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무 용/세계의 무용/발레의 역사와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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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의 발생[편집]

ballet-發生

무용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유사(有史) 이전부터 무용은 존재했다. 아마 인류 발생과 거의 동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무용이 예술 영역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발레가 발생한 이후라고 하겠다. 그로부터 발레는 무용예술의 왕좌를 독점하여 발전해 왔다.

발레는 15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의 소산이다. 르네상스는 인문주의(휴머니즘)를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古典), 고대문화(古代文化)의 부흥을 지향한 문화운동인데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온 유럽을 휩쓰는 기세를 보였다. 발레는 그 문예부흥의 일환으로서 이탈리아에서 탄생했다.

그때까지의 무용은 중세 그리스도교의 금압주의(禁壓主義)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하고 사생아(私生兒)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용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무용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따라서 무용은 민중 속에서 민속적인 형태로 겨우 명맥을 전하였으며 일부는 귀족계급의 오락으로서 여명(餘命)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문예부흥기(文藝復興期)가 도래하자 무용은 갑자기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무용부흥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 무렵의 이탈리아 귀족 사이에는 연회가 있을 때마다 무언극(無言劇)이나 가면극(假面劇), 혹은 막간희극(幕間喜劇) 등이 성행했으며 그러한 행사에서 무용은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무용은 막간희극으로서 대규모적이며 매우 화려하게 열리는 스펙터클이 되기도 했다. 막간희극은 대개의 경우 연극의 막간에 상연되는 것이나 때로는 독립된 무언극으로서도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후의 발레와 연결되는 것이다.

발레의 초기[편집]

ballet-初期

1489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갈레아츠오 공(公)과 아라공의 이사벨라 공주와의 결혼식에 있었던 막간희극의 스펙터클은 초창기의 발레에 획기적인 한 시기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토르토나의 베르곤치오 디 보타가 고안한 것으로 요리가 나오는 그 사이에 그 요리에서 연유된 무용을 추게 하였고 그리스 신화(神話)의 여러 신을 등장시켜 그 호화로움은 대단한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이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발레의 원형(原型)이다. 그리하여 이윽고 이와 같은 스펙터클은 각국의 궁정이나 귀족 사이에서 유행했다.

발레의 프랑스 왕조기[편집]

ballet-France 王朝期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고 이탈리아의 귀족 사이에서 유행했던 스펙터클로서의 발레의 원형은 이윽고 프랑스로 옮겨지게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친 프랑스 궁정은 크게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시대이다. 그 원인은 샤를르 8세나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등이 잇따라 몇 번이나 이탈리아에 원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열렸던 저속한 무용과는 달리, 극히 다채로운 스텝과 몸짓, 몸매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주는 이탈리아 무용에 경탄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탈리아 문화에 매혹된 프랑수아 1세는 무용가는 물론이려니와 화가(畵家)나 조각가(彫刻家), 그리고 음악가들을 이탈리아에서 많이 불러들여 이탈리아식으로 장식된 궁전의 홀에서 이탈리아풍의 화려한 축연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시대는 프랑스에서 극단적일 정도로 가면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가면의 유행은 풍속을 문란케 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프랑수아 1세는 마침내 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의 시대에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公)의 영지(領地)를 정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궁정은 찬란한 무용의 메카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즉 밀라노에서 으뜸가는 무용교사인 폼페오 디오보노를 1554년에는 프랑스로 데리고 왔으며 그에 의해서 무용은 현저하게 향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앙리 2세는 그를 후대하여 여러 가지 명예를 주었으며 그는 앙리 2세에서 앙리 3세에 이르는 4명의 국왕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왕후의 발레 코믹[편집]

