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후기 문학/과도기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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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편집]

過渡期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포악한 식민지 시대는 끝나고 조국 광복의 날은 왔다. 36년간에 걸친 일제 지배하에서의 한국 문학은 참된 민족문학으로서 성장할 수 없었고 더욱이 일제 말기에는 모국어조차 말살되는 상황이었으므로 8·15는 민족해방뿐 아니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라는 역사적 재출발의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광복이 되자 독립과 해방의 감격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박종화의 <민족> <대조선의 봄>, 윤곤강의 <해방의 노래>, 김광섭의 <나의 사랑하는 나라>, 서정주의 <문 열어라 정도령님아> 등의 작품들이 나왔고, 윤동주가 민족시인으로 각광을 받은 것도 이 때이다. 그러나 민족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한반도는 미·소 양군의 진주(進駐)와 함께 남북으로 양단되고, 그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분열되었다.

1945년 12월 이른바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信託統治案)이 결성되자 박헌영(朴憲永) 일파의 공산당측에서는 이에 대한 지지로 나섰고, 민족진영측에서는 반탁(反託)운동을 전개, 광복 뒤의 정치적 혼란은 그 극에 달했다. 1946년의 국대안(國代案)반대사건, 1948년의 제주도 폭동사건, 대구 폭동사건 그리고 정부 수립 뒤의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 국내의 소요사건은 끊이지 않았고, 정치적 분열과 파벌로 정계 요인 암살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니 국내 정세는 아수라장과도 같았다. 그러나 1948년 5·10선거를 거쳐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혼란했던 과도기의 정세는 차차 민족주의적 이념 아래 정돈되어 갔다.

문단의 좌우 대립[편집]

文壇-左右對立

광복과 함께 민족문학의 재출발이라는 역사적인 명제를 가지고 있던 당시의 문학인들은 국내 정세의 대립·혼란과 더불어 좌·우익으로 분열되어 그 대립의 양상은 좌익측의 '조선문학자동맹'과 민족진영측의 '조선문필가협회'로 나타났다.

먼저 좌익측은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문화건설총본부'를 결성했고, 얼마 뒤 총본부는 곧 '조선문화건설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그 서기장(書記長)에 임화가 들어앉았고, 한편 임화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은 일부 좌익 문학인들은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을 결성했으나, 당시 공산주의 정당이던 남로당(南勞黨)의 통합 지령에 따라 '문학건설총본부'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되어 그 해 12월 13일 '조선문학동맹'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좌익측은 1946년 2월 8일 이른바 전국문학가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여 임화 등의 주도권을 장악, '조선문학가동맹'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그들의 문학가대회란 것은 좌익 문학인들만의 집합으로 민족 진영은 그 이념에 반대하고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회는 정치적 색채가 농후했으며 이 대회에서는 홍명희, 여운형 등의 개회사와 축사, 조선공산당 등의 지원, 임화, 이원조, 한효, 권환, 김태준(金泰俊), 김남천, 이태준 등 좌익 문인들의 보고 연설 등이 있었다.

한편 좌익측의 조직적인 문화단체가 결성되자 민족·민주 진영의 문화인들은 이에 대립하여 1945년 9월 8일 '조선문화협회'라는 최초의 조직적인 단체를 결성하였다. 박종화, 이헌구, 김광섭 등이 중심이 된 이 진용을 다시 확대 강화한 것이 9월 18일에 결성된 '중앙문화협회'라는 것으로 양주동, 서항석, 유치진 등이 추가 회원으로 참가했다. 한편 이 중앙문화협회가 우익 문화단체의 문화세력으로서 다시 확대 결성된 것이 바로 '조선문필가협회'였다. 이 협회는 1946년 3월 13일 종로 YMCA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박종화의 개회사, 김광섭의 취지서 낭독, 이헌구의 결과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3백 명의 문필가가 참가하여 큰 성황을 이룬 끝에 회장에 정인보, 부회장에 박종화, 설의식(薛義植), 채동선(蔡東鮮), 총무부에 이헌구, 김광섭, 이하윤, 오종식 등을 선출했다. 이 조선문필가협회는 민족·민주주의 이념 밑에 공평한 문화건설을 할 것을 표방했고, 다시 1947년 2월 2일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로 재구성되어 새로 결성된 좌익측 '전조선 문화예술연맹'과 투쟁했다.

