊)의 소설 등 심리주의적 경향, 자의식의 문학을 현대의 주지적 문학의 영역으로 파악했다.

최재서 등의 주지적 문예비평은 종래의 경향문학의 관념성 또는 인상주의(印象主義)적 비평경향을 불식하고, 분석과 종합에 의한 과학적 비평 방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큰 공적을 남겼다.

주지주의 문학의 소개와 함께 대두된 이상(李箱), 최명익, 허준(許俊) 등의 심리주의적인 자의식의 문학은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내면(內面) 탐구의 문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1935년대라는 어둡고 불안한 시대현실에 대한 반응으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이상(李箱)은 1934년 시 <오감도(烏瞰圖)>를 비롯해서 소설 <날개> <종생기>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와 심리주의에 연관되는 잠재의식과 자의식을 표현, 난해(難解)한 작품으로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허준의 <탁류(濁流)>는 이상의 <날개>에 앞서 발표된 작품으로 자의식과 함께 니힐리즘이 나타나 있고, <야한기(夜寒記)>(1938), <습작실(習作室)에서> 등은 모두 허무의식과 내면의 심연을 표현하였다. <단층>의 동인으로 문단에 나온 최명익(崔明翊)은 1936년 <비오는 길>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이래 <무성격자(無性格者)>(1937), <심문(心紋)>(1939), <장삼이사(張三李四)>(1941) 등의 역작들을 통해 심리주의적인 자의식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김기림[편집]

金起林 (1908- ?)

함북 학성 출생. 호는 편석촌. '구인회' 회원. 일본대학 문예예술과와 도호쿠(東北) 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대에 모더니즘 시운동을 주도한 이론가이자, 실제 창작을 실험한 시인이기도 하다. 6·25 때 납북. 시집으로 <기상도>(1935),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행동주의와 휴머니즘 문학[편집]

行動主義-文學

1935년을 전후하여 우리 문단에는 서구의 행동주의 문학이 소개되고 휴머니즘이 논의된 일이 있었다. 이 사조 역시 히틀러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유행한 다다이즘·쉬르레알리슴의 허무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과 인간성 회복을 목표로 A.지드, 페르낭데스, 앙드레 말로 등 서구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학운동이었다. 특히 서구에서는 지식인의 행동주의가 요구되어 '지식계급인연맹(知識階級人聯盟)'이 결성되었고, 말로는 직접 에스파냐 내란·상해 폭동 등에 참가하였으며, <왕도(王道)> <정복자> <인간의 조건> 등의 작품을 통해 행동적인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 문단에서는 1935년 초 이헌구, 함대훈, 홍효민, 김문집 등에 의해서 행동주의가 소개되고, 휴머니즘에 입각한 문화 옹호, 지성 옹호의 운동이 한때 대두되었다.

특히 휴머니즘은 1935년대의 한국 지식인을 억누르고 있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의미와 함께 침잠되고 있는 문학정신에 대한 활로를 개척하는 뜻에서 한때 성행을 본 것이다. 백철(白鐵)은 <인간 묘사의 시대>(1933), <인간 탐구론>(1934), <현대사조로서의 휴머니즘>(1937) 등의 논문을 통해 암흑기에 접어든 한국문학의 활로와 현실에 대한 문학자의 양심적인 태도를 강조하였다.

그 밖에 당시의 행동주의와 휴머니즘 논의를 보면 이헌구의 <행동정신의 탐구>(1935), 함대훈의 <지식계급의 불안과 조선문학의 장래>(1935), 홍효민의 <행동주의 문학의 검토>(1935), 김문집의 <일본문학과 행동주의>, 김오성(金午星)의 <네오 휴머니즘론>(1936), 윤규섭(尹圭涉)의 <지성문제와 휴머니즘>(1938), 임화의 <문예 이론으로서의 신(新)휴머니즘에 대하여>(1938) 등의 비평활동이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논의들은 이 시기의 문학사조를 대변한 것이며 불안과 위기의 시대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반응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풍자소설과 고뇌의 문학[편집]

諷刺小說-苦惱-文學

파시즘의 대두와 일제의 압력으로 국내 정세는 더욱 험악해져 우리 문학에 불안과 위기의 시대의식이 고조된 것은 전반적인 현상이거니와, 특히 프로문학시대에 동반적 입장에 섰던 작가들은 지식인의 양심·고민, 또는 시대적인 풍자소설을 발표하게 되었다. 1931년 이후는 취직난과 생활난이 극심해져 지식인의 실직(失職)과 비애는 이 시대 작가들의 현실적인 주제로 소설 속에 취급되었다. 그 중 지식인의 취직난과 실직을 취급하면서 풍자소설을 쓴 작가는 채만식이다. 그의 <인텔리와 빈대떡>(1934), <레디 메이드 인생>(1934) 등은 모두 지식계급의 실직과 불우한 운명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그 시대성을 드러내었다.

1935년 시대분위기가 점차 어두워 감에 따라 채만식은 본격적인 풍자소설을 발표한 바 즉 <소망(少妄)>(1936), <예수나 믿었더면>(1937) <치숙(痴叔)>(1938) 등은 모두 시대에 대한 작가의 민감한 마음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뒤에 이 작가는 장편 역작

<탁류(濁流)> <태평천하> 등의 대표작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확보했다. 프로작가인 이기영도 장편 <인간수업(人間修業)>(1936)에서 지식인의 우울을 제재로 풍자적인 경향을 보여 주었고, 자의식의 세계를 그린 이상의 <날개>도 풍자적인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실험작이다.

풍자소설이라 하면 시대·사회·인물 등의 결함·죄악·모순 등을 기지와 냉소로 은근히 풍자하는 경향을 말하는데 시대에 대한 작가의 비판정신이 그 작품의 바탕을 이룬 이 시기의 소설은 지식인의 실직·고민·운명·비애 등을 취급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이와 더불어 이무영의 <창백한 얼굴>(1934) <B녀의 소묘>(1934) 등도 이 시대 지식인의 빈궁과 고난을 그린 작품들이다.

한편 실직과 생활난을 주제로 한 풍자적인 경향과 함께, 지식인의 양심과 자기 반성을 주제로 한 고뇌의 문학이 나타나니 초기의 동반작가이던 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1938), 이효석의 <장미(薔薇) 병들다>(1935)는 그 대표적 작품이며, 한설야의

<임금(林檎)>(1936), 김남천의 <소년행(少年行)> 등도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 작품들이다. 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는 작가가 시정(市井) 문학으로 기울게 된 전기(轉機)적인 작품으로, 학교 내의 추악한 현실과 경향적인 학생층과의 사이에서 갈등과 좌절을 겪는 젊은 지식인의 고심담(苦心譚)이며, 이효석의 <장미 병들 다>에서는 과거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남녀가 속된 현실에 타락되어 가는 가운데 인텔리로서의 양심과 가책을 보여주고 있다.

조용만[편집]

趙容萬 (1909-1995)

소설가. 영문학자.호는 아능(雅能). 서울 출생.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 1931년 희곡 <가보세>를 <동광>에 발표, 문단에 등장했으며, 이어 소설 <연말의 구직자> <희희(戱稀)> 등을 발표했다. 그의 초기작은 동학란과 학교 내의 비밀결사사건 등을 취급한 경향적인 작품들이며, 후기작에 속하는 1941년 <초생기(初生記)> <여정(旅情)> <만찬(晩餐)> 등에서는 인정 세태(人情世態)를 가볍게 풍자한 인생파적인 태도를 가졌다. 1938년 <매일신보> 학예부장, 광복 후에는 <국도신문> 주필을 거쳐 고려대학 영문과 교수 역임. 앞에 든 작품 외에 <삼막사(三幕寺)> <표정(表情)> 등이 있고, 저서에 <육당 최남선> <한국인의 멋> <문학개론> 등이 있다.

이무영[편집]

李無影 (1908-1960)

본명 용구(龍九), 소설가.충북 음성(陰城) 출생. 일본 도쿄에서 4년간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 밑에서 소설을 수업. 초기작으로는 <반역자>(1929) <두 훈시(訓示)> 등이 있고, 중편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1932), 단편 <B년의 소묘(素描)>(1934)가 <동아일보>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작 장편 <먼동이 틀 때>, <루바슈카> <명일(明日)의 포도(鋪道)> 등 일련의 작품은 아나키스틱한 경향을 띠었고, 1939년 이후 작품세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기 위해 농촌에 돌아가 흙의 문학을 지향, <흙의 노예>(1940), <제1과 제1장(第一課第一章)>은 당시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민작가로, 그 밖에 장편 <농민> <향가(鄕歌)> <젊은 사람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등이 있고, 단편집 <무영 단편집> <산가(山家)> 등과 저서에 <소설작법> 등이 있다. 1943년 조선 예술상, 1956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흙의 노예(-奴隸)[편집]

1940년에 이무영이 지은 단편소설. 농촌생활에서 취재한 그의 대표작. 내용은 기계 문명에 대치되는 순수한 인간성의 재탐구와 무지를 이해 못하는 지식층이 흙의 노예라 부를 수 있는 무지한 인간 속에서 참된 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오일도[편집]

吳一島 (1904-1946)

본명은 희병(熙秉). 시인.경북 영양(英陽) 출생. 1931년을 전후하여 시단에 등장. 세련된 서정시를 발표했고, 1934-1935년에 시잡지 <시원>을 발간하여 서정시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시원(詩苑)[편집]

1934년 창간된 시 전문지. 오일도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5호까지 나왔다. 주로 오일도, 김달진(金達鎭), 김기림 등과 시문학파 시인들의 작품이 발표되었고, 당시 순수 서정시 운동의 중요한 발표 기관으로 큰 역할을 했다.

신석정[편집]

辛夕訂(1907-1974)

본명은 석정(錫正). 시인.전북 부안(扶安) 출생.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나와 1935년 <시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장. 동양적인 전원시인으로, 그의 시풍은 신비하고 그윽한 맛이 있으며, 시집에 <촛불> <슬픈 목가(牧歌)> <빙하(氷河)> 등이 있다.

김광균[편집]

金光均 (1913-1993)

시인.개성 출생.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도회적인 감각을 나타낸 모더니즘 시로 1934년경 문단에 등장,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6년경 신세대론(新世代論)이 유행할 때 오장환 등과 함께 신세대 시인으로 불리어졌고,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시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회화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는 정서를 영탄하기에 앞서 감각을 시각화(視覺化)하였다. 김광균의 회화적인 감각은 시 <외인촌>, <와사등> 등에 한층 철저하게 나타났다. 대표작으로 <기항지(寄港地)>(1939)가 있다. 광복 후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였으며 시집 <황혼가(黃昏歌)>를 내었다.

장만영[편집]

張萬榮 (1914-1975)

시인. 호는 초애(草涯).

황해도 백천(白川) 출생. 1937년 시집 <양 (羊)>으로 문단에 등장. 농촌과 자연을 소재로 감각적인 서정시의 세계를 이룩했다. 광복 후 종합지 <신천지>를 주재했고, 시집에 <양> <축제(祝祭)> <유년송(幼年頌)> 등이 있다.

함형수[편집]

咸亨洙 (1914-1946)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마음의 단편>을 <동아일보>에 처음 발표한 이래 다수의 시를 발표. 193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이 당선되기도 했으나 광복 직후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이영도[편집]

李永道 (1916-1975)

경북 청도 출생. 1945년 동인지 <죽순>에 <제야>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조집으로

<청저집(靑苧集)>(1954), <석류>(1968)가 있고,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 <비둘기 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의 길목>(1971) 등이 있다. 작고 후에 후배들에 의해 '정운 시조상'이 제정되어 해마다 시상되고 있다.