王后-ballet comic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의 발레를 프랑스 궁정에서 발전시킨 사람은 카트리느 드 메디시스(1519-89)라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家)의 딸로서 그녀는 프랑스로 출가하여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여자였다. 그녀는 매우 무용을 애호했으며 또 무용의 명수이기도 했다. 그녀는 후에 병약했던 아들인 세 명의 국왕을 대신하여 섭정왕후(攝政王后)의 지위에 올라 권력을 마음껏 누림과 동시에 발레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강력한 보호자 아래 이탈리아 일류의 무용가들이 협력하여 밀라노에서 데리고 온 메트르 드 발레나 이탈리아 태생의 여관(女官)들이 출연했으므로 발레가 궁정오락 가운데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호화로운 연회로 프랑스의 세력과 부(富)를 온 유럽에 과시했으며 동시에 자기 뜻대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 사람의 왕으로 하여금 연회에 열중케 하여 국가의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힘썼다. 그러기 위해 당시 유명했던 바이올리니스트인 발다자리노 다 벨지오이조를 기용하여 비용을 아끼지 않는 호화로운 연회 발레에 힘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서도 튜이를리 궁전에서 베풀어졌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발레라고 하는 <폴란드인의 발레>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것은 폴란드 대사(大使)를 주빈으로 하여 1573년에 개최되었으며 희곡적인 발레 유행의 첨단을 끊은 것이다. 더구나 그 이상으로 발레사상(ballet史上)에 획기적이었던 것은 1581년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상연된 <왕후의 발레 코믹>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앙리 3세의 처제(妻弟)인 로렌의 마르그릿드 공주와 드 조아이유즈 공(公)과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구성자(構成者)는 1555년에 이탈리아에서 초청된 벨지오이조이다. 그는 이 무렵에 프랑스에 귀화하여 발타자르 드 보조아이유라고 개명했었으며 그러한 그의 고안으로 무용·음악·가창(歌唱)·낭독 등을 하나로 조화시켜 통일된 그리스 신화의 사르세 이야기를 무용화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호화롭고 또한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근세 발레의 시조(始祖)라고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눈으로 보다면 일종의 레뷰적(的)인 구성인데 그런대로 무용·음악·가창의 희곡적으로 정연하게 통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극적(劇的)인 발레의 승리인 동시에 오페라의 기원이기도 했다. 이후 발레는 오페라와 함께 발전한다.

발레 코믹[편집]

ballet comic

<왕후(王后)의 발레 코믹>은 호화로왔던 만큼 거기에 소요된 비용도 막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국가재정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전쟁(宗敎戰爭)으로 말미암아 궁핍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궁정의 오락을 위해서 거액을 쓸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 4세, 그 뒤의 루이 13세도 역시 역대의 발레 애호자였다. 앙리 4세의 재위(在位)중에도 약 80종의 발레가 상연된 바 있다. 그 대신 가면극(假面劇)과의 혼합으로 소규모적으로 상연되었으며 내용도 기발한 취향이나 우스꽝스런 것을 주체로 한 일종의 발레 마스커레이드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즉 가면에 의한 발레 코믹인 것이다. 이처럼 압축된 형태의 발레를 앙트레의 발레라고도 한다.

루이 13세는 이러한 발레를 궁정 밖으로 발전시켜 파리 시청에서 자기 스스로가 춘 적도 있다. 루이 13세의 재상(宰相)이며 대정치가로 알려진 리실뢰는 발레를 정치목적으로 이용하여 <프랑스군 전성(全盛)의 발레> 등을 자기 저택에서 상연한 적도 있었다.

무용수 루이 14세[편집]

舞踊手 Louis 14世

이와 같이 역대 국왕의 애호를 받은 프랑스 궁정 발레는 꾸준히 발달하여 루이 13세의 뒤를 이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시대에 와서 대발전을 이루었다.

루이 14세는 왕(王)자신이 발레의 대가였다. 유명한 무용교사인 보샹(1639-1705)에게 사사하여 2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발레의 연습에 힘썼다고 한다.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것은 13살 때의 일로 <카산드라의 가면극(假面劇)>이라는 발레였다. 그 후 그는 1652년부터 70년까지의 18년 동안에 27편의 발레의 주역(主役)을 추었으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밤의 발레>에서의 태양왕이었다. 태양왕은 루이 14세의 이명(異名)이기도 하다.

그는 앞서 말한 보샹 이외의 보캉과 페쿠르 등 뛰어난 안무가(按舞家), 작곡가인 륄리(1632-87)를 이탈리아로부터 초청해 몰리에르가 대본(臺本)을, 브랭이 의상(衣裳)을, 그리고 비가라니가 무대 장치를 맡는 등 모든 재능을 기울여 발레의 향상에 노력했던 것이다.