한편 앞서 우익 문화전선의 조직체였던 '문필가협회'의 활동은 좌익측의 '문화예술연맹'보다 미온적이고 적극성이 없다 하여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젊은 작가·시인들이 주동이 되어

'청년문학가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청년문학가협회는 조지훈, 김동리, 박두진, 조연현(趙演鉉), 유치환, 박목월, 최태응 등이 중심이 되어 '문필가협회'가 결성된 지 1개월 후인 4월 4일에 조직되었다.

이 청년 문학가협회는 문필가협회를 순수한 문학단체가 아니라는 데서 첫째, 자주독립 촉성에의 문화적 혁신, 둘째 일체의 공식적·예속적 경향을 배격하고 진정한 문학정신을 옹호한다는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당시 이 청년문학가협회는 문학가동맹의 공식적인 정치문학에 대하여, 정치에 예속된 문학을 배격하고 문학의 자주성을 강조, 순수 문학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진영의 문학의 방향을 대변했다. 뒤에 이 청년문학가협회와 문필가협회의 문학인들은 다시 합동하여 '한국문학가협회'를 결성하니 이것이 민족주의 또는 자유주의 계열의 문학인을 결속시킨 최초의 단일 문학단체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의 문학단체가 된 것이다. 한편 '문총'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데 대하여, 좌익의 '문연'계는 군정(軍政) 말기부터 불법단체로 찍혀 점차 쇠퇴일로를 걸었다. 따라서 '문연'계 간부 중 일부 좌익 문학인들은 월북(越北)하거나, 일부는 지하에 잠복하여 활동이 마비되었다.

과도기의 문학론[편집]

過渡期-文學論

당시 좌익 문학인들의 공식적인 정치문학에 대하여 우익 민족진영의 입장에서 민족문학론을 전개한 것은 주로 이헌구, 김광섭, 김동리, 조지훈 등에 의해서였다. 당시 김동리는 민족문학론으로서 순수문학론과 함께 별개로 휴머니즘론을 전개하였는데 "민족문학이란 원칙적으로 민족정신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민족정신이란 본질적으로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민족주의적 입장을 밝혔다. 당시 김동석은 <순수 문학의 정체>에서 김동리에 대한 인식공격부터 시작하여 순수문학이란 생활을 떠난 현실도피의 문학으로서 정신이란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 물질적 조건을 망각한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하였고, 이에 김동리는 <독조(毒爪)문학의 본질>이란 반박문을 발표하여 문학의 순수성과 "빵을 구하기 위하여 싸운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인류와 금수의 우열은 규정되지 않으며, 여기서 문학이 나올 수 없다"라는 정신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그 밖에도 김동리는 <본격문학과 제3세계관의 전망> 등을 통해 자신의 주관적인 휴머니즘과 문학관을 밝혔다. 한편 당시 민족진영측에서 활동한 비평가로는 이헌구, 백철, 홍효민, 곽종원, 조연현 등이 있다. 당시의 문학론으로는 조지훈의 <민족문화의 구체성> <전통의 현대적 의의>, 이헌구의 <민족문학 정신과 재인식> <작가의 양심 문제>, 홍효민의 <민족적 사실주의론>, 조연현의 <구국(救國)문학의 정체>

<문학과 사상> 등이 있으며, 정치와 문학의 한계를 밝힌 것으로는 백철의 <문학과 정치의 문제> <정치와 문학> 등이 있다.

광복 후부터 6·25전쟁까지는 하나의 과도기지만 그 중심 사조는 역시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좌·우 투쟁이 모든 생활을 지배하다시피 한 시대에서는 이론적인 주장이 앞서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자연 민족주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광복 전 항일 독립운동의 지도 이념이었던 민족주의가 이 시기에서는 뚜렷한 성격을 띠지 못하고, 그저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만이 민족주의라고 생각한 것 같다.