이용악[편집]

李庸岳 (1914-1971)

함북 경성 출생.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 졸업. 1935년 <신인문학>에 <애소유언(哀訴遺言)>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전 <인문평론>지의 기자를 역임했으며 광복 후 시집 <오랑캐꽃>을 낸 뒤에 고향인 경서에 돌아간 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등의 시집이 있다.

최재서[편집]

崔載瑞 (1908-1964)

평론가·영문학자.호는 석경우(石耕牛).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경성제대 영문과졸업. 경성제대·법학 전문의 강사, 연세대학 교수 등을 지냈다. 1933년 이후 신문·잡지를 통해 영국의 주지파 문학을 소개하고, 1934년에서 1938년에 <비평과 과학> <비평의 형태와 기능> <풍자문학론> <취미론(趣味論)>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활동을 통해 지성(知性) 문학론을 전개, T. E. 흄, T. S. 엘리어트, 허버트 리드, I. A. 리처드, 올더스 헉슬리 등 현대 주지주의 문학을 소개하고 지성적인 문학 평론가로 이론과 창작평 등을 썼다.

1938년 <인문평론(人文評論)>을 주재했고, 주지주의 문학의 소개와 함께 분석과 종합을 통한 그의 과학적인 비평의 방법은 한국 문예 비평사의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후기에는 특히 영문학자로 셰익스피어 연구에 공적을 남겼다. 저서에 평론집 <문학과 지성> <최재서 평론집> <문학원론> <영문학사>> <셰익스피어 연구> 등이 있고, 번역에 드라이저의 <아메리의 비극>, 호손의 <주홍글씨>,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이 있다.

이상[편집]

李箱 (1910-1937)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시인·소설가.

서울 출생. 1930년 경성고등공업을 졸업. 처음에는 시로 출발했다. 1934년 9월 <조선일보>에 시 <오감도>를 발표한 뒤 1936년 9월 <조광>지에 <날개>를 발표함으로써 기재(奇才) 또는 난해한 작품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35년대를 전후해서 세계적으로 유행한 자의식 문학시대에 그는 우리 문단에 서구의 심리주의를 시험하고 근대 정신의 자아 분열에 이른 자의식 문학을 발표함으로써 그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그의 시 <오감도>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적인 전위파의 이론을 우리 문단에 처음으로 실험한 것으로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볼 때는 이채로운 작품이다.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종생기>(1937)는 자의식을 한층 적나라하게 표현, 주관적인 심리묘사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실화(失花)>(1937), <실락원(失樂園)> 등의 작품도 있다. 본래 신경질인 성격에다 심한 폐결핵이었던 그는 시대적인 고민에다 의식적인 자학을 함으로써 사생활은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웠으며, 회복을 원하여 1937년 도쿄에 갔으나 그 곳에서 요절했다. 유고에 <이상 전집>이 있다.

오감도(烏瞰圖)[편집]

(1934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이상의 시. '조감도(鳥瞰圖)'의 '鳥'자를 '烏'자로 바꾼 것부터가 문제된다. 쉬르레알리슴의 영향 아래 서구 전위파의 이론을 처음으로 시단에 실험한 작품이다. 한국 시의 인습과 전통에 항거하여 새로운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날개[편집]

(1936년)

<조광>지에 발표된 이상의 단편소설. 1930년대 심리주의 또는 주지주의 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근대적 불안과 자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절망과 자아(自我)의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근대의식을 해체함으로써 순간이나마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작가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백철[편집]

白鐵 (1908-1985)

평론가.평북 의주(義州) 출생. 일본 도쿄 고등사범 영문과 졸업. 그 후 <개벽>사 기자, 각 신문사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문화부장 등을 지냈다. 경향문학기 초기에는 동반자적인 비평활동을 했고, 이후 1933년경부터 <인간 묘사의 시대> <인간 탐구론>(1934) 등 휴머니즘 문학을 제창했으며, 그 후에는 네오리얼리즘·네오휴머니즘 등을 내세워 진보적인 비평가로 활약했다. 중앙대학교 교수, 펜클럽 한국지부 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에 <신문학사조사>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문학개론> 등이 있고, 1968년 <백철 전집>(4권)을 내었다.

김광주[편집]

金光洲 (1910-1973)

경기도 수원 출생. 중국 상하이 남양의대 수학. 1933년 단편 <밤이 깊어 갈 때>를 <신동아>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포도의 우울> <석방인> <춘상> <장미의 침실>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중국 대륙에서의 오랜 방랑 생활에서 길러진 호방한 기질로, 폭이 넓고 선이 굵은 작품 세계를 보인 작가였다.

김영수[편집]

金英壽 (1911-1977) 서울 출생. 배재 고보,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수학. 학생 연극 단체인 '동경 학생 예술좌' 창립. 1934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희곡 <광풍> 입선, <동아일보>에 <동맥>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조선일보> 기자 역임. 주로 극작가로 활동. 주요 작품으로 <방랑기>, <생리>, <파도> 등 발표. 그는 소설의 '재미'를 통한 통속성을 지닌 작품을 추구한 일면을 지닌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허윤석[편집]

許允碩 (1915-1995)

경기도 김포 출생. 1935년 <사라지는 무지개와 오뉘>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실락원>, <옛 마을>, <해녀>, <조사(釣師)와 기러기>,

<초인> 등 발표. 그는 시대적 사건이나 상황을 서정적인 문체로 형상화하는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허준[편집]

許俊 (1910- ? )

평북 용천 출생. 중앙 고보,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졸업. <조선일보> 기자 역임. 1935년 시 <모 체>를, 1936년에 단편 <탁류(濁流)>를 <조광(朝光)>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만주를 거쳐 광복 후 북한에 거주. 주요 작품으로

<야한기(夜寒記)>, <습작실에서>, <잔등(殘燈)>, <한식일기(寒食日記)> 등 발표. 작품집 <잔등>(을유문화사, 1946)이 있다. 그는 해방기의 현실과 인간의 내면 세계를 깊이있게 탐구한 작가였다.

김이석[편집]

金利錫 (1914-1964)

평양 출생. 연희 전문학교 수학. 1938년 <동아일보>에 <부어(腐漁)>가 입선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실비명>, <뻐꾸기>, <허민 선생> 등 발표. 그는 소박하고 선의에 찬 잔상을 통하여 휴머니즘적인 세계를 추구한 작가였다.

이봉구[편집]

李鳳九 (1916-1983)

경기도 안성 출생.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수학. 1938년 김광균·오장환·서정주 등과 <시인부락(詩人部落)> <풍림(風林)>, <자오선(子午線)> 등의 동인으로 활동. 주요 작품으로 <언덕>, <브라운과 시계>, <북청 가는 길> <방가로(放歌路)>, <잡초> 등 발표. 그는 주로 자전적인 작품 세계를 보이면서 문단 교류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다루었다.

최상규[편집]

崔翔圭 (1934-1994)

충남 보령 출생.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1956년 <포인트>가 <문학예술>지에 추천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사탑(斜塔)>, <형성기>, <겨울 잠행>, <자라나는 탑> 등 발표. 번역서로 <현대소설이론> <소설의 수사학> 등이 있다. 공주 교대 교수 역임. 그의 소설은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위한, 상상력과 환상을 그려내는 작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김문집[편집]

金文輯 (1907- ? )

평론가.호는 화돈(花豚). 마쓰야마(松山)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소설 공부를 했다. 1935년 귀국하여 주로 패기에 넘치는 문예평론을 발표했고, 유미적(唯美的)인 예술지상의 입장을 주장했다.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였으며 저서에 평론집 <비평문학>이 있다.

탁류(濁流)[편집]

(194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채만식의 장편소설. 그의 대표작으로 내용은 여주인공 초봉의 유전하는 기구한 운명을 통하여, 풍자적인 수법으로 세속적인 인정 세태를 그린 작품. 시대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려는 데 주제를 두고 시정(市井)적인 풍속 세태의 분해 과정을 그려 박태원의 장편 <천변풍경>과 함께 대표적인 세태소설을 이루며 그 비판적인 리얼리즘은 문학사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김강사와 T교수(金講師―敎授)[편집]

(1935년)

<신동아>에 발표된 유진오의 단편소설. 속되고 추악한 현실 속에서 지식인의 양심과 고민을 그린 작품으로 심리묘사가 뛰어난 사실주의풍의 소설이다. 주인공 김만필이 전문학교 강사로 취임은 했으나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세속적인 교무담당자와 한 동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 직에서 쫓겨난다는 이야기. 유진오의 대표작이며, 1935년대의 평판작이다.

암흑기의 문학[편집]

暗黑期-文學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일제의 정세는 더욱 급박한 위기의식의 고조와 함께 암흑기적 양상(樣相)을 띠게 되었다. 중·일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과 동시에 1939년에 미·일 전쟁이 다시 점화(點火)되었다. 마침내 전 세계 연합국을 상대로 한 파시즘과의 세기적 대결인 제2차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일제의 세력이 물심 양면으로 약화됨에 따라서 일제의 침략주의적인 탄압은 극도로 노골화되어 그들의 군국정책에 대한 협력이 강요되었다. 1938년 지원병 제도의 실시와 함께 이른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 날조, 대두되었고 1940년 이후에는 징병(徵兵)·징용(徵用)의 강제 실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법제화(法制化)하여 민족 의식을 말살하려는 이른바 황민화(皇民化) 운동이 문화시책으로 구체화되었다.

1939년 이른바 '조선문인협회'가 결성, 일본 국책(國策)에 협력하는 문학기관으로 많은 문학인들을 동원, 자기네 전쟁정책에의 협력이 강요되었다. 더욱이 '국어(일어)상용(常用)'의 운동과 함께 민족어인 한글을 말살하기 위해 문학에서는 일어(日語)로 작품을 쓰도록 강요되었다. 소학교·중학교의 조선어 시간은 전폐되고, 194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양대 민족지가 폐간되었고, 1941년 <문장(文章)> <인문평론(人文評論)> 등의 문예지가 폐간되었다. <인문평론>은 곧 <국민문학(國民文學)>으로 개제, 일문으로 속간되었고, 변절(變節) 문학인들이 속출하여 이들은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산하로 들어가 일문으로 작품을 쓰며 일제의 황민화 운동에 형식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동조하니 이 시기는 민족문화의 수난기이며, 문학사적으로 보아 치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시기였다.