왕립 무용학교[편집]

王立舞踊學校

루이 14세는 그러나 귀족들의 아마추어적인 기예(技藝)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업적인 전문 무용가의 양성에 착안, 그 교육기관으로서 1661년에 파리에 왕립무용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1672년에 다시 음악을 추가하여 왕립음악무용학교가 되었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 내려오는 국립음악무용학교가 되었다. 즉 현재도 여전히 프랑스 발레나 오페라의 전당으로 되어 있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기원이다. 그 창립은 발레가 단순히 궁정이나 귀족 사이의 위안거리가 아니라 정식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아 그 보호를 받게 된 최초의 것으로서도 무용사상에 큰 의의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교장에는 륄리가 취임했으며 전임 무용 교사로서는 보샹이 임명되었다. 륄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작곡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무용가이며 안무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오페라의 창시자였다.

한편 교사 보샹은 뛰어났던 무용가인 동시에 탁월한 이론가였다. 그에 의해서 현재까지도 발레의 기법(技法)의 기초가 되고 있는 '다리의 다섯가지 포지션'이 처음으로 만들어졌음은 큰 공적이라고 하겠다.

발레의 극장 진출[편집]

ballet-劇場進出

왕립 무용학교가 설립되자 그때까지 궁정이나 귀족의 저택에서만 오락삼아 상연되어 왔던 발레의 양상은 마침내 일변하고 말았다. 이미 상류계급의 전유물(專有物)로서만 머무를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가 학교를 설립하여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궁정 발레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그는 귀족의 자제 이외에도 남녀를 불문하고 우수한 소질이 있는 자를 골라서 학교에 입학시켰다. 앞으로는 귀족의 자제를 대신하여 전문 무용가에 의해 궁정 발레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더욱이 보샹의 탁월한 직업 훈련으로 루이 14세의 뜻한 바가 훌륭하게 결실을 맺어 이 아카데미에서 잇따라 뛰어난 전문가가 나오자 이제는 궁정내의 행사에만 출연시키는 것이 아깝고 또한 파리시민의 요청도 있고 해서 마침내 궁정 밖의 극장으로 진출하여 대중을 위한 발레가 되었다.

발레가 일반 대중을 위해 개방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와 동시에 궁정 발레의 시대는 끝났던 것이다.

여성 무용수의 배출[편집]

女性舞踊手-輩出

처음으로 극장에 진출한 발레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1681년에 상제르망 극장에서 상연된 <사랑의 승리>라는 발레이다. 이것은 륄리가 작곡하고 그의 손으로 상연되었다. 보샹이 안무를 하고 페쿠르도 출연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 발레에 의해서 여성 무용수가 처음으로 극장의 무대로 진출했다는 것이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때까지의 궁정 발레에서는 어쩌다가 귀족의 딸들이 출연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거의 남성이 출연했으며 그때까지의 극장에서의 발레에는 여성의 역할은 가면을 쓴 소년이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륄리에 의해 처음으로 여성의 극장진출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그 후부터 여성의 역을 추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잇단 무용수가 배출되어 극장에서 연출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퐁텐, 믈[편집]

Mlle Lafontaine(1665-1738)

여성 무용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여성 무용수로서, 그녀는 왕립무용학교의 출신으로 <사랑의 승리>에 처음으로 출연한 여성이며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사상(史上) 처음으로 제1무용수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녀가 1692년에 수녀원으로 들어간 뒤에 그 후계자로서 마리 쉬블리니(1666-1736?)가 등장했다.

륄리, 장[편집]

Jean Baptiste Lully(1632-87)

루이 14세의 총애와 신용을 한몸에 받아, 국왕이 출연한 발레의 작곡은 거의 그에게 위촉되었다. 또 몰리에르와 협력해서 그를 위해 몇몇 희곡을 작곡했으며 그리스 신화들을 제재(題材)로 한 많은 발레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20여종의 오페라도 작곡했다.

기하학 무늬의 스텝[편집]

幾何學-step

이 무렵의 여성의 의상이라고 하면 몸에 꼭 붙은 상의(上衣)에 고래뼈로 만든 후프를 허리에 달고 그 위에 헐렁거리고 무겁고 긴 치마의 자락이 땅에 끌리게 해서 입고서는 다리까지 가리고 있었다. 이것으로는 다리를 민활하게 쓰는 춤이나 높이 쳐드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도약(跳躍)이라든가 회전(回轉)의 기교는 진보하지 않았으며 무용수는 오로지 수평으로 기하학 무늬를 그리면서 맴도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걸어가는 발걸음의 순서 등을 발레에서는 슈망(길)이라고 한다.