문예지와 작품활동[편집]

文藝誌-作品活動

광복 후는 정치시대라 불릴 정도로 문학 위주의 이론보다는 문단 저널리즘이 휩쓸던 시대로 이 시기에는 많은 정기 간행물이 발간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잡지가 <신천지(新天地)> <민성(民聲)> <문학> <협동>

<백민(白民)> 등이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을 계기로 모든 것이 안정된 방향으로 질서화된 시기에 창간된 것이 순문예지

<문예(文藝)>였다. 그 이전 1946년에 창간된 <백민>이 광복 직후 혼란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문예>지의 출현으로 비로소 문단의 질서가 정립(定立)되고, 많은 역량있는 신인들이 이 <문예>를 통해 등장했다. 당시 <문예>의 추천란을 통해 등장한 신인들은 소설에 강신재(康信哉), 장용학(張龍鶴), 서근배(徐槿培) 등이 있고, 시에 김춘수(金春洙), 김윤성(金潤成), 이원섭(李元燮), 이형기(李炯基) 등이 있다. 그리고 이와 전후해서 일간신문의 신춘문예 등으로 등장한 주요 신인들로는 1950년 <무명로(無明路)>(<서울신문>)로 등장한 김성한(金聲翰), 1946년 <머루>(<서울신문>)로 등장한 오영수(吳永壽), 1949년 장편 <역사는 흐른다>로 문단에 등장한 한무숙(韓戊淑) 등이 있다. 또 <백민>을 통해 등장한 신인들로는 <창고 근처 사람들>로 등장한 홍구범(洪九範), 1948년 <번요(煩搖)의 거리>로 등장한 유주현(柳周鉉), <고목(枯木)>으로 등장한 박연희(朴淵禧)가 있다. 그리고 1945년 <흉가(凶家)>가 <예술조선>에 입선됨으로써 등장한 정한숙(鄭漢淑), 시 <후조(候鳥)>로 등장한 조병화(趙炳華), 그 밖에 전광용(全光鏞) 등이 있고, 1946년 <맥에의 결별(訣別)>로 문단에 등장한 여류 소설가 손소희(孫素熙)가 있다.

특히 1949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란 동인시집을 낸 일군의 모더니즘 시인 즉 박인환(朴寅煥)·김수영(金洙暎), 김경린(金璟麟), 임호권(任虎權), 양병식(梁秉植) 등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광복 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된 이들의 시 즉 박인환의 <열차> <지하실> <인천항>, 김경린의 <파장(波長)처럼>

<무거운 지축(地軸)들>, 김수영의 <아메리카 타임지> <공자(孔子)의 생활난> 등은 모두 새시대의 도시적 감각에서 씌어진 작품들이다.

한편 광복 이후의 시인·작가들의 작품활동을 보면 먼저 좌익 문인들로는 이태준, 박태원, 임화, 김남천, 안회남, 정지용, 김기림, 오장환, 이용악(李庸岳) 등을 들 수 있다. 이태준은 1946년 <해방 전후>를 비롯하여 <소련 기행>을 출판하는 등 좌경화했고, 박태원도 <약탈자>(1945), <한양성(漢陽城)>(1946), <춘보(春甫)>(1946) 등에서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 안회남은 일제 말기에 규슈(九州) 탄광에 징용을 갔다 온 후 <탄갱(炭坑)>(1945), <오욕(汚辱)의 거리> 등 체험적 작품을 발표했고, 김기림은 <파도소리 헤치며>(1945), <한 깃발 받들고>(1946), <어린 공화국이여>(1946) 등을 발표하여 시를 좌경적인 정치적 구호로 변모시켰다. 또 일제 말 <라스 트레인>으로 평판이 있던 오장환도 좌경하여 <병든 서울>(1946), <너는 보았느냐>(1946) 등을, 이용악은 시집 <오랑캐꽃>(1946)을 발표했고, 좌경 신인들이었던 유진오(兪鎭五)의 <횃불>(1946), 김상훈(金尙勳)의 시집 <대열(隊列)> 등은 모두 좌익의 계급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편들이다.

