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전기 문학/신문학의 형성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육당과 신문화 운동

[편집]

六堂-新文化運動

참다운 뜻에서 신문화운동으로서의 신문학의 개척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에 의해 비롯되었다. 최남선은 현대식 시설을 완비한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치하고 민족의 유산인 고전(古典)의 간행에 힘쓰는 한편, 1908년(융희 2) <소년(少年)>이란 잡지를 발간했다. 이는 한국에서 신문화 개척의 선구를 이루는 최초의 현대적 종합잡지였다.

19세의 육당이 <소년>이란 제호를 내세운 것부터가 개화기에 새시대의 주인공이며 씩씩한 일꾼의 상징인 청소년들의 희망과 이상을 북돋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소년>지를 발간하는 취지서에,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고 할 만큼 새시대의 주인공인 소년의 사명을 강조했다. 그는 이 <소년>을 통해 현대시의 선구인 신체시 <해에서 소년에게>, 창가 <경부철도가> 등을 발표했고, 국내외의 역사·과학·전기(傳記)·사조(思潮) 등을 소개하여 민중을 계몽시켰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거인국 표류기(巨人國漂流記)>로 번역, 게재하는 등 외국 문학 소개의 선구적 구실을 했다. <소년>이 국권 강탈 뒤 1911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육당은 다시 <새별> <아이들 보이> <붉은 저고리>등의 소년 잡지를 간행하고, 1914년에는 <청춘(靑春)>을 창간했으며, 이는 <소년>의 뒤를 이은 반전된 교양종합잡지였다. 육당은 <청춘>에서 유럽의 근대문화를 소개하는가 하면,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윤광호(尹光浩)> <방황(彷徨)> 등 초기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또 육당 자신은 <세계 일주가(世界一周歌)> 등과 국민시(國民詩)로서의 현대시조의 부흥과 창작시조를 통해 우리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문장 운동의 전개

[편집]

新文章運動-展開

초창기 우리 신문학의 실질적인 개척자인 육당과 춘원은 먼저 언문일치의 현대적인 신문장운동을 일으켰다. 신문예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참다운 뜻에서 새로운 문학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새문장의 실천이 요구되었으며, 따라서 문장 면에서 의식적인 혁신운동이 제기되었다. 새문장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오늘날 우리가 쓰는 현대적 문체를 최초로 실천했던 사람이 바로 육당이며, 그는 잡지 <새별>을 통해 '신문장 건립운동(新文章建立運動)'을 위해 매호마다 '읽어지' 난을 설치했다. 이 난은 새문장으로 모범이 될만한 것을 소개했는데, 이는 시체문(時體文)으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장과 별로 다름이 없는 완전한 언문일치의 문장이었다. 특히 언문일치의 거의 완전한 단계에 육박한 것은 춘원이었다. 그는 '언주문종(言主文從)'이라 하여 소설을 통해 신문학의 기본조건으로 언문일치의 현대적 문장운동을 실천하는 한편 현대문학적인 이론을 발표했다.

춘원의 문학론

[편집]

春園-文學論

우리 문학의 모든 근대문학적인 형식은 춘원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신시·동화·동요·평론, 그리고 현대적인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다. 그는 1917년 단편소설 <어린 벗에게> <소년의 비애> 등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현대적인 단편소설로 최초의 것이며, 또한 <매일신보>에 발표된 장편소설 <무정(無情)>은 우리나라 현대소설의 여명(黎明)이 되어 주는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에 앞서 춘원은 1916년 <문학이란 하(何)오>라는 글에서 "문학이란 특정한 형식 밑에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발표한 자를 말함이라"고 문학의 정의를 밝힌 다음, 문학의 목적을 "문학은 정(情)의 만족을 목적으로 삼는다. 정의 만족은 즉 흥미니 우리에게 가장 심대한 흥미를 주는 자는 즉 우리 자신에 관한 일이다."고 했다. 또 "문학예술은 그 재료를 전부 인생에서 취한다. 인생의 생활상태와 사상 감정이 즉 그 재료니, 이를 묘사하면 사람에게 쾌감을 주는 문학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하여 문학의 제재(題材)를 인생에서 취할 것을 논했다.