카마르고와 살레[편집]

Camargo-Salle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발레는 마침내 개혁의 시기를 맞았다. 우선 기교의 면에서 진보했다. 그리고 기교의 진보는 마땅히 의상의 개혁을 가져 왔다.

그 개혁의 첨단은 루이 15세 시대에 나타난 여성 무용수인 마리 카마르고(Marie Camargo, 1710-70)이다.

카마르고는 이탈리아인을 아버지로, 에스파냐인을 어머니로 해서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1726년에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했을 때는 스커트 자락을 짧게 하고 다리를 드러냈으며 굽이 없는 신발로 춤을 추었다. 그것은 그녀가 여성 무용수로서 처음으로 수직적인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고안한 앙트르샤와 즈테(발레의 技法 참조) 등의 도약 기법을 처음으로 공개했던 것이다. 이 의상과 기법의 개혁은 관중을 놀라게 했으며 동시에 박수갈채를 받아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그녀의 의상이나 신발 그리고 헤어 스타일까지 순식간에 대유행이 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카마르고의 호적수로서 등장한 무용가가 프랑스의 무희 살레(Marie Salle, 1707-1756)로서, 프랑스의 발레를 처음으로 영국에 진출시켰다. 1734년에 런던에서 상연한 <피그말리온>이라는 발레에서 그녀는 파니에라고 불리는 후프(hoop)나 상의 또는 스커트도 걸치지 않고 또한 코세트나 페티코트도 없이 다만 옷감 하나를 마치 그리스의 조각처럼 몸에 걸친 채 장식도 없는 산발(散發)의 모습으로 추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파격적인 의상개혁이었다.

발레 개혁의 이론[편집]

ballet 改革-理論 카마르고나 살레의 개혁을 더욱 진전시키고, 이론적으로도 발레 그 자체의 개혁자로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현재의 발레에 기초를 닦은 공로자로 장 조르주 노베르(1727-1810)를 들 수 있다. 그는 글루크가 오페라를 개혁했듯이 발레를 18세기의 새로운 시대의 예술로 개혁했던 것이다.

노베르는 파리 태생의 스위스인이며 당시의 가장 뛰어난 무용가였던 뒤프레(1697-1774)의 제자가 되어 16세 때 파리의 오페라 코믹 극장에 데뷔했다. 더구나 그로부터 4년 뒤인 20세 때는 이미 안무가가 되었다. 그러한 그가 1760년에 프랑스의 리옹에서 발행한 그의 저서 <무용과 발레에 관한 편지>야말로 무용의 성서라 불리는 최고의 이론서이다.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논문에서 그가 주장하는 이론을 요약한다면, 우선 발레를 자연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전적인 미(美)의 이상으로 발레를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인습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발레는 춤출 수 있는 드라마여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드라마의 법칙은 그대로 발레에도 적용되어야만 하며 발레에서의 춤은 극적(劇的)인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도 주장한다. 이 생각은 결국 무언극을 중요시해서 추는 연극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무언극(無言劇)의 기법을 처음으로 발레에 도입한 사람이 되었으며 발레 디크션(ballet d'action)의 창시자가 되었다.

노베르, 장 조르주[편집]

Jean Georges Noverre(1727-1810)노베르는 그의 이론을 실천에 옮겨, 당시의 형식화된 움직임을 배척하는 동시에 의상개혁에도 큰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이 급진적인 이론 때문에 그가 열망했던 오페라 극장의 안무가 지위는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런던을 시초로 하여 유럽 각지로 순회 공연을 했으며 빈에서 여왕 마리 테레제에게 고용되고 그 후 프랑스 왕비가 된 그녀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용교사가 됨으로써 1775년에 드디어 열망하던 오페라 극장의 안무가가 될 수 있었다.