한편 민족진영의 문필가 협회측의 작가·시인들의 작품을 볼 때 박종화의 애국의식이 담긴 <민족>, 김동리의 <지연기(紙鳶 記)> <광풍 속에서> 등은 민족주의 작품이다. 또 김동리의 <윤회설(輪廻說)>(1946) <역마(驛馬)>(1946) 등은 모두 그의 독특한 인간의 근원성과 연결되는 순수문학의 작품이다. 문필가협회의 회원은 아니지만 채만식의 <도야지>(1946), 박영준의 <창공>(1947)

<풍설(風雪)>(1947), 계용묵의 <바람은 그냥 불고>(1947), <별을 헨다>(1948) 등은 이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가작들이다. 특히 1930년대 말부터 만주에서 동인활동을 한 안수길(安壽吉)은 이미 1941년 만주에 거주하던 작가들의 작품집인 <싹트는 대지(大地)>에 수록된 <새벽>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알려진 작가였으나, 광복 후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는 등 새출발을 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 <여수(旅愁)> <밀회(密會)> <풍선(風船)>(1949) 등은 당시의 가작 중의 일부였다. 염상섭은 1948년 이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그 초기(1948) <두 파산>(1948) <일대의 유업(遺業)>(1948) <임종(臨終)> 등 근대적 사실주의풍의 작품을 썼다. 황순원은 <맹산 할머니>(1948) <산골 아이>(1948) <기러기>(1950) 등 시골을 배경으로 한 단편들을 발표했다. 최정희는

<풍류 잡히는 마을>(1947) <봄>(1949), 그리고 평판작 <수탉>(1950)을 발표했고, 최인욱의 <개나리>(1948), 최태응의 <혈담(血痰)>(1948), 이주홍(李周洪)의 <가족> 등도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이었다.

한편 시에 있어서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3인의 공동시집인 <청록집>의 간행은 특기할 사실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광복 이후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청록파의 시인으로 클로즈업되었다. 조지훈의 <암혈의 노래> <비가 내린다>(1946), <낙화(落花)>(1946) <흙을 만지며>(1948), 박두진의 <해>(1946), <바다 로>(1947) <산아>(1949) <가을>(1949), 박목월의 <나그네>(1946), <윤사월>(1946), <산을 바라보며>(1947) 등은 이 시기의 청록파의 시세계를 보여준 작품들이다. 유치환도 현실에 대한 의욕을 보인 <노(怒)한 산>(1946) <기(旗) 없는 깃대>(1948), 시집 <청령집>(1948)을 발표했고, 김달진도 <자유>(1946) <사촌(寺村)>(1948) 등을 발표했다. 또 신석정의 <삼대>(1946) <꽃덤풀>(1946), 임학수의 <사자(獅子)>(1945) <겨울의 노래>(1946), 노천명의 <5월>(1946) <약속된 날이 있어서>(1946), 김현승(金顯承)의 <내일>, 장만영의 <이향기(離鄕記)>(1948), 구상(具常)의

<어리석은 사나이>(1947) <옥상 실존(屋上實存)> 등도 이 시대의 주요 작품들이다.

백민(白民)[편집]

1946년 김송 주간으로 창간된 문예지. 처음에는 종합지였으나 얼마 후부터는 순문예지로 전환, 20회 내외로 휴간했다. 광복 후의 혼란기에 민족주의문학 옹호에 이바지했고, 유주현, 홍구범, 박연희 등의 신인을 등장시켰다.

문예(文藝)[편집]

1949년 8월에 창간된 순문예지. 발행인에 모윤숙, 주간에 김동리(그 뒤에 조연현) 등이 발간한 것으로 1954년 초에 폐간됨. 민족진영 문인들의 대표적인 발표기관으로 광복 후 문단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광복 후 최초로 신인 추천제도를 두어 많은 유능한 신인을 발굴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다.

안수길[편집]

安壽吉 (1911-1977)

소설가.함남 흥남 출생. 호는 남석(南石). 일본 와세다대학 고사부(高師部) 졸업. 광복 전에는 박영준 등과 함께 만주에서 신문기자를 하며 동인지를 간행했고, 작품집 <북원(北原)>과 장편 <북향보(北鄕譜)>는 이 시대의 작품들이다. 광복 후에는 주로 지식인의 양심을 그린 <여수>를 비롯하여 <밀회>(1950) <제비>(1952)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54년 단편집 <제3 인간형>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1967년에 완간된 대하소설 <북간도(北間島)>는 한말에서부터 8·15 광복까지에 걸친 민족사의 비극을 정면에서 그린 역작으로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 단편집 <벼>, 장편에 <향수(鄕愁)> <제2의 청춘> <부교(浮橋)> 등이 있다.