한편 이러한 암흑기적 현실에서 눈을 돌려 산방(山房)과 자연을 찾아 은둔(隱遁)하여 붓을 꺾거나 개탄과 울분에 몸부림친 문학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 극도에 달한 민족적 수난은 문학작품의 생산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기실 민족어 말살 이전에도 문학에 있어서 사상적·비판성은 띨 수 없었고, 오직 문학 형식, 문장 수사 등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전이(轉移)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급박한 정세가 오기 전인 1936년을 전후해서는 우리 문학도 양적으로 풍성한 시기를 맞아, 문장·작품 기교 등에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생산한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많은 신인들이 등장했다. 즉 1934년 박영준(朴榮濬), 1935년 김유정(金裕貞)·김동리(金東理), 1936년 김정한(金廷漢), 1937년 정비석(鄭飛石), 1938년 현덕(玄德), 1939년 김영수(金永壽), 1940년 최인욱(崔仁旭) 등 유능한 소설가들과, 처음 시에서 출발하여 소설로 전환한 황순원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또한 김동명(金東明), 임학수(林學洙), 김상용(金尙鎔), 김광섭, 모윤숙(毛允淑) 등의 시인 및 이무영, 계용묵(桂鎔默), 강경애(姜敬愛), 최정희(崔貞熙) 등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적극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이 시대에 등장한 시인들은 이육사(李陸史), 김달진(金達鎭), 서정주(徐廷柱), 유치환(柳致環), 윤곤강(尹崑崗), 백석(白石), 노천명(盧天命) 그리고 이 민족적인 수난기를 전후해서는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김종한(金鍾漢), 박남수(朴南秀), 이한직(李漢稷) 등의 시인과 최태응(崔泰應), 임옥인(林玉仁) 등의 작가가 신인으로 등장했다. 특히 암흑기를 통해 순절(殉節)로 일제에 저항한 윤동주(尹東柱)와 이육사는 민족어가 말살된 뒤에도 문학사의 공백기를 증언한 유일한 시인이었다. 특히 1935년경부터 1941년경까지,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에서부터 서정주의 <화사집(花蛇集)>에 이르기까지 50여 종의 시집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농촌과 전원문학[편집]

農村-田園文學

외부 정세가 극단적으로 악화됨에 따라 이 시기의 문학은 현실 도피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그 중의 한 경향이 전원 농촌문학으로 나타났다. 특히 도시는 불안과 위기의식이 심각하게 대두되었으므로 암담한 도시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전원이나 농촌현실을 중시한 기운이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1935년을 전후해서 등장한 박영준, 최인준(崔仁俊) 등의 신인들은 모두 농촌 현실에서 취재하여 소설을 쓴 농촌작가였다. 박영준은 1934년 <모범경작생(模範耕作生)>이 <조선일보>에 당선된 이래 농촌소설을 통하여 농촌의 생활과 그 곳에 사는 가난하고 무지(無知)한,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작품의 제재로 다룬 것이 그의 특징이며, 최인준도 <양돼지>(1935) <황소>(1935) <안해>(1935) <통곡하는 대지(大地)>(1936) 등 일련의 농촌소설을 통해 진지한 태도로 시골 사람들의 성격을 묘사했다. 이무영도 그의 대표작품인 <농우(農牛)>(1935)를 비롯하여 <금송아지>(1935) <당산제(堂山祭)>(1939) <고향 사람들>(1941) 등의 작품을 통해 농민의 생활감정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가였다. 특히 이무영은 1939년경부터 반도시적(反都市的)인 현실관을 가지고 농촌소설에 전념한 대표적인 작가였다. 그는 동아일보사의 기자 생활을 버리고 농촌으로 낙향(落鄕)하여 1935년에 발표한

<흙을 그리는 마음>에 이어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1940) 등의 전형적인 농촌 소설을 발표하여 '흙의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흙의 노예>는 그의 대표작이며, 이 작가가 뒤에 <도전(挑戰)>(1939) <승부(勝負)> 등의 소설에서 창백한 지식인에 대한 야성적인 힘의 문학을 강조한 것도 이 농촌문학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있어 시인들은 전원과 산방(山房)을 찾아 은거생활을 하면서 동양적인 관조와 자연을 예찬하니 이것 또한 복잡하고 어두운 도시적 현실에 대한 기피(忌避)의 한 징후(徵候)였다. 인생파의 시인 김상용은 관조적인 태도로 인생과 전원생활에 대해 담담하게 노래했다.

또한 김동명은 난세(亂世)를 피해서 자연 속에 파묻혀 한거(閑居)하는 동양 시인의 면모를 1938년의 시집 <파초(芭蕉)>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미 1923년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개벽>)이라는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로써 문단에 등장했던 그는 1935년대를 전후해서 <구름> <바닷가에서> <황혼(黃昏)>등의 시편에서 전원과 자연 예찬으로 일관한 변신을 보여주었다.

1935년 <시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장한 신석정도 동양적인 전원시인으로 1939년 시집 <촛불>과 <돌> <난초> 등의 시편을 통해 자연에 친근한 사상을 보여주었다. 1932년 <조선일보>를 통해 시단에 등장한 김달진(金達鎭)은 허무적(虛無的)인 인생관에서 출발한 동양적인 관조의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박영준[편집]

朴榮濬 (1911-1976)

소설가.평남 강서(江西)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1934년 단편소설 <모범경작 생>이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후, <어머니> <목화씨 뿌릴 때> 등 주로 농촌소설을 발표함.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등에 근무하며 주로 소시민 생활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소설을 발표. 작품으로 장편에 <아름다운 길> 등이 있고, 단편집으로 <목화씨 뿌릴 때>(1947) 등이 있는데, 1953년 단편집 <그늘진 꽃밭>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김상용[편집]

金尙鏞 (1902-1951)

시인. 경기 영천 출생. 일본 리쿄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 <동아일보>에 <무상(無常)>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1939년 첫번째 시집 <망향(望鄕)>을 간행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남으로 창을 내겠소> <서글픈 꿈> <노래 잃은 뻐국새> 등은 그의 초기 시세계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자연 속에서 조용한 생을 관조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정신자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동양인의 오랜 전통적 정신을 소박하고 친근한 민요조로 표현함으로써 특유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시집 외에 풍자적인 수필집인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가 있다.

김동명[편집]

金東鳴 (1900-1968)

시인·정치 평론가.강릉 출생.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과를 졸업했고, 이화여대 교수를 지냄. 1923년 <개벽>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이라는 시로서 문단에 등장했다. 후기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함남(咸南) 서호진(西湖津)에 은거하며 전원시를 발표했고, 1938년 전원시를 모아 시집 <파초>를 출간했다. 광복 후에는 민족적 염원을 노래한 시를 발표하는 한편 정치 평론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그 밖에 시집 <나의 거문고>가 있으며 1954년에 시집

<진주만(眞珠灣)>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정치 평론집으로는 <적(敵)과 동지(同志)>가 있다.

김달진[편집]

金達鎭 (1907-1989)

시인·한학자.경남 창원(昌原) 출생.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 1932년 조선일보에 현상 당선하여 시단에 등장. 1934년 <시원> 등에 <모란(牧丹)> 등을 발표했다. 동양적인 인생관을 가진 시인으로 1939년 시집 <청폐(靑枾)>를 냈고, <장자(莊子)>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피천득[편집]

皮千得 (1910- ) 시인·수필가. 호 금아(琴兒). 서울 출생. 상하이 호강대학 영문과 졸업(1931).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 <소곡(小曲)> 등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기반을 굳혔으며, 1933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追憶)> <기다리는 편지> <무제(無題)> <나의 파링> 등의 수필을 발표, 수필가로서 생활을 겸했다.

그의 시는 대체로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되어 모든 사상·관념·대상을 배제하고 순수한 정서에 의해 생활의 서정을 노래하였다. <꿈> <편지> <사랑> 등의 시를 모아 <서정시집(抒情詩集)>을 간행했다. 또한 생활을 통한 주관적·명상적 소재로 쓴 수필들은 섬세한 문체로 수필문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주요 수필에 <봄> <여성의 미> <구원의 여인상> <인연(因緣)> 등이 있으며, 시문집으로 <금아 시문선(琴亞詩文選)> <산호와 진주> 등이 있다.

풍자문학과 경향파 이후의 시[편집]

諷刺文學-傾向派以後-詩

이미 1934년대에 채만식이 신랄한 풍자적 작품을 발표한 뒤 '고발(告發)의 문학'을 들고 나온 김남천과 이기영, 송영, 홍구(洪九) 등 프로 파에 속했던 작가들이 풍자적인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이 풍자문학과 관련해서 1936년 <사하촌(寺下村)>으로 문단에 등장한 김정한(金廷漢)은 <추산당(秋山堂)과 곁사람들> 등에서 비판적인 리얼리즘을 보여줌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현실비판의식과 풍자성이 곁들였는데, <사하촌>에는 지주계급인 승려(僧侶)와 사하촌 농민과의 대립을 묘사했고, <추산당과 곁사람들>에서는 추산당(秋山堂)이란 인물이 죽은 뒤에 유산(遺産)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악한 골육전(骨肉戰)과 화장터의 광경을 냉혹히 묘사함으로써 그의 작품이 비판적인 경향의 리얼리즘임을 보여주었다.

채만식의 신랄한 풍자소설과 함께 이상의 <날개>도 자의식의 노출 및 시대에 대한 풍자성을 보여주었지만 인생파의 입장에서 작품을 쓴 계용묵(桂鎔默)과 김유정(金裕貞)의 작품에도 다분히 풍자적인 작가의 태도가 반영되었다. 특히 이 때에 발표된 최재서의 평론 <풍자문학론>은 이론적인 면에서 풍자문학의 방향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과거에 경향적인 작품을 쓰던 시인들도 이 시기에 들어와 일부 시대 현실에 대한 고뇌와 풍자의 세계를 그렸다. 1934년을 전후해서 경향시인으로 시단에 등장한 윤곤강(尹崑崗)은 제3시집 <동물시집(動物詩集)>에서 비유·우화(寓話)·풍자를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시집은 대부분 동물을 소재로 어두운 시대를 풍자한 것으로 특이한 시정신을 보여주었다.

또 1938년 경향시로 시단에 등장한 김해강(金海剛)도 1940년 시집 <청색마(靑色馬)>에서 초기의 태양을 주제로 한 서사적인 작품과는 달리 시대에 대한 좌절감과 향수적(鄕愁的)인 것을 노래했다. 이찬(李燦)도 경향적인 시인으로 <대망(待望)> <불안>

<결빙기(結氷期)> <바리우는 이 없는 정거장> 등의 시에서 침통한 현실을 노래했으나 그 외 다른 시들은 시대의식이 해소된 일종의 생활시의 경향을 나타냈다. 이찬은 제2시집 <분향(焚香)>에서 지나간 시대에 대한 고뇌를 보여주었고, 제3시집 <망양(茫洋)>에서 니힐리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한편 카프파의 핵심이던 임화(林和)는 시집 <현해탄(玄海灘)> 중 초기작 <네거리의 순이(順伊)> 등을 제외하고는 시대에 대한 단편적(斷片的)인 반응과 부조화를 보여주었고, 프로파인 박세영의 시집 <산제비>에서는 자연에 대한 서정과 시대적인 울분을 토로했다. 1931년경 일본 나프(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맹했던 김용제(金龍濟)도 몇 편의 시대에 대한 관념시를 썼고, 초기 프로파에 가담한 후 '9인회' 회원으로도 활동한 시인 조벽암(趙碧岩)도 시 <향수(鄕愁)> 등에서 우수(憂愁)와 권태(倦怠) 등 시대적인 부조화와 향수를 노래했다.

김정한[편집]

金廷漢 (1909-1996)

소설가.부산 출생. 동래고보(東萊高普)를 거쳐, 193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第一高等學院) 수학. 1936년 단편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이 때부터 <옥심이>(1936) <항유기(航遊記)>(1938) <그러한 남 편>(1938) <기로(岐路)>(1938) <월광한(月光恨)>(1940) <낙일홍(落日紅)>(1940) <추산당과 곁사람들>(1940) <묵은 자장가>(1941)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러한 단편을 통하여 암흑 속의 식민지 현실에다 비판적인 리얼리즘의 작풍을 보였다.

그러나, 1941년의 <묵은 자장가>를 발표한 후 1945년까지 약 4, 5년간에 걸친 문단 암흑기에 집필을 중지한 이래 이렇다 할 문단적 활동이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그가 1960년대 후기에 와서야 오랜 침묵을 깨고, 낙동강변에 사는 가난한 어촌민(漁村民)의 생활과 수난을 생생하게 그린 중편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69년 단편 <수라도(修羅道)>로 한국문학상을 수상. 부산대학교 교수·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역임하였다. 단편집 <낙일홍(落日紅)>과 <인간단지(人間團地)>(1971)가 있다.