노베르가 창도(唱道)한 발레 디크션의 이론은 19세기 고전 발레에서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프랑스 혁명기의 발레[편집]

France革命期-ballet

노베르의 시대에는 뛰어난 무용가와 이론가가 배출된 시대이며 그 대부분이 직접이건 간접이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였다. 노베르는 유럽 편력중 가장 오랫동안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머물며 그곳에서 베르텐베르크 공(公)의 샤를르 위제느 궁정에 고용되어 대규모의 발레단을 조직한 일이 있다.

그 발레단에서 노베르의 작품에 출연했던 가에타노 베스트리스(1729-1808), 맥시밀리언 가르델(1741-87), 장 도베르발(1742-1806), 안느 하이넬(1753-1806) 등은 모두 당시의 일류 무용가였다. 동시에 발레의 발전을 위해서 모두가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발레는 이러한 준재(俊才)들에 의해서 다시 여러 가지로 개혁되어 공전의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프랑스 대혁명이 발레의 의상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음도 무시할 수 없다. 발레의 의상은 궁정적(宮廷的)인 것에서부터 보다 자유로운 튜닉이나 가운을 본보기로 하게 되었다. 옷감의 재료를 줄이고 가볍게 했으며 그 대신에 속살이 비치는 듯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발레 그 자체의 발전이 한동안 답보상태에 빠져 버렸다. 예컨대 전통적인 오페라 극장에서도 <자유에의 공헌> 등의 발레를 상연하게 되는 대신에 발레의 역(役)으로는 종래의 왕이나 신, 영웅이나 목자(牧者)들이 자취를 감추고 일반시민이나 마을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파의 발레 이론가[편집]

Italia派-ballet理論家

프랑스 혁명으로 한때 발레의 발전이 답보상태에 놓여 있을 때 발레의 주도권은 다시 발상지인 이탈리아로 옮겨졌다. 그것은 비가노와 블라시스라는 두 사람의 이론가가 이탈리아에 나타나서 노베르의 의상을 발전시키고 개화시켰기 때문이다.

살바토레 비가노(1769-1821)는 유명한 작곡가 보케리니의 조카로서 도베르발에게 무용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예술에 대해서 박식했으며, 무용가인 동시에 안무가이기도 하고 또한 발레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코르 드 발레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 점이다. 그때까지의 코르 드 발레가 다만 같은 움직임을 유니존으로 추어 단조로웠던 것을 별개의 움직임을 갖도록 다루어 생명감을 부여했다.

또한 그는 노베르의 사고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무언극적 연기로서 맞춰 추도록 제창했던 것이다. 비가노는 무언극적 연기의 명수이며,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까지 떨쳤기 때문에 혁명으로 인한 공포시대의 난을 피하여 프랑스로부터 많은 우수한 무용가가 밀라노에 모여들어 19세기 초기에는 한때 밀라노가 발레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또 하나의 카를로 블라시스(1797-1878)는 비가노보다 뒤늦게 나왔으나 그는 음악가의 아들로서 무용을 배웠으며, 12세 때 첫무대에 오른 뒤 이윽고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제1의 무용수가 됐다. 그는 무용가이며 안무가인 동시에 뛰어난 이론가로서 특히 무용의 교수법이나 연습법을 확립한 것으로서도 유명하다. 그러한 그가 밀라노에서 발간한 저서 <무용예술의 기초, 이론 및 실기 개론>은 지금도 여전히 발레의 보전(寶典)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블라시스는 또한 1837년에는 밀라노의 제실 무용무언극학교(帝室舞踊無言劇學校)의 교장으로 취임, 모범적인 교육법을 수립하여 자기 이론을 실천함으로써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밀라노의 이 학교는 1813년에 창립된 이탈리아파의 발레 아카데미이다. 그는 또한 애티튜드의 포즈(발레의 技法 參照)나 그 밖의 것을 고안하여 발레 기법의 발달에도 크게 공헌했으며 1856년 이후 모스크바로 가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메트르 드 발레로서 활약, 러시아에 이탈리아파 발레를 널리 보급시켰다.