북간도(北間島)[편집]

안수길의 대하소설. 1959년 4월부터 <사상계>에 1부가 연재된 이래, 5부까지 완결하는 데 9년이 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이주지인 북간도를 무대로 1870년 조선말엽의 어수선한 과도기로부터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이창윤 일가 4대(四代)의 수난과 항일독립투쟁사를 그린 대로망이다. 우리 민족이 북간도에서 주체성과 자주성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나갔느냐 하는 귀중한 증언의 문학으로, 이 작품은 광복 이후 크게 떠들어 온 민족문학의 귀중한 초석이 될 만한 거작이다. 안수길은 이 작품으로 1967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오영수[편집]

吳永壽 (1914∼1979)

소설가.경남 언양 출생. 1949년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50년대 이후부터 향토적인 서정과 순박한 인간상을 그려 주목을 받았다. 1955년 한국문협상을 받았고, 1959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에 단편집 <머루> <갯마을> <명암(明暗)> <메아리> 등과 <오영수 전집> 5권이 있다.

김성한[편집]

金聲翰 (1919- )

소설가.함남 출생. 일본 도쿄 대학에서 수업. 광복 후 서울문리사대·한국외국어대학 강사를 역임했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주필을 지냈다.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명로>가 당선된 후 50년대부터 활동했으며, 단편 <바비도>로 제1회 동인 문학상을 받았고, 또 제1회 자유문학상 수상자이다. 지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고, 작품에 단편집 <암야행(暗夜行)>(1951) <오분간(五分間)>, 장편 <이성계> 3부작이 있다.

오분간(五分間)[편집]

김성한의 단편소설. 1955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신(神)과 프로메테우스와의 대립을 통하여 현대인과 신의 문제를 상징화시킨 작품으로, 프로메테우스가 2천년 만에 코카서스에서 스스로 신으로부터 자유를 전취(戰取)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신과의 회담에서 신에 대항하여 신의 자리를 차지해 보려는 그의 거만을 그린 후, 결국 신은 신대로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대로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한 채 헤어진다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작자는 이 5분간에 일어났던 인간세계의 무질서와 혼란을 통해 현대인의 신앙 상실과 그 거부로부터 온 혼돈과 혼란을 그리고 있으며, 그 비극을 구할 자는 신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존재라고 하면서 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유주현[편집]

柳周鉉 (1921-1982)

소설가.경기도 여주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졸업. 1948년 <번요의 거리>가 <백민>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고, 1958년 <언덕을 향하여>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가는 추상적인 경향과 사실주의 경향을 엇바꾸어 쓰는 것이 특징이며, 뒤에는 장편 대하소설과 역사소설로 성공하였다. 작품에 장편 <대원군(大院君)> <조선 총독부> 등이 있다.

한무숙[편집]

韓戊淑 (1919-1993)

여류 소설가.서울 출생. 1949년 장편 <역사는 흐른다>로 문단에 등장. 1956년 단편집 <월훈(月暈)>을, 1957년 그의 대표작 <감정(感情)이 있는 심연>을 발표하여 1957년 제5회 자유문학상을 받음. 그 밖에 단편집으로 <감정이 있는 심연>과 장편 <빛의 계단>이 있다.

강신재[편집]

康信哉 (1924-2001)

여류 소설가.서울 태생. 이화 여전에서 수학. 1949년 <얼굴> <점순이> 등이 <문예>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여 1960년 한국문협상을 받았다. 대표작에 <젊은 느티나무>가 있고 작품집에 <절벽>과 장편 <임진강의 민들레> 등이 있다.

정한숙[편집]

鄭漢淑 (1922-1997)

소설가.평북 영변 출생.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1945년 단편 <흉가>가 <예술조선>에 입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후, 단편 <전황당 인보기(田黃堂印譜記)>가 한국일보에 당선되었으며, 장편 <암흑의 계절>로 1958년 내성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단편에 <고가(古家)> <닭장 관리> 등이 있고, 작품집에 <묘안묘심(猫眼猫心)>, 장편에 <끊어진 다리>

<황진이> <처용랑> <우리는 서로 닮았다>, 중편으로 <시몬의 회상>이 있다.