그는 다시 "문학적 걸작은 … 가령 연애라 하고, 연의(戀意) 중에도 상류사회, 상류사회 중에도 유(有)교육자, 유교육자 중에도 재모(才貌) 있는 자, 재모 있는 자 중에도 부모의 허락을 얻기 어려운 자의 연애를 과연 여실하게, 진(眞)인 듯하게 묘사하여 누가 읽어도 수긍할 만한 자를 말함이니, 이러한 자라야 비로소 심각한 흥미를 주는 것이라"고 그의 구체적인 연애소설관을 피력했는데, 이러한 그의 주관은 후일의 <무정>에서 그대로 실천되었다. 또한 그는 문학에서의 권선징악적인 윤리관을 배척하고, "안중(眼中)에 영래(映來)하는 인사 형상을 여실하게 묘사하라"고 주장하는 한편,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신 문명의 창작에 착수할 것을 외쳤다. 그는 구체적인 소설론으로 "소설이라 함은 인생의 일방면(一方面)을 정(正)하게, 정(精)하게 묘사하여 독자의 안전에, 작자의 상상 내에 있는 세계를 여실하게 또 역력하게 개전(開展)하여 독자로 하여금 실견(實見)하는 듯한 감을 일으키게 하는 자를 말함이다"고 소설의 리얼리티를 강조했다. 문장 면에 언급하여 "현대를 묘사함에는 생명 있는 현대어를 써야 할 것이며, 근래 조선 소설이 순언문을 사용함은 나의 흔희불기(欣喜不己)하는 바이나, 이러한 생명 있는 문체가 더욱 왕성하기를 바라며, 언한문(諺漢文)을 쓰더라도 말하는 모양으로 가장 쉽게, 가장 일용어(日用語)답게 할 것이니라"고 하여, 언문일치의 문장을 강조했다.

이와 아울러 시대와 장소를 달리 하여도 영구 불변한 재미를 가진 문학작품을 써야 한다고 소설관을 피력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문학론을 전개했다. 춘원은 다시 1918년 3월 <청춘>의 <현상소설고선여언(懸賞小說考選餘言)>에서 소설은 '순수한 시문체'로 쓸 것과 '인정미(人情美)의 발로' 등을 내세우는 한편, 예술을 여기(餘技)로 보지 않고 종교의 성도(聖徒)와 같이 진지해야 하며, 종래의 인습적인 권선징악에서 벗어나 예술 본래의 임무를 다하도록 실감있게 묘사하고, 아울러 고대소설이 이상적인 데 대하여 현대소설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현대적인 문학관과 본격적인 신문장운동을 최초로 주장했다.

춘원과 무정

[편집]

春園-無情

춘원의 <무정>은 1917년

<매일신보>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국 현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며, 당시 독자들의 경이적인 열광 속에 연재되었다. 그만큼 <무정>은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해 놓는 획기적인 작품이며, 또 그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적 위치를 가장 뚜렷하게 확정지었다. 이 소설은 국권 강탈 후 일제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동포의 민족주의 사상을 밑바탕으로, 이형식과 박영채를 남녀 주인공으로 하여 1910년대의 시대상을 형상화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 사상, 자유연애관과 신결혼관, 그리고 기독교적 신앙 등을 주제로 하고, 일체의 봉건적인 것에 대한 비판과 반항으로 새세대의 계몽을 꾀한 이상주의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타난 그의 자유연애관은 당시와 같이 아직 봉건적인 남녀간의 윤리가 지배적인 세대에 있어서 혁명적인 새로운 사상으로, 한때 사회적 비난을 면할 수 없었지만 차츰 새로운 시대사조로 새세대에게 환영을 받게 되었다. 한편 그의 작중인물의 대부분은 외국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온 지식계급을 취급, 이들을 새시대의 인간상으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당시의 독자에게 이상과 동경의 대상이기는 했으나 등장인물의 특수계급화로 대중과의 유리(遊離)는 피할 수 없는 결함이 되었다. 또한 작중인물인 이형식이나 김선형은 막연한 인텔리 근성으로 시급한 민족적인 각성을 구호로 외치나 당시의 민중의식을 포착하지 못하고 관념적인 이상주의로 일관했다. 그 결과 <무정>은 시대의식과 민중의 고민을 포착한 리얼리즘의 소설이 아닌 계몽문학 또는 이상주의 문학으로 규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엄격하게 말해 이 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매우 조잡하고 미숙하기까지 하며, 주인공의 자유연애에 입각한 삼각관계로 시작,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해외 유학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다소 신소설적인 체취도 풍긴다. 그러나 완전한 세련된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구성이나 대화나 장면묘사 등 현대소설적인 여건을 갖추었고, 봉건적 잔재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데에, 3·1운동 이후의 한국 현대소설을 가능케 해준 문학사적인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의 작품 <무정>을 읽어 보면, 우리는 여기서 거의 완전한 언문일치의 문장과 근대적인 산문의 치밀한 서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고대소설은 물론 신소설에서 맛보지 못했던 현대적인 감각과 참신한 문장으로 결국 근대적 내용과 함께 <무정>이 현대소설의 특질을 보여주는 뚜렷한 성과의 하나이다.