아카데미에서의 그의 교육법은 8세부터 12세가량(남자는 14세)까지를 입학시켜 재학연한(在學年限)은 8년간, 처음 3년동안은 무급이나 그 후 5년동안은 유급으로 하여 연수에 따라 급여를 늘리는 제도를 택했다. 또한 하루의 교정(敎程)은 일요일과 축제일 이외의 매일 오전중 세 시간은 무용의 연습, 오후의 한 시간은 마임(無言劇術)을 연습하는 엄격한 것이었다. 이 연습규정은 그 후 각처에서 기준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탈리오니, 마리[편집]

Marie Taglioni(1804-84)

19세기 전반은 문학·미술·음악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 낭만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시대로서, 발레 역시 그 예외일 수 없어 당연히 그 영향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발레 예술은 그 성격상 원래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로맨틱 발레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사람은 19세기의 초두를 장식하는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인 마리 탈리오니(1804-1884)이다. 그녀는 이탈리아인의 유명한 무용가 필립포 탈리오니(1777-1871)를 아버지로, 스웨덴인이며 오페라 가수의 딸 안나 칼스텐을 어머니로 하여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1822년에 빈에서 첫무대에 올랐으며 유럽 각지를 순회공연하여 1827년에 처음으로 파리에 나타나 오페라 극장의 <시칠리아인(Sicily 人)>이라는 발레로 데뷔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오페라 극장의 전속이 되어 1832년 3월 12일에 그 오페라 극장에서 <라 실피드>에 주연하여 절찬을 받아 그녀의 명성이 온 유럽에 떨쳤다.

라 실피드[편집]

La Sylphide

이 발레는 스코틀랜드의 전원(田園)을 무대로 하는 매우 낭만적인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2막물(二幕物)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로맨틱 발레의 여명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동시에 안무(按舞)로 나타낸 그 기법의 점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때의 안무가는 아버지인 필립포였다.

실피드라는 것은 숲이나 연못가에 사는 요정(妖精)의 하나로, 따라서 그 춤도 경쾌해야만 했으며 그 경쾌함을 표현하기 위해 탈리오니는 종래에 없던 도약의 기법을 많이 구사하고 그와 동시에 발걸음을 가볍게 보이기 위해서 발가락 끝을 세워 춤을 추었다. 즉 발레용어에서 말하는 쉬르 라 포앙트로 추었던 것이다. 이것은 발레사상(史上) 기법의 대혁명이었다. 하지만 탈리오니가 처음으로 쉬르 라 포앙트 기법을 발명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도 있으나 아무튼 그녀가 이 <라 실피드>에서 쉬르 라 포앙트로 추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능한 신발을 연구해야만 했다. 보통 신발로는 도저히 발끝으로 서서 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발명된 것이 바로 토우 슈즈이다.

토우 슈즈는 쉬르 라 포앙트를 추기 위해서 특별히 연구된 신발로써 발에 밀착된 천을 사용하고 그 선단은 잘라낸 것처럼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더구나 딱딱하다. 뒤꿈치의 부분은 발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졌으며 바닥은 납작하고 매우 작다. 그리고 추는 도중에 벗겨지지 않도록 긴 끈을 발목에 묶도록 되어 있다.

하기야 이러한 형태의 토우 슈즈는 19세기 후반에 개량된 것이며 탈리오니의 것은 그와 비슷하고 선단만은 삐죽했다. 어떻든 토우 슈즈가 발명된 것은 여성 무용수의 춤에 대개혁을 가져 왔으며 그 이후로 기법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탈리오니의 또 하나의 공적은 <라 실피드>에서 사용한 의상에 있다고 하겠다. 소위 로맨틱 튀튀라는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발레의 지식>에서 이미 설명했거니와 그 순백(純白)의 의상을 입고 추는 발레를 브랑(하얀 발레)이라고도 한다.

여성 무용수의 진출[편집]

女性舞踊手-進出

로맨틱 발레의 승리는 탈리오니를 비롯한 여성 무용수의 진출을 더욱 화려하게 했으며 전시대(前時代)와는 달리 발레는 여성 무용수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되어 남성 무용수는 겨우 그 그늘에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세기는 여성 무용수의 시대라고도 하겠다. 따라서 뛰어난 여성이 많이 발레의 무대에 진출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엘슬러(Fanny Elssler)와 그리지(Carlotta Grisi)이다.

파니 엘슬러(1810-1884)는 빈에서 태어난 무희(舞姬)로서 18세기의 카마르고에 대해 살레가 나타났듯이 그녀는 탈리오니와 인기를 겨룰 만큼의 경쟁상대였다.