박인환[편집]

朴寅煥 (1923-1956)

시인.강원도 인제 출생. 1943년까지 평양의전 수학. 경향신문 기자 등을 지내며 <후반기(後半期)>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시는 비평성과 서정성의 조화를 얻고 있으며 촉망되는 시인이었으나 요절했다. 시집에 <박인환 선시집(選詩集)>이 있다.

한하운[편집]

韓何雲 (1919-1975)

함남 함주에서 출생. 이리농림학교와 함흥 제일고보, 중국 북경대학 졸업. 1949년 <전라도의 길> 등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한하운 시초>(1949), <보리 피리>(1955), <한하운 시선집>(1956), <한하운 시집>(1964) 등이 있고, 자작시 해설집으로 <황톳길>(1960)이 있다.

박연희[편집]

朴淵禧 (1918- )

소설가.함흥 출생. 1948년 <백민>에 <고목>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으며, 그의 작품은 사회악과 정치악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1960년 자유문협상을 받았으며 작품에 <고발(告發)> <현대사> <청색회관> <그 여자의 연인> 등의 장편이 있다.

구상[편집]

具常 (1919- )

시인.본명은 상준(常俊). 함남 원산 출생. 일본 니혼 대학(日本大學) 종교과 졸업. 광복 직후에는 신문기자,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단 부단장 등을 역임했다. 원산에서 시집 <응향(凝香)> 동인으로 활약했고, 월남 후 문필계에 종사했으며, 그의 시는 현실 고발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1956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 시집에 <초토(焦土)의 시>, 평론집 <민주 고발>, 수필집에 <침언부어(沈言浮語)> 등이 있다.

6·25와 종군 문학[편집]

-從軍文學

정부수립을 계기로 해서 모든 것이 안정된 방향으로 질서를 찾게 되고 문단이 정립(定立)되어 본격적인 문학활동이 시작되려 할 때, 1950년 6·25전쟁이 발발(勃發)하였다. 사태가 위급하자 '문총'은 긴급 회의를 열고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편성, 문학인들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정훈(政訓)활동, 선전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에 침입한 그 전야(前夜)까지 방송국에서 국민 총궐기의 애국시(愛國詩)를 낭독하여 비상 시국에 봉사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북한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하자 문학인들 중에는 한강을 건너 피난을 한 사람들도 있었고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잔류(殘留)한 사람들도 있었다. 잔류문인 중에는 박종화, 김동리, 조연현, 김광주 등과 같이 지하로 깊이 잠복한 층이 있는가 하면, 적치하(赤治下)의 서울에서 북괴의 이른바 '문학가동맹'에 영문도 모르고 참가한 문인들도 있었다. 게다가 9·28 수복으로 서울이 탈환되었을 때 이광수, 김동환, 김억 등 북한에 납치된 문학인들이 많았는데, 6·25전쟁은 동족 상잔의 민족 비극인 동시에 문학인들에게서도 암담한 수난기였다.

부산이 임시 수도로 정해지자 대구(大邱)에서는 '종군작가단'이 결성되어, 마해송(馬海松), 조지훈, 박영준, 구상, 최정희 등이 '종군작가단'으로 활약했다. 또한 염상섭, 이무영은 직접 현역으로 군의 정훈(政訓) 활동에 참가했다. 한편 부산에서는 '문총'을 중심으로 후방 문화운동과 군부대를 따라 전선에 종군하였고, <문예>지의 전시판(戰時版), 종군작가단의 <전선문학> 등은 모두 비상 사태에 대처한 문학인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한편 각 전선을 따라 종군한 체험을 소재로 종군작품이 발표되었다. 즉 유치환의 시집 <보병(步兵)과 더불어>, 김동리의 <흥남 철수> <귀환 장정>, 박영준의 단편집 <그늘진 꽃밭> 속에 수록된 <빨치산> 등 몇 개의 전선 취재의 작품, 그리고 김장수(金長壽)의 <백마고지(白馬高地)>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소산들이었다. 한편 휴전이 성립됨에 따라서 3년에 걸친 한국 전쟁은 종말을 고했으나,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이 미증유의 민족 비극을 체험한 우리 문단은 폐허 속에서 다시 새로운 민족문학을 복구(復舊)하고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후(戰後)의 문학은 이 폐허 위에서 시작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