윤곤강[편집]

尹崑崗 (1911-1949)

시인.본명은 명원(明遠). 충남 서산(瑞山) 출생. 1934년경 경향파 시인으로 시단에 등장. 1936년경에 이르러 암흑과 불안 속의 세계를 풍자적으로 그렸다. 광복 후에는 한때 프로문학동맹에 가담했으나, 얼마 후 시집 <살어리>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고전적인 세계로 변신했다. 광복전 시집으로 <대지(大地)>(1937) <만가(輓歌)>(1938), <동물시집>(1939) 등이 있고, 광복 후에는 시집 <살어리>를 비롯하여 시 작품에 <기(旗)> <우리의 노래> <아지랑이>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는 <시와 진실(眞實)>이 있다.

사소설과 세태소설[편집]

私小說-世態小說

암흑기적인 식민지 현실하에 작가는 자유스럽게 외부현실을 비판할 수 없다는 데서 이미 언급된 이상의 <날개> <종생기>, 최명익의 <비오는 길>

<심문(心紋)> 등 자의식의 문학 내지 심리소설이 대두되었고 이와 함께 작가 개인의 신변적인 사소설(私小說)의 세계를 지향한 것은 시대적인 반응으로서의 한 경향이었다.

사소설이라 하면 작가 자신의 실생활에서 얻어진 산 체험을 신변 잡기식으로 그린 소설을 말하는데 즉 소설을 대사회적(對社會的)인 관점이나 인생문제 탐구라는 시야에서 파악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생활태도를 표현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시기의 상황으로 보아 신변적인 사소설이 등장한 것은 하나의 조건 반사(條件反射)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그 대표적인 작가가 안회남(安懷南)이었다. 그는 초기 작품 <연기(煙氣)>(1933) <우울(憂鬱)> <명상(瞑想)> 등에서부터 작가 개인의 신변 이야기와 심리세계에 중점을 두었다. 그 이후에 발표된 <애인(愛人)>(1939) <온실(溫室)>(1939) 등도 모두 신변적 사소설로 일관했는데, 그의 작품에는 어머니와 아내를 둘러싼 가정사(家庭事), 친우와의 교우(交友)관계, 술 친구와의 이야기가 그 중요한 테마를 이룬다. 안회남은 뒤에 <탁류(濁流)를 헤치고>(1940), <어둠 속에서>(1940)에 이르러 현실적인 작품세계로 변모, 광복 후에는 프로문학에 가담했다.

한편 이러한 사소설적인 경향과 앞서 언급된 세태소설이 이 시기에 유행한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시정(市井)의 풍속 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한 이 시기 세태소설의 대표작이며, 채만식의 <탁류>는 그 세태 묘사를 통해 몰락해 가는 현실의 단면을 그린 우수한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한편 유진오는 <가을>(1939) <나비>(1940) <주붕(酒朋)> 등 일련의 시정(市井)세계를 그린 세태적인 작품을 발표해 현실감각의 변모과정을 보여주었다.

역사소설과 통속소설의 유행[편집]

歷史小說-通俗小說-流行 앞서 언급한 대로 20년대 후기부터 역사소설이 대두된 것은 민족주의 문학 내지 국민문학의 한 표현이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1929),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1933) <견훤(甄萱)>, 현진건의 <무영탑>(1937), 박종화의 <금삼의 피> <전야(前夜)>(1940) 등은 모두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었으며, 한편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이 작품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현실적인 의도를 표현했다는 데서 당시의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닌 대하소설로 평가되었다. 이렇게 1935년을 전후하여 역사소설이 대두된 것은 어두운 현실이 자유스러운 창작활동의 여건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그 현실의 불만을 과거의 시대를 취급한 역사소설로 해소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소설의 경향과 함께 1935년 이후부터는 신문소설로서 독자의 흥미를 위주로 한 통속소설이 유행하게 되었다. 통속소설의 특징은 교양적인 것보다 오락적인 성격을 띤 소설로 대체로 줄거리 중심으로 플롯을 전개하고, 연애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통속소설은 현대의 상업주의적인 저널리즘을 배경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 시대의 현실이 본격적인 창작보다는 그 붕괴적인 양상으로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을 대두하게 하였으며, 1935년 이후 약 3, 4년간은 통속소설이 유행적인 현상으로 되었다.

1930년 한인택(韓仁澤)의 <선풍 시대>, 1935년 심훈의 <상록수>가 장편소설로 인기를 끈 이래 여류 작가 김말봉(金末峰)은 신문 연재소설을 통해서 일약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 내용이 철저하게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이라는 데서 크게 저널리즘과 영합되었던 것이다.

그 뒤 김내성(金來成)의 탐정소설이 큰 인기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기운 속에서 연유된 것이다. 1939년 기독교적 휴머니즘과 헌신적인 사랑을 주제로 한 박계주(朴啓周)의 <순애보(殉愛譜)>가 <매일신보>에 당선된 후, 이 작품은 1940년대에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의 하나가 되었다. 통속소설로 등장한 김내성과 박계주는 그 뒤 순문학적인 작품도 썼다.

한편 이미 <조광(朝光)> <조선일보> 등에 장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던 함대훈이 1937년에 발표한 <순정해협(純情海峽)>도 통속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또한 이 무렵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이태준이 신문 소설로서 <청춘무성(靑春茂盛)>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는데, 이 작품도 또한 독자의 흥미를 염두에 두고 쓴 장편소설이었다.

김말봉[편집]

金末峰 (1901-1961)

여류 소설가. 부산 출생. 일본 도오시샤(同志社) 대학 졸업. 처녀작 <망명녀(亡命女)>를 발표한 뒤, 1935년 장편소설 <밀림>을 연재하여 평판을 얻었다. 1936년 발표한 장편소설 <찔레꽃>은 그의 출세작이며, 광복 후 장편 <화려한 지옥> <태양의 권속(眷屬)> <화관(花冠)의 계절> 등을 발표했다.

김내성[편집]

金來成 (1909-1957)

소설가.평양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1939년 <마인>을 발표한 뒤 <백가면> <태풍(颱風)>을 발표하여 처음에는 탐정소설가로 등장. 광복 후에는 통속작가로 전향했다. 1949년부터 3년간 <한국일 보>에 연재된 <청춘극장(靑春劇場)>은 큰 인기를 끌었고, 그 뒤 <인생화보(人生畵報)> <애인(愛人)> 등을 발표한 뒤 <실락원(失樂園)>을 집필 중 사망했다.

박계주[편집]

朴啓周 (1913-1966)

소설가.만주 용정(龍井) 출생. 1939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순애보>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통속적인 작품활동으로 인기를 차지했다. 작품으로 단편집 <처녀지(處女地)>(1948) <진리의 밤>(1948) <구원(久遠)의 정화(情火)> 등이 있다.

토속성과 인생파의 문학[편집]

土俗性-人生派-文學

한편 1935년대를 전후하여 문단에 등장한 신인들은 출신과 지방성(地方性)을 활용하거나 문학의 순수성 및 예술성을 강조하는 인생파적인 경향을 지향했다.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한 신인들은 뒤에 우리 문단의 중견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그들의 작품세계도 암흑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1924년 <상환(相換)>으로 문단에 등장한 이래 인생파적 작품을 발표한 계용묵(桂鎔默)은 1935년 <백치(白痴) 아다다>에서의 예술성 위주의 인생파적인 경향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35년 <소나기> <노다지>로 등장한 김유정(金裕貞)은 생활고와 병고로 죽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에 30편의 가작을 남겼는데 그 특이한 작가적 개성과 구수하고 서민적인 언어법을 활용하여 단편 작가로서의 우리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유정과 때를 같이하여 문단에 등장한 김동리(金東里)도 특이한 문학적 체계를 모색했다. 그의 문학론은 현실적·역사적인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관념적·직관적인 것이 특징이며, 광복 뒤에는 순수문학론을 통해 프로문학파와 투쟁했고, 그의 이러한 문학론은 민족문학과 휴머니즘론의 발전에 주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비석(鄭飛石) 또한 이 시기에 등장했는데, 그의 작품은 순수하게 자연과 조화된 본능의 세계를 그린 것이 특징이었으나 뒤에 이 작가는 <청춘의 윤리>(1943) 등 애정 편력의 대중소설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39년 <소복(素服)>으로 문단에 등장한 김영수(金永壽)도 뒤에는 노골적인 관능과 애욕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이 작가의 통속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1938년 <남생이>가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현덕(玄德)은 작품의 소재를 체험적인 것으로 승화하는 데 각별하게 고심(苦心)한 진지하고 양심적인 작가였다. 그는 <골목>

<경칩(驚蟄)> <군맹(群盲)> <두꺼비가 먹은 돈> 등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대체로 그의 작품은 소년의 눈을 통하여 도시·항구·농촌 등 가난한 영세민(零細民)의 세계를 관찰했는데 이는 그의 작가적 순수성과 진실성을 엿보게 한다. 그는 이 시대의 경박한 저널리즘의 유행성과 영합하지 않고 진실한 작가정신으로 자기의 작품세계를 이룩해 나간 고심과 선택의 희귀한 작가로서 높이 평가된다.

1935년 <단층> 동인으로 처음에는 시인으로 출발한 황순원(黃順元)은 1940년 <황순원 단편집>의 간행을 계기로 작가로서 재출발했다. 1939년 <산신령(山神靈)>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로 등장한 최인욱(崔仁旭)의 작품세계 또한 토속성과 서정성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등장한 유능한 시인으로는 서정주(徐廷柱), 백석(白石), 유치환(柳致環), 이용악(李庸岳), 김용호(金容浩) 등이 있다. 서정주는 동인지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출발, 특히 초기시에서 특수한 혈통·관능·방랑 등을 강조, 인생파적인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7년 시집 <사슴>으로 시단에 등장한 백석은 향토미가 풍기는 독특한 시풍을 가졌는데, <광원(曠原)> <여우곬족> <모닥불> <주막(酒幕)> 등 그의 시는 민족적인 구수한 흙냄새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으로 시단에 등장한 유치환(柳致環)은 1939년 <청마시집(靑馬詩集)>을 발표, 주정적(主情的)인 것을 바탕으로 의지와 관념의 세계를 노래하였는데, 이 시인 역시 인생파 계열에 가까운 시를 썼다. 1935년대 후기에 등장한 이용악의 시는 간도(間島) 등지를 배경으로 침통한 북방의 정조(情調)가 그 바탕을 이룬다. 또 동인지 <맥>의 동인으로 시단에 나온 김용호는 애정의 세계를 즐겨 노래했다.

계용묵[편집]

桂鎔默 (1904-1961)

소설가.평북 선천(宣川) 출생으로 일본 도요 대학(東洋大學) 철학과 졸업.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상환>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후 <최서방> <인두지주> <제비를 그리는 마음> 등의 작품에서 경향성을 보였다. 1935년 <백치 아다다>에서 순예술파적인 경향으로 전환, 이후 <청춘도> <신기루> <장벽> 등의 작품을 발표, 광복 후에 <별을 헨다>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병풍(屛風)의 그린 닭이> <별을 헨다> <백치 아다다> <문장사전> 등이 있음.