그리고 엘슬러는 대작곡가 하이든의 사보(寫譜) 담당자를 아버지로 무희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무용을 배웠으며 그 선천적인 아름다운 몸매로 인기절정의 무희가 되었다. 그러한 그녀를 런던 공연중에 발견한 파리 오페라 극장의 감독은 탈리오니의 호적수로서 재빨리 계약하여 1834년에 파리에서 데뷔시켰다. 이후 그녀는 탈리오니와 함께 발레 사상 가장 찬란한 이름을 남긴 발레리나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발레계가 번영을 크게 누린 것도 이 두 여성이 서로 기예를 다투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카를로타 그리지(1819-1899)는 밀라노 태생의 이탈리아 무희이다. 당시 제1류의 메트르 드 발레였던 쥴 페로(1810-1892)에게 그 뛰어난 재능과 소질을 인정받아, 그를 따라 파리로 갔으며 그 후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지는 파리로 가 <지젤>에서 주연하여 일약 명성을 떨쳤으며 발레 사상에 역시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긴 무희가 되었다.

지젤[편집]

Giselle

로맨틱 발레에서 최고의 명작이라는 <지젤>이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된 것은 1841년 6월 28일이었다. 아돌프 아당(1803-1856)이 작곡을 하고 오페라 극장의 안무가였던 장 코랄리(1779-1854)가 안무를 맡았다. 그리고 여기에 페로도 협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젤이란 독일의 시골에 살며 춤을 좋아하는 아가씨의 이름이다. 그녀는 산사람으로 변장한 왕자에게 실연당하고 미쳐서 죽은 뒤에 빌리가 되어 밤마다 무덤에서 나와 뭇 사내를 유혹하여 호수에 빠져죽게 한다. 그런데 그녀는 무덤을 찾아온 왕자와 만나게 되지만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고뇌한다는 로맨틱한 테마이다. 빌리란 작자(作者)의 한 사람인 고티에가 하이네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독일의 산속이나 이르제 강변에 사는 전설의 요정(妖精)을 말한다.

이 2막물(二幕物)의 발레는 아당의 음악이 뛰어났고 코랄리의 안무가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주연을 맡은 그리지의 연기가 참으로 놀라와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다음해에 런던에서, 그리고 1843년에는 모스크바, 또한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도 상연되어 발레 애호가들을 열광시켰다.

그리하여 이 <지젤>은 이후 일관된 상연의 전통을 지니는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발레로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각국에서 상연될 정도의 명작이 되었다. 그리지는 이 성공에 힘입어 1844년에는 페로의 안무로 <에스메랄다>에서도 초연(初演)하여 그 명성을 확고하게 굳혔다.

발레의 쇠퇴[편집]

ballet-衰退

많은 유명인에 의해서 일세를 풍미했던 로맨틱 발레도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차차 쇠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오페라의 대두를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발레 자체가 노베르의 이론과 정신을 망각하고 함부로 몽환적인 스펙터클만을 따르고 매너리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발레리나 제1주의에 치우쳐 남성 무용수를 경시하는 경향으로 흘러 발레 전체의 효과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발레는 차차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겨우 오페라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에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간신히 발레의 존재를 보여 주었던 사람은 작곡가인 아당과 레오 들리브(1836-1891) 정도였다. 말하자면 아당의 <해적>(1856년 初演)이나 들리브의 <코펠리아>(1870년 初演), <실비아>(1876년 初演) 등이 오늘날까지 남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명작이다.

러시아 발레의 초창기[편집]

Russia ballet-草創期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발레도 성장과 원숙에서 쇠퇴, 그리고 재생의 역사를 되풀이한다. 파리의 오페라 좌(座)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전개되었던 로맨틱 발레의 쇠퇴는 발레의 중심지를 러시아로 옮겨 놓았다.