최남선

[편집]

崔南善 (1890-1957)

신문학의 개척자·사학자·시인. 호는 육당(六堂).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수학한 뒤 귀국해 최초로 신시를 발표하는 한편 많은 시조를 창작하였고, 최초로 수필체 문장을 시도했다. 1908년 신문관을 창설,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청춘> 등을 발간하여 신문화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10년 조선 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 <대동운부군옥(大東運府群玉)> 등 한문 고전 21종을 간행했다. 1919년 '독립선언문'을 기초했고,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설, 주간지 <동명(東明)>을 간행했다. 일제 말기 만주 건국대학 교수, 조선사 편찬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에 수필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국토예찬(國土禮讚)> <심춘순례(尋春巡禮)> <금강예찬(金剛禮讚)> 등이 있고, 시조집에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유취(時調類聚)>, 교양서에 <조선상식(朝鮮常識)> <역사일감(歷史日鑑)>, 역사서에 <조선역사> <고사통(故事通)> 등이 있고, 그 밖의 <신자전(新字典)> <시문독본(時文讀本)> 등과 <삼국유사> 등 역서가 있다.

소년(少年)

[편집]

우리나라 신문화운동의 선구를 이룬 종합잡지. 1908년(융희 2) 최남선이 신문관에서 발행. 특히 신체시 <해(海)에서 소년에게>가 최초로 발표됨으로써 유명해졌으며, 191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청춘(靑春)

[편집]

1914년 9월 최남선이 간행한 종합잡지. 아직 문예지가 없던 시기에 문학작품의 발표 및 문예현상모집에 의한 창작 의욕을 북돋우어 문학사적 공헌이 크다. 이광수의 초기 단편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윤광호> <방황> 및 최남선의

<세계일주가> 등을 비롯한 많은 문학작품이 발표되었고, 해외 문학의 번역 소개에도 힘썼다.

새별

[편집]

<소년>지에 뒤이어 한일합방 후 최남선이 발간한 아동잡지. 최남선과 이광수의 신체시가 이 잡지에 게재되었다.

아이들 보이

[편집]

최남선의 주재로 1913년 9월에 창간한 아동잡지. 언문일치 운동의 선구적 구실을 했으며, 내용은 옛날 이야기·전설·이솝 우화·웃음거리 등으로 되어 있다.

붉은 저고리

[편집]

국권 강탈 직후 최남선이 발행한 아동잡지.

<소년>의 뒤를 이어 발간된 것으로, 초기의 어린이 잡지이다.