백치 아다다(白痴-)[편집]

1939년에 발표한 계용묵의 단편소설. 이 작품은 낭만주의적 바탕 위에다 사실적 수법으로 쓴 그의 대표작으로 인간의 가치는 물질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이라는 사상을 추구했다. 벙어리 아다다는 가난하던 시절에는 그런 대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으나 여유가 생기자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동이가 돈을 가진 것을 보고 새로운 공포를 느낀 나머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돈이 없어져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마침내 돈을 바다에 던져 버린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김유정[편집]

金裕貞 (1908-1937)

소설가. 춘천 출생. 휘문고보를 나온 뒤 연희전문 문과를 중퇴. 1935년 <소나기>(조선일보 당선)와 <노다지>(중앙일보 당선)로 문단에 등장. 1937년 폐결핵으로 별세하기까지 우수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일약 중견작가가 됨. 불우한 환경과 병고 속에서 인생을 마친 작가로, 일제 말기에 활동한 작가 중 가장 역량있는 단편 작가의 한 사람. 그는 능란한 문장, 구수한 속어를 구사한 작가로, 불우한 인간 군상을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그의 작풍 뒤에는 항상 짙은 인간미와 애수(哀愁)가 깃들어 있다. 그는 요절하기까지 2년여의 작가 생활에 30여 편의 단편을 남김. 주요 작품에는 <노다지> <금 따는 콩밭>(이상 1935) <산골> <동백꽃> <봄봄> <가을> <야앵(夜櫻)>(이상 1936) 등이 있음. 작품집으로는 <동백꽃>이 있으며 유고로 <김유정 전집>이 있다.

봄봄[편집]

김유정(金裕貞)의 단편소설. 1935년 <조광(潮光)>에 발표되었다. 점순이와의 성례(成禮)만을 꿈꾸며 점순네 집에서 3년 7개월이나 머슴일을 하던 '나'는 장인에게 사정도 하고 협박도 하지만 "너 성례시켜 주마"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루는 구장에게 이 일을 따지러 갔는데, 이 때 점순의 핀잔과 충동질에 용기를 얻어 장인과 맞붙어 싸워 보았지만 오히려 점순이의 독살스런 말에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해학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인정(人情)의 기미가 생생하게 부각된 김유정 소설의 백미이다.

동백꽃[편집]

(1936)

<조광>에 발표한 김유정의 단편소설. 내용은 토속적인 농촌을 배경으로 성(性)에 눈뜬 처녀와 아직 전혀 성을 모르는 순박하고 어리석은 총각을 중심으로 풍자적이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림으로써 애정의 순진성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 향토미가 풍부하게 넘쳐 흐르며 전면에 작가의 인간미가 나타난 사실주의풍의 작품.

김동리[편집]

金東里 (1911-1995)

본명은 시종(始鍾). 소설가.경주 태생. 1935년 <화랑의 후예>(조선·중앙일보 당선) 뒤에

<산화>(동아일보 당선)로 문단에 등장. 이어서 <바위>(1936) <무녀도>(1937) <황토기>(1937) 등 토속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이채(異彩)를 띠었으며, 인간의 신비력과 직관에 의한 작품세계를 지향하고 주관적인 휴머니즘과 순수문학론을 전개했다.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달> <역마(驛馬)> 등이 있어 같은 계열의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작품이며, <혼구(昏衢)>(1940) <다음 항구>(1940)와 광복 후의 <혈거부족(穴居部族)> <형제> 등 다른 경향의 현실을 추구하기도 함. 그 후 <귀환장정(歸還壯丁)> <인간동의(人間動議)> <흥남철수(興南撤收)>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단편집에 <무녀도> <황토기(黃土記)> <귀환장정> <실존무(實存舞)> 등이 있고, 장편으로는 <사반의 십자가>가 있다. 평론집에

<문학과 인간>이 있으며 문총(文總) 중앙 위원, 예술원 회원, 서라벌예대 교수, 한국문인협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예> <월간문학> <한국문학> 창간.

무녀도(巫女圖)[편집]

1936년에 발표된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속 신앙과 예수교가 교체되어 가는 시대 조류를 배경으로 하여 신비스러운 토속의 세계를 그려 놓은 작품. 내용은 무녀인 모화(毛火)를 중심으로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민속세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그린 것임. 몰락해 가는 운명의 비애를 단순한 애수로 해결짓지 않고, 그 운명과 싸워서 그것을 극복해 감으로써 비록 그것이 몽환적인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서 본질적인 인간정신을 찾으려 했다.

황토기(黃土記)[편집]

1930년 김동리가 지은 단편소설. 내용은 억쇠라는 특이한 인물을 통해 허무의식을 그린 작품. 한국적 토속성과 신화·전설적인 바탕 위에 신비성 등을 가미하여 작가의 독특한 사실적 수법으로 이룩한 작품이다.

사반의 십자가[편집]

-十字架

김동리의 장편소설. 1955년부터 1957년에 걸쳐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작자는 이 작품으로 1958년 예술원 작품상을 받았다.

주인공 사반은 2천년 전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있던 유대의 독립투사로서 혈맹단(血盟團)이라는 비밀결사대의 수령이다. 그는 언제나 조국의 독립이라는 현세적·지상적 영광을 추구한다. 그러나 때마침 구세주란 말을 들으면서 나타난 예수는 영혼의 구제, 즉 내세적(來世的)·천상적(天上的)인 영광만을 추구함으로써 사반과는 끝내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적 대립을 거듭하다가 다같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만다.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바로 옆 십자가에서 "먼저 너 자신부터 구하고 남을 구하라"고 소리친 강도가 바로 사반이다.

이 소설은 예수와 사반의 대립을 통해 영혼과 육체를 스스로 대극점에 놓고 있는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추구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모순은 영혼과 육체의 조화로써 해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조화의 가능성이 몰락해 가는 서구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동양문화 속에 있다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웅건하고 장대한

스케일과 빈틈없는 구성, 정확한 문장 등이 이 작품의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비석[편집]

鄭飛石 (1911-1991)

본명은 서죽(瑞竹). 소설가.의주 출생. 니혼 대학(日本大學) 졸업. <졸곡제(卒哭祭)>(1936)

<성황당>(1937)으로 문단에 등장. 그의 초기작 <성황당>은 자연의 순수 상태에 동화되는 인간의 모습과 성(性)의 세계를 그린 작품으로 당시의 평판작이다. 광복 후 대중작가로 신문 소설로 전향. 남녀의 애정·치정·풍속을 그 시대를 배경으로 그렸다. 장편소설에 <자유부인> <여성전선> <청춘의 윤리> 등이 있고, 단편집으로 <성황당> 등과 그 밖의 저서로 <소설작법>이 있다.

성황당(城隍堂)[편집]

1937년 조선일보에 당선된 정비석의 단편소설. 그의 출세작으로,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이에 동화되는 인간의 순수성과 본능의 세계를 그림. 내용은 '순이'라는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원시적이고 토속적인 세계 속에서 이에 동화되어 가는 그녀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김영수[편집]

金永壽 (1911-1979)

소설가·극작가.서울 출생. 김유정의 조카로 일본 와세다 대학 수학. 1937년 <소복>(조선일보)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단편소설 <밤>(1940) 등 일련의 작품 속에서 관능적인 애욕의 세계를 묘사함. 단편집에 <소복>, 장편에 <파도> <폭풍의 역사> 등이 있다. 광복 후에는 희곡과 방송 드라마로 전향하여, 희곡에 <혈맥(血脈)> 등과 <박서방> <거북> 등의 방송극이 있다.

최인욱[편집]

崔仁旭 (1920-1972)

소설가.경남 합천 출생. 일본 니혼 대학 종교과 수학. 1939년 매일신보에 <산신령>을, <조광>에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뒤에 역사소설과 대중소설로 전환했다. 서라벌예대 교수·중앙대 강사 등을 지냄. 저서에 장편 <초적(草笛)>(1961). <임꺽정(林巨正)>(1965), <만리장성> 등이 있다.

황순원[편집]

黃順元 (1915-2000)

소설가.평남 대동(大同)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 졸업. 경희대학 교수역임. 처음에는 <단층> 동인으로 1935년경 <신동아>에 시를 투고했고, <목가> <골동품>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40년 이후 <황순원 단편집>을 냄으로써 소설로 전환, 치밀한 문장과 감각적·심리적인 소설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 간행된 단편집으로는 <목넘이 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곡예사>(1952) <학(鶴)> <탈> 등과 장편소설 <별과 같이 살다>(1950) <카인의 후예>(1954) <인간 접목>(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日月)>(1964) 등이 있다. 1954년 자유문학상을 받음.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서정주[편집]

徐廷柱 (1915-2000)

시인.호는 미당(未堂). 시동인지 <시인부락>을 통해 문단에 등장, 시단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처음에 그는 토속적인 체취와 강렬한 생의식(生意識)의 세계를 표현한 시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집 <화사집>은 초기의 시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방랑·관능·토속·고뇌의 세계 속에서 생의 갈등과 방황을 보여주었으며, 시집 <귀촉도>에서부터는 점차 긍정적인 세계로 변모되어 시집 <신라(新羅)> 이후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전통적인 신라정신을 그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하였다. 예술원 회원·동국대 교수 역임.

유치환[편집]

柳致環 (1908-1967)

시인.호는 청마(靑馬).

경남 충무 출생. 연희전문 문과 수업.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했다. 초기 시에서부터 형이상학적 관념과 생의 의지를 시세계에서 표현하여 흔히 의지의 시인이라 불렸는데, 허무주의적인 것과 대결하는 것을 시의 과제로 삼았다. 다작의 시인으로 시집에 <청마시집>(1939) <생명의 서(書)>(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2)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이 있다. 1946년에 제1회 조선 시인상을,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음. 예술원 회원·경남여고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용호[편집]

金容浩 (1912-1973)

시인.마산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 졸업. 시지 <맥>의 동인으로 활동. 시집으로 <향연(饗宴)>(1941)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별>(1951) <남해찬가> 등이 있고 저서에는 <시문학 입문> 역서에 <문학 원론>(허드슨 원저) 등이 있다.

여류 문학의 세계[편집]

女流文學-世界

1920년대에 김명순(金明淳)이 <조선문단>에 시를 발표한 이후, 1930년대에서 1935년 사이에 박화성, 강경애(姜敬愛), 백신애(白信愛) 외에 최정희(崔貞熙), 김원주(金源周), 이선희(李善熙),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 임옥인(林玉仁) 등의 여류 작가·시인들이 등장했다. 먼저 강경애는 성실하고 끈질긴 집념으로 일관했는데, 그의 작풍은 소박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것이었다. 백신애는 <조선일보>를 통해 문단에 등장, 주관성과 정열이 강한 작가로 계속 <광인수기(狂人手記)>(1937) <소독부(小毒婦)>(1938) <정조원(貞操怨)> 등을 발표했으나 작품이 원숙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정희의 초기작은 경향성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가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37년 <흉가(凶家)>를 발표한 이래 <정적기(靜寂記)>(1938) <인맥(人脈)>(1940) <지맥(地脈)>(1940)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작가의 특색은 주인공을 통해 대담하게 자기 폭로를 치밀한 수법으로 묘사했는데 한마디로 주정성(主情性)이 강렬하게 반영되었다. 이선희는 북방적인 엑조티시즘의 세계를 그의 작품에 반영했는데 <연지>(1937) <계산서(計算書)>(1937) <매소부(賣笑婦)> <탕자(蕩子)>(1940) 등을 발표, 그 중에서도 <매소부>가 대표작이다. 장덕조(張德祚)는 1932년 <개벽>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작품을 발표했는데, 초기의 단편으로는 <해바라기> <자장가>가 두드러진 편이며, 이 작가의 통속적인 스토리 전개는 뒤에 대중소설로 전환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34년 처녀 시집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등장한 모윤숙은 감상과 정열에 넘치는 시인으로 장편시 <렌의 애가>에는 여심(女心)의 동경과 연모(戀慕)의 감정이 세련되게 표출되어 있다. <중앙일보> 기자를 지내면서 시를 발표한 노천명은 이지적인 시인으로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백신애[편집]

白信愛 (1908-1939)

여류 소설가.경북 경산(慶山) 출생. 대구사범 강습과를 졸업. 1928년에 단편 <나의 어머니>가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꺼래이>(1933)를 발표하면서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음. 정열적이고 다혈질(多血質)의 작가였으나 결국 미완성의 작품세계를 남기고 죽음. 주요 작품에 <정현수(鄭賢洙)> <정조원> <적빈> <광인수 기> <소독부> <혼명(昏冥)>에서 등이 있다.