러시아에서 무용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의 피터 대제(大帝) 시대라고 한다. 대제는 러시아의 서구화(西歐化)에 힘을 기울여 루이 14세를 본따서 무용을 장려했으며, 그것이 러시아에서의 발레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한 러시아에 발레가 정식으로 이식된 것은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女帝:재위, 1730-1740) 시대부터였다. 여제(女帝)는 프랑스의 왕실을 흉내내어 1735년에 프랑스로부터 발레 교사인 랑데를 초빙하여 수도(首都)인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에 제실무용학교(帝室舞踊學校)를 창립했다. 이것이 러시아 아카데미로서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친 마린스키 극장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이 개장된 것은 1825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시대에 발레는 국가의 한 제도가 되어 더욱 순조로운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1801년에는 프랑스의 발레교사 샤를 디들로(1767-1837)가 취임함으로써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로맨틱 발레가 보급되었다.계속해서 유명한 무희(舞姬) 탈리오니와 그리지가 러시아에 가서 공연했으며 안무가로서는 프랑스에서 당시 제1류의 명성을 떨친 루이 뒤포르나 페생=생 레옹 등이 잇따라 러시아로 초빙되어 그 발전에 더욱 크게 공헌했다.

러시아 발레의 개화[편집]

Russia ballet-開花

19세기 후반 발레 쇠퇴기에 홀로 전성기를 과시한 것은 러시아였다. 역대 황실(皇室)의 열렬한 보호와 장려 때문에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는 이 나라 발레의 2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거액을 아끼지 않고 프랑스로부터 교사나 안무가를, 이탈리아로부터는 무희를 각기 제1류만을 초빙하여 발레의 식민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마침내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고도의 고전 발레를 개화시키고 완성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공로자는 프티파였다.

마리우스 프티파[편집]

Marius Petipa(1822-1910)

마리우스 프티파는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청년시대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엘슬러와 공연하는 등 오로지 무용수로서만 활약하였다. 그러한 그가 1847년 25세 때 러시아로 초빙된 것도 제1무용수로서였다. 그 무렵 페테르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쥴 페로가 안무를 담당했으며, 프티파는 그에게서 안무를 배웠다.

그리하여 프티파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최초의 안무를 한 것은 1858년에 상연된 <섭정전하(攝政殿下)의 결혼>이라는 2막물(二幕物)의 발레에서였다. 그 후 1900년까지 42년 동안에 약 54종의 신작(新作) 발레를 안무했을 뿐만 아니라 17곡의 옛 작품을 개작하고 또한 35종이나 되는 오페라의 발레를 안무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정력가라고 하겠다.

고전 발레[편집]

古典ballet

안무가로 프티파의 명성을 높인 것은 1862년 상연된 <파라오의 딸>이었다. 그리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美女)>(1890), <호두까기 인형(人形)>(1892), <백조(白鳥)의 호수(湖水)>(1895) 등에서 더욱 그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러한 여러 작품을 통해서 프티파는 마침내 파 드 되의 형식을 포함한 고전발레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 세 작품은 모두 발레 음악의 아버지라는 차이코프스키(1840-1893)의 작곡으로서 세상에서는 이를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 차이코프스키가 최초로 작곡한 것은 <백조의 호수>였다. 그리고 이것이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처음으로 상연된 것은 1877년, 율리우스 라이진가의 안무였다. 그런데 이때의 상연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는 상연되지 않았던 것을 마린스키 극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안무로써 성공을 거둔 프티파가 다루어 1895년에 이 명작을 확고한 것으로 했던 것이다.

<백조의 호수>를 러시아에서 상연할 때는 대부분의 안무를 프티파가 고안하였으며 세부에 걸친 실제의 안무를 레프 이바노프(1834-1901)가 맡았다. 이바노프는 19세기의 위대한 안무가의 하나이며 프티파의 수제자이기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호두까기 인형>도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바노프의 안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안무는 프티파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얼마 후에 그가 병에 걸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우수한 조수였던 이바노프가 그 일을 이어받아 그가 안무를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아무튼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은 프티파가 완성한 고전 발레의 형식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명작으로서 오늘날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상연되는 걸작이다. 이리하여 프티파의 이름은 고전 발레의 완성자로서 크게 떨쳤다. 프티파는 또한 무용가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20세기에 들어와서 러시아로부터 다수의 명무용수를 배출하는 요인을 만들었다.

또 하나의 공로자로는 엔리코 체케티(1850-1928)가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태어나 카를로 블라시스의 2대(二代) 제자로서 그 정통(正統)을 전하고 교사로서 오랫동안 러시아에 머물러 명무용수의 육성에 크게 공헌한 거장이다. 그가 완성시킨 기법은 특히 '체케티 메서드(Cecchetti method)'라고 하여 오늘날에도 발레의 지침이 되고 있다.