이광수

[편집]

李光洙 (1892- ? )

호는 춘원(春園). 평북 정주 출생. 최남선과 함께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이며 소설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수업한 뒤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계몽적인 이상주의 소설을 많이 썼다. 1919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신문>의 주필, 귀국 후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17년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고, 최초의 단편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를 비롯하여 <개척자> <흙> <유정> <무명> 등 많은 소설과 논문·수필·기행문·서간문 등을 발표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파로 변절했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그가 걸어온 길은 바로 한국 현대문학이 걸어온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린 벗에게

[편집]

(1917년)

이광수가 <청춘>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내용은 주인공 '나'의 고독과 그 때까지 비밀로 숨겨 두었던 중국 여인과의 애정문제를 친구에게 고백하는 서간체의 형식. 문장은 비록 신소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묘사와 애정문제의 대담성 등은 이미 현대소설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척자(開拓者)

[편집]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장편소설. 주제는 봉건적인 인습의 타파, 자유연애관, 민족을 위한 청년의 사명 등을 강조했는데, 당시 많은 청년들이 이 소설을 통해 계몽을 받았다.

[편집]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과 함께 그의 대표작의 하나. 당시 성행된 농촌 계몽운동에서 취재된 인도주의적인 경향이 짙은 작품이다. 일종의 농촌 계몽소설로서, 인텔리 출신인 주인공 허숭이 사회적인 지위·재산·가정을 버리고 농촌에 들어가, 농민과 함께 소박한 생활을 하며 그들을 교화하는 과정을 그렸다. 도시를 악의 소굴로 보고 농촌에 이상향을 만들려는 이상주의적 경향에는 톨스토이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사랑

[편집]

(1939년)

이광수의 장편소설. 인도주의를 표방한 애정소설. 이 작품에서 작가의 불교적인 인생관을 엿볼 수 있으나 톨스토이의 기독교적인 인도주의가 아울러 나타나 있다. 내용은 석순옥의 안빈에 대한 육신을 초월한 순결하고도 헌신적인 애정을 강조한 것으로 작가의 이상주의적인 애정관을 엿볼 수 있다.

무명(無明)

[편집]

(1939)

<문장(文章)> 창간호에 발표된 이광수의 중편소설. 춘원의 인도주의, 이상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사실주의(寫實主義)적인 수법으로 하층사회의 인간상을 형상화한 역작. 내용은 감옥에 수감된 주인공 '나'와 인장 위조범(印章僞造犯)이며 폐결핵 3기인 '윤', 방화(放火) 혐의로 수감된 노인 '민', 사기 혐의로 들어온 미결수(未決囚) '정' 등을 중심으로 암담한 환경 속에서 물욕·암투·이기심 등 본능의 갈등과 성격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인간 성격의 어두운 면을 생생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춘원의 기존 작품경향과는 다소 다르며, 그 날카로운 묘사와 리얼한 심리 표출(表出)로 이광수의 작품 중 가장 우수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외국 문학의 번역

[편집]

外國文學-飜譯

한국의 신문학운동은 서구의 근대문명과 문예사조의 영향으로 자극을 받은 것인 만큼 <무정>이 발표되기 얼마 전까지 번안소설이 한동안 유행했다. 개화 초기에 윤치호(尹致昊)는 <이솝 우화>를 <이색우언(伊索寓言)>으로 번역했고, 최남선은 <소년> <청춘> 등을 통해 <일리아드>를 비롯한 앤더슨, 셰익스피어, 괴테, 위고,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 서구 작가의 작품을 초역(抄譯) 또는 경개(梗槪)를 소개했다. 특히 영국 작가 라미 부인의 원작 <불쌍한 동무> 등 많은 번역본을 신문관에서 간행한 바 있으며, 이광수 또한 1913년 스토우 부인의 원작 <엉클 톰스 캐빈>을 <검둥이의 설움>으로 번역, 출간했다. 그러나 외국 문학에 대한 소개와 번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18년 9월 장두철(張斗撤)이 주간(週刊)으로 <태서문예신보>를 순한글로 발간한 후부터의 일이다. 이 잡지는 외국 작품의 번역, 문예에 대한 동향, 작가의 소개 등이 기재되었는데, 시인 김억(金億)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개>를 비롯하여 베를렌 등 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象徵派) 시인의 작품을 번역·소개하여 현대시의 창작 면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편집]

1918년 장두철의 주재로 도쿄에서 발간한 순문예지. 순한글로 발간된 주간잡지로 서구 문예사조의 소개 등 여러 면에서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이미 문단에 등장한 작가들의 작품 외에 3·1운동 이후에 등단한 작가들의 습작시대의 작품들도 많이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