강경애[편집]

姜敬愛 (1907-1943)

여류 소설가.황해도 출생.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살다가 그 곳에서 죽음. 1931년 <어머니와 딸>로 문단에 등장, 자연주의 경향이 짙은 소설을 발표함. 작품에 <부자>(1932) <소금>(1934) <해고>(1935)

<산남(山男)>(1936) <어둠>(1937) 등의 단편과 중편으로 <지하촌(地下村)>(1936)이 있으며, 장편으로는 <인간문제>(1933) 등 소박한 리얼리즘이 반영된 작품이 발표되었다.

지하촌[편집]

地下村

강경애의 단편소설. 1936년 3월 12일부터 4월 3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동네의 조무래기 아이들에게도 시달림을 당해야 하는 불구자 칠성이는 마을의 처녀 큰년이를 사랑했다. 어느날 그는 멀고 먼 읍에 가서 큰년이에게 줄 인조견 저고리감을 떠 가지고 다 죽다시피한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보니, 억수같은 비는 다 가꾸어 놓은 조밭을 망쳐놓았고 큰년이는 바로 전날 시집을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칠성이는 품속에 인조견 저고리감을 안고 한없이 울었다. 사회의 밑바닥을 파헤쳐, 강렬한 사회개혁의 의욕을 나타낸 작품이다.

최정희[편집]

崔貞熙 (1912-1990)

여류 소설가.함남 단천(端川) 출생. 중앙보육학교 졸업. 시인 김동환이 남편이다. 1932년경부터 <삼천리>의 여기자로 있으면서 <람프등>

<정당한 스파이> 등을 발표했는데, 그의 초기작은 경향성이 짙게 나타나 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것은 1937년 <흉가>를 발표한 뒤부터로 <정적기>(1938) <인맥>(1940) <지맥>(1940) 등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며, 광복 뒤에는 <풍류 잡히는 마을>(1947) <우물 치는 풍경>(1948) <수탉> 등의 단편과 <녹색의 문>(1954) <인간사(人間史)>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단편집에 <인맥(人脈)> <풍류 잡히는 마을> 등이 있으며, 1958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모윤숙[편집]

毛允淑 (1910-1990)

여류 시인.호는 영운(嶺雲). 평북 출생.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뒤 1934년 처녀시집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등장, 애국적인 감정과 열정이 넘치는 시인으로, 1937년 장편시 <렌의 애가>를 발표, 성숙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광복 후에는 문예지 <문예(文藝)>를 발간했고, 광복 후의 시집으로는 <옥비녀> <속 렌의 애가> 등이 있음. 1971년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제 펜클럽 부회장 역임.

노천명[편집]

盧天命 (1913-1957)

여류 시인.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 <중앙일보>기자 등을 지냈다. 감상을 억제한 이지적인 시인으로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에 <산호림>(1938), <창변(窓邊)>(1945) <노천명 시집>(1949) <사슴의 노래> 등이 있고, 유고에 <노천명 전집>(1960)이 있다.

이선희[편집]

李善熙 (1911- ? )

함남 함흥 출생(원산이라고도 알려짐). 이화여전 문과 3년 수료. 1934년 <중앙>지에 <불야 여인(不夜女人)>을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여성의 심리세계를 파고들어 감상성과 낭만성을 짙게 풍기는 작품을 남겼다.

문장과 인문평론[편집]

<文章>-<人文評論)>

1939년을 전후하여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의 양대 순문예지가 출현하여 일제 말기의 민족 수난기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堡壘) 역할을 했다. 이 두 잡지는 문학사적으로 큰 공적을 남겼는데 1941년 4월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될 때까지 한국 현대문학을 이끌고 나간 유일한 작품활동의 무대였다. 이 두 문예지를 통하여 문학사에 남을 허다한 주옥편이 형성되었거니와, 특히 이 두 잡지가 발굴한 신인들의 활동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문장>지의 추천제도를 통하여 나온 작가와 작품을 들면, 곽하신(郭夏信)의 <나그네>(1940) <신작로>(1941), 최태응(崔泰應)의 <바보 용칠이>(1939) <봄>(1939) <항구>(1940), 임옥인(林玉仁)의 <봉선화>(1939) <후처기(後妻記)>(1940) <고독>(1940) 등이 있다. 특히 <문장>은 다수의 유능한 시인들을 배출했는데, 박두진(朴斗鎭), 조지훈(造芝薰), 박목월(朴木月), 김종한(金鍾漢), 박남수(朴南秀), 이한직(李漢稷) 등이며 <인문평론>을 거쳐 등장한 작가로는 윤세중(尹世重), 임서하(林西河) 등으로 이들은 광복 후의 재생하는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은 전위적 역할을 담당했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의 작품은 뒤에 언급되겠지만, 김종한의 <할아버지> <계보(系譜)>(1939), 이한직의 <온실> <낙타>(1939), <한(翰)>(1940), 박남수의 <밤길> <거리(距離)>(1940) <주막(酒幕)> <호롱불> 등의 시작품이 모두 <문장>지에 추천된 작품들이다. 기성작가의 작품으로는 이광수의 <무명>이 <문장> 창간호에 발표되었고, <인문평론>에서는 1940년에 전작소설(全作小說) 시리즈를 계획하여 이효석의 <화분>, 유진오의 <화상보>, <김천의 대(大)> 등의 장편소설을 간행,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문장(文章)[편집]

1939년 4월에 이태준이 주간이 되어 창간된 순문예지. <인문평론>과 더불어 일제 말기의 문학 발전과 유능한 신진 작가·시인의 발굴에 크게 공헌함.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끝까지 항거하여 문학사의 명맥(命脈)을 유지하여 오다가 1941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인문평론(人文評論)[편집]

1938년 12월 최재서의 주재로 창간된 문예잡지. 일제 말기에 우리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1941년 4월 일본 관헌의 탄압에 의해 폐간됨. 얼마 후 잡지명이 <국민문학>으로 개제되어 처음에는 우리말과 일본어를 섞어 쓰다가 나중에는 일어(日語) 전용의 추태를 부리면서 8·15 광복 전까지 계속됨.

최태응[편집]

崔泰應 (1917-1998)

소설가.황해도 출생. 일본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수업. 1939년을 전후해 <문장>에 <바보 용칠이> <항구> <봄>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 광복전 그의 작품에는 시대에 둔감하고 소박한 인물들을 내세워 심리적인 묘사에 장기를 보였는데, 광복 후의 작품은 제작 태도가 바뀌었다. 장편 <전후파> 등이 있고, 단편 100여 편이 있다.

임옥인[편집]

林玉仁 (1915-1995)

여류 소설가.함북 출생. 일본 나라(奈良) 여자고등사범 졸업. 1940년 <문장>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풍선기(風船記)> <월남전후(越南前後)> 등 많음. 1957년 자유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건국대학교 가정대학장 역임.

오장환[편집]

吳章煥 (1916- ? )

충북 보은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 수학.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등단.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이다. 광복 후 월북하였다.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문명 비판적인 시와 보들레르적인 위악적 태도의 시를 썼으나, 1940년대를 전후하여 서정적 사색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생명력을 추구했다. 광복 후엔 현실 비판과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념시를 썼다. <성벽>(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등의 시집이 있다.

박남수[편집]

朴南秀 (1918-1994)

시인.평양 출생. 일본 쥬오 대학(中央大學) 법과 졸업. 1940년을 전후하여 문단에 등장한 후 오랫동안의 침묵 끝에 1950년부터 다시 활동하여 지적 서정의 한 경지를 천착하고자 했다. 1957년 제5회 자유문학상을 수상. 시집에 <초롱불> <갈매기 소묘(素描)> 등이 있다.

이한직[편집]

李漢稷 (1921-1977)

호는 목남(木南). 시인.서울 출생.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법과 수업. 1939년을 전후하여 <문장>지의 추천을 받고 등장. 그의 시에는 소박한 윤리를 발견하려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일본 도쿄에서 거주. 광복 전의 시로는 <한(翰)> <온실> 등이 있고, 광복 뒤의 작품으로 <붕괴> 등이 있다.

청록파의 시세계[편집]

靑鹿派-詩世界

같은 시기에 <문장>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장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은 우연히 공통적인 시풍(詩風)을 가졌는 바, 자연을 바탕으로 그 표현이 전통적인 율감에 의거하여 이룩되었다는 데서 자연파 또는 청록파(靑鹿派)로 불리는 특징있는 시파를 이루었다.

먼저 박목월의 <길처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 <산그늘>과 1940년 <가을 어스름>이 추천되었는데, 그의 시는 대체로 애련·소박한 향토적인 세계를 노래했다. 박두진은 <낙엽송(落葉頌)>(1939) <들국화>(1940)가 추천된 후 뒤에 발표된 <도봉(道峰)>

<연륜(年輪)> <숲> <설악부(雪岳賦)> <푸른 숲에서> 등 처음부터 자연과의 친화에서 출발하여 싱싱한 자연의 생활력과 또 피안적이며 신앙적인 시세계를 보여준 시인이었다. 한편 조지훈은 <승무(僧舞)>(1939) <봉황수(鳳凰愁)>(1940) 등의 추천시와 뒤에 발표된 <고풍의상(古風衣裳)> <고사(古寺)> 등 이 시인은 그 제재(題材)·시상(詩想)에 있어서 제2의 자연이라 할 수 있는 고적(古蹟)·고전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어서 화사(華奢)·전아한 전통적이며 고전적 시세계를 이룬 것이 특징이었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의 자연시는 암흑기적인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復歸)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되었다. 이 청록파 시인은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

조지훈[편집]

趙芝薰 (1920-1968)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시인이며 국학자.

경북 영양(英陽) 출생. 혜화전문 졸업. 1939년 <고풍의상>이

<문장>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에 대한 저항으로 암암리에 전통적인 것과 고전에서 소재를 택했고, 광복 뒤에는 역사적인 감각으로 그 시풍이 변모되어서 고전시인·자연시인·민족시인으로 불리며, 그 자신이 배열한 작품 경향은 다음과 같다. ① <고풍의상> <봉황수>(1940) <승무>(1939) 등 전통적인 것에서 취재, 민족정신을 표현했고, ② <파초우> <완화삼(玩花衫)> 등에서는 자연 교감과 정조(情調)를, ③ <마음> <고사> 등에서는 서경(敍景)과 선(禪) 감각을, ④ <풀잎 단장>에서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적막감을, ⑤ <암혈(岩穴)의 노래> <불타는 가슴> 등에서는 광복 후의 민족적 비분을, ⑥ <아침> <풀밭에서> 등에서는 자연미와 인정미를, ⑦ <역사 앞에서>는 현실과 역사의식을 각각 표현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고려대학교 교수·민족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냈고, 1957년 제4회 자유문학상을 받음. 1946년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을 발간한 이후 <풀잎 단장>(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여운(餘韻)>(1964) 등 시집과 <시의 원리>(1959), <지조론>(1962) <돌의 미학>(1964) <한국 문화사 서설>(1964) <한국민족운동사>(1964) 등의 저서와 역서에 <채근담(菜根譚)>이 있다.

박두진[편집]

朴斗鎭 (1916-1998)

시인.경기도 안성 출생. 우석대·연세대 교수 등을 지냄.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시단에 등장한 이후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싱싱한 생명력과 기독교적 신앙의 바탕 위에서 긍정적인 선미(禪味)를 모색했고, 후기에는 특히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시세계에 표현함.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해> <오도(午禱)> <박두진 시선> 등이 있다.

박목월[편집]

朴木月 (1917-1978)

본명은 영종(泳鍾). 시인.경주 출생. 1939년을 전후해서 <문장>지의 추천으로 등장.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민요풍의 서정시를 지음. 그의 초기작은 애련·소박한 향토적인 시풍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진솔(眞率)한 생활시로 성숙한 시경지를 개척함. <연륜> <청노루> <나그네> 등은 그의 출세작이며, 광복 후에는 <박영종 동요집> <청록집>(공저) <산도화(山桃花)> <난(蘭)·기타> 등의 시집이 있다. 1955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저항의 문학[편집]

抵抗-文學

<문장>이 폐간되고, <인문평론>이 <국민문학>으로 개제된 이후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우리의 모국어가 말살되고, 창씨 개명을 실시하는 등 일제의 탄압은 극도에 달해 단순한 민족의식조차 허용치 않았다. 특히 이 시기는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여 이른바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 문학단체에 의해 일본의 전시정책에 동조, 고무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어용문학으로 타락했으니 문학사적으로 보아 이 시기는 암흑기 또는 수난기로 흔히 불리어진다.

민족 수난의 최악의 시기에서 끝까지 민족적 신념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한 시인이 1930년대 후반의 이육사(李陸史)와 1940년대의 윤동주(尹東柱)였다. 이육사는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있었으며 사회운동에 참여한 뒤 소설을 쓰다가 30세가 지난 뒤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 윤곤강, 김광균 등과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행하여 여기에 서정이 풍부한 <청포도> <교목(喬木)> 등 목가풍(牧歌風)의 서정시를 발표했다. 그 무렵부터 <광야(曠野)> <절정(絶頂)> <꽃> 등 서정적 저항시를 썼는데 그는 상징적이면서도 화사한 시풍으로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다. 그의 조국애가 넘치는 시편들은 만주·간도 등지를 배경으로 한 침통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정서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시 <청포도(靑葡萄)>가 발표된 것은 1940년이었으며 그의 시작들은 대부분이 1935년 이후에 씌어진 것들이었다.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해 베이징으로 탈출했으나 곧 일본 관헌에게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체포, 민족해방을 1년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獄死)했다.

한편 민족어가 말살된 이후 민족 시련이 극도에 달한 1940년 이후의 암흑기적 공백기(空白期)를 저항·고뇌·죽음으로 일관한 시인 윤동주의 작품들은 문학사적으로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의의를 지닌다. 그의 이름은 생전에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시즘과 전화(戰禍)의 위협 속에서 숭고한 민족적 신념으로 주옥같은 서정시와 저항시를 썼다.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을 절규한 시편들은 그가 민족운동의 혐의로 체포,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한 뒤 광복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이름으로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시편들은 수난받은 민족에 대한 자책(自責)과 희생정신으로 이룩된 것이며, 그 섬세한 서정과 치열한 저항정신은 일제 암흑기를 증언하는 유일하고도 빛나는 민족시인으로서 새삼 평가하게 되었다. 그의 <서시(序詩)>는 고난의 시대를 살고 있던 이 시인의 숭고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그의 시편 중 <돌아와 보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懺悔錄)> <간(肝)> 등은 모두 민족에 대한 애정, 고난과 시련, 정의·자유에 대한 갈망과 양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1945년 2월 조국 광복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이역(異域)에서 순사(殉死)했거니와 그의 순교자적인 사명감에서 비롯된 민족적 신념과 정서가 담긴 서정시들은 공백기의 문학사를 빛내 주는 문학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육사[편집]

李陸史 (1905-1944)

시인.본명은 활(活)·원록(源祿). 육사는 그의 호. 경북 안동 출생. 중국 베이징(北京) 대학 사회과 졸업. 한때 신조선사·인문사 등에서 근무했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37년 <자오선>의 동인으로 뒤늦게부터 시를 발표, <청포도> <교목> 등을 발표했으며, 민족 정서를 상징적이면서 유니크한 시풍으로 노래한 서정시들은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작에는 침통한 북방의 정조 속에서 민족정서와 신념을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광야> <꽃> <절정> 등은 저항적인 서정시이다. 1942년 일제에 대한 울분을 품고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일본 관헌들에게 체포,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일세의 지사(志士)로서 생전에는 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광복 후 친구들에 의해 유고 <육사시집>이 발간됨으로써 시인으로 그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그 밖에 논문 <중국문학사초고(草稿)>가 있다.

청포도[편집]

靑葡萄

이육사의 시.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자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향토색 짙은 서정성 시풍으로 민족 고유의 정서를 상징적이면서도 독특하게 노래하여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윤동주[편집]

尹東柱 (1917-1945)

시인. 북간도 용정(龍井) 출생.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으며 유해는 가족에 의해 북간도에 묻혔다.

광복 후 친구들에 의해 첫시집이 발간되었고, 1955년 미발표 유고를 보충,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우리 문학사상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민족의 슬픔과 고난을 지성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대표작으로 <돌아와 보는 밤>

<무서운 시간>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등이 있다.

서시[편집]

序詩

윤동주의 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앞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연희전문 졸업을 1개월 앞두고 쓴 이 작품은 서시(序詩)인 만큼 그의 시집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가 가야 할 길이란 식민지 일제의 질곡(桎梏)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의지와 신념으로 민족을 위해 광명을 선사하는 일이며, 고결한 지성으로 불굴의 절조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길을 가기 위해서 종교적인 자세로 하늘에 대고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다. '부끄러움이 없기를 …괴로워했다'는 것은 모호한 표현이면서도 이 작품에서는 희구에 대한 강한 이미지로 부각되어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변영로[편집]

卞榮魯 (1898-1961)

시인. 호 수주(樹州). 서울 출생. 중앙학교 및 미국의 산호세대학 수료(1933). 1920년 <폐허(廢墟)>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 1922년 이후 <개벽(開闢)>을 통해 계속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번역물을 발표했다. 1924년 발간된 첫번째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순화에 기여하는 높은 시정신과 함께 민족적 저항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조선의 마음> 이후 서정시인으로서의 문단적 위치가 확고해졌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영문 번역하기도 했던 그는 <동아일보> 재직시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幀)의 '일장기말소사건'과 관련 퇴사당했고, 일제 말엽에는 향리(鄕里)에서 칩거했다. 광복 전후를 통하여 약간의 시를 발표했던 그는 과작(寡作)이긴 하나, 우리나라 신시(新詩)에 있어 기교파의 선구시인이라 할 수 있다. 즉 민족애와 서정성에서 높고 섬세한 경지를 보여주었던 그의 시는 기교에 중점을 두고 어구(語句)의 선택과 연마에 재능을 보였다. 시집으로 <조선의 마음> 외에 <명정 40년(酩酊四十年)> <수주수상록> <수주시문선> 등이 있다.

논개[편집]

論介

변영로(卞榮魯)의 시. 192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논개의 애국적 정열을 명백한 민족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시는 민족적 의분을 밖으로 내풍기는 정열보다도 그 의(義)에 대한 강렬한 찬탄을 내향적으로 응결시키려는 시적 긴장감이 돋보인다.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한 비유에 의해 수식됐고, 시의 형태적 구성도 너무 규칙적인 반복으로 일관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당시의 시적 수준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이 얼마나 깔끔하게 시의 기교적 완성을 노렸는가를 짐작케 한다. 아름다운 애국의 연인 논개와 같이 깨끗하고 맑고 꾸밈없이 표현된 작품이다.

국어의 투쟁[편집]

國語-鬪爭

갑오경장 이후의 우리의 한글은 일제의 압력과 낡은 보수층의 완고한 사상에 대해 투쟁하면서 자라왔다. 비록 3·1운동이라는 민족독립의 횃불이 일제의 총칼 아래 잠시 꺼지는 듯했으나, 우리의 국어는 1921년 주시경의 제자이던 권덕규(權悳奎)를 비롯하여 이윤재(李允宰), 장지영(張志暎),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이병기, 정인승(鄭寅承), 김윤경(金允經) 등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면서 민족항쟁을 지속해 왔다.

이는 뒤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또다시 <한글학 회>로 그 명칭이 바뀌면서 우리나라 한글 투쟁사상 큰 발자국을 남겼다. 이 학회에서는 일본의 탄압 아래서 민족정기와 모국어를 선양하고자 1926년 '한글날'이라는 기념일을 제정하고, 또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함으로써 국문 표기의 지표로 삼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중되어 만주사변·중일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마침내 우리 국어의 말살정책이 나타나, 내선일체의 미명 아래 일어(日語)상용을 강요하여 국민학교에서 국어의 교과를 폐지하고, 심지어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학생을 서로 밀고(密告)케 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가혹한 벌을 주었다.

더욱이 일제는 우리말 신문·잡지를 폐간시키고 급기야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회원 31명을 검거하고 사전 편찬의 원고를 증거물로 압수하니, 이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 또는 홍원사건(洪原事件)이라 하는 것이다. 그들은 1년 동안 일제의 갖은 고문과 형벌 끝에 10명이 징역 언도를 받았으나, 그 동안 이윤재, 한징(韓澄) 두 사람은 가혹한 고문 끝에 마침내 옥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국어학자들이 수난을 받는 가운데 많은 문인들은 붓을 꺾고 전원에 숨어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신념을 버리지 않고 굳세게 투쟁해 나갔으니 이는 우리 민족문화 투쟁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조선어연구회[편집]

朝鮮語硏究會

1921년 12월 3일 서울 휘문의숙에서 조직된 한글연구단체. 창립회원은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신명균(申明均), 김윤경 등임. 국어의 정확한 법리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매년 4월에 총회, 매달 한 번의 연구발표회를 열어 '훈민정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국어의 계몽 선전에 힘썼으며, 1927년에 동인지 <한글>을 창간. 1931년 그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고쳤다가 그 후 1949년 <한글학회>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윤재[편집]

李允宰 (1888-1943)

호는 환뫼(桓山). 김해 출생. 국어학자·사학자.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영변의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에 관련되어 3년 복역하였으며, 1921년 중국에 건너가 베이징(北京) 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1924년에 귀국한 뒤 오산학교 교사, 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1937년 수양 동우회 및 흥사단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마침내 1943년 12월 함흥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일부를 번역한 <도강록(渡江錄)>과 <표준 조선말 사전>이 있다.

권덕규[편집]

權悳奎 (1890-1950)

사학자·국어학자.휘문의숙 졸업. 일제 때 중앙중학, 이화여고 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1923) <조선 유기(朝鮮留記)>(1945) <을지문덕>(1948) 등이 있다.

장지영[편집]

張志暎 (1889-1973)

국어학자.서울 출생. 1906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漢語科)를 졸업하여 주시경 문하에서 국어를 연구했고, 1921년 조선어연구회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중학교 교원·조선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조선어 철자법 강좌>를 지어 맞춤법 보급에 이바지한 공이 컸으며, 광복 직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광복 후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최현배[편집]

崔鉉培 (1894-1970)

호는 외솔. 국어학자.명예 문학박사. 경남 울산 출생. 1919년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거쳐 교토(京都) 대학 철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조선어학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좌되어 홍원경찰서에 잡혀 투옥되었다. 광복 후 연세대 부총장 및 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50여 년간 한글 문화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편, 한국말의 말본 체계를 확립하는 데 노력했다. 저서로 <조선민족 갱생의 도(道)>(1926) <우리 말본>(1935) <한글의 바른길>(1937) <한글 갈>(1940) <한글의 투쟁>(1954) <나라 사랑의 길>(1958) 등이 있다.

이희승[편집]

李熙昇 (1897-1989)

호는 일석(一石). 국어학자.경기도 광주 출생. 경성제대 조선어 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교수·서울대 교수 등을 지냈으며 학술원 회원·명예 문학박사이다. 광복 전 조선어학회 간부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3년간 투옥당했다. 저서에 <국어학개설> <조선어학논고>, 편저에 <국어 대사전>, 시집에 <박꽃>, 수필집에 <벙어리 냉가슴> 등이 있다.

아동문학[편집]

兒童文學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을 살펴보면 1908년에 창간된 <소년>을 비롯하여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의 잡지가 동화나 동요를 다룬 적이 있으나, 옛날얘기가 남의 나라 동화를 다른 나라 말에서 옮겨온 2중 번역이 많았으며, 글도 한문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3년 3월 소파 방정환에 의해 창간된 <어린이> 잡지를 무대로 새로운 동요·동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1925년을 전후해 전례없는 동요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방정환의 <형제별>, 윤극영의 <반달>, 한정동의 <따오기>, 이원수의 <고향의 봄>, 윤석중의 <오뚜기>, 유지영의 <고드름>, 서덕출의 <봄편지> 등은 딱딱한 창가의 굴레를 벗어던진 예술동요의 샛길을 터준 작품들이었으나 창작동화에 이르러서는 동요보다 뒤져서 마해송(馬海松)·고한승(高漢承)이 등장하였다.

방정환[편집]

方定煥 (1899-1931)

서울 출생. 호는 소파(小波). 보성전문을 거쳐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최초로 본격적인 아동문학 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순수아동잡지 <어린이>을 창간했다. 계속해서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발간했으며, 동화대회·소년문제 강연회·아동예술 강습회·소년 지도자 대회 등을 주재하며 계몽운동과 아동문학운동에 앞장섰다.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그가 아동문학 활동을 한 기간은 약 10년간으로서 <형제별> <가을밤> <귀뚜라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창작보다는 번안작품이 더 많다. 그의 사후, <소파전집> <방정환 아동문학 독본> <동생을 찾으러> <소파아동문학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한편 '새싹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였다.

고한승[편집]

高漢承 (1902-1950)

아동문학가. 경기도 개성 출생. 방정환·마해송·윤극영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잡지 <어린이>에 동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극예술협회 등에 가입, 신극운동에도 참여하여 <장구한 밤> <4인 남매> 등의 창작극을 썼다. 1927년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집 <무지개>를 출간하고 색동회를 중심으로 동화의 창작과 구연(口演) 등을 통하여 어린이의 정서함양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개벽사에 근무했으며, <어린이>를 복간, 주재하면서 많은 동화를 발표하였다.

마해송[편집]

馬海松 (1905-1966)

아동문학가. 본명은 상규(湘圭). 개성 출생. 1920년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재학 중에 홍난파 등과 유학생극단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한편으로는 방정환 등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졸업 후, <분게이슌슈(문예춘추)>사 초대 편집장을 거쳐 1930년 <모던니혼>을 창간했다.

윤석중[편집]

尹石重 (1911- )

아동문학가. 호 석동(石童). 서울 출생. 일본 조치대학 신문학과 졸업(1944). 1924년 <새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어린이>에 <오뚜기>가 입선되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이고 정서적인 우리말을 동시어로 가다듬어서 간직해 일제말기에 우리말을 지켜왔으며, 새로운 형태의 동요·동시를 개발해 아동문학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시어의 익살스럽고 생활적인 감각과 재치있는 표현으로 로망주의적인 동심세계를 부각시키려 한 점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작품에 <낮에 나온 반달> <외나무 다리>

<넉점 반> <자장노래> <키 대보기> 등이 있으며, 작품집에 <잃어버린 댕기> <초생달> <굴렁쇠> <윤석중 동요백곡집> <윤석중 아동문학독본> <바람과 연> 등 많은 동요·동시집이 있다.

이원수[편집]

李元壽 (1911-1981)

아동문학가. 경남 양산 출생. 마산상업학교 졸업(1930). 1926년 아동지 <어린이>에 동요 <고향의 봄>이 당선되었다. 이 동요는 홍난파의 작곡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애창되는 노래가 되었다. 1927년 <기쁨사>의 동인이 되어 이 때부터 활발한 동요 창작을 했다. 1949년 동화 <숲속의 나라>를 <어린이나라>에, 소년소설 <5월의 노래>를 <진달래>에 연재, 동요와 함께 동화·소년소설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외재율 중심의 재래적 동요에서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 동시를 개척하고 산문문학으로서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을 확립하며 부단한 비평활동을 통한 아동문학 확립에의 기여 등 문학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초기 <고향의 봄> <비누 풍선> 등과 같이 율동적이며 감각적인 경향에서 1940년대 동시 <어머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현실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경향으로 변천되었다.

강소천[편집]

姜小泉 (1915-1963)

아동문학가. 본명은 용률(龍律). 함남 고원 출생. 함흥 영생고보 졸업.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현상문예에 당선, 이후 <닭>을 비롯한 여러 편의 동요·동시를 창작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돌멩이> <토끼 삼형제>

<마늘먹기> <전등불 이야기> <꿈을 찍는 사진관> <호박꽃 초롱>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어린이헌장의 기초, 독서지도, 글짓기 지도 및 아동문학의 보급·육성에 남다른 열성을 기울였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 몰입한 인간상으로 인간본연의 자세를 추구하려했고,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삶의 가치를 정립하려 했다. 만년에는 교훈적인 동화를 많이 썼다. 작품집으로 <강소천 소년무학> <강소천 아동문학 독본> 등이 있다.

박화목[편집]

朴和穆 (1923- )

시인·아동문학가. 호는 은종(銀鐘). 평양 출생. 봉천 신학교 졸업.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죽순> <등불>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에 <개암나무> <고추짱아> <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적 이상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어, 일종의 조용함과 허무감을 풍기는 것이 특색이다. 작품집으로는 <초롱불> <저녁놀처럼> <얼룩 염소의 모험> 등이 있다.

친일문학[편집]

親日文學

일제 강점기간 동안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황민화 정책의 강행에 의해서 이를 고무·찬양한 문학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당시에 있어 '국민문학'으로 호칭된 친일문학은 '일본국민으로서의 문학'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황민문학과 동일한 뜻이 된다.

친일문학의 시작은 1937년 5월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의 결성에서 시작된다. 학무국 사회교육과가 주동하여 조직하게 한 이 단체는 총독부 방침인 사회교화를 위해서 가요(歌謠) 정화운동을 전개했다. 안서 김억이 작사한 <종군간호부의 노래> <정의의 수(帥)에>, 최남선이 작사한 <김소좌를 생각함> <정의의 개 가> <총후의용(銃後義勇)> <방호단가(防護團歌)> <장성(長城)의 파수> 등이 이른바 '애국가요'라는 것들인데, 이것은 1940년대의 국민문학운동의 원시적 출발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안서는 <매일신보>에 <신춘문단의 전망>(1933)에서 "앞으로의 시가는 가장 농후하게 군가적(軍歌的)으로 씩씩하고 우렁찬 경향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하고 시 <신년송>(<매일신보>, 1944년 1월 4일)을 통하여 대동아 결전과 미·영 격멸을 읊었으며, <님 따라 나서자>(<매일신보>, 1944년 12월 7일)라는 시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가네하라군조(金原軍曹)를 뒤따르자는 징병 격려시를 쓰기도 했다. 이어서 1939년 4월 임화·최재서·이태준이 주동하여 황군위문 작가단을 결성한다. 이에 김동인·박영희·임학수 등 3명이 파견되어 박영희가 <전선기행>을, 임학수가 <전선시집>을 창작 발표했다. 이후 1939년 10월 29일 부민관에서 학무국의 산파 역할로 '조선문인협회'가 탄생하였다. '조선문인협회'는 초대 회장으로 이광수가 선출되었는데, 이 조직을 통하여 문학가들이 문필보국운동에 총동원되기에 이른다. 이광수는 결성식장에서 "이 협회의 창립목적은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문인협회'의 활동은 범민중적인 지탄의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한 친일문학은 새로운 자리를 잡게 된다. 더욱이 1940년대에는 <문장> 등이 친일문학으로 돌아섰고,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을 통폐합해서 <국민문학>지가 창간되어 조선문학의 일어화가 가속화되고야 만다. 이렇게 생성된 친일문학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정신을 그 기본으로 한다. 이 때 일본정신이라 함은 천황 중심의 제정일치(祭政一致), 가족국가적 조직을 고무·찬양함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일본에 대한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긍지와 감사를 그 내용으로 한다. 셋째, 일어(日語)로 창작된다. 그들이 말하는 국어(國語)는 바로 일어였다.

이러한 친일문학을 부르짖은 대표적인 인물은 최남선과 이광수를 들 수 있다. 최남선은 청일전쟁이 "일본의 진보적 정신이 청조(淸朝)의 정신을 구축하려는 전쟁"이라는 성전론을 주장하면서 태평양전쟁을 미화시키기도 했다. 그의 <성전의 설문> <아세아의 해방> 등이 성전론을 피력한 작품들이다. 이 외에 주요한도 친일문학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시 <성전찬가>를 통하여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하였다. 그의 친일시들은 대단히 격정적이기도 하다. 또한 <적, 미국의 사상모략>이라는 평론에서 미국을 백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지적하면서, 대동아 단결을 이룩하여 조선의 청년들은 분연히 일어나 미·영의 모략을 분쇄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인물뿐 아니라 프로문학 쪽에서도 친일을 한 인물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희와 김기진이다. 박영희는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전향논리를 폈지만, 기실 그의 전향은 부일(附日) 협력의 길목으로 걸음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1938년 동경에서 열린 '시국대응 전국위원회'에서 전향의 면모를 드러냈다. 박영희는 '시국대응 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의 간사로 참여하면서, 김동인·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 작가단'의 일원으로 화베이(華北)를 다녀와 <전선기행>을 창작하였다. 김기진은 일찍이 경향파 쪽에서 대중화론을 주창한 뛰어난 이론가였지만, 1943년 8월 1일 징병제 실시 당일에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시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 행적을 드러내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 <봄봄> 등 서정적인 소설을 많이 쓴 이효석은, <아자미의 장>이라는 소설에서 일제가 민족말살의 수단으로 권유했던 이른바 일선통혼(日鮮通婚)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광복 이후 남쪽 문단의 비평계를 주도한 백철의 친일행각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백철의 평론 <낡음과 새로움>은 국민문학의 원칙을 밝힌 것으로, 이 글을 통해 일본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수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연극인으로 유치진의 부일 협력을 거론할 수 있다. 유치진은 국민연극 이념의 수립에 이론과 창작 양측면에 기여했다. 그는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과 <신체제하의 연극> 등의 평론을 발표하였으며, 1941년 현대극장을 발족시켜 총독부의 만주 이민정책에 호응하는 내용의 <흑룡강> <북진대>를 공연했다. 이상에서 열거하는 사람과 달리 언론계에서의 친일자로는 최린을 거론할 수 있다. 최린은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 대표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는 친일파로 전락하고 만다. 어용언론의 기수인 <매일신보>의 사장직을 거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조선언론보국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읍소'라는 연제로 임전대책 연설을 했고, 언론총진격대강연회 등을 주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친일 부역은 단지 몇 사람의 일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당시의 저명인사들 모두 이에 해당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나, 당시 일본의 정책은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전시행정체제였다. 이에 부합되어 한반도는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앞에 열거한 친일문학자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친일을 강요했으며,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식민지정책을 한반도에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극에 달한 시기가 1945년 초부터 광복 전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